나는 내가 백일때부터 새어머니 손에 자랐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 새어머니는 내게 보라색 브라우스를 지어 입히셨다.
나는 그런 새어머니가 좋았다.
동생들이 "느거 집에 가!"라고 내게 가슴 아픈 말로 멍들어도 나는 어쩔 수 없는 나이기에 또 다른 은신처로
할머니댁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오빠와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고 내가 가면 반가워하기보다 어수선 하다고나 할까
"왜 와시냐~" 라고 할머니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손녀가 오면 반기실까 몰라도
오빠는 그게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오빠는 오줌
사게는 나를 반가워히자 않고
곧바로 새어머니 집에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는 새어머니 집에 있다가 할머니집에 있다가 종잡을 수없는 삶을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여름,
갑자기 내게 어머니라는 분이 나타났다.
친어머니라는 분은 내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구 내새끼" 하시며 어루만져 보시더니 "가자"라고 하시며 섬나라 제주에서 부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는 어린 마음에 너무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새어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았는데 친어머니가 나타나셔서 기쁜건지 슬픈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친어머니가 누구인줄 알고 또 친어머니가 얼마나 나를 보고 싶어 했었는지를 알고
갑자기 닥쳐온 행복에 넋이 나갔다.
그렇게 3개월을 부산에서 어머니랑 살다가 어머니께서
"6학년 때 다시 만나자구나"
하시며 도로 섬나라 제주에 보내시고 어머니는 일본에 가고 마셨다.
나는 야속했다.
내게 행복이 뭔지를 알려주신 분이 또 나를 죽음의 구렁텅잉에 빠뜨리고 가셨으니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새어머집에 가야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할머니집에 가야하는 내 신세가 또 시작되었다.
학교도 가는 둥 마는 둥이고 결속하는 것은 일쑤였다.
거리를 헤메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쩌다 밥을 주고 재워주시는 새어머니가 너무나도 고맙고 좋았다.
나같으면 " 니 친어미한테 가지 왜 왔노"라고 말했을 텐데 새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묵묵히 어린소녀가 내뱉은
"엄마가 6학년때 오신데요~" 라는 말을 믿고 기다리셨다.
아니나 다를까 친어머니는 6학년 졸업한 지 얼마 안돼서 찾아 오셨다.
그런데 친 어머니는 초등학교 2학년때의 자신의 실수를 생각하셨는지
당당하게 새어머니집에 안오시고 할머니집으로 오시고 마신것이었다.
그때 나는 새어머니 집에 있었고 할머니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는 데리러 오신 것이 그만 눈치 빠른 새어머니께서 아시고
나랑 할머니랑 같이 할머니 집에 왔다. 왠걸 새어머니 "그 년 어디있어" 하시며 "어디숨었어 나와!" 하시며 난리가 났다.
"아!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나는 무서워 떨었다. 동네가 갑자기 시끌시끌 해지고 삽시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1시간을 보채다가 새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친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아마 다른 곳으로 피신하신 모양이다.
나는 그런 친어머니가 좋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오빠가 나랑같이 부산에 가자고 했다.
그때는 초봄 3월달이어서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오빠의 도움으로 나는 어머니의 친척집에 가서 대구 경산의 한 기숙사 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거기서 나는 중학교 3학년까지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 도움으로 일본에 가기로 했다.
일본은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동무도 없는 학교생활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우리나라 처럼 공부만 잘한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무서운 정신병을 앓고 말았다.
그 길로 나는 생사를 같이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을 하여야만이 먹을 수 있고 일을 하려면 공부도 해야했다.
아픈 나로서는 일이나 공부 둘 중엥 하나는 없어져야 하는데
그때의 나로서는 쉽게 없앨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딱해 보이셨는지 한 직장을 구해주셨다. 그곳은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그것에서 고등학교도 다니면서 일했다.
1년 반이 지나자 일거리가 늘어서 몸이 아파서 할 수가 없어 그만 그만두고 말았다.
그호로 다른 직장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어머니와 나의 관계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싸울 일도 아닌데 싸우게 되고 다른 일을 해서 월급을 타서 드리면 "돈 필요하지"라며 쑥 내미신 적이 없다.
동네는 같아도 집은 틀린 우리집은 내가 밥을 지어 먹어야 하는데 식대비를 주지 않는 어머니셨다.
월급날에 어머니가 알아서 "돈 필요하지"라고 말 해주기를 나는 바래도 어머니는 아무 느낌도 없으셨다.
그럴때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게 나는 죽어갔다. 1년 반 동안 그렇게 함께 살때는 도시락도 싸주시고 용돈도 주시던 어머니가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다닌다고 월급날에 맛있는 요리주고 식대비 안주는 어머니로 둔갑해 버리는 어머니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다.
겨울에 추울까봐 어머니께서 잠드시기 전에 나의 전기 담요이불을 깊숙히 잘 덮어주시던 어머니,
아침에 늦잠을 자서 호들갑을 떠시면서 "밥먹어라"하시던 어머니,
초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오면 어떻게 아시고 전화로 "들어왔니"하시며 걱정해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다.
어머니도 어머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리라.
나는 어머니께서 나에게 너무 몰인정하나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애쓰셨다.
어머니는 돈과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두시고 사투하고 계시리라고는 어린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 세상은 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ㅇ언젠가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돈이 생명이다."라고
어머니는 당신 혼자만의 타국 생활이 아니라 어린 나도 부양 하셔야 했다
그래서 더욱더 내게 돈의 큰 힘을 말씀하신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사했는지 20년이 다 된 지금
어머니는 내가 밥 잘 먹고 다니는지 항상 전화를 걸면 말씀하신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