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홀 바다로 풍덩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였다
내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집을 나선 것은.
스쿠버다이빙에 입문한지 이제 1년 남짓, 국내의 거친 동해와 제주도 앞바다에서의 다이빙 경험뿐인 나에게는 본격적인 첫 해외다이빙이 시작되고 있었다
필리핀 중부 비사야제도-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매력적인 해변으로 유명한 섬인 보홀. 해양 생태계가 다채롭고 아름다워 스쿠버다이버들에게 매력적인 다이빙포인트가 많은 곳이지만 사실 기존 우리 팀에게는 너무 여러번 가서 식상할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나에겐 처음인 걸.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부족한 실력에 대한 걱정, 염려, 미안함도 들었다.
다이빙은 혼자 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아니다보니 나 하나의 실수로 우리 팀의 모든 멤버들에게 민폐가 될 수도, 또 나 자신과 팀원들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멋대로 혼자 나아간다고 다이빙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해야만하는 나지만 글쎄. 몸으로 하는 모든 것에 영 재능이 없는 나는 다이빙 할때 만큼은 의기소침한 소심이가 되버리고 만다
좁디좁은 lcc 비행기좌석에서 어깨를 한껏 접은 채로 불편한 5시간여의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뜨거운 공기에 숨부터 훅 들이마셨다 이제 막 아주 짧은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한국의 날씨에 비해 필리핀 보홀, 이 곳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덥고도 습한 기온 속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공항에서 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우리의 다이빙 숙소에서는 살짝 피곤함에 젖은 필리피노들과 까맣게 탄 사장님이 반겨주는 곳이였다. 이 곳에서 우리는 4박 5일간 보홀 바다를 누비게 될 것이다.
첫 날 체크다이빙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날만큼 순식간에 지나가고, 둘쨋날부터 본격적인 다이빙 투어가 시작되었다.
경이롭고도 아름다운 장면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또 사라졌다. 마치 거대한 수족관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바다의 자연 속에 우리는 관찰자이자 어느 순간은 그들의 일부이기도 했다.
따뜻한 수온은 다이빙 하기 딱 좋을 정도로 기분좋고 포인트마다 개성이 다른게 재미있는 부분이였다. 어디는 생소한 물고기가. 어디는 너무나 신기하게 생긴 산호들이 장관을 이루는 바다의 풍경들은 해외 다이빙이 거의 처음인 나
에게 모두가 보석같았다. 국내다이빙도 나름 매력이 있지만 , 보홀 다이빙에 비하면 동해에서는 멋있게 생긴 게 아닌 맛있게 생긴 물고기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게 사실이니까
또 중간중간 쉬는 시간엔 계속 나오는 망고와 간식, 즐겁게 이 시간을 만끽하는 나의 동료들. 해병대 수영은 분명 멋있는게 맞는데, 화려한 숏핀수영을 보고 감탄해야 하는데. 햇빛에 감전된 것 처럼 웃음이 나서 몇달치의 웃음을 겨우 며칠만에 다 웃는 것처럼 웃었다. 다른 사람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눈물 나게 웃어본 적이 있었나 싶다
하지만 다이빙이 계속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첫 날부터 지나칠정도로 발에 꽉 맞았던 부츠가 물기를 머금고 내 발을 짓눌러 발가락과 발등에 물집이 잡히더니 2일차에 터져버려서 피가 흐를 정도로 상처가 났다. 거기에 짠 물이 들어가기까지 하니 아프다기보다도 고통스러웠다. 여기저기 잘도 부딪히기도 해서 온 몸엔 멍이 들고 독한 필리핀 모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인내심 없는 피딱지가 앉았다. 겉보기와 다르게(?) 체력도 약해서 호평 일색이였던 야간 다이빙도 포기했지만 더 큰 사건은 다음날 일어났다.
3일차의 다이빙. 너무나 아름다운 섬과 주변의 해양생태계로 다이버들에게는 꼭 가봐야 하는 필리핀의 국립공원, 발리카삭본래의 순리대로 살아갈 뿐인 이 곳의 물고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들에게는 그것조차 가까이서 바라보고싶은 모습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무리속으로 뛰어들었다.
머리위에서 반짝이는 전갱이떼들을 관찰하다가 슬슬 떠올라야 하는시간이 되었을 때 내 호흡기에 기어코 문제가 생겼다.
사실 첫날부터 게이지가 영 이상해서 미리 얘기 했었지만 분명 이 정도는 크게 문제 없는 거라고 했는데…호흡기에 물이 차고 게이지는 마구 흔들거리면서 드디어 호흡이 막히기 시작했다. 내가 다이빙을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그런 순간이 찾아온 거였다. 공기는 들어오다가 말고 한 순간에 막히고, 다시 조금 들어오는 것 같더니 내가 필요한 숨만큼 들어오지 않고. 이게 내 착각이 아니구나 싶은 판단이 들어 가까이 있던 다이버선배 동료에게 -호흡기에 문제가 있어요-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 한순간 놀람과 걱정으로 커지는 눈을 보며 짧은 사이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는지 모른다. 그래도 예전에 그랬듯이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이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어도 나를 잡아줄 동료들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선배가 내게 보조호흡기를 물려주고 함께 올라가려다가 아차 싶은 순간은 정말 아찔했다. 감압을 위해 확보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나를 붙든 내 선배들과 함께 수면에 떠버렸고…..급상승은 다이버에게 정말 위험할 수 있어서 방지하는게 최우선인데 내 장비의 문제로 이런 일을 감수할 일 없을 베테랑 선배들이 위험을 직면한 거였다.
내가 걱정했던 대로 나뿐만아니라 나의 동료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한 건 1차적으로 나의 렌탈 장비였지만 2차적으로는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탓도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다이빙을 포기해야하나. 정말 위험할 수 있는 순간이 나뿐만아니라 또 다시 내 동료에게도 올까봐 소심이가 되려는 나에게 머리가 깨져도 다음 다이빙을 하겠다는 내 버디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본인의 개인장비 -비쌈- 인 호흡기와 내 렌탈호흡기를 바꿔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 다음 다이빙은 나야 너무나 편안했지만 기존 내 호흡기의 문제 확인처리반이 된 내 버디는 두배로 고생해야만 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발리카삭에서 만나고 싶었던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잭피쉬와 바라쿠다 무리.
돌개바람처럼 춤추듯 회오리 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묘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물고기의 눈들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잭피쉬와 바라쿠다 두 무리가 함께 유영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였다. 이 모습을 보려고 우리 함께 날아와 뛰어들었던 거였구나. 지상에서 전력껏 달리기 한거나 마찬가지로 숨이 차고 발이 아파도 그 모든 걸 잊을 만큼 신비하고도 압도적이였다.
한번한번이 모두 특별할 수 밖에 없는 다이빙을 하고, 지치고 소금기에 쩔은 몸을 좀 털어낸 후엔 보홀의 저녁을 즐겼다. 다이빙 후에 마시는 맥주는 왜 그렇게도 맛있는지. 동료 다이버는 필리핀 맥주가 맛이 없다며 투덜거렸지만 맥주귀신인 나에겐 산미구엘이 마치 암리타 같았다. 소박하지만 사람들의 웃음이 해맑은 보홀. 여행은 많이 다녀봤지만 보홀은 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매력이 있었다. 종달새같은 룸메이트들과 그 날의 기억을 나누며 깔깔거리는 밤들도 즐거웠다. 내일의 바다가 기대되는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빙으로서는 마지막 날, 우리 팀중에서도 초보 병아리, 아니 치어들에게 지령이 떨어졌다.
Surface Marker Buoy. 통칭 소세지
수면에 위치를 표시하는 부표를 띄워 안전하게 상승하고 내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다이버에겐 필수인 이 SMB 스킬을 한번쯤 연습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우리 팀의 대장님께서 이번에 한번 바다에서 해보라고 한다.
솔직히, 내심 욕심은 있었다. 내가 짜잔! 하고 어드밴스 다이빙 스킬-smb 쏘기에 성공하고 이번에도 내가 조금은 더 늘었어요. 라고 잘난 척 하고 싶은 욕심이.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쟨 틀려먹었어 아마 이번 신규 캠프 이후로는 다신 볼 일 없을 걸. 했던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지난한 독학 연습을 거쳐 혹독한 국내바다에서 내 한 몸뚱이는 건사하게 될 정도로 나름으로는 장족의 발전을 거쳤던 나로서는 이번에도 조금 더, 그래도 저번보다도 더 나아가고 있다고, 내게 해주는 모든 조언들을
귀담아 듣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놈의 소세지는 나를 장렬하게 배신했다. 아니, 소세지가 아니라 내 손가락이 나를 배신했다 멋대로 놓아버린 그 놈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선이였다 (건져준 분들께 정말 7만원어치-인터넷 구매가-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나의 두번째 다이빙 스승님인 나의 버디들에게 계속 되는 가르침을 듣고 세번째 마지막 시도에 어영부영 부표를 떠올리기는 했지만 그걸 회수하는 것조차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였다. 온통 버벅거리는 내 자신이 한심한 것도 잠시. 나는 초보니까 그럴 수 있지! 라며 정신승리 하면서 풀어진 릴을 열심히 감아댔다. 뭐, 몸으로 하는 건 내가 배우는 게 늦는 편이긴 하지만 제법의 끈기도 있으니까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다 (아마도)
작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도저히 바다속으로 뛰어들 수 조차 없을 것 같았던 내가 신기할 정도로 스쿠버다이빙은 어느샌가 내게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지상의 인간들로서는 영원히 몰랐을지도 모를 세상. 바다속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들. 회초리산호, 부채산호 양배추산호같은 전혀 본 적 없던 산호초들. 자기 집에서 멍청해보이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바다장어와 신기하게 생긴 라이언피쉬와 트렘펫피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같았던 말미잘 속의 니모…그리고 보랗고 노랗고, 예쁘고 아름다운 다양한 물살이들. 특히 하늘을 나는 것처럼 우리 위를 유영하다가 달려나가는 거북이의 발짓은 왠지 모를 가슴벅참을 느끼게 하고,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보글거리는 나의 호흡소리는 공기방울이 되어 날아간다. 무중력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내 팔다리는 신기하기까지 하다.
물속에서는 바닷속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다른 다이버들을 관찰하는 것도 내게는 퍽 재미있는 장면들이다. 다양한 자태를 뽐내는(?) 동료들. 잠수만 할 줄 아는 바다코끼리인줄 알았더니 어느새 화려한 발차기의 인어왕자로 업그레이드한 다이버, 나랑 같이 시작했는데 트림자세를 제대로 익혔다는 평가를 받은 동기, 나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더 여유롭게 앞서나가며, 옆구리에 아가미가 달린 게 아닐 정도로 물 속에서 호흡이 안정적이여서 부러운 후배. 힘들다고 배영자세로 거의 눕다시피해서 유영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걸 안다. 아 다른 버디에게 붙들려 배달되어가는 멤버들을 보면서 속으로 슬쩍 웃어버리는 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숙달된 선배 다이버들의 우아한 자세와 핀질은 가끔은 감탄스럽기까지도 해서 덕분에 물고기 구경보다도 그 핀질을 한번씩 흉내내는 것에 집중할 때도 있다. 물론, 갈 길은 너무나 멀지만.
뭐. 솔직히 이젠 좀 더 뻔뻔해지고 있긴 하다. 나보다 더 늦게 입문한 다이버들에게도 뒤쳐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한들 스쿠버다이빙은 경쟁이 아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보지 못한 더 넓고, 믿을 수 없을만큼 경이로운 지구의 다른 면을 조금이나마 관찰할 수 있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특별한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 내가 부족할 때 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동료와 함께 바다 여행자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시간. 나에겐 그게 스쿠버다이빙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만큼 아마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겠지만 언젠가, 언제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이버가 될 수 있을거라 믿는다.
그리고 즐겁지만 힘에 부치는 다이빙을 마치고 난 후, 나의 동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특별한 만큼 나는 앞으로도 이 모든 시간들을 오래 영유하고 싶다.
보홀 시내에서 툭툭이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스쿠버 인생 첫 버디였던 대장님이 말씀하셨다. 힘들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함께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고 남은 시간에 즐겁게 함께 즐기는 것. 이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라고.그 말처럼 지금의 모든 순간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주지 않을까.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또 모험을 떠날 것이다. 바다가 있는한 우리는 함께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