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벨은Eugene Bell, 한국명;배유지裴裕祉, 1868-1925-光州開化의 아버지
1868년 4월 11일 켄터키주에서 출생
1894년 켄터키 신학대학을 졸업.
1895년 2월 12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조선으로!
1895년 4월 9일 부인(로티 벨 선교사-로티 벨 1893년 선교사로 임명받음)과 함께 내한
1896년 5월 27일 아들 헨리(Henry)를 낳고,
1896년 6월 미남장로회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서 유진벨과 오웬Owen선교사를 목포선교부 파송을 결의.
1897년 목포선교부로 부임
1897년 3월5일 변창연조사와 함께 목포교회 시작
1898년 1월 28일 장로회 미션공의회 예양협정Commity Agreement으로 남장로회-충남일부,호남선교키로!
1898년 오웬선교사와 목포에서 교회개척-목포양동교회
1899년 1월 6일 딸 샬롯(Charlotte) 출생-샬롯은 후에 인돈William Linton과 결혼-한국선교에 헌신
1901년 4월 12일 첫부인 로티벨 목포에서 심장병으로 순교:서울 양화진선교사 묘역안장-언더우드선교사 집례.
1904년 Margaret W. Bell(군산의 William F. Bull 선교사의 여동생)과 재혼.
1904년 3월 18일 미남장로회 한국선교부 유진벨(배유지)과 오웬(오기원)의 정탐보고 듣고 광주선교부 개설키로 결의후 사역시작
1904년 4월에 광주 양림리 선교부 부지매입,유진벨, 의사 오웬의 임시사택 건축은 4월부터 시작되어 12월15일 무렵에 완공.
1904 12 19 배유지, 오기원선교사와, 변창연, 김윤수, 서명석성도의 한국인 성도 3가정이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1904 12 25 배유지 목사의 임시사택에서 한국인 기독교인 3명(이미 목포에서 세례 받음)의 가정을 포함한 40여명이 모여
광주 최초의 공식적인 개신교 복음주의 예배를 드림. (현재는 사택 없어지고 사택자리에 선교기념비가 1982년에 건립됨)
1905 10월 교인이 250여명에 이름
[2월 12일 오기원 선교사 부인의 일기;예배의 회집 인원수가 늘어나서 집안에 다 들어 가지 못할 만큼 많은 수가 모였고 예배 후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오는 데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만큼 사람들이 집밖에까지 넘치게 되었다]
1905 11 15 배유지 목사의 사택이 완성
1905 11 20 진료소 개소-배유지 목사의 사택이 완성되어 임시사택은 주일에는 예배처소로 주중에는 진료소로 사용됨.
선교 진료소 책임은 놀란 의사(Dr. J. W. Nolan)-광주 제중원 1대원장.
[놀란선교사 선교보고-첫 날(1905년 11월 20일) 9명의 환자가 와서 그 가운데 한 명은 성경을 샀으며 겨울 성경학교에도 참석하였다]
[우월순 선교사[Dr. R. M. Wilson]-2대원장의 보고;이 병원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 병원이 오늘날 광주기독병원의 모태이다!
1906년 2월 선교사들은 광주 시내의 요충지(지금의 광주우체국 위치)에 교회터를 물색하였으나 이미 일본인들의 소유로 넘어가 있어서 포기하였다. 그 직후 지금의 충장로 3가에 해당하는 북문안 사창골을 교회처소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 터는 대한 제국의 구식군대가 무기고 및 훈련원으로 사용하던 자리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구식군대가 해체되었으나 일본인들의 손에 아직 넘어가지않은 시내 중심권에 위치한 땅이었다.
교인들은 가난에도 불구하고 힘을 모아 40달러를 모금하였고 선교사들도 교인의 자격으로 80달러를 헌금함으로써 6월 경에 ㄱ자형 교회당 건물을 완성하고 이전하였다.
부속건물에는 책방과 응접실을 비치하여 기독교 서적을 상당히 많이 판매하였다.
건물이 ㄱ자형인 것은 당시 사회 관습이 엄격하여 한쪽 공간은 남성들, 한쪽 공간은 여성들이 예배 드리도록 하기 위한 것 으로 배유지 목사는 한 가운데 서서 설교하였다.
그 해 6월의 보고에서 배유지 목사는 교회의 장소와 지역 선교의 전망이 아주 밝다고 전망 하였다. 국가적인 패배와 좌절 의 장소가 광주 복음화의 최전방 기지로 탈바꿈하고 장차 일제하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갈 인재양성의 보루가 되었다.
1907년 계속 늘어나는 교인을 감당하기 위하여 교회당을 지은 지 바로 이듬해에 증축하였다. (평균 60여 명 출석)
1908년 평균 125여명 출석
1908년 2월 1일 한국과 한국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학교를 세울 필요를 느끼고 대한제국의 인가를 얻어 자신의 임시사택에서 광 주 남학교(숭일학교)를 시작.-25명이상 등록;숭일학교(지금의 광주숭일중학교와 광주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양 림교회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1908년 4월 1일 배유지 목사는 사랑채에서 수피아여학교(지금의 수피아 여자중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고 초대 교 장으로는 엄언라(Miss Ella Graham) 선교사가 취임하였다(참고:『수피아90년사』).
1910년-4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린 지 6년만에 교세가 400 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1910년 제19차 선교사연례대회 보고).
이러한 증가에 따라 1,000여 명의 교회당 건물로 확장하였다.
1911년-숭일학교의 건물이 1910년에 착공되어 1911년 성탄절 전에 완성되었다.
1912년-광주 선교부는 1911년에 지금의 수피아학교 (지금의 수피아여중과 수피아여고) 부지를 50달러에 구입하고 건축을 시작 하여 이듬해 가을에 완공하였다. 교명은 기부한 사람 곧 북캐롤라이나주의 애쉬빌(Ashiville, NC)에 사는 스턴스 부인(Mrs. M. L. Stearns)의 뜻에 따라 그 여동생의 이름을 붙였다 (The Jennie Speer Memorial School for Girls). 수피아학생들은 북 문안의 교회까지 아름답게 열을 지어 출석하였으며 교사들과 학생들은 교회학교와 성가대 봉사에 많이 기여하였다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대 총회장
1919년 3월 두 번째 부인 마가렛트(Bell Margarlet W.) 수원아래 병점에서 교통사고로 졸. 광주 양림동선교사 묘역에 안장
두번째 부인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은 것으로 보임(사진상으로)
1925년 9월 28일 57세로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묘역에 안장
<참조;광주 양림교회-양림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