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증(證)을 논(論)하다
성음(聲音)은 장기(臟氣)에서 나오니, 장(臟)이 실(實)하면 성(聲)이 크고(:弘) 장(臟)이 허(虛)하면 성(聲)이 약(:怯)한다. 따라서 오장(五臟)의 병(病)은 모두 음(瘖)이 될 수 있다.
만약 우사(憂思) 적려(積慮)가 오래되어 음(瘖)에 이르면 심(心)의 병(病)이다.
경공(驚恐) 분울(憤鬱)로 갑자기 음(瘖)에 이르면 간(肝)의 병(病)이다.
혹 풍한(風寒)이 피모(皮毛)에 습(襲)하고 화조(火燥)가 금장(金臟)을 형(刑)하면 해(咳)가 되고 수(嗽)가 되며 음(瘖)에 이르면 폐(肺)의 병(病)이다.
기포(飢飽)하거나 피로(疲勞)하여 중기(中氣)의 패(敗)에 이르러 천촉(喘促)하여 음(瘖)이 되면 비(脾)의 병(病)이다.
주색(酒色)에 과상(過傷)하고 욕화(慾火)가 번삭(燔爍)하여 음(陰)이 휴(虧)하므로 양(陽)에서 기(氣)를 도(盜)하고 정(精)이 갈(竭)하므로 폐(肺)로 고(槁)가 이(移)하여 폐조(肺燥)하면서 수(嗽)하고 수(嗽)가 구(久)하여 음(瘖)이 되면 이는 신수(腎水)가 고후(枯涸)한 병(病)이다.
이처럼 오장(五臟)은 모두 음(瘖)이 될 수 있으니, 그 대개(:槪)가 이와 같으니라.
그런데 설(舌)은 심(心)의 묘(苗)이다. 심(心)이 병(病)하면 설(舌)을 전(轉: 굴리다)할 수 없다. 이처럼 심(心)은 성음(聲音)의 주(主)가 된다.
성(聲)은 기(氣)로 말미암아 발(發)하니, 폐(肺)가 병(病)하면 기(氣)가 탈(奪)한다. 이처럼 기(氣)는 성음(聲音)의 호(戶)이다.
신(腎)은 정(精)을 장(藏)하고 정(精)은 기(氣)로 화(化)하니, 음(陰)이 허(虛)하면 기(氣)가 없다. 이처럼 신(腎)은 성음(聲音)의 근(根)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언(言)이 미약(微)하고 종일(終日) 중언부언(復言)한다면 이는 기(氣)가 탈(奪)한 것이다." 하였다. 하물며 성(聲)이 없다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처럼 성음(聲音)의 병(病)은 비록 오장(五臟)에서 말미암지만, 실은 오직 심(心)의 신(神), 폐(肺)의 기(氣), 신(腎)의 정(精) 세 가지가 주(主)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신(腎)이 그 근체(根蒂)이니, 원기(元氣)는 이로 말미암아 생(生)한다. 따라서 정(精)에서 기(氣)로 화(化)하고 기(氣)에서 신(神)으로 화(化)하니, 신기(腎氣)가 한 번 휴(虧)하면 원양(元陽)이 침약(寢弱)한다. 따라서 성음(聲音)의 표(標)는 심폐(心肺)에 있고 성음(聲音)의 본(本)은 신(腎)에 있다. 경(經)에서 이른 것을 보건대, "양(陽)의 성(盛)함이 이미 쇠(衰)하였으므로 음(瘖)이 된다. 내(內)가 탈(奪)하여 궐(厥)하면 음배(瘖俳)가 된다. 이는 신허(腎虛)이다." 하였다. 따라서 신(腎)이 성음(聲音)의 근(根)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一. 음아(瘖瘂)의 병(病)은 당연히 허실(虛實)을 알아야 한다.
실(實)하면 그 병(病)이 표(標)에 있으니, 규(竅)의 폐(閉)로 인하여 음(瘖)이 된다.
허(虛)하면 그 병(病)이 본(本)에 있으니, 내(內)의 탈(奪)로 인하여 음(瘖)이 된다.
규(竅)의 폐(閉)에는 풍한(風寒)의 폐(閉)가 있으니 외감(外感)의 증(證)이다.
또 화사(火邪)의 폐(閉)가 있으니, 열(熱)이 폐(肺)를 승(乘)한 것이다.
또 기역(氣逆)의 폐(閉)가 있으니, 간(肝)의 체(滯)가 강(强)한 것이다.
풍폐(風閉)는 산(散)하여 낫게 할 수 있다. 화폐(火閉)는 청(淸)하여 낫게 할 수 있다. 기폐(氣閉)는 순(順)하여 낫게 할 수 있다. 이는 모두 실사(實邪)이니, 그 치료(治)가 쉬운(:易) 경우이다.
담연(痰涎)의 폐(閉)는 비록 허(虛)도 있고 실(實)도 있다고 말하지만 치절(治節)의 불행(不行)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담사(痰邪)가 되겠는가? 이처럼 허(虛)는 많고 실(實)은 적으니, 당연히 사정(邪正)을 살피고 완급(緩急)을 나누어 치료(治)하여야 된다.
내(內)의 탈(奪)에는 색욕(色慾)의 탈(奪)이 있으니, 그 신(腎)이 상(傷)한 것이다.
우사(憂思)의 탈(奪)이 있으니 그 심(心)이 상(傷)한 것이다.
대경(大驚) 대공(大恐)의 탈(奪)이 있으니 그 담(膽)이 상(傷)한 것이다.
기뇌(飢餒) 피로(疲勞)의 탈(奪)이 있으니 그 비(脾)가 상(傷)한 것이다.
이처럼 각기 그 속(屬)을 구하여 원기(元氣)를 대보(大補)하지 않고 어떻게 그 시패(嘶敗: 목이 쉬거나 손상)한 것을 다시 온전(:完)하게 하고 잔손(殘損)한 것이 다시 진(振)하기를 기대(:望)하겠는가? 이는 모두 허사(虛邪)이니, 그 치료(治)가 어려운(:難) 경우이다.
그런데 치료의 어려움(:難)과 쉬움(:易)의 변(辨)이 진실로 이와 같지만, 어려움(:難)과 쉬움(:易)의 변별(辨)은 또한 구잠(久暫)을 변(辨)하고 병인(病因)을 변(辨)하여야 완전할 수 있다.
잠(暫)하면서 근(近)하면 쉽고, 점(漸)하면서 구(久)하면 어려우니라.
맥(脈)이 완(緩)하면서 활(滑)하면 쉽고, 맥(脈)이 세(細)하면서 삭(數)하면 어려우니라.
평소(:素)에 손상(損傷)이 없으면 쉽고, 적(積)하여 노겁(勞怯)이 있으면 어려우니라.
몇 제(劑)에 개(開)하면 쉽고, 오래도록 약(藥)하여도 효(效)하지 않으면 어려우니라.
이 외(外)에 또 호규(號叫)하거나 가창(歌唱)하거나 비곡(悲哭)하거나 열극(熱極)으로 인하여 냉수(冷水)를 폭음(暴飮)하거나 폭(暴)하게 풍한(風寒)을 흡(吸)하여 음(瘖)에 이르면 이 또한 쉬운 경우이다. 이와 같을 때는, 단지 식(息)을 양(養)할 줄만 알면 약(藥)이 아니어도 나을 수 있다.
이들을 모두 당연히 변별(辨)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