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증(證)을 논(論)하다
담음(痰飮) 일증(一證)은 내경([內經])에서는 단지 적음(積飮)의 설(說)만 있고, 본래 담증(痰證)이라는 명칭(:名)은 없었다. 이로 내경([內經])은 담증(痰證)을 중시(:重)하지 않았음을 대강 알 수 있다.
담음(痰飮)의 명칭(:名)을 고찰(:考)해 보면 비록 중경(仲景)으로부터 기(起)하였지만, 후세(後世)에 상전(相傳)하여서는 담(痰)인지 담(痰)이 아닌지를 논(論)하지도 않고 입만 열면 바로 '담화(痰火)'라고 하거나 '괴병(怪病)이 되는 것은 담(痰)이다.'고 하거나 '담(痰)은 백병(百病)의 모(母)이다.'라고 말하였다.
담(痰)과의 관계(關係)가 이렇게 중(重)한 것이었다면 어째서 내경([內經])에서는 이를 소홀(忽)히 여겼을까? 이는 담(痰)의 병(病)이 될 때는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所以)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로 풍(風)으로 인하거나, 화(火)로 인하여 담(痰)이 생(生)하면 단지 그 풍(風)이나 화(火)를 치(治)하면 풍(風) 화(火)가 식(息)하면서 담(痰)이 저절로 청(淸)하여지느니라. 허(虛)로 인하거나, 실(實)로 인하여 담(痰)이 생(生)하면 단지 그 허(虛)나 실(實)을 치(治)하기만 하면 허(虛) 실(實)이 나으면서 담(痰)은 저절로 평(平)하여지느니라.
그 담(痰)을 치(治)하면 풍(風) 화(火)를 저절로 산(散)할 수 있다거나 허(虛) 실(實)을 저절로 조(調)할 수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담(痰)은 반드시 병(病)으로 인하여 생기지, 병(病)이 담(痰)으로 인하여 이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경([內經])에서는 담(痰)을 말하지 않았으니, 바로 담(痰)은 병(病)의 본(本)이 아니고, 담(痰)은 오직 병(病)의 표(標)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의 의류(醫流)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백계(百計: 온갖 계책)는 단지 담(痰)을 공(攻)하는 것만이 곧 치병(治病)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으니, 끝내 담(痰)이 된 까닭이나 담(痰)이 무엇으로 인하여 기(起)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느니라. 이는 손가락을 인(引)하며 팔뚝을 움직이려고 하고, 나뭇잎에 물을 주어 뿌리를 구(救)하려고 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표본(標本)을 오인(誤認)하여 주견(主見)이 진실(:眞)을 실(失)하였으므로, 병(病)이 낫기를 구하려고 하여도 어렵고도 어렵도다!
一. 담(痰)과 음(飮)은 비록 동류(同類)라고 하지만, 실은 차이(:不同)가 있다.
음(飮)은 수액(水液)의 속(屬)이니, 청수(淸水)를 구토(嘔吐)하고 흉복(胸腹)이 팽만(膨滿)하며 탄산(呑酸) 애부(噯腐)하고 욱욱(渥渥wowo)거리는 소리가 있는 등의 증(證)이 있다. 이는 모두 수곡(水穀)의 나머지(:餘)가 정적(停積)하여 행(行)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소위 음(飮)이라는 것이다.
만약 담(痰)이 음(飮)과 차이(:不同)가 있다면 음(飮)은 청철(淸澈: 맑다)하고 담(痰)은 조탁(稠濁: 뻑뻑하고 탁하다)하다는 것이고, 음(飮)은 오직 장위(腸胃)에 정적(停積)하지만 담(痰)은 도달(:到)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수곡(水穀)이 불화(不化)하여 정(停)하면 음(飮)이 되니 그 병(病)은 전적(:全)으로 비위(脾胃)로 말미암느니라.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도록 화(化)하면 담(痰)이 되니, 오장(五臟)의 상(傷)으로 모두 이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치료(治)하려면 당연히 그 변별(辨)할 것을 알아 그 근본(本)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一. 담(痰)은 곧 사람의 진액(津液)이니, 수곡(水穀)이 화(化)한 것이 아님이 없다. 이처럼 담(痰)도 또한 화(化)한 물(物)이지, 화(化)하지 않은 속(屬)은 아니다. 단지 화(化)할 때 그 정도(:正)을 얻었으면 형체(形體)를 강(强)하게 하고 영위(營衛)가 충(充)하게 할 것이니, 담연(痰涎)은 본래 모두 혈기(血氣)이었다. 만약 화(化)할 때 그 정도(:正)을 잃으면 장부(臟腑)가 병(病)하고 진액(津液)이 패(敗)하게 되니, 혈기(血氣)가 곧 담연(痰涎)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난세(亂世)에 도적(盜賊)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 누가 잘 치세(治世)할 때의 양민(良民)이 아니겠는가? 다만 도적(盜賊)이 흥(興)하는 것은 반드시 국운(國運)이 병듦(: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담연(痰涎)이 되는 것도 반드시 원기(元氣)가 병듦(:病)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예전에 듣건대 입재(立齋)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혈기(血氣)가 모두 성(盛)하면 어찌 담(痰)이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초년(初年)에는 이 말을 매우 의심(:疑)하면서 이르기를 '어째서 실담(實痰)이 없다는 것인가?' 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의 소견(見)이 안정(:定)되고 식(識)이 많아지면서 비로소 '아! 그것이 맞다.' 하고 믿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보는가?
담연(痰涎)의 화(化)는 본래 수곡(水穀)으로부터 말미암으니, 비(脾)가 강(强)하고 위(胃)가 건(健)하여 마치 젊은이(:少壯)의 무리들과 같다면 식(食)하는 대로 화(化)하여 모두 혈기(血氣)가 되므로, 어찌 유(留)하여 담(痰)이 되겠는가? 오직 모두 화(化)할 수 없어서 10~20%가 유(留)하면 10~20%가 담(痰)이 될 것이고, 30~40%가 유(留)하면 30~40%가 담(痰)이 될 것이며, 심지어 70~80%가 유(留)하면 단지 혈기(血氣)가 날로 삭(削)하고 담연(痰涎)이 날로 많아진다는 것을 볼 뿐이다.
이처럼 그 연고(故)는 바로 원기(元氣)의 운화(運化)하지 못함이니, 허(虛)할수록 담(痰)은 더 성(盛)하게 된다. 그러므로 입재(立齋)의 말이 어찌 보통(:常) 사람들보다 뛰어난(:出) 소견(見)이 아니겠는가?
요즘 담(痰)을 치(治)하는 자들을 보면 반드시 '담(痰)으로 질환(:患)이 되었으니 공(攻)하지 않으면 어떻게 거(去)할 수 있겠는가?' 한다. 이는 정기(正氣)가 불행(不行)하여 허담(虛痰)이 결취(結聚)하면 비록 힘을 갈(竭)하도록 이를 공(攻)하여도 담(痰)을 거(去)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허(虛)를 더욱 더한다(:增)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攻)으로 인하여 갑자기 절(絶)하거나 우연히 잠시 소생(蘇)하였다가 나중(:他日)에 더 심(甚)하게 되니, 이는 모두 공(攻)하므로 인한 잘못들이다.
또 담(痰)은 공(攻)할 수 있는 경우는 적고, 공(攻)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따라서 담(痰)을 치(治)하려면 우선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一. 담(痰)에는 허실(虛實)이 있으니 변(辨)하지 않을 수 없다.
담(痰)은 곧 담(痰)이므로 모두 유여(有餘)한 것 같은데, 어찌 또 허실(虛實)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허실(虛實) 두 글자는 전적(:全)으로 원기(元氣)를 말하는 것이다.
공(攻)할 수 있으면 바로 실담(實痰)이고 공(攻)할 수 없으면 바로 허담(虛痰)이다.
어째서 공(攻)할 수 있는가?
그 연력(年力)이 성(盛)하여 혈기(血氣)가 상(傷)하지 않거나, 비감(肥甘)이 과도(過度)하거나, 습열(濕熱)이 성행(盛行)하거나, 풍한(風寒)이 피모(皮毛)를 외폐(外閉)하거나, 역기(逆氣)가 간격(肝膈)과 내(內)로 연(連)하면 모두 빠르게 담음(痰飮)이 되니, 단지 그 형기(形氣) 병기(病氣)를 살펴서 모두 유여(有餘)에 속(屬)하면 곧 실담(實痰)이다. 실담(實痰)이란 무엇인가 하면 그 원기(元氣)가 실(實)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소벌(消伐)을 행(行)하여야 하니, 단지 그 담(痰)만 거(去)하면 되지 않음이 없다.
어째서 공(攻)할 수 없는가?
형(形)이 이(羸)하고 기(氣)가 약(弱)하거나, 나이(:年)가 중년(中)이어서 쇠(衰)하면 곧 허담(虛痰)이다. 혹은 병(病)이 많거나, 노권(勞倦)하거나, 우사(憂思)나 주색(酒色)하거나 하여 노손(勞損) 비풍(非風) 졸궐(卒厥)에 이른 것도 또한 허담(虛痰)이다. 혹은 맥(脈)에 세삭(細數)이 보이거나, 장(臟)에 양사(陽邪)가 없거나 하여, 시(時)로 구오(嘔惡)나 설사(泄瀉)하고 기단(氣短) 성암(聲暗)하는 등의 증(證)이니, 단지 살펴서 그 형기(形氣) 병기(病氣)에 본래 유여(有餘)가 없으면 모두 허담(虛痰)이다. 허담(虛痰)이란 무엇인가 하면 원기(元氣)가 이미 허(虛)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단지 조보(調補)하여야 하니, 만약 이를 공(攻)하면 위(危)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실담(實痰)은 본래 많지 않으며 그 래(來)가 빠르고 그 거(去)가 또한 속(速)하며, 그 병(病)은 또한 쉽게 치료(治)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병(病)의 근본(本)이 깊지(:深) 않기 때문이다.
허담(虛痰)은 도리어 본래 많고 심(甚)하며 그 래(來)가 점(漸)하고 그 거(去)는 지(遲)하며 그 병(病)은 또한 치료(治)가 어려우니라. 왜 그러한가 하면 병(病)이 하루 만에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담(實痰)은 족히 우려(:慮)할 바가 아니니, 가장 외(畏)할 것은 오직 허담(虛痰) 뿐이다.
총괄(:總)하자면 담(痰)을 치(治)하는 법(法)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원기(元氣)만 날로 강(强)하게 하면 담(痰)은 반드시 날로 적어지게 된다. 곧 약간 담(痰)이 있더라도 또한 해(害)가 될 수 없고, 또한 위기(胃氣)를 충조(充助)할 수도 있다.
만약 원기(元氣)가 날로 쇠(衰)하면 수곡(水穀) 진액(津液)이 담(痰)이 되지 않을 수가 없으니, 거(去)하는 대로 생(生)하게 된다. 이를 공(攻)하여 모두 없앨지라도 또한 원기(元氣)의 보(保)와는 아무 문제(:恙)가 없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다.
따라서 담(痰)을 잘 치료(治)하려면 오직 생(生)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곧 보천지수(補天之手: 하늘을 보수하는 손)이다.
그러므로 이를 치료(治)하려면 그 허실(虛實)을 변(辨)하지 않고 일개(一槪)로 공(攻)하려는 것은, 마치 왕은군(王隱君)이 논(論)한 '내외(內外)의 백병(百病)은 모두 담(痰)에서 생(生)하니, 모두 곤담환(滾痰九)의 종류(類)로 써야 한다.'는 것과 같으니, 이는 또한 단지 목전(目前)의 것만 알고 나중의 해(害)는 모르는 것이다.
一. 오장(五臟)의 병(病)이 비록 모두 담(痰)을 생(生)할 수 있지만 비(脾)와 신(腎)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비(脾)는 습(濕)을 주(主)하니 습(濕)이 동(動)하면 담(痰)이 된다. 신(腎)은 수(水)를 주(主)하니 수(水)가 범(泛)하여도 담(痰)이 된다.
따라서 담(痰)의 화(化)는 비(脾)에 있지 않음이 없고, 담(痰)의 본(本)은 신(腎)에 있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담증(痰證)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니, 반드시 이 두 장(臟)과 관련(:涉)된다.
다만 비가(脾家)의 담(痰)에는 허(虛)와 실(實)이 있다.
습(濕)의 체(滯)가 태과(太過)하면 비(脾)의 실(實)이고, 토(土)가 쇠(衰)하여 수(水)를 제(制)할 수 없으면 비(脾)의 허(虛)이다.
신가(腎家)의 담(痰)에는 허(虛)가 아님이 없다.
화(火)가 토(土)를 생(生)하지 못하면 곧 화(火)가 수(水)를 제(制)하지 못하고, 양(陽)이 음(陰)을 승(勝)하지 못하니, 반드시 수(水)가 도리어 비(脾)를 침(侵)하게 된다. 이는 모두 음(陰) 중의 화(火)가 허(虛)한 것이다.
만약 화(火)가 성(盛)하여 금(金)을 삭(爍)하면 정(精)이 그 사(舍)를 수(守)하지 못하여 진(津)이 고(枯)하고 액(液)이 후(涸)하면 금수(金水)가 상잔(相殘)하게 된다. 이는 모두 음(陰) 중의 수(水)가 허(虛)한 것이다.
이처럼 비신(脾腎)의 허실(虛實)에는 차이(:不同)가 있으니, 당연히 변(辨)하여야 할 것이다.
또 고인(古人)들이 말한 습담(濕痰) 울담(鬱痰) 한담(寒痰) 열담(熱痰)의 종류(類)는 비록 상(上)에 있거나 하(下)에 있거나 한(寒)하거나 열(熱)하거나 하여 각각 부동(不同)함이 있지만, 그 화생(化生)하는 근원(原)은 이 두 장(臟)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가령 한담(寒痰) 습담(濕痰)은 본래 비가(脾家)의 병(病)이지만 한(寒)과 습(濕)의 생(生)이 과연 신(腎)과 무관(:無干)하겠는가? 목(木)이 변(變)하여 풍(風)을 생(生)하는 것은 본래 간가(肝家)의 담(痰)이지만 목(木)이 강(强)하여 토(土)를 제(制)하므로 비(脾)와 무관(:無涉)할 수 있겠는가? 화(火)가 성(盛)하여 금(金)을 극(剋)하면 그 담(痰)은 폐(肺)에 있겠지만 화사(火邪)의 염상(炎上)은 중하(中下) 이초(二焦)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담(痰)을 치료(治)하려는데 그 근원(源)을 모르면 결국 온갖 추측(猜摸)만 하는 것일 뿐이다.
一. 비풍({非風})의 문(門)에 담론(<談論>) 세 편(篇)이 있으니, 당연히 서로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