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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가 전문대학을 졸업한 그 해.
중소도시에서의 직장을 구한다는 게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꼭이 직장을 구하려면 대도시로 나가지 못을 이유도 없었지만 곁에 있기를 바라는 홀어머니의 권유로 인근 은행에 서류를 넣고 기다리던 그때.
좀 더 정확하게는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 인근의 소전 거리(牛田거리)에 사는 청주댁 막내 아들이 시집 온지 두 달도 안 된 옆집의 새색시를 겁탈하려다 때맞춰 귀가한 남편에 붙잡혀 온 장터를 발가벗겨져 끌려 다닌 직후 이 사건으로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 무렵.
어머니는 며칠째 출타 중이었고 어머니를 대신해 ‘나루터’란 선술집의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유명한 국립공원의 초입에 위치한 가게라지만 계절이 이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는지라 손님이래야 뜨내기가 한 둘이 전부였고 이미 어둠이 내린지도 오래여서 간판 전원을 끄고 샷터를 내리려고 막 창문을 열었을 때다.
“배 한 척 빌립시다.”
산뜻한 제대군복에 스포츠형의 머리를 한 사내 둘이 취기를 풍기며 윤희를 밀치듯 하며 들어섰다.
“네.....?”
“나루터에서 배를 빌리지 어데서 빌리것소. 후딱 쐬주 한 병 내오소.”
무슨 말인가 하고 눈망울을 굴리고 있던 윤희에게 후줄근한 키에 깔끔한 용모의 사내가 설명이라도 하듯 눈가로 미소를 매달고서 말했다.
앞가슴의 명찰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이제 막 제대하는 전역병이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명찰의 ‘이상민’이란 이름이 자신과 운명적으로 악연이 되어 얽혀들 줄은 꿈엔들 상상도 하지 못 했었다.
“우리 집은 소주를 취급하지 않는데요.”
그들에게서 느낀 취기 탓일까? 웬지 자신이 뱉은 억양이지만 다소 쌀쌀맞다는 뉘앙스를 느끼고 있는 데
“머셔? 이 체나가 시방 사람 등급멕여 술을 팔것다능 기가 뭐시가? 이제 봉께 젓가락 핵교 졸업도 못 헌 초보같은디 한 번 눌러 줘 뿐져야 손님을 알아 볼 모양인디 어짜꺼나?”
눈썹이 특이하리 만큼 굵고 광대뼈의 윤곽이 뚜렷한 사내가 탁자를 치며 잡아 삼킬 듯이 노려보며 언성을 높이는 데 아무런 잘 못도 없으면서 윤희는 덜컥 주저앉을 것 같은 현기증이 났다.
어머니의 상술을 지켜보면서 윤희는 술장사의 생리대로 어설피 취한 취객에게 어설프게 대하면 횡설수설 치근덕거리기가 일쑤고 자칫 타 손님과의 시비로 그날 장사를 망치기 십상이어서 나름대로 바리게이트를 친 것인데 오히려 미숙한 상술이 악효과를 유발한 결과였고 여타의 뒷수습의 말을 할 줄을 몰라 이들의 다음 행동이 겁이 날 뿐이었다.
“이봐. 심병장 앉아서 얘기하자구. 이 아가씬 주인 아줌마의 따님 같은데 자네가 실수한 거야. 이 아가씨 이름이 뭐더라...? 맞아. 윤희씨가 맞죠?”
이상임이란 사내의 부드러운 말은 예측하지 못 한 공포에 가슴 조아리던 윤희에게 청량제의 구실을 했고 그 부드러운 말에 가슴을 녹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지난번 휴가 때 아주머니께 인사차 들렸더니 술 한 잔 대접하며 뭐란 줄 아십니까? 우리 윤희 신랑감으로 저만은 해야 할 텐데 말씀하시기에 따님이 메주든 호박이든 아주머니만 보고 사위가 되겠다고 했죠. 하하.... 한데 윤희씬 내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미인이라 그 때 선택한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이, 심병장. 앞으론 형수께 무례하면 이 형님께 혼난다. 이번만 용서해 주마.”
“요 싸가지가 지금 머시기라 하능기가? 나 몰래 제수 만들면 쥑인다고 했는디 시방 머시기라 한다냐? 첫 눈에 내 눈깔이 휘까닥 했는디 제수씨라고야?”
어머니와 이들의 친분이 어떠했던 것일까? 혹 어머니 또한 이 사람 말처럼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윤희로선 생소한 안면이었고 금시초문이었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가 오갔을 때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당사자가 없는 데서의 진실은 아니었을 것이란 것을 쉬이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데 이런 불안한 분위기에서 그가 가벼이 내던진 한 마디의 말이 전혀 싫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감사해요. 예쁘다는 말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요.”
왤까?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리만큼 어린아이 같은 정감이 실린 자신의 억양에 깜짝 놀랐고 그 험악했던 분위기를 잊어버린 헤픈 감정의 절제에 후회 감이 들었다.
“하하.... 난 단지, 보고 느낀 것을 직설적으로 얘기했을 뿐 칭찬이란 단어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만난 인연으로 제가 따르는 술 한 잔은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얼래? 야가 시방 첫 눈에 만리장성 쌓자는 거시어?ꡓ
“형수에게 질투 가지면 안 된다.”
윤희의 나이 스물 둘. 지금껏 여타 친구들과는 달리 그 흔한 미팅이며 데이트를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순진무구를 고집하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죽도록 타성을 기피하고 언제까지고 홀로 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의 동물이 어찌 이성만 생각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던 때가 없었겠는가, 다만 합법적인 절차를 거치기 전에는 이성의 어울림은 불결하다고 여기는 결벽증 같은 성격 탓이다.
윤희의 이러한 성격의 조성 원인은 어머니의 삶에서 비롯된 원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윤희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삶은 눈물과 회한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 회한을 안고 살면서도 끝내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마냥 기다리는 인고의 삶에서 윤희는 사춘기 때 이미 어머니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가슴앓이를 들으며 타성에 대한 기피증이 일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독신의 미래를 설계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혼사를 논할 성인이 되어서도 손님으로부터 다소 가벼운 농을 해 올라치면 자리를 지키지 못 하는 그런 성격인데 아무리 첫 인사가 쌀쌀 맞다 해서 막무가내로 욕을 하는 사내를 겼어보지 못 했기에 그에 대처해 면박을 줄 언어를 찾지 못 하고 그 욕을 삭여들을 수 있는 다감한 이해폭도 가지고 있지 못 했다.
“잡아먹는 사람 업슨께 엉덩이를 쪼까 내려보드라고 잉?”
안주를 놓고 돌아서던 윤희는 부리한 사내에 소매가 잡혔다.ꡓ
“야가 시방의 요점은 체나에게 첫눈에 반했단디 땡초가 지 머리 못 깎는 다고 나가 시방부터 가슴이 쓰지만서도 오작교가 되어야 쓰것소. 잉.”
“너 지금 자다말구 봉창 두드리고 있구나? 우리가 지금 맞선 보냐! 오작교 노릇하게? 우린 이미 사랑하는 사이란 말야! 짜식이 얼렁뚱땅 훗날 떡고물을 챙기려는 데 속보인다. 속보여. 험.”
마지 못 해 좌불안석이던 윤희는 무심결에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다소 흥청거리는 어투와는 달리 취기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쓸어보고 있었다.
아아, 저 눈빛.
윤희는 그의 웃음기가 다소 묻어 있는 눈을 직시하지 못 하고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어느새 미미하게 울리고 있는 자신을 들킬 것 같은 조바심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그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으며 언제 시간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을 했단 말인가? 그의 말이 전부 언어의 유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어메 야가 시방 한 술 더 뜨고 자빠졌네 그랴! 몇 시에 만나기로 했당가?ꡓ
“열시. 저 가로등에서. 한데 네가 왜 관심을 가지는 거야?”
“어라? 야밤중에? 밤에 둘이 만나서 머한다냐 잉?ꡓ
“밤에 애인끼리 만나 뭐 하겠냐? 뽀뽀하지! 그렇죠 윤희씨?”
“그럼요. 기다리는 성의가 괴씸해서 누군가 나타날런지도 모르겠네요.”
어차피 말장난이고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마당에야 갸벼운 한 마디 섞지 못 할 이유가 없으리라.
훤칠한 이 사내의 말에 액면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잠시 마음이 동할지는 모르지만 중심이 흐트러지지는 않으리라. 이미 윤희에겐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가 있기 때문이다.
사내의 수려한 용모와 교육으로 닦여진 지성미가 한 눈에 느껴지고 이와 어우러진 매력에 가슴이 울렁거림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따라서 땅을 일구는 약혼자의 꾀죄죄한 모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부류다. 그러나 여자를 피동적인 인격체로 치부하고 끝까지 원색적인 태도는 처음의 호감마저 사라지게 했고 자신 또한 그들에게 유희를 아낄 이유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다. 기다려 보라지 나갈 때까지.
“바람 놓지 마요. 지난번 딱지맞고 몇 달간 죽다 살았당게요 잉?”
윤희는 사내의 말을 뒤로 흘러버리고 자릴 떴다. 술집의 작부로 여기는 손님의 좌석에 더 앉아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