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1년 공덕산功德山 미면사米麵寺 중창
/ 황금산
1241년(고려 고종 28)에 상주태수로 부임한 최자(崔滋)1)가 허물어진 공덕산(功德山) 가람을 더 크게 확장하고 정비한 뒤, 천태종의 주법 원묘국사 요세(了世)의 후계자인 진정국사 천책(天頙)을 초청하여 옛 미면사(米麵寺)의 중창불사(重剏佛事)를 완성하였다. 뒤에 천태종(天台宗)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수행한 성지(聖地)로 추앙되면서 절 이름을 동백련사(東白蓮社)로 고쳤다.(출처:보한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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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최자(崔滋 1188년 ~ 1260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 시호는 문청(文淸)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저작으로 보한집(補閑集), 삼도부(三都賦) 등이 있다.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초명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叟)이다.
명유(名儒)인 문헌공 충(沖)의 6세손이며, 우복야 민(敏)의 아들이다. 1212년(강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국자감 학유(國子監學諭)에 이르렀다. 그 뒤 10년간은 관운이 트이지 않다가〈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수정배시(水精盃詩)〉로써 이규보(李奎報)에게 알려져 이것이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최이(崔怡)가 문병(文柄)을 잡을만한 후계자를 묻자, 이규보는 최자를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래서 문재(文才)를 열번 시험하였는데, 다섯번 1등을 하고 다섯번은 2등을 하였다. 다시 이재(吏才)를 시험하려고 급전도감녹사(給田都監錄事)를 시키자 민첩하고 근면하여 인정을 받았다. 한때 제주태수로 있었고. 1233년(고종 20)에 최린(崔璘)·권술(權述)과 함께 금나라로 문안사행을 다녀왔다. 1241년(고종 28) 정언을 거쳐서 상주태수가 되어 공덕산 미면사(문경시 산북면 소야리 동백련사의 전신)를 중창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한때 충청·전라 안찰사가 되었고, 그 뒤 국자감대사성·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상서우복야·한림학사 및 승지를 지내고, 추밀부사가 되어 1250년 2월 중서사인(中書舍人) 홍진과 함께 몽고에 들어갔다. 1256년 11월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가 되었고, 다시 수태사(守太師)·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더해졌다. 1258년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집권자 최의(崔竩)를 죽여서 4대째 내려오던 최씨정권이 무너졌으나, 수상으로서 난국을 잘 타개하였다. 1259년 1월 몽고의 침입이 있자 고관들 사이에서는 항복과 항전을 두고 중론이 분분하였는데, 추밀원사 김보정(金寶鼎)과 함께 강도(江都)는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시문에 뛰어나서 당대에 크게 문명을 떨쳤다. 문학평론사상 이인로(李仁老)와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대체로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으며, 문학비평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다.
저서로 《최문충공가집(崔文忠公家集)》 10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속파한집(續破閑集)》(補閑集으로 고쳐 부름) 3권이 현전한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 1편이, 《동문선(東文選)》에 부(賦) 2편, 시 10편, 기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주2 : 보한집(補閑集)
시화집(詩話集).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한 수필 시화집으로 당시의 권신(權臣)인 최이(崔怡)의 권유로 동산수(東山叟) 최자(崔滋)가 간행한 것이다. 아름다운 근체시(近體詩)와 시평(詩評), 거리에 떠도는 쇄언(瑣言), 흥미있는 사실(史實)·부도(浮屠), 부녀자들의 이야기 등을 수록하였다. 당시까지의 고려 문인들의 시, 그 중 오·칠율절(五七律絶)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시의 풍격(風格)에 역점을 두고 다루어, 21종의 풍격으로 구분하여 그 우열을 논하고 있다. 또 그는 이인로와는 달리 사어(辭語)와 성률(聲律)보다는 기골(氣骨)과 의격(意格)을 앞세워 이규보(李奎報) 계통의 시를 옹호하고 있다. 당시 사회 사정을 아는데 좋은 문헌이 되며,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과 함께 고려시대 3대 비평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상·중·하 3권으로 최우의 아들 항(沆)에 의해 간행되었고,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1권의 양장본으로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