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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거룩한 사물에 대한 공경
사무엘상 4:1~7:14
기억절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5,46).
요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존경.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병원과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공경을 나타낼 때 축복을 받는다. 이스라엘과 그의 원수들은 눈에 보이는 상징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왜곡하였다. 그리하여 그같은 축복을 잃어버렸다.
개요
이스라엘의 잘못(삼상 4:1~22)
블레셋의 범죄(삼상 5:1~6:21)
패배에서 승리로(삼상 7:1~14)
서론
법궤의 중요성.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삼상 3:20)을 지라도, 백성들의 영적 생애는 쇠퇴하여 있었다. 실로의 성막에서 있은 엘리의 아들들의 악한 감화는 거룩한 봉사를 공공연히 경멸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이웃 나라들까지도 그같은 추문을 알게 됨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우상숭배와 범죄를 행하였다. “그러나 보응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권위는 제거되었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태만히 여김과 멸시를 당하였으므로 당신의 성호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신께서 개재하실 필요가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60).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으며 성소 봉사의 핵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궤의 건조와 취급에 대하여 세심한 지시를 하셨다(출 25:10~16).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감각이 무디어지고 엘리의 아들들의 감화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그들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이교의 사상들을 빌려왔다. 그들은 법궤를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우리는 이번 주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비극과 패배 가운데서 그들을 최종적으로 회복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셨는지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잘못(삼상 4:1~22)
싸움에서 패한(삼상 4:1,2)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신 20:1~4, 7:18~21 비교).
답: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의향도 대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찬동도 없이 이 원정을 기도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6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비록 그들이 최상의 상태에 있다할지라도, 그들과 조우하게 될 강력한 원수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아셨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실질적으로 그들을 괴롭히는 원수의 군사력에 맞설 만한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느슨한 연합, 곧 빈약하게 조직된 동맹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블레셋은 잘 조직되어 있었으며, 군사적인 기술과 병력면에서 월등하였다. 그들만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철 병기와 황소가 끄는 나무로 된 사륜거는 그들을 강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명성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들의 비참한 패배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도록 허락하지 않은 결과임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와 그들과 함께 있게 하였는데, 이것이 문제를 더욱 그르쳤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근거에서 이같은 결정을 하였는가?(삼상 4:3~6; 수 6:1~16 비교) 어떤 오류가 이같은 행동을 부채질하였는가?(삼상 4:7,8).
답:
법궤가 전쟁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 유일한 경우는 여호수아의 지도 하에 여리고를 점령할 때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감독과 지시 하에 그렇게 하였다. 블레셋의 물고기 신(神)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교활한 원수들을 수행해서 전선까지 나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도 그같은 이교 풍습의 영향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어떻든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게 하였을 것이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오도록 결정하였다. 엘리는 명백히 너무 늙고 허약해서 그 문제에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흡니와 비느하스는 장로들의 요청에 기꺼이 동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참람됨.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만이 법궤에 신성함을 더해 준다는 사실과 그 율법에 순종할 때만이 그것이 그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했다. …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진(陣)으로 매어 오자는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대제사장의 동의 없이 그들은 참람하게도 지성소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왔다. 교만심으로 가득 차고, 신속한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의기양양해진 그들은 그것을 진으로 매어 왔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임재의 증거라고 생각한 법궤를 바라보면서 ‘땅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다’”(엘렌 G. 화잇 코멘트, 본교 성경 주석 2권, 1011).
주께서는 어떤 상황 하에서 법궤 위에 좌정해 계셨는가?(출 25:8,21,22, 29:45,46).
답: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법궤를, 신은 아닐지라도 행운을 가져다주는 마력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법궤가 거룩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났던 장소인 성소의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법궤는 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지만, 법궤가 하나님은 아니었다. 이같은 위대한 진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종교를 거짓 신들과 거짓 종교들로부터 구별지었다.
우리는 그 다음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삼상 4:9~21).
답:
“일어날 수 있는 재난 중에서 가장 무서운 재난이 이스라엘에게 내렸다. … 비느하스의 아내는 남편이 불경건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한 여인이었다. … 그는 이스라엘의 최후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이 불운한 시간에 탄생한 아이를 이가봇 혹은 ‘영광이 없다’ 고 명명하고 임종의 숨은 거두면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는 말을 슬프게 반복하였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61~264).
참된 공경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을 존경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추측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가?
블레셋의 범죄(삼상 5:1~6:21)
거룩한 법궤로 말미암아 블레셋이 겪었던 일을 알기 위해서 사무엘상 5장을 읽어라.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어떻게 보호하셨으며, 당신의 백성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명예를 어떻게 옹호하셨는지 주목하라.
3절
4절
6절
9절
11, 12절
기회를 상실함. 이 경험이 우상을 숭배하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끼쳤을 선교적 영향을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삼상 6:5)려야 한다고 주장한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의 충고를 주목하라.
블레셋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에 신실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삼상 6:1~12).
답:
“이 현명한 자들은 신비한 능력이 법궤와 같이 함을 인정하였다. …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하나님의 권세에 억지로 복종할지 모르나 그 반면에 그들은 마음으로는 당신의 지배에 대하여 반역한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67).
벧세메스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법궤를 두기 위한 준비를 블레셋 사람들보다도 더 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삼상 6:13~21).
답:
부조와 선지자 하권, 269, 270쪽에서 지적한 이유들을 주목하라.
* 예배자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는 데 실패하였다.
*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하게 순종하고 있지 않았다.
* 그들은 법궤가 돌아온 것을 행운의 전조로 여겼으며 그것의 참된 신성성을 느끼지 않았다.
* 그것을 놓을 적합한 장소를 찾는 대신에 그것이 도착한 장소인 타작마당에 그대로 방치했다.
* 그들은 그것에 스스럼없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내용물을 보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마침내 대담하게도 그 거룩한 뚜껑을 열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법궤를 보도록 허락되었으며 그것도 일 년에 한 차례였다(히 9:7; 레 16:2,29~31). 블레셋 사람들까지도 감히 그것을 열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는 경외심으로 법궤를 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감히 거스른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 내에 있는 불경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의 신성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집에서 행해지는 불경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떤 제안을 하겠는가?
패배에서 승리로(삼상 7:1~14)
법궤는 마침내 어디서 안전히 있을 장소를 찾았는가?(삼상 7:1,2).
답:
명백히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들 가운데 있는 레위인들을 포함해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법궤를 가져가도록 호소하였다. “그들은 장엄한 기쁨으로 법궤를 그들의 성읍에 가져와 레위 사람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하였다. 아비나답은 그 아들 엘리아살에게 명하여 법궤를 돌보게 하였고 법궤는 여러 해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70).
고고학적인 증거는 실로가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의해 멸망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함을 입증한다. 그것은 사무엘서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시 78:60~64 참조). 사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놉에 성소가 설치되어 있었다(삼상 22:19 참조). 법궤는 다윗의 통치 때까지 20년간을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패배 후, 20년 동안 사무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 것 같은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관계는 어떻게 존속되고 있었는가?(삼상 7:3).
답:
사무엘은 제멋대로 하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심한 심적 부담감을 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호소하며, 우상숭배의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들과 함께 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집 저집으로 온 나라의 흙먼지 길을 다니고 있는 그를 상상해 보라.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땅으로 이주한 일은 없었던 반면에,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종하였으며, 공물을 바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섬겼다. 사회적 또는 사업상 관계로 그들은 끊임없이 블레셋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에게 예속되는 상태를 싫어하면서도, 그들의 관습과 신들과 악행들을 용납함으로써 그들의 생활 방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받아들인 이상한 신들 가운데는 여신 아스다롯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블레셋의 물고기 신인 다곤 신의 배우자였으며 가나안의 바알이었다. “아스다롯을 예배하는 일은 일반적 여신의 열렬한 숭배자이거나 ‘성녀(聖女)’ 또는 신전 매춘부로 알려진 지도적인 여인들에 의해서 종종 조장되는 음란한 유흥이었다”(본교 성경 주석 2권, 480).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기 시작했을 때, 사무엘은 그들이 회개의 증거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하였는가?(삼상 7:3,4).
답: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0,112).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그분께로 돌아가며, 죄를 회개하고, 습관과 태도와 우상 또는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를 그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일이다. 이것이 참된 부흥으로 이끈다.
“심령을 살피시는 주님께서는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내기를 바라신다. … 아 그대들은 밝은 촛불을 들고 마음을 샅샅이 살필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세속적인 습관들에 의하여 묶여 있는 가는 실을 찾아 끊어버려야 할 것이다”(가려뽑은 기별 2권, 404).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사무엘의 호소를 다음 말씀과 비교하라(왕상 8:46~50; 사 55:6,7). 이 참고 성경절들은 우리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답:
“인간의 마음의 통로를 통하여 수 세대를 전해 내려온 부모의 온갖 사랑, 곧 사람들의 영혼 속에 솟아나는 애정의 온갖 샘들은 무한하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때, 끝없는 대양과 비교되는 한 줄기 작은 실개천이다. 말로서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고 글로서도 그것을 묘사할 수 없다. … 영원 그 자체도 결코 그것을 완전히 계시할 수 없다”(교회증언 5권, 740).
“오늘날도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한 바와같은 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부흥이 필요하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271).
이스라엘의 부흥에 대한 블레셋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삼상 7:5~7). 그대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어떤 경우를 보게 되는가?(계 12:10~12).
답:
“블레셋의 군주들은 이것을 독립을 선언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 블레셋은 평화로운 목적으로 나라의 각지로부터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위해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그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도록 매우 신속하게 그들을 공격하였다”(본교 성경 주석 2권, 482).
우리 영혼의 원수는 우리가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흥이 일어날 때 그리고 우리가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신속하고 격렬하게 공격한다.
블레셋의 위협에 대해서 이번에 이스라엘이 보인 반응을 20년 전에 그들이 보였던 반응과 비교하라. 이번 전쟁의 결과를 이전 전쟁의 결과와 비교하라. 무엇이 그같은 차이를 가져왔는가?(삼상 7:8~10, 4:1~3).
답:
20년 전 자신만만하고 자아를 의지하던 백성들이 이제 겸손하고 여호와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가운데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삼상 7:8)으소서 라고 탄원하는 백성이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선지자의 기도가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들이 그들을 위하여 싸움을 싸워 주시도록 그분께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쉽게 그들의 원수들을 패배시키셨는지!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민족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안전과 행복의 길인 한편 범죄의 길은 재난과 패배로 인도할 뿐이다”(부조와 선지자 하권, 27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여 개입하신 일을 어떻게 기념하였는가? 그들이 쟁취한 승리의 원대한 결과는 무엇이었는가?(삼상 7:12~14).
답: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삼상 7:12)으니 그는 또한 끝까지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멸망시키는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비를 바라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인애와 자비를 언제나 새롭게 기억하자. … 그리함으로 우리의 나그네 생애의 여생을 통하여 우리 앞에 있을 모든 난관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굳세게 하자”(정로의 계단, 307).
나의 충성심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종교의 상징을 더 많이 강조하는가? 다음의 제안 중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 표를 하라.
종교적인 상징들, 곧 교회, 종교 미술과 음악, 성만찬 예식 및 침례식과 같은 상징들을 없앤다.
영적으로 내게 더욱 의미가 있을 새로운 종교적 상징들을 고안한다.
종교적인 상징들은 그것이 나타내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떠나서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에 모셔들여 나의 생애를 향도하게 하며 인도와 보호함을 위해 그분을 신뢰한다.
연구와 명상
부조와 선지자 하권, 257~272쪽에서 “법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김” 장을 읽어라. 이번 주 교과에 나오는 장소들과 그 지역의 지형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도록 고대 팔레스틴의 지도를 연구하라. 성경 사전이 있으면, 블레셋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라.
요약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거룩한 율법이 담긴 신성한 법궤를 맡기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임재를 법궤 위에 나타내셨고 거기서 당신의 뜻을 알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법궤를 당신의 임재에 대한 상징물 대신에 신으로 취급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평범한 것으로 간주했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거두셨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임재 없이 종교적인 활동이나 예배에 참여하게 될 때,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영적 위험과 영원한 상실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