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야, 할머니가 무슨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살짝 방에 들어오시더니 말을 전하고 가셨다. 수상쩍다. 무슨 대단한 말씀이시기에 열 발짝 거리도 안되는 안방에서 내 방까지 전령을 다 보내셨나.
안방에 가보니 할머니께서 오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계셨다. ‘야 니 뭐 맛있는 거 묵고 싶다매. 이따 저녁에 뭐 맛있는 거 무라.’ 뭐지. 웬 용돈이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머뭇거렸더니, 니 요즘 돈 너무 많이 썼다, 맛있는 거 사무라 하며 오만 원을 내미시는 거다. 아하 그런 거군. 마다할 용돈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넙죽 오만 원을 받았다. 괜히 어색해서 ‘아빠! 나 용돈 받았어!’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제는 할머니와 둘이 양재 꽃 시장에 다녀왔다. 슬쩍 여쭤볼 때는 별 반응이 없으시더니 당일이 되니 이미 빼도 박도 못하는 일정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사실 전날 잠을 못 잤지만, 나가보니 이미 소리 소문 없이 겉옷까지 챙겨 입고 계신 할머니를 보고 어서 빨리 모자를 눌러쓰고 옷을 입었다.
최근 들어 부쩍 답답해하시는 할머니와 외출이 하고 싶었다. 가끔 방문을 열고 나가 집 안을 가만히 둘러보면, 이 집이 할머니의 온 세상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아직은 집 앞 채소 가게 '강화'에도 가실 수 있고, 혼자 물리 치료를 받으러 '선양 병원'에도 가실 수 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가 갈 수 있는 곳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두 달에 한 번씩 몇 블록 떨어진 식당에서 친구분들과 모임을 하시기도 하고, 그보다 더 전에는 옆 동네로 노래교실을 다니곤 하셨다. 그러고 보니 전에는 오후 두 시쯤이 되면 할머니가 부르는 무반주 트로트 가락을 들을 수 있었다. 수업 때 받아 온 가사집을 보며 노래를 부르시던 할머니는 이제 TV의 트로트 프로를 틀어 두시기만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 당장 어디 바닷가에라도, 생생 정보통에 나온 시장에라도 모시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째 비가 오는 날씨인 덕에 시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와 나는 팔짱을 끼고 가동과 나동을 여러 번 오갔다. 한 동을 가로질러 걷고 나면 한 번은 앉아 쉬셔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딱 한 번 내가 식혜를 뽑아 마시는 동안만 기다려주시고는 내내 시장을 돌았다. 그러다 할머니께서 꽃 하나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내가 니 대학 붙었을 때 이거를 하나 샀거든...'
그 시절 나는 할머니가 화초를 키우시는 줄도 몰랐다. 많은 손주들 중 한 명인 나와 할머니가 특별히 더 다정하게 지낼 이유는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갑자기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드라마에 나오는 할머니와 손녀 같은 사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할머니가 내가 대학에 붙었다고 화초를 사서 몇 년을 키웠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나, 그리고 굳이 '너 대학 붙은 기념으로 꽃을 샀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할머니. 그랬던 우리는 팔짱을 끼고 느린 걸음을 걸으며 화초를 구경했다.
나는 방에 걸어 둘 초록색 다육 식물을 사고, 할머니 것으로는 제라늄과 카랑코에 같은 빨갛고 노란색의 고운 꽃들을 샀다. 서른 한 살의 손녀는 이제 할머니께서 지갑을 열도록 두는 것보다 제 지갑을 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뭘 사달라고 말하는 나이를 언제 이렇게 훌쩍 지났나 싶지만, 뭘 사드리면 좋을지 묻는 나이가 되었음에 종종 뿌듯함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 야 없었으면 우짤 뻔 했노' 소리를 듣다 보니 내가 자꾸 옷이나 가방 대신 주방 가전 같은 것을 들여다보나 보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창밖을 보며 차가 너무 막힌다고 걱정하시던 할머니는 결국 택시비가 너무 많이 나올 것 같다며 이만 원을 찔러 주셨다. 괜찮다는 말에도 계속 받으라고 하시는 걸 보니 이거 안 받으면 집에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다 싶어 감사하게 받았다. 집에서 양재까지 택시비는 대충 이만 오천 원쯤 나온다. 왕복 오만 원을 주고 꽃 시장을 다녀오는 일이 할머니에게는 조금 사치스러웠던 걸까. 이만 원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보며 이제는 진짜로 면허를 따고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용돈을 받았다. 하루 동안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오만 원을 받고는 실실 웃음이 났다. 용돈으로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뭘까? 치킨을 시켰다.
할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산 치킨을 다같이 맛있게 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