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다고 하네. 아빠한테 주말에 시골에 좀 내려가서 살펴보라니까 말도 안 듣고. 어휴.”
엄마의 한숨 소리에 나까지 심난해졌다.
열세 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며 무용담 늘어놓듯 흡연 경력을 자랑하고, 맨 정신 보다 술 기운에 찌들어있던 날이 많았던 나의 할아버지는 올해로 딱 90세가 되셨다. 끼니때마다 미원을 한 숟가락씩 국에 타 먹고 소주와 막걸리를 끼고 살았지만 환갑 즈음 위와 식도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한 것 말고는 별다른 지병도 없었다. 저렇게 막 살아도 장수하는걸 보면 수명은 환경보다 유전인가보다 하며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타고난 건강 체질인줄 알았던 그런 할아버지가 1년 전부터 조금씩 이상해졌다.
귀가 어두워져 큰 목소리와 과한 입모양을 보여야만 대화가 가능해졌고, 방금 전까지 알아보고 반가워하다가 또 돌아서면 누구냐며 처음 보는 사람 취급을 했다. 특히 할머니에게는 더없이 폭력적이었으며 원래도 다혈질에 욱하던 성격이 더 고약해졌다.
결국 아침 일찍 주간보호시설 셔틀에 할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저녁 늦은 시간에 귀가시키며 치매 돌봄 기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매 끼니마다 먹던 막걸리도, 아무 때나 소리 지르고 때리며 부려먹던 할머니도 없는 시설에서의 생활. 난동은 점점 더 거칠고 잦아졌으며 기물을 던지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상황이 반복되었고 당연하게 할아버지에게 투여되는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 같은 약물의 처방도 늘어났다. 최근 몇 달간은 밤이고 낮이고 늘 약에 취해 잠만 자다가 얼마 전에는 또 시설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워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골절되어 완전히 와상환자가 되어버렸단다. 적지 않은 나이라 수술도 위험부담이 커, 결국 주간보호시설도 보내지 못하고 하루에 4시간씩 요양보호사를 불러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치매에 걸려 누워있는 90살 아버지와 나이든 간병인 어머니.
이 두 노인을 시골집에 두고, 다섯 명이나 되는 자식들은 어떠한 대책도, 계획도 세우지 않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다.
“형이 장남이니까 가서 좀 거들떠봐.”
“네가 가까이 사니까 자주 좀 가봐라.”
“딸이니까 가서 좀 챙겨드려.”
장남인 아빠가 시골에 내려갈 기미가 없어 보이니 며느리인 엄마만 괜한 죄책감에 애를 태운다.
아빠는 왜 부모님을 찾아뵈러 내려가지 않는 걸까. 왜 모른 척 하는 걸까.
젊은 시절에 할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다. 돈을 포대에 가득 담아 올 만큼 넘치게 벌어왔지만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기 바빴고 가족들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눈치를 봐가며 도망치던 동생들과 달리 여리고 순종적이었던 아빠는 가장 많이 얻어 맞았다.
배를 탈 때마다 섬에 새로운 부인을 만들고 온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다. 할머니는 혼자 다섯 남매를 거두느라 제대로 교육시킬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터. 독하게 공부해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막내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초적 의무 교육까지 밖에 못했는데, 가정 폭력 앞에서는 모두 피해자였지만 무심했던 어머니를 또 다른 방관자라 여기며 자식들은 원망을 키웠다.
다섯 남매는 그렇게 열일곱 무렵부터 각자 도망치듯 독립했다.
명절에만 잠깐 모여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늘 부모자식간의 다툼과 고성으로 소란스럽게 끝이 났다.
돌봄은 순환한다.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봄 받지 못했던 나의 아빠는 다시 부모에게 돌려줄 사랑의 기억이 없을지 모른다.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욕망만을 좇으며 살아온 할아버지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보내고 있다.
당장 움직일 수조차 없는 아픈 몸으로 가족들의 외면을 통과하며 끝을 기다리는 삶.
남들은 오복 중 하나라고 말하는 90세의 장수가, 어쩌면 하늘이 할아버지에게 내린 벌은 아닐까.
첫댓글 장수가 늘 축복일 순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촘촘한 현실표현으로 잘 보여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ㅠㅠ 가족...상처가 다른 상처가 되고, 가깝다는 이유로 가장 막 대하죠. 가슴아픈 글 담담히 잘 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