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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광반야경 - 3. 가호품(假號品)
“또한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觀)해야 한다. 보살이란 단지 글자일 뿐이며, 부처 또한 글자일 뿐이고, 반야바라밀도 글자일 뿐이고, 5음이란 것은 글자일 뿐이다. 사리불이여, 나라고 말하는 일체의 언어는 글자일 뿐이다. 나라는 것을 찾아도 또한 나라는 것이 없으며, 중생도 없으며, 생하는 바도 없으며, 생겨나게 하는 자도 없으며 , 스스로 생겨남도 없다. 사람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으며, 자음[作]도 없으
며, 만듦[造]도 없으며, 또한 이루는 자도 없으며, 받는 자도 없으며, 주는 자도 없으며, 보는 것도 없으며, 얻는 것도 없다. 왜 그런가? 일체의 모든 법은 있는 바가 없어서 공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라는 것도 일체 명자의 법에 모두 보는 바가 없고, 보는 바가 없음에도 다시 견(見)을 두지 않는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부처님을 제외하고 일체 모든 성문∙벽지불보다 뛰어난데 무소유인 공을 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체에서 들어갈 곳[所入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사리불이여, 보살이 이와 같음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한 염부제 안에 있는 수목∙초목∙벼∙삼∙사탕수수∙잔잔한 떨기나무∙대나무∙갈대가 모두 사리불∙목건련 등과 같으면서 그 수(數)가 그들처럼 지혜와 신족과 그 덕(德)이 한량없다고 해도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에 비교해 보고자 하면 마침내 무수한 억백천 배 만큼이나 비교가 될 수 없고 비유로써 견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보살은 지혜를 가지고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
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생각하는 지혜는 하루 중에도 모든 성문∙벽지불보다 뛰어나다.
사리불이여, 염부제에 있는 초목 숫자 정도는 그만두기로 하고, 삼천대천국토에 사리불∙목건련 등과 같은 이들이 가득 차 있다고 하자. 다시 이 정도는 그만두기로 하고,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세계에 사리불∙목건련 등과 같은 이들이 가득 찼다고 하자. 그 수가 이와 같다면 헤아릴 수 없을 것이지만,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 비교하면 백 분∙천 분∙거(巨)억만 분에도 미치지 못한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 가진 지혜에 비교해 보면 모든 성문∙벽지불의 지혜는 백천만 배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수다원에서 성문∙벽지불에 이르고, 위로는 보살과 모든 부처님 세존에 이르기까지 이 여러 무리의 지혜는 서로 위배되지 않고 생겨남이 없어서 그것은 실로 모두 공하여 차별도 없고 나오는 것도 아니며, 생(生)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로 공은 특별히 낫거나 못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어째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 하루 동안 생각한 것만으로도 성문∙벽지불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들보다 낫다고 한 까닭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하루 동안 마음으로 ‘나는 도법(道法) 인연으로 중생을 위해 모든 법을 깨달아서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리불이여, 모든 성문과 벽지불이 진실로 이런 생각이 있는가?”
사리불이 말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모든 성문과 벽지불은 처음에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마땅히 이렇게 알고 생각하기를, ‘모든 성문과 벽지불이 소유한 지혜를 보살의 지혜에 비교해 보면 백 분∙천 분∙거억만 배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해야 된다.
또한 사리불이여, 성문과 벽지불은 마음으로 ‘나는 마땅히 6바라밀을 행해서 중생을 가르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부처님의 열 가지 힘[十種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혜(無礙慧)를 구족하고, 부처님의 18법(法)을 구족해서 아유삼불(阿惟三佛)5)을 이루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사람으로 하여금 니원(泥洹:열반)을 얻게 하겠다’는 이런 생각이 정말로 있겠는가?”
사리불이 말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이런 생각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능히 그렇다. 보살은 이 6바라밀을 행해서 18법을 구족하고 아유삼불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하게 한다.
사리불이여, 비유하면 마치 반딧불이 ‘나는 광명으로 염부제를 비추어서 두루 밝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리불이여, 모든 성문∙벽지불도 또한 ‘나는 마땅히 6바라밀을 행하여 18법을 구족하고, 아유삼불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하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리불이여, 비유하건대 해가 뜨면 염부제를 두루 비추어서 그 빛을 받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고 18법을 구족하고 아유삼불을 이루어서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어떻게 나한과 벽지불지를 지나서 아유월치지(阿惟越致地)를 얻는데 이르며, 불도지(佛道地)를 장엄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초발의 때부터 항상 6바라밀을 행하고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법에 머무르며, 아라한∙벽지불의 지를 지나서 아유월치지에 이른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어떤 지(地)에 머물러야 성문∙벽지불을 위해서 복전을 짓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초발의 때부터 항상 6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그 도량에 이를 때까지 그 중간에 항상 성문∙벽지불을 위해서 보호해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가? 사리불이여, 세상에는 보살이 있어서 곧 5계∙10선(善)∙8재(齋)∙4선(禪)∙4등의(等意)∙4무형정(無形定), 나아가 37품법(品法)이 있음을 알고 모두 이 세상에 나타내며, 곧 18사(事)∙부처님의 열 가지 힘[佛十種力]∙4무소외(無所畏)를 구족하기 때문이다. 세간에 마침 이런 법이 있으니, 곧 왕자종(王者種)∙범지종(梵志種)∙장자종(長者種)∙가라월종(迦羅越種)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천왕에서 위로 삼십삼천에 이르는 줄 알고,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과 위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나타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어떻게 마침내 시은(施恩)에 보답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시복(施福)에 보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이미 보답했기 때문이다. 보살은 항상 베풀고 있다. 그러면 무엇으로 베풀고 있는 것인가? 모든 선법(善法)을 베푼다. 무엇이 선법인가? 10선(善)의 법을 말한다. 10선의 법에서 위로 모든 부처님 세존의 법에 이르기까지 10력∙4무소외∙부처님의 18법을 구족하여 이것을 베풀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마땅히 색(色)이 공과 합치됨[合]을 알아야 하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마땅히 통(痛:受)∙상∙행∙식도 공과 합치됨을 알아야 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마땅히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도 공과 합치됨을 알아야 하며, 색(色)∙성(聲)∙향(香)∙미(味)∙세활식(細滑識:촉)6)∙법(法)도 공과 합치됨을 알아야 하며, 안색식(眼色識)∙이성식(耳聲識)∙비향식(鼻香識)∙설미식(舌味識)∙신세활식(身細滑識)∙법성식(法性識)도 또한 그러하니, 이것이 상응하는 것이다. 마땅히 고(苦)∙습(習:集)∙진(盡:滅)∙도(道)의 4제(諦) 법도 공과 합치됨을 알아야 하며, 마땅히 12인연(因緣)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열둘인가? 첫째는 치(癡:무명)이고, 둘째는 소작행(所作行)이고, 셋째는 식(識)이고, 넷째는 명색(名色)이고, 다섯째는 6입(入)이고, 여
섯째는 재(栽:觸)이고, 일곱째는 통(痛)이고, 여덟째는 애(愛)이고, 아홉째는 수(受)이고, 열째는 유(有)이고, 열한째는 생(生)이고, 열두째는 사(死)이다. 이 12인연은 공과 합치되는 것이다. 마땅히 알지니, 일체의 모든 법은 유위법(有爲法)이건 무위법(無爲法)이건 또한 공과 합치된다. 마땅히 알아야 할지니, 본성(本性)이 또한 공과 합치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일곱 가지가 공과 합치됨을 알았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위에서 말한 일곱 가지 일이니, 이 일곱 가지 일과 반야바라밀이 상응하는 것을 안다. 5음이 합치됨을 보지 않으며, 또 합치되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또한 5음법이 생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5음법이 멸하는 것도 보지 않는다. 또한 5음법에 집착함을 보지 않고, 5음법이 또한 단절됨도 보지 않는다. 색(色)과 통(痛)이 합치되는 것도 보지 않으며
, 통(痛)과 상(想)이 합치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상(想)과 식(識)이 합치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식과 행(行)이 합치되는 것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에 법과 법이 합치되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은 성(性)이 본래 공하기 때문이다.사리불이여, 색은 공하므로 색(色)이 아니며, 통∙상∙행∙식도 공하므로 식이 아니다. 색이 공하므로 봄이 없으며, 통(痛)이 공하므로 지각함이 없으며, 상이 공하므로 생각함이 없으며, 행이 공하므로 작용함[行]이 없으며, 식이 공하므로 분별함[識]도 없다. 왜냐하면 색과 공이 동등하여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이 색이기 때문이다. 통∙상∙행∙식도 또한 공이며 공이 곧 식이며, 또한 생함도 보지 않고 멸함
도 또한 보지 않는다. 또한 집착함도 보지 않으며, 또한 단절됨도 보지
않으며, 또한 중장됨도 보지 않으며 또한 감소됨도 보지 않는다. 과거∙미래∙현재도 아니며 또한 5음도 없다. 색∙성∙향∙미∙세활∙법도 없고, 또한 안∙이∙비∙설∙신∙의도 없으며, 또한 12인연도 없고, 4제(諦)도 없으며, 얻음에 이를 것도 없다.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도 없고, 또한 부처님도 없으며, 또한 도(道)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로써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하며, 이렇게 상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행을 하면 또한 상응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는다. 6바라밀에서도 또한 합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5음법과 나아가 신법(身法)도 합하는 것과 합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으며 37품(品)∙부처님의 10종력(種力)∙4무소외(無所畏)∙부처님의 18법(法), 나아가 살운야법 (薩云若法)7)도 상응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보살은 반야바라밀과 상응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공과 합하지 않으며,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에 합하는 것도 아니며, 무상∙무원이 공과 합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공은 합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합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는다. 무상∙무원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공의 법상(法相)을 건너서 5음과 합하지도 않고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과거색(過去色)은 과거색과 합하지 않으며 또한 과거색은 볼 수 없다. 미래의 색[當來色]도 미래의 색과 합하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색은 볼 수 없다. 현재의 색도 현재의 색과 합하지 않으며 또한 현재의 색은 볼 수 없다. 통∙상∙행∙식도 이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미래∙현재의 삼세 이름 모두가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처럼 합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에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살운야법이 과거∙미래∙현재에 합하는 것을 보지못하며, 과거∙미래∙현재도 보지 못한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생각을 지어야 하며, 이와 같이 상응해야 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살운야가 5음에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하며, 5음이 살운야와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살운야가 6정(情)과 합하는 것도 아니며 6정이 살운야와 합하는 것도 아니다. 색∙성∙향∙미∙세활∙법이 살운야와 합하는 것이 아니며, 살운야도 색∙성∙향∙미∙세활∙법과 합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바라밀이 살운야와 합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시바라밀∙찬제바라밀∙유체바라밀∙선(禪)바라밀과 반야바라밀도 또한 살운야와 합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또한 살운야와 6바라밀이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또한 살운야와 37품∙10력이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하며, 37품∙10력이 살운야와 합하는 것도 보지 못한다. 또한 살운야도 보지 못한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부처님도 또한 살운야와 합하지 않으며, 살운야도 또한 부처님과 합하지 않는다. 도(道)도 또한 살운야와 합하지 않으며 살운야도 또한 도와 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운야가 곧 부처님이고 부처님이 곧 살운야이며, 도가 곧 살운야이고 살운야가 곧 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합하는 것이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5음이 유(有)와 합하지 않으며 유 또한 5음과 합하지 않음을 안다. 5음은 또한 고락(苦樂)∙유아(有我)∙무아(無我)와 합하지 않으며 6정법(情法)도 이와 같다. 5음은 또한 공∙무상∙무원과 합하지도 않으며, 또한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또한 행하는 것도 보지 못하며 행하지 않음도 보지 못한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하며, 이와 같이 상응해야 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은 또한 반야바라밀을 위해서 단(檀)을 행하고 시(尸)를 행하고 찬(羼)을 행하고, 유체(惟逮)를 행하고 선(禪)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다섯 가지 바라밀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유월치(阿惟越致)를 위해서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4무소외(無所畏)∙4무애혜(無礙慧)∙부처님의 10종력(種力)∙18법불공(法不共)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 또한 내공(內空)∙외공(外空)∙소유무소유공(所有無所有空)∙공공(空空)∙대공(大空)∙필경공(畢竟空)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유위공(有爲空)∙무위공(無爲空)∙무저공(無底空)∙제법상공(諸法相空)∙일체제법공(一切諸法空)을 위해서, 또한 생공( 生空)을 위해서, 또한 무생공(無生空)을 위해서, 또한 진공(眞空)을 위해서, 또한 위공(僞空)을 위해서, 또한 여여함[如]을 위해서, 또한 법성(法性)을 위해서 또한 진제(眞際)를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 법이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신족(神足)∙철시(徹視)∙철청(徹聽)∙지타인의(知他人意:누진통)∙자지숙명(自知宿命:숙명통)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히려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거늘, 하물며 어떻게 보살이 신통 등의 일을 보겠는가?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마음으로 ‘나는 마땅히 신족(神足)으로 시방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 세존을 뵈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설하신 법을 나는 마땅히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마땅히 시방의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다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시방의 중생들이 태어나고 죽는 곳[生死所趣]과 선악으로 인해 가는 곳[善惡之趣]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스스로 ‘나는 마땅히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만큼의 사람들을 제도해서 반니원에 이르게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온갖 마군이 그 틈을 얻을 수 없고 모든 세간의 일에서 모두 항복받을 수 있다. 시방의 갠지스강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다 함께 이 보살을 옹호하여 성문∙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사천왕에서부터 위로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천들이 모두 함께 이 보살을 옹호하여 중도에 장애가 없게 한다. 이 보살의 몸에 중병이 있어도 현세에 낫게 된다. 왜냐하면 널리 중생들을 자비심으로 보살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속히 다란니와 모든 삼매문을 얻어서 다 앞에 나타나 있을 것이다.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뵙고 도량에서는 항상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이 합하는지 합하지 않는지, 평등한지 평등하지 않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법이 합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또한 법이 평등한 것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
과 상응하는 것이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또한 나는 마땅히 법성(法性)을 빨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든가, 깨달음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성이란 깨달음에 이르름이 없음이 이 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사리불이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법과 법성이 구별된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합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또한 법성은 약간 차별을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이 일체에 모두 합하는 것이다. 법성에서 법이 나타난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나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법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합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성은 공과 합하지 않으며, 공도 또한 법성과 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합하는 것이다. 6정(情)∙18성(性)도 또한 공과 합하지 않으며, 또한 공도 6정∙18성과 합하지 않는다. 법성도 공과 합하지 않으며, 공도 또한 법성과 합하지 않는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공과 합하는 것을 제일이라고 한다. 공을 행하는 보살은 성문∙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가르치고 속히
성불에 이르게 된다. 사리불이여, 모든 존재하는 상응 중에서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 존귀하며 제일의 상응이니, 그 이상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공∙무상∙무원∙무상정진(無上正眞)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행하면 이 보살은 이미 수기[莂]를 받았고 도량에 근접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행하면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만큼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두텁게 할 수 있다. 보살은 또한 ‘나는 반야바라밀과 상응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마땅히 나에게 수기를 내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수기를 받아서오래지 않아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나는 마땅히 성불해서 법륜을 굴리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법성과 일체는 분별[別]이 없으며 또한 법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며,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바가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위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인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처음부터 중생상(衆生想)이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한 중생상이 멸하는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들이 처음부터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 문이다. 모든 중생들이 생(生)하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오히려 어떻게 생멸이 있음을 보겠는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는가?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기 위해서이다. 중생상을 일으키지 않으며, 중생상이 공한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중생행(衆生行)도 보지 않으며, 중생행이 다른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 이것이 보살이 제일의 공[第一空]을 행하는 것이며, 보살이 이 가운데 머무는 것은 모두 집합하기 위함이며 대중은 모아서 그 가운데에 머문다. 보살이 이와 같이 머무는 것은 대자대비에 처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질투하고 자만하는 뜻이 없으며, 어지럽고 게으른 뜻이 없으며, 성내어 분한 뜻이 없으며, 악한 뜻을 일으키지 않으며, 악한 지혜의 뜻을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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