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썸, 그 명랑한 서정
박 진 희
이옥순 작가가 세 번째 수필집 『그린썸』(수필과 비평사, 2021.)을 상재했다. 2010년 『단감과 떫은 감』, 2013년 『홍차가 우려지는 동안』 이후 8년 만에 출간하는 작품집이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오래 기다렸던 작품집이라 그런가, 그 간극은 훨씬 큰 것같이 느껴진다. 과연 시간은 거저 흐르는 것이 아닌가 보다. 간극이 컸던 만큼 작품의 의미는 깊고 넓어졌으며 그것을 구현하는 형식은 세련되어졌다. 이러한 양상은 작가의 자연에 동화된 삶과 폭넓은 독서에 힘입은 바 큰 것으로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그린썸』의 가장 큰 특장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한 편 읽으면 결국 끝까지 다 읽게 될 만큼 흡인력이 좋다. ‘재미’라는 것은 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읽히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발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실컷 키워놨더니」라는 작품을 보자. 다짜고짜 “초밥집에서다.”로 시작한다. 한 문장, 여섯 글자, 무언가 늘어질 틈이 없다. 중간에서 뚝 자르고 들어오는 듯한 첫 문장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실컷 키워놓은’ 자식에게 핀잔 들은 이야기를 쓰고 있다. 초밥집에서 마스크를 벗고 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작가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말하러 온 사람 같았다.”라며 표나게 못마땅해한다. 그런 작가에게 ‘아이’는 그런 식이면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끝에 나온 작가의 말이 “실컷 키워놨더니.”이다. 상황이 그려지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사실 이런 상황에선 어느 쪽의 말이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확히 ‘아이’의 눈에 부끄러운 어른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상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그날도 둘이 밥상머리에 앉아 남편 친구 흉을 보고 있었다. 아이가 지나가면서 저도 엄마 · 아빠처럼 어른이 되면 남 흉보는 사람이 되면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게 처음이었으면 그런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밥상에 같이 앉으려고 왔다가 또 뻔한 레퍼토리가 펼쳐지고 있으니 한마디 했을 것이다.”
작가는 “이게 아닌데 싶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상황 끝에 곁들이고 있는 작가의 적나라한 심정 표출이 웃음을 유발한다. ‘초밥집’ 에피소드보다 더 극적인 까닭에, 조금 더 큰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읽다가 박장대소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친구는 참 이상하다.”라며 ‘남편 친구’의 흉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이게 아닌데 싶었다.” 다음에는 그 ‘아닌 것’에 대한 성찰이 뒤따르는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 ‘아닌데 싶었던’ 행위를, 독자를 대상으로 능청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옥순 작가의 글은 이런 식이다. 이러니 읽다가 멈추기가 쉽겠는가. 간결하고 명랑한 문체,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인한 긴장감,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듯한 현장감, 무엇보다도 기발한 아이러니와 유머는 그의 글을 역동적이면서도 매력적이게 만든다.
「장미와 낙지」라는 작품도 이러한 특징적 단면들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수작 중 하나다. 이 글에서 ‘장미’와 ‘낙지’는 각각 ‘남편’과 ‘그녀’를 표상하는 상관물이다. 일반적으로 ‘장미’와 아내가, ‘낙지’와 남편이 연결될 것 같지만 그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는 것이 이옥순 작가의 특징이다. “그녀는 행복하다. 이만하면 됐다. 점잖은 그녀의 남편은 묻는 말 열 중 여덟아홉은 그녀가 원하는 쪽 대답을 한다. 어쩌다 살짝 마음에 걸리는 한두 가지도 그녀의 위트 넘치는 말솜씨로 얼마든지 돌려놓을 수 있다.” 이 글은 이렇게 현재에서 시작한다. 짧은 네 문장으로 남편과 ‘그녀’의 성격, 함께 하는 일상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행복과 ‘이만하면 됐다’ 싶은 평안한 일상이 처음부터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부부간의 심각한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매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장미’와 ‘낙지’였던 것이다. 이 글은 이질적인 소재를 병치하여 조화라는 의미를 환기하게 한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소재를 다루는 감각과 언어를 운위하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옥순 작가의 글이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재미와 감각에 감탄하게도 되고 또 전해지는 의미에 감동하게 되는 글이 이옥순 작가의 글이다. 의미는 주로 자연에 대한 관찰과 동화를 통해 체득되고 전해진다. 수필집의 표제가 ‘그린썸(Green thumb)’이라는 것에서도 작가의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간취할 수 있다. ‘그린썸’이란 직역하면 ‘초록 엄지손가락’인데 정원을 가꾸는 사람, 나아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표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작가의 글은 다양한 풀과 꽃을 대하면서 그리고 정원을 가꾸는 과정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작가에게 자연은 그저 관찰하고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모든 감각을 통해 교호하는 대상이다. 작가의 글에 배어있는 농밀한 서정은 이러한 대상과의 사귐, 직핍한 체험에서 연원한다.
준 것보다 많이 받은 것 같고, 준 것도 없이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고마웠다. 봄이라는 계절이 그렇다. 앞에 찍은 점처럼 작은 씨앗을 한 포기상추로 자라게 하는 힘을 가졌다.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허전할 때 우리는 언제든지 봄을 소환할 수 있다. 사소한 것에까지 스미어 결국 사소하지 않은 세상으로 만들어 놓는 신비스러운 봄. 그걸 겸손하게 바라보는 눈, 그게 봄이다.
- 「봄을 소환하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싫어한다고 죽을 때까지 싫어할 것이라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우연한 기회에 강아지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 강아지를 기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아지보호단체의 리더가 되어 있을 확률도 없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보편적 사랑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저 풀 한 포기를 관심 있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 사랑도 결국 온 우주로 확대될 수도 있는 것이다.
- 「풀 한 포기와 우주」
자연을 통해 작가가 통찰한 것은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결국에는 온 우주를 이룬다는 것”(「삽화 몇 컷」)이다. 그의 글은 “사소한 것에까지 스미어 결국 사소하지 않은 세상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신비스러운 봄”뿐만이 아님을, “보편적인 사랑을 지닌 사람”인 ‘우리’ 또한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생각게 한다. 우리의 일생 또한 소소한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상기하게 하고, 이 사소한 일상이 아름다운 문학이 되는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게 한다.
사실 자연을 소재로 한 글과 작품집은 너무나 많다. 핸드폰에 꽃 사진이 많으면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연륜이 쌓이면 자연의 섭리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고 그것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주요 모티프가 자연이라는 사실은 그리 특징적인 게 못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의미화와 그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재미와 감동을 모두 담보하고 있는 『그린썸』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집 한 권을 읽으면 그 중 눈에 띄는 작품이 몇 편 있게 마련이다. 고만고만한 작품들 속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작품들이라고 할까.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달리 선택되는 경우도 있고 다수의 동의로 확인되는 수작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린썸』에서는 그러한 작품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기복 없이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터인데,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그린썸』에 수록된 모든 작품은, 각각 독립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이사이 스며있는 사진과 어울려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다양한 나무와 꽃, 풀, 돌, 물이 모여 하늘과 더불어 정원을 이루듯 말이다. 결국 이 세상이란 온갖 다르면서도 고유한 존재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린썸』은 명랑하면서도 따듯하게 일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