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너머 산에서 종소리 들려오니 隔林遙聽出山鍾
푸른 봉우리에 절간이 있겠구나 知有蓮坊在翠峯
나무는 빽빽하여 집 비추는 달빛 가리고 樹密影遮當戶月
골짜기는 비어 문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에 답하네 谷虛聲答打門筇
물은 흰 비단 깐 듯 돌 위에 흐르고 水鋪白練流全石
무지개는 푸른 비단을 고송에 걸었네 虹曳靑羅掛古松
늙은이 며칠 머뭄을 괴이타 마라
莫怪老人留數日
그 옛날 보조가 유적을 보이네
當年普照示遺蹤
한 노승이 절을 찾아 먼 길을 왔다. 산 너머 숲에서 종소리 들려오니 저 산 봉우리 어디엔가 절간이 있을 것이다. 숲속 길을 오르는데 해는 이미 저물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이윽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달빛에 절집이 드러난다. 지팡이로 문을 두드리니 그 소리가 빈 골짜기에 울린다.
고려 때 인각 대사가 적천사를 찾아오면서 지은 이 시를 떠 올리면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적천사를 찾았다. 인각 대사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이다. 적천사 입구인 원리에서 차를 내려 걷는다.
옅은 구름 속에서 비치는 만추의 햇살이 다사롭다. 저 멀리 투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남산의 수려한 등성이가 두렷이 드러나고, 그 산등성이와 이어진 봉우리마다 가을이 듬뿍 물들어 있다. 절로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은 가을빛으로 빚은 듯 청량하고, 길섶에서 우는 벌레 소리는 계곡물을 닮아 청아하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오자 나뭇잎이 떨어져 길 위에 구른다. 잔물결처럼 다가오는 햇살이며 가을빛에 젖은 단풍잎, 그리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이 모두가 공모하여 가을을 구가하고 있다. 일연 스님은 어디 쯤에서 종소리를 들었을까?
한참을 걸어서 소나무 숲을 지나니 천년의 은행나무와 절 지붕이 보인다. 적천사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창건을 하고, 고려 때 보조국사가 중창하여 오백 대중이 상주하는 큰 가람으로 거듭났다.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수령 약 800년의 은행나무는 이미 잎이 많이 떨어졌다. 가끔 적천사를 찾는 까닭도 무엇보다 이 은행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힘차게 뻗어 올라간 줄기며 수 백년의 연륜을 말해주는 유주에는 신비한 기운이 스려있다.
은행나무 앞에 축조한 오래된 비문을 지금에서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비문을 읽어내려 하였으나, 마모된 부분이 많아서 판독이 잘 되지 않아 개략적이나마 번역해 보았다.
적천사는 보조국사의 도량이다. 보조국사가 송나라 경원 년중에 이절을 중창하고, 문자를 쓰지 않고 표지를 남기고자 이 나무를 심어 가히 더불어 천만세에 남기려 하였다. 세존의 보리수가 성도한 도량을 가리키 듯이 이 유적 또한 그러하며, 달마의 불립문자와도 같다. 광주에서 온 도인 혜철이 이 나무를 보고 보조가 직접 손으로 심은 것이라고 하여 모든 사중들에게 알려서 돌과 흙을 쌓았으며, 작은 게송을 지어 모두가 도인의 정성에 감읍하였다.
비문에 이르되 당당한 국사요 성스러운 사자는 연수의 법을 이어 받았으며, 도를 떨쳐 중국과 변방의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굽히므로 천자께서 마침내 불일법해를 중흥하고 절을 창달함에 걸림이 없다고 칭하였다. 또한 이 나무를 심어 표를 하고 천년의 기이함이 되기를 염원했다. 승려 혜철이 거듭 우러르고 참다운 자비로써 흙과 돌로 밑둥치를 둥글게 쌓고나서 부르니 그 말에 응하여 보리수에서 피리소리가 흘러 나오고 하늘을 덮는 수많은 보배가 드리워지는 상서가 나타나서 이 작은 비를 세운다.
강희 33년 갑술 윤5월 방장산 태허도인 경일 찬
보조국사가 송나라 경원 년중에 적천사를 중창하고 불립문자의 의미로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으로서, 강희33년(1694년) 방장산 태허 도인 경일이 쓴 비문이다. 방장산은 도교의 3신산 중 하나로서 화악산을 일컬으며, 이로 미루어 도교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문 실력이 짧은 데다 비문 중에 일부 글자는 알아볼 수 없어서 정확한 번역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용 중 일부는 생략하였으며 약간의 오역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적천사 중창 시기와 관련하여 은행나무 안내판을 비롯하여 절 안내판에는 고려 명종 5년(1175년)이라고 되어있다. 고려 명종 5년은 보조국사가 17세 되던 해로 국사가 승과에 급제(1182년)하기 이전이므로 이때 중창을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비문에 송나라 경원(1195~1200) 년중에 중창하였다고 적시되어 있으므로, 중창 시기를 명종 25년(1195년) 이후로 수정해야 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나무를 지나서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으로 들어간다. 학교 다니면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을 때 눈을 부릅 뜬 저 사천왕상을 두려워했던 기억이 있다. 사천왕은 욕계 6천중 제일 아래에 있는 사왕천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천왕문을 들어서면 인간세계를 벗어나 천상으로 들어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천왕문을 거쳐 무차루(無遮樓) 밑으로 난 통로를 지난다. 이 통로는 무차루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낮고 이어지는 계단이 가팔라서 저절로 고개와 허리를 숙이게 된다. 이는 전각의 이름처럼 오는 사람 막지 않되 지나가는 누구나 구분 없이 고개를 숙여 하심(下心)하고, 아만(我慢)을 조복(調伏)시키라는 가르침 일 것이다.
무차루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옆에 명부전과 적묵당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3칸의 맞배지붕에 다포양식인 대웅전은 지붕이 건물에 비해 작고 처마도 짧은 편이어서 허세가 없고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근래에 새로 입힌 듯 깔끔한 단청에 가을 오후의 잔잔한 햇살을 받아 단아해 보인다. 뜰에 서 있는 당간지주는 오랜 세월 풍상에 군데군데 조금씩 깎여 나갔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 천하에 부처님 같은 이 없으며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 또한 비할 자 없어라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어도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 같으신 분 전혀 없어라
대웅전 기둥에 부처를 찬탄하는 주련이 걸려 있다. 일찍이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했으니, 이 게송의 부처를 우리들 속에 있는 진여자성으로 바꿔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절을 에워싸고 있는 산의 단풍이 고와서 눈길을 빼앗는다. 멀리 화악산에서 시작하여 철마산과 남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에도 추색이 깊게 물들어 있다. 절마당에 만추의 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적묵당 툇마루에는 한 보살이 눈을 감고 앉아서 무언가를 나지막하게 염송하고 있다. 듬성듬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는 햇살과 뒹구는 낙엽의 조화가 스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면서 텅 빈 절이 적묵에 잠긴다.
일연 스님은 충렬왕의 국사로 책봉되었다가 79세에 물러나면서 군위 인각사로 내려왔으니, 인각사에 주석하던 중에 이 절을 찾았던 것 같다. 스님은 이곳에 와서 며칠을 머물면서 비단같이 흐르는 계곡 물과 무지개가 걸린 노송이 빗어내는 장관에 감탄하고, 추앙해 마지않는 보조국사의 유적도 보았다. 무차루에 걸려 있는 일연 스님의 시가 그때의 심정을 나타낸 것인가?
경치에 휘잡혔다가 차분히 붓 들어
건곤에 휘둘러서 멍한 눈동자 쫓아낸다
홍진이 끊기니 마음은 물 같고
흰 머리 낮추어 둘러보니 기상은 추상같다
독수리는 뒤에 있고 산은 높아 만 리에 바람 불고
학은 옆에 있어 구름 걷히니 천추에 달이 비친다
팔백 년의 은행잎이 하나 둘 떨어져 쌓인다. 푸르던 잎을 황금빛으로 장엄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몸을 가벼이 하려는 것이리라. 떨어지는 저 묵언의 은행잎이 그 옛날 보조국사께서 전하고자 했던 불립문자인가!
첫댓글 랭보의 별명은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였다는데 교육부장님께도 어울리겠어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바람 구두는 아니어도 바람 곰신 정도는 될 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