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醉)하다
최잠숙
산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틈나는 대로 산을 찾는다. 딱히 어느 산을 어떻게 가야겠다는 목표나 계획도 없이 쉬는 날이 같을 때는 산을 찾곤 한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축복이다.
평야 지대가 많았던 고향과 달리 청주는 주변에 산이 많았다. 처음 청주로 이사 온 몇 해 동안은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이곳 청주에서의 생활이 숨이 막힐 듯 답답해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틈만 나면 산을 찾았다. 그날도 그랬다.
아침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오늘 계획 있어?” “아니, 있다가 점심 먹고 음악실이나 가야지 뭐.” “그럼, 산에 가자.” 그렇게 시작되어 나선 길이었다.
보온병에 커피를 담고, 찐계란과 좋아하는 과일 몇 가지로 도시락을 만들어 무작정 나섰다. 습관처럼 나의 애마는 상대리를 지나고 피반령을 넘었다. 회인을 막 벗어나려는 갈림길에서였다. 무작정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호점산성』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가보자, 오늘은 여기다. 그렇게 시작된 호점산성과의 만남이었다. 산성 입구의 안내문을 읽어 보았다. 최영 장군 시대에 돌로 쌓은 산성이며, 전투를 한 이력은 없다고 적혀 있었다. 오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을 대하기에 앞서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산성 초입부터 우거진 풀숲은 야생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천연(天然)의 멋이 살아 숨 쉬는 곳, 이곳에 산 열매들이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풀꽃들,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에 쿵쾅대는 심장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나아갔다. 풀숲이 끝나자 가파른 돌길이 이어졌다. 길들여지지 않은 산길을 네발로 기어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도 도무지 성(城)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질 즈음 평지가 나타났다. 노랗게 익은 잔디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가지고 온 커피를 마셨다. 상큼한 가을바람 한 움큼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갔다.
평지 끝머리, 숲으로 향해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성(城)이라더니 도대체 성의 흔적이 보이지를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 사그라들었나 하는 염려가 스멀스멀 기어 나올 무렵 저만치 희끄무레한 벽같은 것이 보였다. 피곤함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 가보니, 납작한 돌들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성벽이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켜켜이 쌓여 견고한 벽을 만들고 있었다. 길게 이어져 내려가는 성벽을 따라 걸었다. 이 깊은 산속에, 이 많은 돌들을 어떻게 옮겨 석축을 쌓았을까? 돌 하나에 내 나라를, 돌 하나에 내 마을을, 돌 하나에 내 가족을 생각하며 쌓아 올렸을 선조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날을 기억하며 오백 년이 넘는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 왔을 성벽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긴 세월을 말없이 지켜 온 천연(天然)의 석축, 난 호점산성의 매력에 흠뻑 취해 버렸다. 아니, 헤어날 수가 없었다.
넋을 잃고 성벽을 쳐다보고, 어루만지는 사이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산은 내게 그만 내려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내려오는 내내 달뜬 가슴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수없이 돌아보며 되뇌였다. 내가 너에게 취해 버렸어. 헤어나기가 힘들어. 또 올 거야. 난 너를 오래오래 사랑할거야 라고.
산길을 내려와 기다리는 애마 옆에 다다르니 어둠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어둠을 타고 시장기도 몰려온다.
첫댓글 '돌 하나에 내 나라를, 돌 하나에 내 마을을, 돌 하나에 내 가족을 생각하며 쌓아 올렸을 선조들의 숨결...'
읽는 이까지 그런 마음으로 돌을 쌓는 심정이 되어버리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 장군을 연상하며 고려시대까지 산책하시는 작가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호점이라면 호랑이가 나올 법한 고개, 호점산성에 가 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호점산성, 나중에 저도 찾아가봐야겠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