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需 雲 雜 方(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은 탁청공 김유(1481-1552)공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상하권 두권에 술 담는 법을 비롯하여 108가지 음식 만드는 법을 기록해 놓고 있어 500년전 안동 사림계층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로 알려진 허균의 『도문대작』(1611)보다 100여년 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전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의 전통 요리법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책 제목에서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한다.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게 하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라고 있다. 또한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그러니까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 걸맞은 요리 만드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동안 이 책은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왔다. 전편이 한문으로 되어 있고 다른 사본, 곧 이본(異本)이 발견된 예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소장처는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 종가인 설월당(雪月堂)이다. {수운잡방}은 이 종가에서 오백 년 가까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왔다.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와서 안동대학교의 윤숙경 교수에 의해 비로소 조사보고서가 이루어졌다.
▶책의 체제, 보존상태
{수운잡방}은 표지와 내표지 등을 합쳐서 모두 25장으로 되어있다. 서문과 발문은 나타나지 않으며 본문 한 행은 20자 정도로 되어 있다. 글씨는 해서가 드물게 보이는 행서체, 초서체 혼용으로 나타난다. 각장의 행수는 15행 안팎으로 되어 있고 그 지본은 우리가 흔히 닥지라고 말하는 한지(韓紙)다.
오랜 세월을 간직해 온 책이기 때문에 {수운잡방}의 각장 지본은 상당히 바래어 있다. 그러나 보관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본문 중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을 정도다. 다만 모필로 쓰는 과정에서 간간히 잘못 쓴 글자나 활자가 난 경우에는 옆에 지우고 고쳐 쓰거나 삽자로 표시해서 바로 잡았다. 또한 장이 넘어가면 행서보다 초서가 더 많이 나온다. 특히 이 책 33항째부터는 글자에 기운이 떨어져 보이고 초서가 눈에 뜨이게 많이 나온다. 31항과 33항 사이에 한 장의 공백면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윤숙경 교수는 이와 함께 전편에서 누룩이 국(麴), 국( )으로 쓰여 있는데 후편에서 국(麴)과 곡(曲)으로 바뀌었음에 주목했다. 그리하여『수운잡방』의 전편과 후편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수운잡방}은 두사람이 쓴 책인가?
지금『수운잡방』의 원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제 1부는 삼해주(三亥酒)로 시작해서 윤숙경 교수가 42의 번호를 붙인 <우벽향주(又碧香酒)>까지다. 이 항목은 본문 열 다섯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한 행만으로 끝나며 그 다음 16장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아도 여기까지는 한 건의 예외도 없이 술 만드는 법이다. 그런데 그 다음 항목인 43번째는 <작고리법(作高里法)>이며 이어 식초를 만드는 법이 나온다. 이 부분은 윤숙경 교수의 정리 번호에 따르면 86번째 항까지 계속된다. 그리고는 한 장의 공백이 있고 그 다음이 <삼오주(三午酒)>로 시작하는 87번째 항목이다. 이 부분은 121번째 항목인 <다식법(茶食法)>으로 끝난다.
이렇게 나누어 보아도 1, 2부와 3부 사이에 용어, 어법, 기술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차이가 생기는 점은 없다. <曲>자와 <麴>자의 차이는 일종의 약자 사용 사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2부를 합해서 일컬을 수 있는 전편과 후편의 서체문제에는 재해석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초서인가 아닌가는 저자 2인설의 논거로서는 약하다. 실제 우리가 필기를 할 때도 처음에는 갖은 자를 쓰다가 그 뒤에 흘림체를 쓰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에는 움직일 수 없는 외적 증거도 나타난다. {수운잡방} 표지를 넘기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의 다섯자가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탁청공>이란 당호는 <濯淸亭>으로 한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인 탁청정파의 김유(金 )공이다. 설월당은 바로 이 분의 셋째 아드님이였다. 그랬다면 이 책에 <탁청공유묵>이라고 쓸 사람은 바로 이 집의 후예 가운데 누구였을 것이다. 봉건시대의 예속(禮俗)을 생명으로 생각하는 유가에서는 조선(祖先)이 성체(聖 )이며 바로 신격(神格)이기도 하다. 그런 윤리관 아래서는 조상의 저작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을 삽입시키고 그 앞에 버젓이 누구의 것이라고 쓰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다. ▶가장 오래된 요리서의 배경설화들
{수운잡방}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요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허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손꼽아왔다. 허균은 선조 2년(1569)에 나서 광해군 10년인 1618년 역모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도문대작}은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의 한 부분이다. 허균은 이 문집을 처형되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여 오늘 우리에게 끼칠 수 있게 했다. 그에 따르면 {도문대작}의 완성연도가 1611년으로 나타난다.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저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앞에서 이미 드러난 봐와 같이 {수운잡방}의 저자는 탁청정 김유 공이다. 이분은 성종 22년(1481)에 태어났다. 그가 {수운잡방}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 이후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내당의 일들을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서거한 것은 명종 7년인 1552년이다. 옛사람들의 통례에 따르면 60세가 넘은 다음에는 선비가 새 일을 시작하거나 저작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이 50대에 완성했을 공산이 크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7, 80년 정도 앞서 저작된 요리서임이 확실하다.
▶저자 김유 공
김유 공이 {수운잡방}과 같은 규방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는 그 바닥에 좀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 시조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 형님이 되는 분이 운암 김연(雲巖 金緣)공이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영민하여 곧 벼슬길에 올랐고 옥당을 산 다음 외직에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행동의 방향을 도의 정치의 실현으로 잡고 일세의 명유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 )과 의기 투합했다. 마침 고개를 쳐든 신진사류들에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면서 훈구파 보수세력인 김안로(金安老) 등과 첨예하게 맞섰다.
아우님으로서 김유공은 이런 김연공의 정치활동에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중앙에 진출하는 것은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제가 다 벼슬길에 올라 고향을 멀리하면 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일을 보살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공은 향토를 지키기로 하고 어버이를 섬기며 봉제사 접빈객 등 집안일 보살피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기초식품의식, 김치 담그는 법, 연 기르는 법
향리를 지키면서 김유공은 효양과 풍류를 축으로 살았다. 그 여가에 만든 것이 {수운잡방}이다. 이제 {수운잡방}을 보면 여러 가지 김치와 채소절이를 만드는 방법이 열거되어있다(윤숙경, <수운잡방에 대한 소고>, {안동문화}7집 참고). 그 기술적인 문제 역시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한 데까지 끼쳐 있다. 참고로 <토란대로 김치 담는 법>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토란 줄기 가늘게 썬 것 한 말에 소금을 가볍게 한 웅큼씩을 뿌린 다음 독에 담고 매일 손으로 눌러 점차 작아지거든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한다(芋莖細 一斗鹽小一握式和合納甕 每日以手壓之則漸小 入他器者移納以熟爲限). {수운잡방}의 이런 면을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과 대비시켜 보면 그 특징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장씨부인의 이 요리서에서 김치 담그는 법은 <산갓침채> 한가지뿐이다.
{규호시의방}은 {수운잡방}과 110-20년 정도의 상거밖에 나지 않는 연대에 쓰인 책이다. 또한 문화배경이 같은 지역에서 저작된 책이어서 그때에 일반 식사에 쓰인 김치가 이것만이었을 리는 없다. 이것은 {규호시의방}이 주방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것들을 골라 적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당시의 여러 김치 담그는 법을 고루 채록하고 있다. 그 기술적 지침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실무 지침서로서가 아니라 문화사적 안목에서 작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수운잡방}이 단순한 주방용 지침서로 작성된 것이 아님은 그 항목에 과일 저장법, 작물재배법이 포함된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 제 2부에는 오이심기와 함께 생강 심기, 머위 심기, 참외 심기, 연근 심기 등 작물의 재배법이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 <종연(種蓮)>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뿌리를 채취하여 흙을 다져 붙여서 돌에 얹어 연못 안에 드문드문 놓아둔다. 종근이 좋으면 다음 해에 꽃이 핀다(採蓮根與土 交雜盛石池中然 若種實明年開花). ▶선비문화의 산물, 소정과욕(小情寡欲)의 세계
{수운잡방}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따라서 그 저작 동기를 직접적 발언을 통해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표지 다음 면에 지은 분의 생활철학 일단을 파악할 수 있는 말이 적혀 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욕심을 함부로 부리지 말며 성색을 주리고 쾌락에 빠지지 말라. 바깥출입을 삼가야 할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바람 사나운 날, 큰 비 내리는 날, 더위가 기승인 날, 추위가 매서운 날이다(少情寡欲 節聲色薄慈味 時有四不出 大風大雨大暑大寒也)>. 이런 말의 전반부는 유학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중용에는 천하의 큰 이치가 <중화(中和)>에 있다고 전제했다. 그 <중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희노애락 등 감정과 식욕, 육욕, 재물욕 등 갖가지 욕심이 절제되어야 한다. 또한 {대학(大學)}을 보면 참 선비가 지향할 마음 바탕을 밝혀놓은 부분이 있다. 그에 따르면 선비는 사물의 근본을 터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를 위해서 선비는 눈앞에 드러나는 차원을 넘어 사물의 근본에 철해야 할 것이라는 구절도 있다.
▶고리(高里)만드는 법
{수운잡방}에는 식초를 만드는 법도 적지 않게 나온다. {규호시의방}에는 식초 항으로 2개가 나올 뿐이다. 이것은 김치의 경우와 함께 {수운잡방}이 밑반찬, 또는 기초식품 만들기에 기울인 관심의 농도가 매우 짙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식초의 기초단위를 인식하고 그것을 만들게 기록한 점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식초는 통상 식품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서 쓴다. 그러나 8·15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 집에서 만들어 썼다. 그 무렵에는 묽은 술을 뜨게 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전단계가 되면 식초를 만들기 위해 <가시>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가시>란 일종의 발효세균이다. 일제말기까지 우리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작은 항아리들에 일찍부터 전해 내려오는 식초용 <가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식초가 필요하면 술을 쉬게 한 다음 거기에 <가시>를 넣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초용 효소, 곧 <가시>는 어떻게 만들어 쓴 것인가. 이에 대한 기록은 {규호시의방}의 경우 미분화 상태로 나타난다. 이 책에는 <가시>에 물을 부으면 식초가 된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독립된 단위로 식초용 효소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그것이 독립된 항목으로 기술되어 있다.
작고리법(作高里法) 오천가법(烏川家法) 7, 8월에 알맞은 양의 밀을 깨끗이 씻어서 익힌다.…… 붉나무 잎, 닥나무 잎, 삼잎을 깔고 초석을 깐 다음 그 위에 찐 밀을 펴고 또한 그 위에 앞의 나뭇잎들을 두껍게 덮는다. 열흘이 지나면 꺼내어 햇볕에 말린 다음 키질을 하여 저장하여 둔다. 때에 맞추어 많이 만들어 저장할 것이다(七八月眞麥 任意多少淨洗熟蒸……千金木葉楮葉麻葉次鋪草席上 席上鋪蒸麥厚覆前件木葉 過十日後出曝乾 揚置 趨時多作藏之). 이것으로 우리는 {수운잡방}을 지은이가 적어도 식초의 촉매제인 효소를 그 나름대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이 그 다음 부분이다. 이 <작고리법> 다음 자리에는 그 역시 독립된 항목으로 <조고리초법(造高里醋法)>이 적혀 있다. 여기에 비로소 어떤 그릇에 물을 얼만큼씩 부은 다음 <고리> 얼마를 섞으라는 기술이 나온다. 이것은 뚜렷하게 식초효소를 만드는 법을 의식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위의 두 항목 아래에는 <오천가법(烏川家法)>이라는 부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무렵에도 이미 일반 가정에서는 식초를 만들 때 가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수운잡방}의 지은이의 집에서는 <고리> 제조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직접 주방에 섰을 리가 없는 김유공이 그것을 문장화해서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사물을 말하되 그 지엽말단인 표현형태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근본, 기초를 살피고 있음을 뜻한다. ▶보양, 건강을 위한 음식만들기
{수운잡방}에는 유식이 건강, 보양의 차원에서 생각된 단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단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백자주(栢子酒)>항이다. <백자주>는 잣을 장만한 다음 멥쌀과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익힌 후에 끓인 물을 섞어 술밑을 만든다. 그것을 식힌 다음 누룩가루를 독에 넣고 익히면 잣술, 곧 <백자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항목의 제목 아래에는 이 술의 효능으로 <신중과 방광이 냉한 것을 다스리고 두풍과 백사, 귀매들린 것을 없앤다(治腎中冷膀胱冷 去頭風百邪鬼魅).>라고 적혀있다.
▶포도주 빚는 법
{수운잡방}의 술 빚는 자리에는 포도주를 빚는 또하나의 방법이 적혀있다. <포도를 짓이겨 놓은 다음 찹쌀 다섯 되로 죽을 섞어 독에 담아 두고 맑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쓴다(蒲萄破碎用 米五升作粥待冷 末五合入甕待用之可).> 이것은 서구식인 포도주 빚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다. 개항 후에 들어온 서구식 포도주 양조 방식에는 쌀을 익혀서 쓰는 방법이 없다. 또한 누룩을 효모로 하는 일도 드물다. 이제까지 우리는 포도주가 개항 후에 수입된 서구문화의 산물로만 알아왔다. 그런데 『수운잡방』의 한 한목으로 그런 생각이 지레짐작의 결과임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유 만드는 법과 즙장, 우유는 전통음식의 한가지였다
위의 경우와 비슷한 문화사적 정보가 <타락(駝駱)>과 <즙장(汁醬)>의 항에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즙장>이란 경상도에서 집장이라고 한다. 그 중요재료는 밀과 메주 고운 고추가루 등이다. 찰밥을 이들과 버무린 다음 무, 가지, 풋고추 또는 다시마, 소살코기 잘게 썬 것들을 소금에 저린 다음 장아찌로 박는다. 그것을 항아리에 담아 잘 봉하고 풀두엄에 묻는다. 8, 9일 지나면 두엄이 썩는 열로 익혀서 먹는 장이다.
이 장은 경상북도의 일부 대가 집에서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흔하게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그후에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는데 {수운잡방}에는 바로 이 집장만들기가 <조즙(造汁)>의 항목으로 나온다. 이와는 다른 항목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우유에 관한 것이다. 즙장과 달라서 우리 전통음식에서 우유를 다룬 예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겨레는 본래 북방에서 남하한 기마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문화배경으로 미루어보면 말과 밀착된 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에 곁들여 말젖을 먹었을 공산이 크다. 구비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주몽이 말젖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유 먹는 전통은 고려를 거쳐 이조의 중기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그러니까 영남지방의 한 사가에 지나지 않은 탁청정의 주인이 그것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수운잡방}에 나오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 먼저 그것은 송아지로 하여금 암소의 젖을 빨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유가 끓어서 익게 되거든 오지 항아리에 담고 본타락 작은 잔 한잔을 섞어서 따뜻한 곳에 놓은 다음 두껍게 덮어둔다. 밤중에 나무 막대로 찔러 보아서 누런 물이 솟아오르면 그 그릇을 시원한 곳에 둔다. 본타락이 없으면 탁주 한 중바리를 넣어도 좋다.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식초를 조금 같이 넣으면 더욱 좋다(若駝駱卽沸 盛沙缸納本駝駱一小盞和之 置溫處厚 至夜半以木揷之 黃水湧出卽置其器於凉處 若無本駝駱則好濁酒一中中鍾亦可 本駝駱入時好醋少許幷入甚良). 여기서 <타락>이 우유인 것은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보면 명백해진다. 즉 그 책의 <타락>항에 <소젖을 타락이라고 한다(牛酪曰駝酪)>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가축의 젖을 뜻하는 우유의 고어 형태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타락>에서 락(駝)는 낙타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수운잡방}이 비장된 사유
한 마디로 말해서 {수운잡방}은 문화사적 의의가 적지 않은 책이다. 특히 요리방법의 기록으로서 이 책은 독특한 음식철학을 거느리고 쓴 저작인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에 담긴 지식, 정보의 양도 상당한 경우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나면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이런 {수운잡방}이 그 동안 전혀 공개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수운잡방}에 담긴 기록 내용이다. 이제 살핀 바와 같이 이 책은 사림계층이 정계, 본령으로 생각하는 경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잡저 중의 잡저에 속하는 것이 이 책이다. 이런 이 책의 성격, 내용이 그것을 수장만 하고 공개하지 않는 빌미로 작용했다. 이 경우에 생각될 수 있는 {수운잡방} 오백년 비장의 사유는 이렇게 집약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허균의 {도문대작}이 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탁청정 주인이 사림출신이듯 허균 역시 그런 계층의 출신이었다. 전자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음에 반해 그는 조정의 중심에 나간 사림 중의 사림이었다. 그런 그가 문집의 한 부분으로 요리서인 {도문대작}을 넣고 있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잡서이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시각이 터무니없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다음 또 하나의 빌미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수장한 집안의 특수한 사정이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수운잡방}을 수장해온 집은 김유공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이다. 그런데 이 설월당의 종가가 오랫동안 빗장을 지르고 사는 입장이 되었다. 설월당공은 그 아드님으로 계암 김령(溪巖 金玲)공을 두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대과에 급제한 다음에는 승정원에서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조정이 대북과 소북의 갈등, 마찰로 어지러워지자 정치를 단념했다. 그는 향리에 내려가 병을 일컫고는 몇 차례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분은 벼슬길에 오른 다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로 써서 남겼다. 모두 8권으로 된 이 {계암일기(溪巖日記)}에는 당시 정치 행태, 특히 훈구척신들의 비리와 작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김령공은 그가 쓴 이 일기가 일반에게 공개될 경우 후손들에게 미칠 권신들의 박해를 걱정한 것 같다. 그리하여 서거할 때 유언으로 일기를 집밖에 내어놓지 말라고 일렀다. 이것이 곧 {계암일기}, <불가문외반출(不可門外搬出)>의 유훈이다. 그후 설월당의 대를 이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유언을 잘 지켰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계암일기}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비장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본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 {수운잡방}이 반천년을 비장되어 온 것은 이런 {계암일기}에 빌미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것이 다른책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반대 증거로 {계암집}이 발간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김령공은 두문불출을 했음에도 훌륭한 시문과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들을 수집 정리한 {계암집}이 그의 사후에 문집으로 상재되었다.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저작 내용을 정확하게 판별할 능력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설월당에서 계암공의 저작도 아닌 {수운잡방}을 <불가문외반출>의 책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인가.
▶{수운잡방}은 대를 이어 증보될 책이었다.
이제 그 원본을 살펴보면 {수운잡방}이 공개, 간행되지 않은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수운잡방}이 탁청정공의 맏아드님 집이 아니라 설월당에 전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청정공에게는 맏아드님으로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공이었다. 그는 8척 장신에 기개도 있어 무반이 되었다.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동서남북 국토를 두루 누비다시피하고 고을을 살아 그가 거친 곳만도 열 세 고을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상도 병마 절도사에 올랐다. 탁청정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벼슬을 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맏아드님에게 {수운잡방}을 맡겨 그 보완, 정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공은 사정이 그와 달랐다. 이 아드님은 매우 총명했으나 정치에는 뜻이 없어 퇴계선생 문하에서 경학에 전념하는 분이었다. 탁청정공은 이 아드님을 매우 총애했다고 전한다. 그런 사정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몇가지 일을 맡기는 가운데 {수운잡방}이 끼어 들었을 공산이 크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의 단계에서 완성된 저작이 아니다. 그 완성이 설월당공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설월당공도 뒤에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 생전에 {수운잡방}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후 설월당의 후손들은 제가끔 자신의 생활을 꾸리기에 바빴을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수운잡방}은 선조의 유묵으로 소중하게 간직되기만 하고 수정, 보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인 이 책이 반천년을 비공개로 파묻혀온 사연의 대강이다.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수운잡방}은 탑으로 치면 기단과 탑신이 있지만 상층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방치된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한채의 집에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집이 설계되어 기둥 서까래가 올라가고 지붕이 이어져 기와도 덮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이어야 할 마무리 단계, 곧 창호가 들어가고 내장공사를 해야할 단계에서 방치되는 집도 있다. 대비가 가능하다면 {수운잡방}은 요리서로서 그와 같이 미완성으로 오늘에 전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에도 {수운잡방}은 그 문화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책이다. 우선 {수운잡방} 이후에 나왔으면서도 우리나라 전통 요리서로서의 대명사가 된 책이 있다. 그것이 장씨 부인의 {규호시의방}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씨 부인은 선조 31년(1598)생이며 숙종 6년(1680)에 작고했다. {규호시의방}의 끝자리를 보면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라고 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저자가 60을 넘기고 70에 접어든 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규호시의방}의 저작연도는 1660년대 후반, 또는 1670년대 초반이 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수운잡방}의 제작연도를 1530년대 초에서 10년 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규호시의방}보다 약 110∼20년 정도 앞서 이루어진 책이다. {규호시의방}에는 여러 곳에 {수운잡방}과 대비 가능한 부분이 나타난다. 이 책 후반부 술 빚는 법들을 보면 거기에는 <벽향주> 전문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철자는 현행으로 고침).
백미 두말닷되 백세작말하여 더운물 서말로 죽쑤어 차거든 누룩 너되 진말 두되 섞어 넣어 나흘 댓새만에 백미 서말 닷되 백세하여 물에 담가 하루 재여 익게 떠 물 서말에 골라 차거든 누룩 두되 먼저 밑술에 섞어 넣어뒀다가 이칠일 만에 쓰라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벽향주 빚는 법은 특히 <오천양법(烏川釀法)>으로 되어 있는 항목이다. 그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단서를 뺀 상태에서 거의 그대로 적혀 있다. 물론 부분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수운잡방}에는 <백미 세말>로 되어 있는 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두말 닷되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다음이 {수운잡방}에서는 <한동이 더운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후자에서는 <더운 물 서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실제 주방에 선 경험의 있고 없음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도문대작}에 대비시켜 보면 문화사적 의의가 더욱 뚜렷해진다. {도문대작}의 내용은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서울지방에서 계절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들 음식에 대해서는 각각 그 명산지를 소개 기록했다. 가령 방풍죽은 강릉, 석이병은 표훈사, 백산자는 진주, 다식은 안동, 밤다식은 밀양, 차수(叉手: 칼국수)는 여주, 엿은 개성, 웅지정과(熊脂正果)는 준양, 콩죽은 북청이 열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도문대작}은 일종의 미식 기행성향을 지닌 책이다. 그에 반해서 {수운잡방}은 상당히 강하게 뿌리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김치 담는 법과 식초 제조법에 자세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한 마디로 {수운잡방}은 이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요리서다. 그러나 이 요리서는 그 내용과 문화사적 의의로 하여 충분하게 고전의 하나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할 책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전통계승을 게을리할 수 없는 오늘 우리의 의무이며 과제일 것이다
[需 雲 雜 方(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은 탁청공 김유(1481-1552)공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상하권 두권에 술 담는 법을 비롯하여 108가지 음식 만드는 법을 기록해 놓고 있어 500년전 안동 사림계층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로 알려진 허균의 『도문대작』(1611)보다 100여년 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전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의 전통 요리법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책 제목에서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한다.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게 하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라고 있다. 또한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그러니까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 걸맞은 요리 만드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동안 이 책은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왔다. 전편이 한문으로 되어 있고 다른 사본, 곧 이본(異本)이 발견된 예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소장처는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 종가인 설월당(雪月堂)이다. {수운잡방}은 이 종가에서 오백 년 가까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왔다.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와서 안동대학교의 윤숙경 교수에 의해 비로소 조사보고서가 이루어졌다.
▶책의 체제, 보존상태
{수운잡방}은 표지와 내표지 등을 합쳐서 모두 25장으로 되어있다. 서문과 발문은 나타나지 않으며 본문 한 행은 20자 정도로 되어 있다. 글씨는 해서가 드물게 보이는 행서체, 초서체 혼용으로 나타난다. 각장의 행수는 15행 안팎으로 되어 있고 그 지본은 우리가 흔히 닥지라고 말하는 한지(韓紙)다.
오랜 세월을 간직해 온 책이기 때문에 {수운잡방}의 각장 지본은 상당히 바래어 있다. 그러나 보관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본문 중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을 정도다. 다만 모필로 쓰는 과정에서 간간히 잘못 쓴 글자나 활자가 난 경우에는 옆에 지우고 고쳐 쓰거나 삽자로 표시해서 바로 잡았다. 또한 장이 넘어가면 행서보다 초서가 더 많이 나온다. 특히 이 책 33항째부터는 글자에 기운이 떨어져 보이고 초서가 눈에 뜨이게 많이 나온다. 31항과 33항 사이에 한 장의 공백면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윤숙경 교수는 이와 함께 전편에서 누룩이 국(麴), 국( )으로 쓰여 있는데 후편에서 국(麴)과 곡(曲)으로 바뀌었음에 주목했다. 그리하여『수운잡방』의 전편과 후편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수운잡방}은 두사람이 쓴 책인가?
지금『수운잡방』의 원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제 1부는 삼해주(三亥酒)로 시작해서 윤숙경 교수가 42의 번호를 붙인 <우벽향주(又碧香酒)>까지다. 이 항목은 본문 열 다섯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한 행만으로 끝나며 그 다음 16장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아도 여기까지는 한 건의 예외도 없이 술 만드는 법이다. 그런데 그 다음 항목인 43번째는 <작고리법(作高里法)>이며 이어 식초를 만드는 법이 나온다. 이 부분은 윤숙경 교수의 정리 번호에 따르면 86번째 항까지 계속된다. 그리고는 한 장의 공백이 있고 그 다음이 <삼오주(三午酒)>로 시작하는 87번째 항목이다. 이 부분은 121번째 항목인 <다식법(茶食法)>으로 끝난다.
이렇게 나누어 보아도 1, 2부와 3부 사이에 용어, 어법, 기술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차이가 생기는 점은 없다. <曲>자와 <麴>자의 차이는 일종의 약자 사용 사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2부를 합해서 일컬을 수 있는 전편과 후편의 서체문제에는 재해석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초서인가 아닌가는 저자 2인설의 논거로서는 약하다. 실제 우리가 필기를 할 때도 처음에는 갖은 자를 쓰다가 그 뒤에 흘림체를 쓰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에는 움직일 수 없는 외적 증거도 나타난다. {수운잡방} 표지를 넘기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의 다섯자가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탁청공>이란 당호는 <濯淸亭>으로 한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인 탁청정파의 김유(金 )공이다. 설월당은 바로 이 분의 셋째 아드님이였다. 그랬다면 이 책에 <탁청공유묵>이라고 쓸 사람은 바로 이 집의 후예 가운데 누구였을 것이다. 봉건시대의 예속(禮俗)을 생명으로 생각하는 유가에서는 조선(祖先)이 성체(聖 )이며 바로 신격(神格)이기도 하다. 그런 윤리관 아래서는 조상의 저작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을 삽입시키고 그 앞에 버젓이 누구의 것이라고 쓰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다. ▶가장 오래된 요리서의 배경설화들
{수운잡방}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요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허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손꼽아왔다. 허균은 선조 2년(1569)에 나서 광해군 10년인 1618년 역모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도문대작}은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의 한 부분이다. 허균은 이 문집을 처형되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여 오늘 우리에게 끼칠 수 있게 했다. 그에 따르면 {도문대작}의 완성연도가 1611년으로 나타난다.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저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앞에서 이미 드러난 봐와 같이 {수운잡방}의 저자는 탁청정 김유 공이다. 이분은 성종 22년(1481)에 태어났다. 그가 {수운잡방}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 이후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내당의 일들을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서거한 것은 명종 7년인 1552년이다. 옛사람들의 통례에 따르면 60세가 넘은 다음에는 선비가 새 일을 시작하거나 저작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이 50대에 완성했을 공산이 크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7, 80년 정도 앞서 저작된 요리서임이 확실하다.
▶저자 김유 공
김유 공이 {수운잡방}과 같은 규방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는 그 바닥에 좀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 시조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 형님이 되는 분이 운암 김연(雲巖 金緣)공이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영민하여 곧 벼슬길에 올랐고 옥당을 산 다음 외직에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행동의 방향을 도의 정치의 실현으로 잡고 일세의 명유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 )과 의기 투합했다. 마침 고개를 쳐든 신진사류들에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면서 훈구파 보수세력인 김안로(金安老) 등과 첨예하게 맞섰다.
아우님으로서 김유공은 이런 김연공의 정치활동에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중앙에 진출하는 것은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제가 다 벼슬길에 올라 고향을 멀리하면 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일을 보살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공은 향토를 지키기로 하고 어버이를 섬기며 봉제사 접빈객 등 집안일 보살피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기초식품의식, 김치 담그는 법, 연 기르는 법
향리를 지키면서 김유공은 효양과 풍류를 축으로 살았다. 그 여가에 만든 것이 {수운잡방}이다. 이제 {수운잡방}을 보면 여러 가지 김치와 채소절이를 만드는 방법이 열거되어있다(윤숙경, <수운잡방에 대한 소고>, {안동문화}7집 참고). 그 기술적인 문제 역시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한 데까지 끼쳐 있다. 참고로 <토란대로 김치 담는 법>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토란 줄기 가늘게 썬 것 한 말에 소금을 가볍게 한 웅큼씩을 뿌린 다음 독에 담고 매일 손으로 눌러 점차 작아지거든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한다(芋莖細 一斗鹽小一握式和合納甕 每日以手壓之則漸小 入他器者移納以熟爲限). {수운잡방}의 이런 면을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과 대비시켜 보면 그 특징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장씨부인의 이 요리서에서 김치 담그는 법은 <산갓침채> 한가지뿐이다.
{규호시의방}은 {수운잡방}과 110-20년 정도의 상거밖에 나지 않는 연대에 쓰인 책이다. 또한 문화배경이 같은 지역에서 저작된 책이어서 그때에 일반 식사에 쓰인 김치가 이것만이었을 리는 없다. 이것은 {규호시의방}이 주방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것들을 골라 적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당시의 여러 김치 담그는 법을 고루 채록하고 있다. 그 기술적 지침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실무 지침서로서가 아니라 문화사적 안목에서 작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수운잡방}이 단순한 주방용 지침서로 작성된 것이 아님은 그 항목에 과일 저장법, 작물재배법이 포함된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 제 2부에는 오이심기와 함께 생강 심기, 머위 심기, 참외 심기, 연근 심기 등 작물의 재배법이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 <종연(種蓮)>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뿌리를 채취하여 흙을 다져 붙여서 돌에 얹어 연못 안에 드문드문 놓아둔다. 종근이 좋으면 다음 해에 꽃이 핀다(採蓮根與土 交雜盛石池中然 若種實明年開花). ▶선비문화의 산물, 소정과욕(小情寡欲)의 세계
{수운잡방}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따라서 그 저작 동기를 직접적 발언을 통해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표지 다음 면에 지은 분의 생활철학 일단을 파악할 수 있는 말이 적혀 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욕심을 함부로 부리지 말며 성색을 주리고 쾌락에 빠지지 말라. 바깥출입을 삼가야 할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바람 사나운 날, 큰 비 내리는 날, 더위가 기승인 날, 추위가 매서운 날이다(少情寡欲 節聲色薄慈味 時有四不出 大風大雨大暑大寒也)>. 이런 말의 전반부는 유학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중용에는 천하의 큰 이치가 <중화(中和)>에 있다고 전제했다. 그 <중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희노애락 등 감정과 식욕, 육욕, 재물욕 등 갖가지 욕심이 절제되어야 한다. 또한 {대학(大學)}을 보면 참 선비가 지향할 마음 바탕을 밝혀놓은 부분이 있다. 그에 따르면 선비는 사물의 근본을 터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를 위해서 선비는 눈앞에 드러나는 차원을 넘어 사물의 근본에 철해야 할 것이라는 구절도 있다.
▶고리(高里)만드는 법
{수운잡방}에는 식초를 만드는 법도 적지 않게 나온다. {규호시의방}에는 식초 항으로 2개가 나올 뿐이다. 이것은 김치의 경우와 함께 {수운잡방}이 밑반찬, 또는 기초식품 만들기에 기울인 관심의 농도가 매우 짙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식초의 기초단위를 인식하고 그것을 만들게 기록한 점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식초는 통상 식품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서 쓴다. 그러나 8·15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 집에서 만들어 썼다. 그 무렵에는 묽은 술을 뜨게 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전단계가 되면 식초를 만들기 위해 <가시>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가시>란 일종의 발효세균이다. 일제말기까지 우리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작은 항아리들에 일찍부터 전해 내려오는 식초용 <가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식초가 필요하면 술을 쉬게 한 다음 거기에 <가시>를 넣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초용 효소, 곧 <가시>는 어떻게 만들어 쓴 것인가. 이에 대한 기록은 {규호시의방}의 경우 미분화 상태로 나타난다. 이 책에는 <가시>에 물을 부으면 식초가 된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독립된 단위로 식초용 효소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그것이 독립된 항목으로 기술되어 있다.
작고리법(作高里法) 오천가법(烏川家法) 7, 8월에 알맞은 양의 밀을 깨끗이 씻어서 익힌다.…… 붉나무 잎, 닥나무 잎, 삼잎을 깔고 초석을 깐 다음 그 위에 찐 밀을 펴고 또한 그 위에 앞의 나뭇잎들을 두껍게 덮는다. 열흘이 지나면 꺼내어 햇볕에 말린 다음 키질을 하여 저장하여 둔다. 때에 맞추어 많이 만들어 저장할 것이다(七八月眞麥 任意多少淨洗熟蒸……千金木葉楮葉麻葉次鋪草席上 席上鋪蒸麥厚覆前件木葉 過十日後出曝乾 揚置 趨時多作藏之). 이것으로 우리는 {수운잡방}을 지은이가 적어도 식초의 촉매제인 효소를 그 나름대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이 그 다음 부분이다. 이 <작고리법> 다음 자리에는 그 역시 독립된 항목으로 <조고리초법(造高里醋法)>이 적혀 있다. 여기에 비로소 어떤 그릇에 물을 얼만큼씩 부은 다음 <고리> 얼마를 섞으라는 기술이 나온다. 이것은 뚜렷하게 식초효소를 만드는 법을 의식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위의 두 항목 아래에는 <오천가법(烏川家法)>이라는 부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무렵에도 이미 일반 가정에서는 식초를 만들 때 가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수운잡방}의 지은이의 집에서는 <고리> 제조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직접 주방에 섰을 리가 없는 김유공이 그것을 문장화해서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사물을 말하되 그 지엽말단인 표현형태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근본, 기초를 살피고 있음을 뜻한다. ▶보양, 건강을 위한 음식만들기
{수운잡방}에는 유식이 건강, 보양의 차원에서 생각된 단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단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백자주(栢子酒)>항이다. <백자주>는 잣을 장만한 다음 멥쌀과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익힌 후에 끓인 물을 섞어 술밑을 만든다. 그것을 식힌 다음 누룩가루를 독에 넣고 익히면 잣술, 곧 <백자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항목의 제목 아래에는 이 술의 효능으로 <신중과 방광이 냉한 것을 다스리고 두풍과 백사, 귀매들린 것을 없앤다(治腎中冷膀胱冷 去頭風百邪鬼魅).>라고 적혀있다.
▶포도주 빚는 법
{수운잡방}의 술 빚는 자리에는 포도주를 빚는 또하나의 방법이 적혀있다. <포도를 짓이겨 놓은 다음 찹쌀 다섯 되로 죽을 섞어 독에 담아 두고 맑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쓴다(蒲萄破碎用 米五升作粥待冷 末五合入甕待用之可).> 이것은 서구식인 포도주 빚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다. 개항 후에 들어온 서구식 포도주 양조 방식에는 쌀을 익혀서 쓰는 방법이 없다. 또한 누룩을 효모로 하는 일도 드물다. 이제까지 우리는 포도주가 개항 후에 수입된 서구문화의 산물로만 알아왔다. 그런데 『수운잡방』의 한 한목으로 그런 생각이 지레짐작의 결과임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유 만드는 법과 즙장, 우유는 전통음식의 한가지였다
위의 경우와 비슷한 문화사적 정보가 <타락(駝駱)>과 <즙장(汁醬)>의 항에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즙장>이란 경상도에서 집장이라고 한다. 그 중요재료는 밀과 메주 고운 고추가루 등이다. 찰밥을 이들과 버무린 다음 무, 가지, 풋고추 또는 다시마, 소살코기 잘게 썬 것들을 소금에 저린 다음 장아찌로 박는다. 그것을 항아리에 담아 잘 봉하고 풀두엄에 묻는다. 8, 9일 지나면 두엄이 썩는 열로 익혀서 먹는 장이다.
이 장은 경상북도의 일부 대가 집에서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흔하게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그후에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는데 {수운잡방}에는 바로 이 집장만들기가 <조즙(造汁)>의 항목으로 나온다. 이와는 다른 항목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우유에 관한 것이다. 즙장과 달라서 우리 전통음식에서 우유를 다룬 예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겨레는 본래 북방에서 남하한 기마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문화배경으로 미루어보면 말과 밀착된 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에 곁들여 말젖을 먹었을 공산이 크다. 구비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주몽이 말젖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유 먹는 전통은 고려를 거쳐 이조의 중기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그러니까 영남지방의 한 사가에 지나지 않은 탁청정의 주인이 그것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수운잡방}에 나오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 먼저 그것은 송아지로 하여금 암소의 젖을 빨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유가 끓어서 익게 되거든 오지 항아리에 담고 본타락 작은 잔 한잔을 섞어서 따뜻한 곳에 놓은 다음 두껍게 덮어둔다. 밤중에 나무 막대로 찔러 보아서 누런 물이 솟아오르면 그 그릇을 시원한 곳에 둔다. 본타락이 없으면 탁주 한 중바리를 넣어도 좋다.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식초를 조금 같이 넣으면 더욱 좋다(若駝駱卽沸 盛沙缸納本駝駱一小盞和之 置溫處厚 至夜半以木揷之 黃水湧出卽置其器於凉處 若無本駝駱則好濁酒一中中鍾亦可 本駝駱入時好醋少許幷入甚良). 여기서 <타락>이 우유인 것은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보면 명백해진다. 즉 그 책의 <타락>항에 <소젖을 타락이라고 한다(牛酪曰駝酪)>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가축의 젖을 뜻하는 우유의 고어 형태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타락>에서 락(駝)는 낙타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수운잡방}이 비장된 사유
한 마디로 말해서 {수운잡방}은 문화사적 의의가 적지 않은 책이다. 특히 요리방법의 기록으로서 이 책은 독특한 음식철학을 거느리고 쓴 저작인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에 담긴 지식, 정보의 양도 상당한 경우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나면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이런 {수운잡방}이 그 동안 전혀 공개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수운잡방}에 담긴 기록 내용이다. 이제 살핀 바와 같이 이 책은 사림계층이 정계, 본령으로 생각하는 경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잡저 중의 잡저에 속하는 것이 이 책이다. 이런 이 책의 성격, 내용이 그것을 수장만 하고 공개하지 않는 빌미로 작용했다. 이 경우에 생각될 수 있는 {수운잡방} 오백년 비장의 사유는 이렇게 집약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허균의 {도문대작}이 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탁청정 주인이 사림출신이듯 허균 역시 그런 계층의 출신이었다. 전자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음에 반해 그는 조정의 중심에 나간 사림 중의 사림이었다. 그런 그가 문집의 한 부분으로 요리서인 {도문대작}을 넣고 있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잡서이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시각이 터무니없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다음 또 하나의 빌미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수장한 집안의 특수한 사정이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수운잡방}을 수장해온 집은 김유공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이다. 그런데 이 설월당의 종가가 오랫동안 빗장을 지르고 사는 입장이 되었다. 설월당공은 그 아드님으로 계암 김령(溪巖 金玲)공을 두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대과에 급제한 다음에는 승정원에서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조정이 대북과 소북의 갈등, 마찰로 어지러워지자 정치를 단념했다. 그는 향리에 내려가 병을 일컫고는 몇 차례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분은 벼슬길에 오른 다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로 써서 남겼다. 모두 8권으로 된 이 {계암일기(溪巖日記)}에는 당시 정치 행태, 특히 훈구척신들의 비리와 작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김령공은 그가 쓴 이 일기가 일반에게 공개될 경우 후손들에게 미칠 권신들의 박해를 걱정한 것 같다. 그리하여 서거할 때 유언으로 일기를 집밖에 내어놓지 말라고 일렀다. 이것이 곧 {계암일기}, <불가문외반출(不可門外搬出)>의 유훈이다. 그후 설월당의 대를 이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유언을 잘 지켰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계암일기}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비장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본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 {수운잡방}이 반천년을 비장되어 온 것은 이런 {계암일기}에 빌미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것이 다른책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반대 증거로 {계암집}이 발간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김령공은 두문불출을 했음에도 훌륭한 시문과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들을 수집 정리한 {계암집}이 그의 사후에 문집으로 상재되었다.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저작 내용을 정확하게 판별할 능력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설월당에서 계암공의 저작도 아닌 {수운잡방}을 <불가문외반출>의 책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인가.
▶{수운잡방}은 대를 이어 증보될 책이었다.
이제 그 원본을 살펴보면 {수운잡방}이 공개, 간행되지 않은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수운잡방}이 탁청정공의 맏아드님 집이 아니라 설월당에 전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청정공에게는 맏아드님으로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공이었다. 그는 8척 장신에 기개도 있어 무반이 되었다.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동서남북 국토를 두루 누비다시피하고 고을을 살아 그가 거친 곳만도 열 세 고을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상도 병마 절도사에 올랐다. 탁청정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벼슬을 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맏아드님에게 {수운잡방}을 맡겨 그 보완, 정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공은 사정이 그와 달랐다. 이 아드님은 매우 총명했으나 정치에는 뜻이 없어 퇴계선생 문하에서 경학에 전념하는 분이었다. 탁청정공은 이 아드님을 매우 총애했다고 전한다. 그런 사정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몇가지 일을 맡기는 가운데 {수운잡방}이 끼어 들었을 공산이 크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의 단계에서 완성된 저작이 아니다. 그 완성이 설월당공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설월당공도 뒤에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 생전에 {수운잡방}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후 설월당의 후손들은 제가끔 자신의 생활을 꾸리기에 바빴을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수운잡방}은 선조의 유묵으로 소중하게 간직되기만 하고 수정, 보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인 이 책이 반천년을 비공개로 파묻혀온 사연의 대강이다.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수운잡방}은 탑으로 치면 기단과 탑신이 있지만 상층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방치된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한채의 집에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집이 설계되어 기둥 서까래가 올라가고 지붕이 이어져 기와도 덮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이어야 할 마무리 단계, 곧 창호가 들어가고 내장공사를 해야할 단계에서 방치되는 집도 있다. 대비가 가능하다면 {수운잡방}은 요리서로서 그와 같이 미완성으로 오늘에 전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에도 {수운잡방}은 그 문화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책이다. 우선 {수운잡방} 이후에 나왔으면서도 우리나라 전통 요리서로서의 대명사가 된 책이 있다. 그것이 장씨 부인의 {규호시의방}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씨 부인은 선조 31년(1598)생이며 숙종 6년(1680)에 작고했다. {규호시의방}의 끝자리를 보면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라고 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저자가 60을 넘기고 70에 접어든 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규호시의방}의 저작연도는 1660년대 후반, 또는 1670년대 초반이 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수운잡방}의 제작연도를 1530년대 초에서 10년 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규호시의방}보다 약 110∼20년 정도 앞서 이루어진 책이다. {규호시의방}에는 여러 곳에 {수운잡방}과 대비 가능한 부분이 나타난다. 이 책 후반부 술 빚는 법들을 보면 거기에는 <벽향주> 전문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철자는 현행으로 고침).
백미 두말닷되 백세작말하여 더운물 서말로 죽쑤어 차거든 누룩 너되 진말 두되 섞어 넣어 나흘 댓새만에 백미 서말 닷되 백세하여 물에 담가 하루 재여 익게 떠 물 서말에 골라 차거든 누룩 두되 먼저 밑술에 섞어 넣어뒀다가 이칠일 만에 쓰라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벽향주 빚는 법은 특히 <오천양법(烏川釀法)>으로 되어 있는 항목이다. 그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단서를 뺀 상태에서 거의 그대로 적혀 있다. 물론 부분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수운잡방}에는 <백미 세말>로 되어 있는 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두말 닷되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다음이 {수운잡방}에서는 <한동이 더운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후자에서는 <더운 물 서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실제 주방에 선 경험의 있고 없음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도문대작}에 대비시켜 보면 문화사적 의의가 더욱 뚜렷해진다. {도문대작}의 내용은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서울지방에서 계절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들 음식에 대해서는 각각 그 명산지를 소개 기록했다. 가령 방풍죽은 강릉, 석이병은 표훈사, 백산자는 진주, 다식은 안동, 밤다식은 밀양, 차수(叉手: 칼국수)는 여주, 엿은 개성, 웅지정과(熊脂正果)는 준양, 콩죽은 북청이 열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도문대작}은 일종의 미식 기행성향을 지닌 책이다. 그에 반해서 {수운잡방}은 상당히 강하게 뿌리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김치 담는 법과 식초 제조법에 자세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한 마디로 {수운잡방}은 이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요리서다. 그러나 이 요리서는 그 내용과 문화사적 의의로 하여 충분하게 고전의 하나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할 책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전통계승을 게을리할 수 없는 오늘 우리의 의무이며 과제일 것이다
[需 雲 雜 方(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은 탁청공 김유(1481-1552)공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상하권 두권에 술 담는 법을 비롯하여 108가지 음식 만드는 법을 기록해 놓고 있어 500년전 안동 사림계층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로 알려진 허균의 『도문대작』(1611)보다 100여년 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전요리서 수운잡방
{수운잡방(需雲雜方)}은 우리나라의 전통 요리법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이 책 제목에서 '수운(需雲)'은 격조를 지닌 음식문화를 뜻한다.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게 하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라고 있다. 또한 '잡방(雜方)'이란 갖가지 방법을 뜻한다. 그러니까 {수운잡방}이란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 걸맞은 요리 만드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동안 이 책은 필사본으로 전해 내려왔다. 전편이 한문으로 되어 있고 다른 사본, 곧 이본(異本)이 발견된 예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소장처는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 종가인 설월당(雪月堂)이다. {수운잡방}은 이 종가에서 오백 년 가까이 소중하게 간직되어 왔다. 그러다가 80년대에 들어와서 안동대학교의 윤숙경 교수에 의해 비로소 조사보고서가 이루어졌다.
▶책의 체제, 보존상태
{수운잡방}은 표지와 내표지 등을 합쳐서 모두 25장으로 되어있다. 서문과 발문은 나타나지 않으며 본문 한 행은 20자 정도로 되어 있다. 글씨는 해서가 드물게 보이는 행서체, 초서체 혼용으로 나타난다. 각장의 행수는 15행 안팎으로 되어 있고 그 지본은 우리가 흔히 닥지라고 말하는 한지(韓紙)다.
오랜 세월을 간직해 온 책이기 때문에 {수운잡방}의 각장 지본은 상당히 바래어 있다. 그러나 보관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어서 본문 중 판독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을 정도다. 다만 모필로 쓰는 과정에서 간간히 잘못 쓴 글자나 활자가 난 경우에는 옆에 지우고 고쳐 쓰거나 삽자로 표시해서 바로 잡았다. 또한 장이 넘어가면 행서보다 초서가 더 많이 나온다. 특히 이 책 33항째부터는 글자에 기운이 떨어져 보이고 초서가 눈에 뜨이게 많이 나온다. 31항과 33항 사이에 한 장의 공백면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윤숙경 교수는 이와 함께 전편에서 누룩이 국(麴), 국( )으로 쓰여 있는데 후편에서 국(麴)과 곡(曲)으로 바뀌었음에 주목했다. 그리하여『수운잡방』의 전편과 후편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수운잡방}은 두사람이 쓴 책인가?
지금『수운잡방』의 원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제 1부는 삼해주(三亥酒)로 시작해서 윤숙경 교수가 42의 번호를 붙인 <우벽향주(又碧香酒)>까지다. 이 항목은 본문 열 다섯째 장으로 넘어가면서 한 행만으로 끝나며 그 다음 16장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보아도 여기까지는 한 건의 예외도 없이 술 만드는 법이다. 그런데 그 다음 항목인 43번째는 <작고리법(作高里法)>이며 이어 식초를 만드는 법이 나온다. 이 부분은 윤숙경 교수의 정리 번호에 따르면 86번째 항까지 계속된다. 그리고는 한 장의 공백이 있고 그 다음이 <삼오주(三午酒)>로 시작하는 87번째 항목이다. 이 부분은 121번째 항목인 <다식법(茶食法)>으로 끝난다.
이렇게 나누어 보아도 1, 2부와 3부 사이에 용어, 어법, 기술 내용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차이가 생기는 점은 없다. <曲>자와 <麴>자의 차이는 일종의 약자 사용 사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2부를 합해서 일컬을 수 있는 전편과 후편의 서체문제에는 재해석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초서인가 아닌가는 저자 2인설의 논거로서는 약하다. 실제 우리가 필기를 할 때도 처음에는 갖은 자를 쓰다가 그 뒤에 흘림체를 쓰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이 경우에는 움직일 수 없는 외적 증거도 나타난다. {수운잡방} 표지를 넘기면 거기에는 뚜렷하게 <탁청공유묵(濯淸公遺墨)>의 다섯자가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탁청공>이란 당호는 <濯淸亭>으로 한 광산 김씨 예안파의 한 갈래인 탁청정파의 김유(金 )공이다. 설월당은 바로 이 분의 셋째 아드님이였다. 그랬다면 이 책에 <탁청공유묵>이라고 쓸 사람은 바로 이 집의 후예 가운데 누구였을 것이다. 봉건시대의 예속(禮俗)을 생명으로 생각하는 유가에서는 조선(祖先)이 성체(聖 )이며 바로 신격(神格)이기도 하다. 그런 윤리관 아래서는 조상의 저작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그것을 삽입시키고 그 앞에 버젓이 누구의 것이라고 쓰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다. ▶가장 오래된 요리서의 배경설화들
{수운잡방}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요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을 허균(許筠)의 {도문대작(屠門大嚼)}으로 손꼽아왔다. 허균은 선조 2년(1569)에 나서 광해군 10년인 1618년 역모에 연루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도문대작}은 그의 문집인 {성소부부고}의 한 부분이다. 허균은 이 문집을 처형되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여 오늘 우리에게 끼칠 수 있게 했다. 그에 따르면 {도문대작}의 완성연도가 1611년으로 나타난다.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저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다. 앞에서 이미 드러난 봐와 같이 {수운잡방}의 저자는 탁청정 김유 공이다. 이분은 성종 22년(1481)에 태어났다. 그가 {수운잡방}을 쓰기 시작한 것은 30대 이후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내당의 일들을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서거한 것은 명종 7년인 1552년이다. 옛사람들의 통례에 따르면 60세가 넘은 다음에는 선비가 새 일을 시작하거나 저작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이 50대에 완성했을 공산이 크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수운잡방}은 {도문대작}보다 7, 80년 정도 앞서 저작된 요리서임이 확실하다.
▶저자 김유 공
김유 공이 {수운잡방}과 같은 규방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는 그 바닥에 좀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그는 광산 김씨 예안파 입향 시조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 형님이 되는 분이 운암 김연(雲巖 金緣)공이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영민하여 곧 벼슬길에 올랐고 옥당을 산 다음 외직에 나가 강원도 관찰사가 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행동의 방향을 도의 정치의 실현으로 잡고 일세의 명유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 )과 의기 투합했다. 마침 고개를 쳐든 신진사류들에 적극적인 성원을 보내면서 훈구파 보수세력인 김안로(金安老) 등과 첨예하게 맞섰다.
아우님으로서 김유공은 이런 김연공의 정치활동에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내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중앙에 진출하는 것은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제가 다 벼슬길에 올라 고향을 멀리하면 부모를 봉양하고 집안일을 보살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유공은 향토를 지키기로 하고 어버이를 섬기며 봉제사 접빈객 등 집안일 보살피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기초식품의식, 김치 담그는 법, 연 기르는 법
향리를 지키면서 김유공은 효양과 풍류를 축으로 살았다. 그 여가에 만든 것이 {수운잡방}이다. 이제 {수운잡방}을 보면 여러 가지 김치와 채소절이를 만드는 방법이 열거되어있다(윤숙경, <수운잡방에 대한 소고>, {안동문화}7집 참고). 그 기술적인 문제 역시 매우 구체적이며 자세한 데까지 끼쳐 있다. 참고로 <토란대로 김치 담는 법>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토란 줄기 가늘게 썬 것 한 말에 소금을 가볍게 한 웅큼씩을 뿌린 다음 독에 담고 매일 손으로 눌러 점차 작아지거든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익을 때까지 그렇게 한다(芋莖細 一斗鹽小一握式和合納甕 每日以手壓之則漸小 入他器者移納以熟爲限). {수운잡방}의 이런 면을 {규호시의방(閨壺是議方)}과 대비시켜 보면 그 특징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장씨부인의 이 요리서에서 김치 담그는 법은 <산갓침채> 한가지뿐이다.
{규호시의방}은 {수운잡방}과 110-20년 정도의 상거밖에 나지 않는 연대에 쓰인 책이다. 또한 문화배경이 같은 지역에서 저작된 책이어서 그때에 일반 식사에 쓰인 김치가 이것만이었을 리는 없다. 이것은 {규호시의방}이 주방에서 만들 수 있는 요리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것들을 골라 적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당시의 여러 김치 담그는 법을 고루 채록하고 있다. 그 기술적 지침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실무 지침서로서가 아니라 문화사적 안목에서 작성된 것임을 말해 준다. {수운잡방}이 단순한 주방용 지침서로 작성된 것이 아님은 그 항목에 과일 저장법, 작물재배법이 포함된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 제 2부에는 오이심기와 함께 생강 심기, 머위 심기, 참외 심기, 연근 심기 등 작물의 재배법이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 <종연(種蓮)>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연뿌리를 채취하여 흙을 다져 붙여서 돌에 얹어 연못 안에 드문드문 놓아둔다. 종근이 좋으면 다음 해에 꽃이 핀다(採蓮根與土 交雜盛石池中然 若種實明年開花). ▶선비문화의 산물, 소정과욕(小情寡欲)의 세계
{수운잡방}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따라서 그 저작 동기를 직접적 발언을 통해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표지 다음 면에 지은 분의 생활철학 일단을 파악할 수 있는 말이 적혀 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욕심을 함부로 부리지 말며 성색을 주리고 쾌락에 빠지지 말라. 바깥출입을 삼가야 할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바람 사나운 날, 큰 비 내리는 날, 더위가 기승인 날, 추위가 매서운 날이다(少情寡欲 節聲色薄慈味 時有四不出 大風大雨大暑大寒也)>. 이런 말의 전반부는 유학의 경전 가운데 하나인 {중용(中庸)}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중용에는 천하의 큰 이치가 <중화(中和)>에 있다고 전제했다. 그 <중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희노애락 등 감정과 식욕, 육욕, 재물욕 등 갖가지 욕심이 절제되어야 한다. 또한 {대학(大學)}을 보면 참 선비가 지향할 마음 바탕을 밝혀놓은 부분이 있다. 그에 따르면 선비는 사물의 근본을 터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를 위해서 선비는 눈앞에 드러나는 차원을 넘어 사물의 근본에 철해야 할 것이라는 구절도 있다.
▶고리(高里)만드는 법
{수운잡방}에는 식초를 만드는 법도 적지 않게 나온다. {규호시의방}에는 식초 항으로 2개가 나올 뿐이다. 이것은 김치의 경우와 함께 {수운잡방}이 밑반찬, 또는 기초식품 만들기에 기울인 관심의 농도가 매우 짙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식초의 기초단위를 인식하고 그것을 만들게 기록한 점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식초는 통상 식품가게에서 파는 것을 사서 쓴다. 그러나 8·15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대개 집에서 만들어 썼다. 그 무렵에는 묽은 술을 뜨게 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전단계가 되면 식초를 만들기 위해 <가시>가 사용되었다. 이때의 <가시>란 일종의 발효세균이다. 일제말기까지 우리 가정에서는 집집마다 작은 항아리들에 일찍부터 전해 내려오는 식초용 <가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식초가 필요하면 술을 쉬게 한 다음 거기에 <가시>를 넣어서 식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초용 효소, 곧 <가시>는 어떻게 만들어 쓴 것인가. 이에 대한 기록은 {규호시의방}의 경우 미분화 상태로 나타난다. 이 책에는 <가시>에 물을 부으면 식초가 된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독립된 단위로 식초용 효소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수운잡방}은 그와 달리 그것이 독립된 항목으로 기술되어 있다.
작고리법(作高里法) 오천가법(烏川家法) 7, 8월에 알맞은 양의 밀을 깨끗이 씻어서 익힌다.…… 붉나무 잎, 닥나무 잎, 삼잎을 깔고 초석을 깐 다음 그 위에 찐 밀을 펴고 또한 그 위에 앞의 나뭇잎들을 두껍게 덮는다. 열흘이 지나면 꺼내어 햇볕에 말린 다음 키질을 하여 저장하여 둔다. 때에 맞추어 많이 만들어 저장할 것이다(七八月眞麥 任意多少淨洗熟蒸……千金木葉楮葉麻葉次鋪草席上 席上鋪蒸麥厚覆前件木葉 過十日後出曝乾 揚置 趨時多作藏之). 이것으로 우리는 {수운잡방}을 지은이가 적어도 식초의 촉매제인 효소를 그 나름대로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이 그 다음 부분이다. 이 <작고리법> 다음 자리에는 그 역시 독립된 항목으로 <조고리초법(造高里醋法)>이 적혀 있다. 여기에 비로소 어떤 그릇에 물을 얼만큼씩 부은 다음 <고리> 얼마를 섞으라는 기술이 나온다. 이것은 뚜렷하게 식초효소를 만드는 법을 의식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위의 두 항목 아래에는 <오천가법(烏川家法)>이라는 부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무렵에도 이미 일반 가정에서는 식초를 만들 때 가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수운잡방}의 지은이의 집에서는 <고리> 제조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직접 주방에 섰을 리가 없는 김유공이 그것을 문장화해서 남기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사물을 말하되 그 지엽말단인 표현형태만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라 근본, 기초를 살피고 있음을 뜻한다. ▶보양, 건강을 위한 음식만들기
{수운잡방}에는 유식이 건강, 보양의 차원에서 생각된 단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단적인 보기가 되는 것이 <백자주(栢子酒)>항이다. <백자주>는 잣을 장만한 다음 멥쌀과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익힌 후에 끓인 물을 섞어 술밑을 만든다. 그것을 식힌 다음 누룩가루를 독에 넣고 익히면 잣술, 곧 <백자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항목의 제목 아래에는 이 술의 효능으로 <신중과 방광이 냉한 것을 다스리고 두풍과 백사, 귀매들린 것을 없앤다(治腎中冷膀胱冷 去頭風百邪鬼魅).>라고 적혀있다.
▶포도주 빚는 법
{수운잡방}의 술 빚는 자리에는 포도주를 빚는 또하나의 방법이 적혀있다. <포도를 짓이겨 놓은 다음 찹쌀 다섯 되로 죽을 섞어 독에 담아 두고 맑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쓴다(蒲萄破碎用 米五升作粥待冷 末五合入甕待用之可).> 이것은 서구식인 포도주 빚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다. 개항 후에 들어온 서구식 포도주 양조 방식에는 쌀을 익혀서 쓰는 방법이 없다. 또한 누룩을 효모로 하는 일도 드물다. 이제까지 우리는 포도주가 개항 후에 수입된 서구문화의 산물로만 알아왔다. 그런데 『수운잡방』의 한 한목으로 그런 생각이 지레짐작의 결과임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우유 만드는 법과 즙장, 우유는 전통음식의 한가지였다
위의 경우와 비슷한 문화사적 정보가 <타락(駝駱)>과 <즙장(汁醬)>의 항에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즙장>이란 경상도에서 집장이라고 한다. 그 중요재료는 밀과 메주 고운 고추가루 등이다. 찰밥을 이들과 버무린 다음 무, 가지, 풋고추 또는 다시마, 소살코기 잘게 썬 것들을 소금에 저린 다음 장아찌로 박는다. 그것을 항아리에 담아 잘 봉하고 풀두엄에 묻는다. 8, 9일 지나면 두엄이 썩는 열로 익혀서 먹는 장이다.
이 장은 경상북도의 일부 대가 집에서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흔하게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그후에 전통이 단절되어 버렸는데 {수운잡방}에는 바로 이 집장만들기가 <조즙(造汁)>의 항목으로 나온다. 이와는 다른 항목으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우유에 관한 것이다. 즙장과 달라서 우리 전통음식에서 우유를 다룬 예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겨레는 본래 북방에서 남하한 기마민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문화배경으로 미루어보면 말과 밀착된 생활을 했을 것이며 그에 곁들여 말젖을 먹었을 공산이 크다. 구비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주몽이 말젖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우유 먹는 전통은 고려를 거쳐 이조의 중기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그러니까 영남지방의 한 사가에 지나지 않은 탁청정의 주인이 그것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수운잡방}에 나오는 이 부분을 살펴보면 먼저 그것은 송아지로 하여금 암소의 젖을 빨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유가 끓어서 익게 되거든 오지 항아리에 담고 본타락 작은 잔 한잔을 섞어서 따뜻한 곳에 놓은 다음 두껍게 덮어둔다. 밤중에 나무 막대로 찔러 보아서 누런 물이 솟아오르면 그 그릇을 시원한 곳에 둔다. 본타락이 없으면 탁주 한 중바리를 넣어도 좋다.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식초를 조금 같이 넣으면 더욱 좋다(若駝駱卽沸 盛沙缸納本駝駱一小盞和之 置溫處厚 至夜半以木揷之 黃水湧出卽置其器於凉處 若無本駝駱則好濁酒一中中鍾亦可 本駝駱入時好醋少許幷入甚良). 여기서 <타락>이 우유인 것은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보면 명백해진다. 즉 그 책의 <타락>항에 <소젖을 타락이라고 한다(牛酪曰駝酪)>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가축의 젖을 뜻하는 우유의 고어 형태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타락>에서 락(駝)는 낙타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서역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하게 된다.
▶{수운잡방}이 비장된 사유
한 마디로 말해서 {수운잡방}은 문화사적 의의가 적지 않은 책이다. 특히 요리방법의 기록으로서 이 책은 독특한 음식철학을 거느리고 쓴 저작인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에 담긴 지식, 정보의 양도 상당한 경우다.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나면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이런 {수운잡방}이 그 동안 전혀 공개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수운잡방}에 담긴 기록 내용이다. 이제 살핀 바와 같이 이 책은 사림계층이 정계, 본령으로 생각하는 경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잡저 중의 잡저에 속하는 것이 이 책이다. 이런 이 책의 성격, 내용이 그것을 수장만 하고 공개하지 않는 빌미로 작용했다. 이 경우에 생각될 수 있는 {수운잡방} 오백년 비장의 사유는 이렇게 집약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우리는 허균의 {도문대작}이 있다는 사실을 지나칠 수 없다. 탁청정 주인이 사림출신이듯 허균 역시 그런 계층의 출신이었다. 전자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음에 반해 그는 조정의 중심에 나간 사림 중의 사림이었다. 그런 그가 문집의 한 부분으로 요리서인 {도문대작}을 넣고 있다. 이것은 {수운잡방}이 잡서이기 때문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시각이 터무니없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다음 또 하나의 빌미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수장한 집안의 특수한 사정이다.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수운잡방}을 수장해온 집은 김유공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이다. 그런데 이 설월당의 종가가 오랫동안 빗장을 지르고 사는 입장이 되었다. 설월당공은 그 아드님으로 계암 김령(溪巖 金玲)공을 두었다. 이 분은 어려서부터 명민하여 대과에 급제한 다음에는 승정원에서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조정이 대북과 소북의 갈등, 마찰로 어지러워지자 정치를 단념했다. 그는 향리에 내려가 병을 일컫고는 몇 차례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분은 벼슬길에 오른 다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로 써서 남겼다. 모두 8권으로 된 이 {계암일기(溪巖日記)}에는 당시 정치 행태, 특히 훈구척신들의 비리와 작태를 날카롭게 비판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김령공은 그가 쓴 이 일기가 일반에게 공개될 경우 후손들에게 미칠 권신들의 박해를 걱정한 것 같다. 그리하여 서거할 때 유언으로 일기를 집밖에 내어놓지 말라고 일렀다. 이것이 곧 {계암일기}, <불가문외반출(不可門外搬出)>의 유훈이다. 그후 설월당의 대를 이은 사람들은 모두가 이 유언을 잘 지켰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계암일기}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비장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본으로 이 책이 간행되었다. {수운잡방}이 반천년을 비장되어 온 것은 이런 {계암일기}에 빌미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이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것이 다른책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 반대 증거로 {계암집}이 발간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김령공은 두문불출을 했음에도 훌륭한 시문과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들을 수집 정리한 {계암집}이 그의 사후에 문집으로 상재되었다. 이것은 그의 후손들이 저작 내용을 정확하게 판별할 능력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설월당에서 계암공의 저작도 아닌 {수운잡방}을 <불가문외반출>의 책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인가.
▶{수운잡방}은 대를 이어 증보될 책이었다.
이제 그 원본을 살펴보면 {수운잡방}이 공개, 간행되지 않은 이유가 다른 데에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수운잡방}이 탁청정공의 맏아드님 집이 아니라 설월당에 전해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청정공에게는 맏아드님으로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공이었다. 그는 8척 장신에 기개도 있어 무반이 되었다.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동서남북 국토를 두루 누비다시피하고 고을을 살아 그가 거친 곳만도 열 세 고을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상도 병마 절도사에 올랐다. 탁청정공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벼슬을 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맏아드님에게 {수운잡방}을 맡겨 그 보완, 정리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셋째 아드님인 설월당공은 사정이 그와 달랐다. 이 아드님은 매우 총명했으나 정치에는 뜻이 없어 퇴계선생 문하에서 경학에 전념하는 분이었다. 탁청정공은 이 아드님을 매우 총애했다고 전한다. 그런 사정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몇가지 일을 맡기는 가운데 {수운잡방}이 끼어 들었을 공산이 크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 {수운잡방}은 김유공의 단계에서 완성된 저작이 아니다. 그 완성이 설월당공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나 설월당공도 뒤에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 생전에 {수운잡방}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후 설월당의 후손들은 제가끔 자신의 생활을 꾸리기에 바빴을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수운잡방}은 선조의 유묵으로 소중하게 간직되기만 하고 수정, 보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요리서인 이 책이 반천년을 비공개로 파묻혀온 사연의 대강이다.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수운잡방}은 탑으로 치면 기단과 탑신이 있지만 상층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방치된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한채의 집에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집이 설계되어 기둥 서까래가 올라가고 지붕이 이어져 기와도 덮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을 이어야 할 마무리 단계, 곧 창호가 들어가고 내장공사를 해야할 단계에서 방치되는 집도 있다. 대비가 가능하다면 {수운잡방}은 요리서로서 그와 같이 미완성으로 오늘에 전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런 책임에도 {수운잡방}은 그 문화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책이다. 우선 {수운잡방} 이후에 나왔으면서도 우리나라 전통 요리서로서의 대명사가 된 책이 있다. 그것이 장씨 부인의 {규호시의방}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씨 부인은 선조 31년(1598)생이며 숙종 6년(1680)에 작고했다. {규호시의방}의 끝자리를 보면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라고 되어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저자가 60을 넘기고 70에 접어든 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규호시의방}의 저작연도는 1660년대 후반, 또는 1670년대 초반이 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수운잡방}의 제작연도를 1530년대 초에서 10년 정도의 간격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수운잡방}은 {규호시의방}보다 약 110∼20년 정도 앞서 이루어진 책이다. {규호시의방}에는 여러 곳에 {수운잡방}과 대비 가능한 부분이 나타난다. 이 책 후반부 술 빚는 법들을 보면 거기에는 <벽향주> 전문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철자는 현행으로 고침).
백미 두말닷되 백세작말하여 더운물 서말로 죽쑤어 차거든 누룩 너되 진말 두되 섞어 넣어 나흘 댓새만에 백미 서말 닷되 백세하여 물에 담가 하루 재여 익게 떠 물 서말에 골라 차거든 누룩 두되 먼저 밑술에 섞어 넣어뒀다가 이칠일 만에 쓰라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벽향주 빚는 법은 특히 <오천양법(烏川釀法)>으로 되어 있는 항목이다. 그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단서를 뺀 상태에서 거의 그대로 적혀 있다. 물론 부분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수운잡방}에는 <백미 세말>로 되어 있는 것이 {규호시의방}에서는 두말 닷되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다음이 {수운잡방}에서는 <한동이 더운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이 후자에서는 <더운 물 서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실제 주방에 선 경험의 있고 없음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그 내용을 {도문대작}에 대비시켜 보면 문화사적 의의가 더욱 뚜렷해진다. {도문대작}의 내용은 병이류 11종목, 채소와 해조류 21종목, 어패류 39종목, 조수육류 6종목, 기타 차, 술, 꿀, 기름, 약밥 등과 서울지방에서 계절따라 만들어 먹는 음식 17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들 음식에 대해서는 각각 그 명산지를 소개 기록했다. 가령 방풍죽은 강릉, 석이병은 표훈사, 백산자는 진주, 다식은 안동, 밤다식은 밀양, 차수(叉手: 칼국수)는 여주, 엿은 개성, 웅지정과(熊脂正果)는 준양, 콩죽은 북청이 열거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도문대작}은 일종의 미식 기행성향을 지닌 책이다. 그에 반해서 {수운잡방}은 상당히 강하게 뿌리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김치 담는 법과 식초 제조법에 자세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한 마디로 {수운잡방}은 이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요리서다. 그러나 이 요리서는 그 내용과 문화사적 의의로 하여 충분하게 고전의 하나로 자리매김이 이루어져야 할 책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전통계승을 게을리할 수 없는 오늘 우리의 의무이며 과제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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