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파노라마(2)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목요반 임두환
“인생은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이 말은 스페인이 낳은 소설가이자 극작가 세르반테스가 남긴 명언(名言)이다. 학창시절부터 가슴속 깊이 새겨왔던 명언을 나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서 국가예비고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좌우명은 내 인생길에서 커다란 버팀목이었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는데 뚝심을 발휘해 주기도 하였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회갑진갑을 보낸 지금에 와서도 이모작인내 인생의 꿈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희망을 걸어본다.
- 군대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나는 하늘 높은 줄만 알았지 세상 넓은 줄은 몰랐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나 다름없었지만, 내 꿈을 이루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자원입대를 해야 했다.
내 군번은 11681132이다. 1966년 11월 23일 입대하여 1969년 10월 21일 제대를 하였다. 이전에는 30개월이면 제대를 했으나 1968년 1월 21일 무장간첩 김신조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35개월이나 복무하게 되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 6주와 광주포병학교에서 주특기 측지교육을 마치고는 자대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방으로 떨어질지 후방으로 떨어질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가 미군부대[KATUSA〕로 특명을 받은 것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카투사라니, 하늘을 날 듯 기뻤다. 기쁨에 겨워 눈물까지 나왔다. 그 당시 카투사로 뽑힌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인천교육대에서 2주 동안 카투사기본교육(제식훈련, 예의범절, 기초영어 등)을 받고서 미1군단 76포대로 배치를 받았다. 이곳은 8인치자주포가 있는 곳이었다. 입대하기 전, 어렵게 지내왔던 내가 아니던가. 뜬금없이 침대생활에다 양식과 커피를 대하고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 미국병사[GI〕를 대할 때 손짓발짓까지 해야 했으나, 제대할 무렵에는 포대장의 통역까지 맡았던 나였다. 카투사로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미력한 힘이었지만, 카투사라는 긍지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열심히 홍보했던 것이 지금도 자부심으로 남는다. 우리 76포대 바로 옆에는 포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도서관 ‧ 영화관 ‧ 실내오락관 ‧ 실내체육관 ‧ 야구장 등이 있어서 여가를 즐기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실컷 보고, 포켓당구나 빙고(bingo)게임을 즐겼으니 시골 촌놈이 출세를 한 것이다.
- 직장근무시절
1969년 10월 21일 군복무를 마치고서 농협대학교에 응시하고자 전화로 문의를 해 보았다. 전에는 군복무를 마쳐야 가능했지만, 1969년도부터는 국가예비고사를 치러야 응시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1970년도 예비고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머리를 싸매고 예비고사필승작전에 돌입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간지인 서울신문에 1970년 2월중, 엽연초생산조합직원 30명을 채용한다는 공고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응시하기를 망설였지만, 어머님의 권고도 있어서 경험삼아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결과는 운 좋게도 합격이었다. 처음으로 치른 시험이었는데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얼마나 기뻤던지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어머님도 마을사람들도 춤을 추었다.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 있는 경사였다.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농협대학 진학은 하는 수 없이 접어야 했다.
취직을 빨리해서 우리가족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엽연초생산조합연합회 청주교육원에서 7개월 동안 잎담배경작에 대한 이론과 실무교육을 이수하고서, 1970년 10월 12일자 진안엽연초생산조합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 직책은 잎담배 경작지도사(耕作指導士)였다. 종자파종에서부터 잎담배수매까지 책임을 지고 지도해야 했고, 그 결과에 따라 평가를 받았었다. 경작농민들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웃고 울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엽연초생산조합에서 4년 9개월 동안 근무하고, 나는 전매청 특채 농림직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975년 8월 1일자로 남원전매지청 수납과로 발령을 받았다. 수납과에서 하는 일은 엽연초생산조합을 감독하면서 잎담배경작지도, 식재조사, 예정수량조사, 잎담배수매업무 등을 도맡아야 했다. 수납과 농림직으로 있으면 출장비가 많아서 용돈은 풍족했으나 승진하는 데는 아무래도 행정직을 따를 수 없었다.
농림직으로 7년 10개월을 근무하고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전형시험을 거쳐 행정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은 전주전매지청 진안전매서였다. 진안이라면 나의 학창시절, 마이산을 품에 안고 원대한 꿈을 키웠던 곳이 아니던가. 이제부터는 전매행정을 다루는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전주지점, 전북본부영업부, 익산지점, 김제지점, 남원지점, 전북본부총무부 등을 거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전북본부에서 인사담당과 총무과장직까지 맡아볼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그 뒤 고창지점장, 진안지점장을 끝으로 2004년 12월 담배와 더불어 살아온 34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KT&G에서 퇴직을 하였다. 진안농업고등학교를 나온 시골 촌놈이 입신출세(立身出世)를 했다고나 할까.
- 제 2의 인생
담배와의 인연은 아직도 끊기지 않았는지, KT&G에서 퇴직하고서는 곧바로 2005년 1월 10일부터, 다시 담배판매인회 전주조합 영업상무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담배판매인예정지조사’와 ‘불법담배판매자계도’지만, 짬이 나는 대로 담배판매인점포를 관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두 해만 근무를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올해로 벌써 5년째가 된다. 언제 그만 둘지는 모르겠으나 윗분들에게 누(累)가 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열정을 바치고 싶을 뿐이다.
나는 2006년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처음 등록했을 때는 수필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저 내가 걸어온 흔적을 남겨볼까 싶어서 강의실을 찾았다. 김 학(金 鶴) 지도교수님께서는 불광불급(不狂不及)과 십년법칙(十年法則)을 강조하셨다. 불광불급이란 ‘무슨 일을 하려면 그가 하는 일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십년법칙이란 ‘무슨 일이고 한 번 마음먹었으면 십년은 해봐야 된다.’는 말씀이셨다. 나는 2008년 3월, 제21회 대한문학 신인상에 당선하여 수필가로 등단 하는 영광을 얻었다.
꿈 너머 꿈을 이루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왕지사(已往之事) 등단을 하였으니 수필집 몇 권을 펴내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욕심이다. 더구나 행촌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서 문학회 일을 하다 보니, 내로라하는 문학계인사들도 만나게 되었고, 행촌수필문학회 회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다.
앞으로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멋진 인생일까?
나는 이 순간도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마음을 같이하는 문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술도 마시면서, 틈틈이 수필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인생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진다.”
그렇다. 뭐니 뭐니 해도 성취감을 맛보며 사는 인생이 바로 멋진 인생이 아닐까 싶다.
(2009.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