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특집, 사진 첨부
'내가 좋아하는 색'
배경으로 사는 빛깔
성민희
나 어릴 적 엄마의 시선이 어김없이 머무는 색이 있었다. “저 치마가 곱네.” 엄마는 코발트빛 원피스를 입고도 파란색과 초록색의 무늬가 어지러운 치마를 고르셨다. 장롱 속의 옷은 물론 부엌의 앞치마도 처마 밑의 타올에도 파란색이 희끗거렸다. 그때의 나는 분홍이 너무너무 좋아 연필이랑 필통, 머리핀도 다 분홍색이었는데.
등에 메고 다니던 초등학교 가죽 가방이 네모 난 여고생 책가방으로 바꿔져가듯이 내가 좋아하던 색깔도 변해갔다. 분홍에서 노랑으로, 노랑에서 보라로. 몇 번의 변덕이 있더니 언제부터인지 좋아하는 색을 꼽으라면 나도 엄마처럼 “파란색!” 한다.
나는 파란색을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한 이후에 최초로 탄생한 빛깔이라고 생각한다. 물이 생기고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부터 있었던 색. 모든 창조물을 비추는 색. 인간에게 모태에서부터 느껴졌음직한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주는 색으로.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는 이 색깔이 없다고 한다. 고개만 들면 보이는 하늘의 색도, 흐르는 물속에 비치는 색에서도 파랑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다만 검정의 일종으로 여겼다. 검정이나 흰색으로 표현되던 하늘이 중세를 지나며 화가들이 파란색의 염료를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 파란색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후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하며 천한 색이라며 홀대를 받던 파란색은 세월이 흐르면서 천상의 빛으로 신성시 되었다. 귀족적이고 우아한 색으로서 성모마리아는 물론 왕의 의상 색으로 사용되었다. 색깔이 주는 느낌도 다양해서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에게 파란 상의를 입혀서 낭만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고 피카소는 파란색을 다양하게 변형시켜 외롭거나 슬픔, 고독 등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파란색의 느낌을 말해보라고 하면 젊음, 희망, 상쾌, 냉정, 지성적 등 비교적 긍정적인 단어를 들먹인다. 나도 그래서 좋다. 뭔지 모르게 밝고 희망적인 느낌이라서 좋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파란색은 모든 자연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림에서든 사진에서든 파란색은 모든 풍경의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자신이 아무리 청명하고 강렬해도 절대로 나대지 않는다. 관람자의 시선을 강탈해가지 않는다. 화폭 깊숙이 스며들어 함께 있는 풍경을 돋보이게 해 준다. 메뚜기 날아가는 여름 하늘이나 흰 눈 내리는 겨울 바다를 주인공이라며 그려주어도 결국에는 배경이 되어 누워있다. 자기 존재에 대한 과시나 욕망이 없다. 다른 색깔의 뒤에서 상대를 돋보이게 도와준다. 질투나 상실감 같은 감정이 없다. 모든 색에게 정중하다.
엘에이에는 많은 문학 단체와 문단 선배가 계신다. 그 중에 파란색이라고 말하고 싶은 분이 있다. <글마루>의 정해정 동화작가다. 단체 모임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도 조용히 앉아만 계시는 분인데 왜 모두들 존경하며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후배들의 간곡한 요청에 몇 년째 계속해서 한 단체의 회장 직을 이어오신다. 해마다 사양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무슨 엘리자베스 여왕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한숨을 쉬기도 하셨다. 먼데 나들이 갈 때에는 서로 모시고 가겠다고 경쟁도 붙는다. 일전에는 회비를 내는 문학모임에서 누군가가 대납을 해 드려서 놀랐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아무리 줄긋기를 해봐도 연결이 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야단(?)을 치시는 그 분 뒤에서 심술이 난 내가 한마디 했다. “나는 만인의 연인은 싫어. 나만의 연인이 좋아.”
그 분은 장르 상관없이 모든 문인의 언니고 누나다. 상담자고 조언자다. 정말 닮고 싶은 선배님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렇다. 그 분은 자신의 허명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단체의 뒤에 서서 조력만 할 뿐 나서지 않으신다.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돋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조용히 격려해주며 모든 후배의 배경으로만 계신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굳이 나를 알아달라고 깝신거리며 나부대지 않아도 모두가 인정해 주는 사람, 편안해하는 사람,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 넉넉하게 포용하는 사람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사진 속의 하늘과 땅을 본다. 그 모호한 경계에 파란색은 노란색을 품고 누워있다. 하늘과 바다의 긴 만남에는 파란색이 회색을 품고 있다. 정서가 달라도 모순투성이 인간이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지라도, 도무지 이해하고 싶지 않는 상황으로 사건을 몰고 가는 사람이라도 넓은 품으로 안아 들일 수 있는 인격으로 살고 싶다.
계절과 날씨와 시간에 따라 자연은 변해도 고유의 넉넉함을 버리지 않는 파란색. 때로는 푸르딩딩하고 푸르뎅뎅하고 푸르죽죽하고 푸르므레하고 푸르스름하고 푸릇푸릇하게 자신을 변화시켜가며 세상을 껴안는 파란색이 나는 좋다.
[현대수필] 2021년 겨울호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