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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투성이의 도로명 주소 재고해야
배우리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우리 읍내 장터에서 새터말을 물어 찾아와서 박서방네만 찾으면 되었는데, 이젠 무슨대로 2547길 53나길 27로 찾아오라 해야 된대나.”
새주소 사용에 따른 어느 시골 주민의 푸념이었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변경하는 '도로명 주소' 사용이 내년부터 전면 시행 에정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지번 중심 주소의 기준이 바뀌게 됐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나라의 모든 국민들은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고, 아울러 그 불편에 따른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곳곳에 붙여 놓은 도로명 주소를 보고 놀라는 주민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저 외기도 어려운 도로명-숫자가 우리 주소냐?’며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막상 주민등록 주소까지 이런 식의 주소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는 불만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아직은 구주소도 병행 사용하여 불편을 덜 느끼겠지만, 완전히 도로명 중심의 새주소로만 사용하라고 하면 그 불편을 더욱 실감할 것이다.
도로명 주소 체계는 정부가 1997년부터 추진해 온 사업이다. 이 때만 해도 지자체와 주민들의 큰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말죽거리길’, ‘삼봉로’ 등의 길이름들을 보고는 옛 땅이름들이 되살아나는 것에 찬성의 뜻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길이름을 바꿔 달라는 민원들이 끊이지 않고, 시민 단체들은 아예 이 도로명 정책을 전면 폐지하라는 요구까지 해 오고 있지 않은가.
새 도로명 제정 취지의 중심은 ‘편하게 길찾기’였지만 이러한 논리는 이미 퇴색되었다. 제정 초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등 으로 장소 찾기는 아무 것도 아닌 시대가 되었다. 길이름이 위치에 따라 일련번호로 매겨져 있지 않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간단한 상용 휴대장비 하나면 어디라도 찾아갈 수 있고, 구간 거리까지 알 수 있다. 길찾기에 얽매여 길이름을 바꾸고 그 복잡한 숫자들을 붙여서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다.
길찾기 위주의 지금의 새 주소는 큰길 위주로 길이름을 붙이고, 거기서 분기되는 도로들은 그 큰길 이름에서 숫자를 덧붙이며, 또 거기서 분기되는 도로들은 그 숫자 붙은 길이름에 또 다른 숫자를 덧붙이는 형식이다 이렇게 되어 ‘원효로4가 ??번지’식의 기존의 주소가 ‘효창원로 12가길 9-3’식으로 여러 단계의 숫자와 기호로 된 곳이 많아 머리를 무척 어지럽히고 복잡하게 한다.
큰길 위주로만 주소를 매기다 보니 지명의 절대수가 줄어 조상들의 숨결이 밴 많은 고유의 이름들까지 사라져 가게 되었다. 이것이 큰 문제다. 땅이름은 우리 문화의 좋은 유산이다. 이것이 도로명 체계로 인해 우리 입에서 멀어져, 아니 아예 사라질 위기에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정부는 지금이라도 시민들의 소리에 크게 귀기울이고 주소 체계의 올바른 방향을 정해 주길 바란다. 지금까지는 많은 이들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정부에서 그렇게 해 나가겠거니 생각하고 잠잠했지만, 문젯점이 드러난 이상 그대로 간다면 본격적인 시행 단계에서 감당못할 반대의 벽에 부딛힐 수도 있다.
이미 내디딘 발길이니 그대로 가자고 하면 지나친 오기로 비칠 수 있다.
익히 불리던 땅이름을 버리고 숫자 투성이의 길이름을 쓰라는 이 정책에 점점 반대의 힘이 실리고 있다. 외국에서의 경우처럼 선(線) 위주의 주소 체계로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애초의 도로명 제정 취지였지만, 땅덩어리가 작고 길이 복잡하며 곳곳마다 고유의 이름들이 많은 우리 나라에, 더구나 지금의 주소로도 길찾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 속에 옛날식의 외국식 옷을 입히는 꼴인 지금의 새 주소 체계는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덧붙여 말하지만, 지금의 새주소보다는 차라리 1997년부터 해 왔던 길이름 주소 체계가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