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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예찬
문병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내 조국 내 고향
그 향기론 흙 속에 묻혀
날로 고와진
이 아름다운 백골을 보아라.
그 어느 빛나는 꽃보다 더 눈부신
차마 눈뜨고 바라보기마저 현기증 나는
이 깨끗한 정결한 침묵을 보아라.
산 사람들 변절하고
육신에 아픔 못 이겨 굴복할 때도
백골은 오히려 불변의 모습으로
썩어 그 향기 날로 깊어지거니
이름이 없어도 좋다.
명예와 훈장은 오히려 부질없는 장식
파란 이끼마저 자랑스레 간직하고
스스로 사랑했던 조국의 흙 품속에
차라리 두 평 흙구덩이 무덤이 없어도 좋았다.
두더지가 파먹고
스스로 고뇌로 구더기가 파먹고
마지막 남을 것만 남은 희고 고운 백골
천언 만사의 증언을 대신하여
이 한 조각 뼛조각과 두개골이
우리가 숨 쉬는 대지와 하늘이 아니냐.
서른 한 해
골짜기를 울고 간 뇌성벽력 속에서
이슬로 닦이고 바람으로 삭이고
꽃잎으로 씻기고 별빛으로 속삭이며
날이 갈수록 고와가는 주검을 보아라.
흐드러진 진달래로 비단 삼고
능선을 쓰다듬은 바람으로 집을 삼아
휘영청 달밤이면 온몸으로 흐느끼는
한 평 무덤마저 거부한
저 차갑게 식은 눈부신 몸부림을 보아라.
오오 골짜기에 뒹구는
무명용사의 빛나는 백골이여.
문병란 시인
1935년 3월 28일 전남 화순 출생. 1960년 조선대 문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김현승(金顯承)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가로수」(1959. 10), 「밤의 호흡」(1962 7), 「꽃밭」(1963. 11)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순천고, 광주제일고교 교사를 거쳐 조선대 국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0년에 첫 시집 『문병란 시집』을 내었다. 이 시집 서문에 “시는 시인에겐 하나의 신앙과 같은 것”이라 하여 시인은 시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나 각종 횡포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보고, 시의 창조를 분만의 고통에 비유했다. 이 시집에는 개인적인 서정이나 실존적 고독과 방황을 형상화한 시들과 역사 및 현실에 입각한 시들이 실려 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죽순 밭에서』(1977), 『벼들의 속삭임』(1978), 『5월의 연가』(1986), 『양키여 양키여』(1988) 등 현실에 입각해서 저항‧비판의식을 주조로 한 민족‧민중문학 창작에 몰두한다. 역사성과 민중성을 통해 민족민중문학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국민운동본부 대표를 역임했다.1985년에는 제2회 요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위의 시집 외에도 『땅의 연가』(1981), 『뻘밭』(1983), 『무등산』(1986), 『견우와 직녀』(1991), 『새벽의 차이코프스키」(1997), 『인연서설』(1999),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2001), 『동소산의 머슴새』(2004), 『매화연풍』(2008) 등의 시집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저 미치게 푸른 하늘』(1979), 『어둠 속에 던진 돌멩이 하나』(1986)와 문학논집으로 『현장문학론』(1983), 『민족문학강좌』 (1991) 등이 있다. 『원탁시』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민주화운동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빛을 발하면서 그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오욕의 역사가 아니라 긍지의 역사였다. 광주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가장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 언론의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우선 거의 모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서 항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한 두 명의 영웅적인 항쟁이 아닌,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승리하였다. 당국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협동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항쟁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세번째로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게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중에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민주화운동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거나 사실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방송국과 같은 보도매체들이었다. 그러나 시민군과 계엄군의 싸움은 정당성과 도덕성이 아니라 물리력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기대가 무너지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 마음 속에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지만 그것은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광주항쟁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월투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독재체재가 어느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각종 지배구조에 억눌려있던 일반 시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은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뒤바꾼 전대미문의 시민무장봉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의 선혈을 발판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 6공화국의 집권층이 보여준 광주양민학살만행과 천문학적인 부정부패가 온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와 정의와 법'에 의한 단죄의 행로를 걸었다. 그간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을 송두리째 흔들던 5공화국 7년동안, 광주항쟁의 실체를 밝혀 줄 각종 군 자료와 증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6공화국의 여소야대라는 정국속에서 열렸던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상당부분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정부·여당은 청문회를 거듭하면서 신군부 등 기득권자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쟁점과 책임자 규명 문제에 있어서는 교묘한 호도책으로 일관하여 완전한 진상규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민정부의 초기에는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에 대한 단죄보다는 역사에 의한 처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이 나라의 '헌정을 유린하고 국민을 살육한 부도덕한 신군부 집단'에 대한 전국민적 처벌 요구가 자칫 영원한 역사적 과제로 미루어질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거세지는 "광주민주화운동 책임자 처벌"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검찰은 다시 전면 재수사에 나섰고 그들은 '역사에 의한 단죄'가 아닌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저항권을 말살한 헌정 초유의 내란집단'으로 규정되어 전세계의 관심속에 "법과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반면에 전국민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세기의 재판'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과거의 역사적 잔재와 의식의 소유자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하려 해도 반드시 국민과 정의의 힘에 의해 낱낱히 밝혀질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제의 패배에서 벗어나 이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으로 거듭나고 있다. 현 정부가 광주항쟁을 세계사에 유래없는 초이성적 초도덕적 투쟁이라고 규정한 만큼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계승 방안을 위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한다. 이 21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 바로 이것이다. 서로 돕고 신뢰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은 더욱 더 찬란한 역사속의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 출처: 광주광역시 5.18기념문화쎈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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