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er
‘do’라는 동사에 ‘-er’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만들어진 단어. 아주 단순한 구조의 단어이다.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생경함이 떠오른다. 이렇게 간단한 단어를 어째서 여태껏 접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과 그 담긴 뜻이 환기시켰던 발견의 희열을 또렷이 기억한다. ‘하다’라는 뜻의 동사 ‘do’에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미사 ‘-er’이 결합되었으니 짐작한 대로 doer는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조금 더 고급스럽게 해석하면 ‘실행가, 행동가’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dreamer’와 대비되어 나는 이 단어가 꽤나 인상 깊었다. 단순해서 흥미로웠지만 단순함에 담긴 의미가 너무나 새삼스러워서 기억에 남았다. 해석된 우리말은 다소 거창하다. 행동가씩이나. 그저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 doer이다. 그렇다면 dreamer의 뜻은 무엇인가. 예상되듯이 ‘꿈꾸는 사람’일 터이다. 이 또한 달리 말해 ‘몽상가’라고도 해석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에서 ‘doer’였을까, ‘dreamer’였을까.
꽤 오래 전 어느 학생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꿈이 있느냐고. 나는 꿈이 있었다, 그때. 꿈꾸기에 너무 늙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꿈이 있긴 했다. 그러나 어쩐지 부끄러워, 꿈꾸는 것이 당연한, 너무나 그래야 하는 학생 앞에서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덧붙였던 것 같다. 그저 꿈만 꾸는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왕이면 ‘doer’가 되라고. 그래서 꿈이 현실이 되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나는 doer를 알고부터 doer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처참하다. 무언가 하면서 살기는 했는데, 돌이켜보면 뭘 했나, 싶은.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고작 dreamer로 머물러 버리고 만. 누구나 하는 흔해 빠진 푸념과 자조로 덕지덕지 덧댄 그렇고 그런 핑계투성이의 삶. 꿈만 꾸는 사람이 아닌 ‘하는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에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지만, 과연 합당한 이유가 맞는지 생각하다 보면 결국 답은 나의 모자람으로 귀결되고 만다. 나는 참 모자란 인간이다. 지금껏 살면서 터득한 유일하게 명확한 사실이다. 이 사실 하나를 알자고 이만큼 살았을까. 대단한 줄 알고 살았다가 결국 모자람만 가득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인 모양이다, 적어도 나로서는. 이럴 줄 알았으면 베로니카처럼 진즉에 죽기로 결심하는 게 맞았을까.
그래도 이제 와, 실컷 살아 놓고 이제 와 죽어버리지는 않으려고 한다. 실컷 다 먹어 놓고 왜 이리 맛이 없냐는, 그런 타박은 너무 우습지 않은가. 모자라긴 해도 우스워지지는 말아야지.
해가 바뀌었다. 그저 숫자의 바뀜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 이유라도 끌어와 나는 다시 꿈을 꾼다. 해가 바뀌면 세상은 그나마 꿈꾸는 사람에게 관대해진다. 더러 꿈을 꾸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나도 그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또 꿈을 꿀까 한다. 그리고 또 소망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꼭 꿈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하여 나는 다짐한다. 정말 ‘doer’로 살아보자고. 여하튼 뭐든 ‘하는 사람’이 되자고. 정말 그러자고. 정말 그러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