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드라마 제목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사르트르가 한 말이다. 사르트르는 주체성과 더불어 ‘타인’을 설명했다. 실존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거나 실존을 확인 받을 수 있는 역할로 작용하는 ‘타인’이라는 존재. 또한 ‘시선’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나의 시선에 가둘 것이냐, 그의 시선에 갇힐 것이냐의 문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눈싸움’이라는 것이 있다. 시선을 마주하고 누가 깜빡임 없이 더 오래 상대를 바라볼 수 있는가. 생리적으로 눈은 깜빡여야 하고 눈싸움은 그 한계를 누가 뛰어넘느냐의 물리적 다툼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시선’은 누군가를 장악하는 문제이다. 내 시선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타인. 그를 제압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음이다. 반대로 타인의 시선에 갇히면 나는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본의 아니게 그에게 굴복하고 있는 형상이다. 비로소 ‘타인이 지옥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 ‘응시’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쿠라에게 타인은 다른 의미로 이해되는 듯하다.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는 상반된 성향의 두 인물이 나온다. 사쿠라와 하루키. 사쿠라는 자신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유지하는 하루키를 보면서 자신의 삶과 비교한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이르러 사쿠라는, 실상 작가의 말이겠지만,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다. 그 해석은 꽤 그럴듯하다. 두 인물의 차이는 사실상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맺기에서의 차이이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두 인물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명확히 구별된다. 물론 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사쿠라의 죽음을 계기로 두 인물은 상반된 서로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며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타인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 주목했다. 사쿠라는 말한다. 자신에게 ‘산다는 것’은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나를 비교해가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온전한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하기에 사쿠라에게 있어 인생은 누군가 있어준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며 혼자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즉, 타인을 말할 것이다. 그것이 사쿠라가 타인이란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 그에 반해 하루키는, 적어도 사쿠라의 말을 빌자면, 오로지 자신으로 존재한다. 타인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홀로 온전히 세상에 존재하는 자아. 사쿠라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만, 그럼에도 오롯이 혼자로서 완전한 자아로 존재할 수 있는 하루키를 동경한다고 고백한다. 타인의 존재와 별개로 오롯이 혼자만의 세계를 완성하고 그 세계 안에서 자신의 매력을 만들고 자신의 책임으로 삶을 영위해 가는 하루키를. 그래서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던 하루키가 사쿠라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쿠라가 계속 존재해주기를 바란다고 수줍은 고백을 할 때, 즉 비로소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스스로 타인과 관계맺기를 시도할 때 사쿠라는 무척 기뻐한다. 자신의 존재가 존재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일 테다. 타인의 존재가 있어야 가능했던 자신의 존재가 오롯이 자신만으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에 감격한 것이다. 특히나 그 상대가 타인의 존재에 무관심했던 하루키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쿠라가 생각하는 ‘산다는 것’에 썩 동의하지 않는다. 타인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비로소 나의 존재가 성립한다는 그의 생각에 사실 끄덕이기보다는 갸우뚱했다. 우선 내가 존재해야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 아닐까. 나의 의식이 타인을 인지하지 않는 이상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먼저일까. 내 존재에 타인이 대자로서 미치는 영향과 그 중요성은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조차도 나의 의식이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내 마음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있기 때문이고, 내 몸이 있는 것은 다른 모두가 잡아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는 지금 살아있어.’(222면)
과연 그런가. 다른 모두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가, 내가 존재하기에 다른 모두를 인식하는 것인가. 나는 어쩐지 후자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