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과 출력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다. 출력부는 잘 보인다. 서울대 합격증은 보인다. 입력부는 보이지 않는다. 공부를 했다고? 공부를 했는지 안했는지 알게 뭐야? 평소에 보니까 맨날 놀던데 어떻게 서울대 붙었지? 아기가 태어나도 그렇다. 출력은 보인다. 아기가 보인다.
입력은? 그것은 침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원시 부족민은 아기가 태어나는 이유를 모른다. 아기는 신의 축복에 의해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부부관계인지, 커플관계인지, 친구관계인지, 남친인지, 남사친인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는 입력부를 반영 못한다. 강아지에게 주는 간식은 보인다. 강아지가 진짜 원하는 것은 주인이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약속은 보이지 않고 간식은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강아지가 단지 간식 때문에 훈련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성공과, 출세와, 미모와, 쾌락은 눈에 보인다. 인간의 언어는 잘 보이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에너지의 출력부는 보이고 입력부는 보이지 않는다. 옛날사람이 도, 기, 리, 법, 공, 중도, 중용, 이데아, 변증법 따위를 말했던 것은 입력부를 표현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보통은 동기나 욕망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 출력부를 강조한 오류다. 출세하고 싶어서, 성공하고 싶어서? 천만에. 입력부는 뇌과학으로 설명된다.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는 만남이고, 각인이고, 전율이고, 일치고, 조절이고, 동력이고, 흥분이고, 호르몬이다.
메커니즘이 있다. 물레와 방아의 연결이다. 물레는 밸런스고 방아는 지렛대다. 방아는 잘 보인다. 물레는 시스템 내부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물레는 엔진이고 엔진은 내부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방아면 물레는 심장이다. 심장을 볼 수는 없다.
존재의 엔진은 연결이다. 연결이 도출하는 것은 관성력이다. 관성력은 추론된다. 보이지 않는 힘을 신이라고 한다. 자연에서 기세가 되고, 사회에서 권력이 되고, 시장에서 이윤이 되고, 내면에서 자유의지가 되는 조절장치다. 조절장치는 이기는 힘을 가진다.
물레는 스스로 도는 능동이고 방아는 돌려야 도는 수동이다. 능동이 엔진이고 수동은 바퀴다. 엔진은 스스로 돌지만 바퀴는 돌려야 돈다. 뇌는 제 스스로 돌고 손발은 뇌가 명령해야 돈다. 긍정주의, 낙관주의, 진보주의, 보편주의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발성이다.
부정주의, 비관주의, 보수주의, 특수주의는 자체 엔진이 없는 사람의 빌붙는 전략이다. 동력원이 없으면 힘이 있는 것에 빌붙어야 한다. 숙주에게 힘이 있는지 테스트해야 한다. 집적거려본다. 반응을 테스트 한다. 그러므로 나빠진다. 악당은 사람을 테스트 한다.
방향전환이 진짜다. 물레는 방향전환이 가능하지만 방아는 방향전환이 불가능하다. 활은 방향전환이 가능하지만 화살은 방향전환이 불가능하다. 두 방향의 힘을 한 방향으로 전환하면 관성력이 유도된다. 유도전류도 그러하고 생명도 그러하고 역사도 그러하다.
존재
세상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연결이다. 연결의 접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많이 주면 받지 못하고 적게 주면 거절당한다. 거기에 조절장치가 있다. 존재는 대칭을 통해 주고받음을 조절하여 널리 세상을 이룬다.
원자는 없고 대신 주고받음의 조절단위가 있다. 하나의 존재는 하나의 에너지 조절단위다. 하나의 주고받는 단위다. 세상은 원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에너지를 주고받는 조절장치 메커니즘의 무한복제다.
궁극적인 액션은 주는 것에 있다. 엔진은 자체 동력을 사용하여 능동적으로 주지만 바퀴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자식은 자식의 자식에게 준다.
에너지의 일방향성에 따라 조절장치는 주는 쪽이 독점한다. 빛은 어둠에게 준다. 어둠이 빛을 골라서 받아가는 일은 없다. 빛은 이기고 어둠은 진다. 지는 쪽은 결정권이 없다. 어둠이 빛을 거절할 수는 없다.
세상은 대칭이면서 비대칭이다. 주고받기는 대칭인데 조절장치는 비대칭이다. 주는 것은 존재론, 받는 것은 인식론이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대칭성 및 둘을 통일하는 구조론의 비대칭성으로 모두 설명된다.
주체
주는 자에게 결정권이 있다. 그것이 권력이다. 주는 자가 사건의 주체가 된다. 주체는 객체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이기는 힘이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다. 주는 주체는 숨은 변수가 있다. 주도권이 있다.
주체의 주도권을 긍정하는 것이 긍정주의, 낙관주의, 보편주의, 진보주의다. 주체는 이겨서 외부의 힘을 동원하므로 자유의지가 있다. 내부의 힘은 고갈되지만 외부의 힘은 계속 동원되므로 자유롭다. 자유의지 긍정이 긍정주의다.
주는 자가 이긴다. 지면 줄 수 없다. 이기면 능동적으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주는 자는 힘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줄지, 얼마나 줄지, 언제 줄지 주는 사람이 정한다. 주는 주체의 조절능력을 믿는 것이 낙관주의다.
주려면 넓은 공간에서 조절장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보편주의다. 정치가 국민에게 주는 것이 진보주의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필요없고 열린 공간에서 주고받기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는 열역학 법칙에 의해 결과적으로 좋아진다.
준 만큼 작아지는 것이 마이너스 원리다. 주면 줄 수 없게 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주려고 다가서면 거리가 좁혀진다. 우주의 에너지 방향은 수렴방향이다. 주려고 손을 내미는 힘은 미는 힘이다. 우주의 기본 힘은 미는 힘이다.
낳음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무엇이든 그것은 단위다. 세상은 단위로 되어 있다. 단위는 두 가지가 있다. 내부 결정단위와 외부 전달단위다. 에너지가 안에서 결정하면 물질이 외부에 전달한다. 메커니즘은 안에서 결정하고 원자는 외부에 전시한다.
구조론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아이디어다. 지금까지 인류는 존재의 절반을 봤을 뿐이다. 존재의 머리와 꼬리 중에서 꼬리만 본 것이다. 인류는 보여지는 절반을 봤을 뿐 연출하는 반대쪽 절반을 보지 못했다. 내부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보지 못했다.
파인만은 말했다.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하여 단 하나의 지식만 후대에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원자론이어야 한다고. 원자는 결정자가 아니고 전달자다. 쏘는 활이 아니고 날아가는 화살이다. 파인만이 틀린건 아니다. 화살을 보면 활을 생각한다.
그런데 왜 아무도 활을 말하지 않지?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는 법. 원자가 있으면 원자의 자궁도 있어야 한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그것이다. 최초에 무엇이 있었나? 탄생이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틀렸다. 태초에 낳음이 있었다. 엄마가 먼저다.
닭이 알을 낳는다. 닭이 먼저다. 닭이 엄마가 되는 순간은 특정된다. 닭의 몸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 그 닭은 엄마가 되고 그 순간부터 게임은 시작된다. 모든 것에 앞서 만남이 있었다. 일치가 있었다. 복제가 있었다. 의사결정이 있었다.
단위
이야기는 단에서 시작된다. 단端, 단單, 단斷, 단段이 글자는 달라도 의미가 같다. 단은 일의 시작점이다. 첨단이 되기도 하고 말단이 되기도 한다. 판단의 단위가 되고 추론의 단서가 된다. 무엇을 하든 단에서 시작하고 단으로 종결한다.
우리는 존재의 단을 원자로 삼았다. 틀렸다. 메커니즘이 단이다. 메커니즘이 결정하면 원자가 전달한다. 화살은 단이 아니고 활이 단이다. 강剛이 아니고 유柔가 단이다. 정靜이 아니라 동動이 단이다. 아기는 단이 아니고 엄마가 단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므로 시작점을 특정할 수 없다. 특정해야 단이다. 만남의 순간은 특정된다. 태어나서 엄마를 만나고,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고, 학교에서 급우를 만나고, 직장에서 동료를 만나고, 사귀며 연인을 만난다.
단은 일점이 특정되어야 하며 특정되려면 일치해야 한다. 거기서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난자와 정자의 수정을 어미가 결정한다. 결정하는 것이 먼저다. 근원에 자궁이 있다. 낳음이 먼저다. 빅뱅이 먼저다. 긍정이 먼저다. 진보가 먼저다.
붙잡는 것이 있다. 붙잡아야 일치하고, 일치해야 만나고, 만나야 시작된다. 육상선수는 출발선에 붙잡힌다. 권투선수는 링에 붙잡힌다. 학생은 입시에 붙잡힌다. 부부는 아기에 붙잡힌다. 존재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조에 붙잡힌다.
생각
모든 것은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다. 구조는 아이디어다. 집을 지으려면 건축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건축구조가 아이디어다. 영화를 찍으려면 역시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히어로와 빌런으로 나누어지는 인물 캐릭터가 영화의 구조를 이룬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만화를 그리든 작가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스타일이 아이디어의 자궁이다. 옷을 입어도 스타일이 있어야 맵시를 연출할 수 있다. 패션에도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조가 있다. 아이디어가 스타일이고 스타일이 구조다.
아이디어는 둘을 하나에 집어넣는다. 개그맨은 중의적인 표현으로 웃긴다. 타블로의 노래 가사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드라마 주인공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진 입체적 캐릭터로 설정된다. 바퀴축은 1이면서 2다. 이는 우주의 작동원리다.
우주는 일치에 의해 빅뱅되었다. 정자와 난자는 일치에 의해 복제된다. 유비, 관우, 장비는 일치에 의해 도원결의를 한다. 세상은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아이디어로 끝난다. 구조로 시작해서 구조로 끝난다. 만남으로 시작해서 또다른 만남을 낳는다.
세상은 연결로 시작해서 또다른 연결로 끝난다. 대칭이 일치해야 연결된다. 일치하면 비대칭으로 바뀐다. 일치는 한 점에서 일어나므로 그 지점을 특정할 수 있다. 그곳에 존재의 조절장치가 있다.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다. 모든 논란을 잠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