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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03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이해를 그대의 유일한 법으로 삼아라 ★
“에고가 들어오는문”
▷ 일 시 : 불기2568 (2024)년3월18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상구보리 하화중생 *
2024년3월18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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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과 산회가를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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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내용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195~200p
▶에고가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을 앨포트(Alport)는 '육체적 자아(the bodily self)' 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기(自己)'라는 인식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자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는 엄마와 하나이다.
그는 엄마와 전적으로 하나이며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에게는 엄마가 세상 전체이며 우주다. 그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궁 밖으로 나오면서 분리 감이 생겨난다.
엄마와 연결된 다리가 끊어지고 아기가 제 스스로 호흡해야 할 때 분리감이 생겨난다.
사실, 호흡은 아기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아기가 호흡을 행할 수 있겠는가?
호흡은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호흡은 무(無)로부터 나온다. 아기가 숨쉬기 시작한다.
그 몇 초 동안은 지극히 위태롭고 중요한 순간이다.
의사, 간호원, 부모 등 모든 사람이 '이 아기가 숨을 쉴 것인가 아닌가?'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 196
아기를 강요하거나 설득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기는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일 호흡이 일어나기로 되어 있다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호흡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간혹 숨을 쉬지 못하는 아기가 태어난다.
사산(死産)의 경우가 그렇다.
아기가 최초로 숨을 쉬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아기는 전에 한 번도 호흡해 본 적이 없다.
그가 호흡할 준비를 했을 리도 없다.
그는 호흡이라는 메커니즘(mechanism)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른다.
허파는 전에 한 번도 작동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호흡이 찾아들고 기적이 일어난다.
이 호흡은 무(無)로부터 온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내가 숨쉰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그대가 숨쉬는 게 아니다.
호흡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나' 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지 말라.
'내가 숨쉰다'고 말하지 말라. 아무도 숨쉬고 있지 않다!
숨을 쉬느냐 쉬지 않느냐는 그대의 능력 밖에 있다.
실험해 보라. 얼마 동안 숨을 멈추어 보라.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잠시 후면 거대한 파도처럼 호흡이 밀려들고 그대는 다시 숨쉬기 시작한다.
또는 외부적으로 호흡을 차단해 보라.
얼마 동안 그렇게 해보면
돌연 그대는 거대한 호흡의 파도가 밀어닥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의 능력 밖에 있다. 호흡이 들어오기를 원한다.
그대 안에 숨쉬는 것은 '무(無)' 다. 또는 그것을 '신(神)이라 불러도 좋다.
어떻게 부르건 아무 차이도 없다. 무(無)이건 신(神)이건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는 기독교, 유태교,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다.
신(神)은 무(無)다.
우리는 '자아' 라는 인식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자아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갓난아기는 자기와 세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197
숨쉬기 시작한 후에도
자신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구별하기까지는 여러 달이 걸린다.
점차 복잡한 학습과 지각 경험을 통과해 가면서
'내안'과 '저밖이라는 막연한 구별이 생기기 시작한다.
내 안에 어떤 것이 있다는 구분,
이것이 예고가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이다.
예를 들어 아기가 배고픔을 느낀다. 그는 내부에서 그것을 느낄수 있다.
그런데 엄마가 찰싹 때리면 아기는 그것이 외부에서 오는 자극임을 느낀다.
이제 안에서 오는 것이 있고, 밖에서 오는 것이 있다는 구분이 생겨난다.
엄마가 웃으면 아기는 외부에서 웃음이 오는 것을 본다.
그래서 아기는 그 웃음에 감응하여 자신도 웃는다.
그리고 이 웃음이 내부의 어딘가에서 오는 것임을 느낀다.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것이 에고의 첫 번째 경험이다.
실상, 안과 밖의 구별은 없다.
안은 바깥의 일부이고, 바깥은 안의 일부이다.
그대 집 안의 공간과 집 밖의 공간은 둘이 아니다. 명심하라,
그 공간은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거기에 있는 그대와 여기에 있는 나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에너지의 두 측면,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아이는 에고의 방식을 배우기 시작한다.
두 번째 문은 '자기 동화(self-identity)'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배우고,
오늘 거울에 비친 모습이 어제 비쳤던 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변화무쌍한 경험들 안에서
'나'라는 감각, 자기라는 감각이 지속된다고 믿게 된다.
아이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배가 고프고, 때로는 배가 고프지 않다.
어떤 때는 잠이 오고 어떤 때는 깨어 있다.
어떤 때는 화가 나고 어떤 때는 사랑이 넘쳐 흐른다.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한다.
어느 날은 화창한 날씨였는데, 어느 날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그러나 거울 앞에 서면・・・・
아기가 거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관찰해 보았는가?
그는 거울 속의 아기를 잡으려 한다.
그 아기가 '저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거울 속의 아기를 잡을 수 없을 때 198
그는 거울 뒤로 돌아가 혹시 아기가 여기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살펴본다.
그러나 서서히 그는 그 아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연속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어제도 오늘도 같은 모습이다.
처음으로 거울을 들여다본 아기들은 거울에 매료되어 떠날 줄을 모른다.
그들은 '저 애는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본다.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한다. 단 한가지만이 변화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이미지 (self-image)다.
이것이 에고가 들어오는 또 하나의 문이다.
세 번째 문은 자기존중(self-esteem)'이다.
이것은 아이가 제 스스로 어떤 것을 배우는 데서 오는 자부심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빠' 라는 말을 배우게 되면
그는 하루종일 '아빠, 아빠' 하면서 그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아이는 그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만 오면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하면 아이는 하루 종일 걸음을 시도한다.
계속 넘어지고 뒹굴면서도 다시 일어난다.
이것은 자부심을 주기 때문이다.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 나는 걸을 수 있다!
나는 이 물건을 여기에 서 저기로 옮길 수 있다!"
부모는 아이의 이런 극성스러움 때문에 걱정한다.
그러나 아이는 부모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건을 옮기기 시작한다.
부모는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러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가져오는 것이지?"
그러나 아이는 책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왜 이 물건을 계속 들여다보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그의 관심사는 자기도 물건을 옮길 수 있다는 데 있다.
아이는 동물을 죽이기 시작한다.
개미를 보면 즉시 달려들어 눌러 죽여버린다. 그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
그는 행위를 즐기는 중이다. 그는 매우 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
시계를 보면 아이는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점차 그는 탐험가가 된다.
그가 이런 행위를 즐기는 것은
그것이 아이의 에고에게 세 번째 문을 주기 때문이다.
즉, 그는 나도 할 수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노래를 배우게 되면
그는 아무 사람 앞에서나 노래 부를 준비를 한다.
손님이 오면 아이는 노래 부를 기회가 오기만을 노리고 있다.
또는 춤을 추거나, 흉내를 내는 등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하든 간에
그는 자신이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자기 또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런 행위가 에고를 불러들인다.
네 번째는 자기 확장(self-extention)'이다. 소속감과 소유욕이다.
아이는 나의 집, 나의 아버지, 나의 엄마, 나의 학교에 대해 말한다.
그는 '내것rmine)' 의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내것이 그의 중심 단어이다.
그의 장난감을 집어 들면 그는 장난감에 별 관심이 없을지라도 안돼! 이 장난감은 내꺼야!' 하고 말하는 쪽에 더 흥미를 가진다. 그는 장난감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무도 자신의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장난감을 구석에 던져 버리고 밖으로 놀러 나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 장난감을 건드리기만 하면 아이는 그 장난감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장난감은 내것 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내것(mine) 은 나에게(me)' 라는 관념을 주고,
나에게는 '나(I) 라는 관념을 심어 준다. 그리고 명심하라.
이런 문들은 어린아이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문들은 평생 동안 그대를 따라 다닌다.
나의 집 이라고 말할 때 그대는 어린애와 같다.
내 부인 이라고 말할 때 그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다.
내 종교' 라고 말할 때 그대는 어린애와 같은 수준이다.
힌두교인과 모하메드교인이 종교적인 문제로 싸울 때 그들은 어린애와 같다. 200p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어린아이들은 끊임없이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야!' 하고 주장한다.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이 최고이며 진짜이다. 우리의 신이 가장 강력하다.
다른 종교의 신은 별 볼일 없다.
이것은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태도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평생 동안 그대를 따라 다닌다.
그대는 자신의 이름에 큰 관심이 있다.
내가 사람들의 이름을 바꿀 때 일부 사람들은 아주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개명(改名)을 원치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편지를 써서 저는 산야스를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발 제 이름만 바꾸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왜? 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름을 소중한 재산처럼 여긴다. 사실, 이름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대의 에고는 몇십년 동안 그 이름과 함께 살아왔다. 이름은 에고의 문이다.
그 문이 닫히는 것은 에고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그대의 이름을 바꾸는 이유이다.
이름은 임의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명칭이라는 것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전혀 요란을 떨지 않고 간단하게 그대의 이름을 바꿔 버리는 이유이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이름을 바꾼다.
어떤 사람이 자이나교 승려가 되면 그들은 요란법석을 떨 것이다.
거창한 행렬과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누군가 승려가 되었다!
이제 그는 이 새 이름에 매우 집착하게 될 것이다.
거창한 축제, 그에게 쏟아지는 존경과 명예, 요란한 행사들,
이렇게 되면 핵심이 완전히 빗나간다.
나는 당연한 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의 이름을 바꾸어 버린다.
이것은 이름이 아무것도 아니며 임의적인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름은 너무나 쉽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대는 A라고 불릴 수도 있고, B라고 불릴 수도 있다.
또는 C라고 불릴 수도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실상 그대는 이름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이름이든 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름은 실용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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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 ) 『반야심경 』 초판 2쇄; 서울:태일출판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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