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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제14장 잡 히 심
[대 지]
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함(1-2)
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3-9)
三. 예수님을 은 삼십에 매매함(10-11)
四. 유월절 잔치(12-16)
五. 예수를 판 가룟 유다를 내어 보냄(17-21)
六. 성찬 예식을 창설함(11-25)
七.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함(26-31)
八.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31-42)
九. 예수께서 잡히심(43-50)
十.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침(51-51)
十一. 예수께서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심(53-65)
十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66-72)
[본문강해]
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함(1-2)
. 14:1-2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유월절은 정월(아빕월) 14일이고, 그 날부터 무교절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유월절 다음날 살아나셨다.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유월절 이틀 전이므로 예수께서 잡히시기 하루 전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방책을 구하였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반발하고 소요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명절(유월절)을 피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에 계획한 것보다 빨리 예수님을 잡아죽이게 되었다.
二.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음(3-9)
.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예수께서 고난 주간에 밤에는 베다니에 가서 주무시고, 낮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를 하였다. 이 날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나사로도 함께 있었고, 그 누이 마르다는 일을 보고 있었다(요12:2).
한 여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이다(요12:3).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씻었다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이 발에 흘러내린 것을 마리아가 자기의 머리털로 닦은 것을 말한다. 마리아가 자기의 머리털로 닦은 것은 자기의 가장 귀한 것으로 닦기 위해서였다. 고린도전서11:15에 "만일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고 했다.
"나드유"라는 것은 나드 나무의 뿌리에서 뽑아낸 향유로서 아주 고급 향유였다. 이 향유는 300 데나리온에 팔 수 있는 아주 값비싼 것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이 하루 일한 품삯에 해당되므로 300데나리온은 장정 삼백 명의 품삯에 해당되는 많은 금액이다. 이렇게 값지고 귀한 기름을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리고, 예수님의 발에 묻은 기름을 자기의 소중한 머리털로 닦아 드릴 때에 그 집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대단히 좋게 여기셨다.
. 14:4-5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제자들은 "어찌하여 그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늪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아니하고 허비하느냐"고 불평하였다. 가룟 유다가 먼저 불평을 시작했고 제자들도 동조하였다.대개의 경우 한사람이 불평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이 곧 동조하여 불평하게 된다. 불평은 언제나 불평 분자로부터 시작이 되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조하고 불평이 커지게 된다. 가룟 유다가 먼저 불평을 시작한 것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가끔 훔쳐 가곤 하였다(요12:4-6). 그러므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면 거기에서도 얼마쯤 훔쳐 갈 수 있을 터인데 예수님께 부어 드렸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평한 것이다.
사람들이 불평하는 근본 원인은 자기 중심과 자기의 유익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할 때에 외부적으로는 이것이 틀렸다, 저것이 틀렸다 하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가룟 유다도 왜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는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불평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도 쉽게 동조하여 불평한 것이다. 사울 왕도 아말렉과 싸울 때에 자기가 먹으려고 살찐 짐승을 가져왔으나 대의명분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끌어왔다고 하였다.
우리 성도는 언제든지 불평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모든 것을 성경 원리에 맞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나무라지 않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그 여자의 행위를 기쁘게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이 그 여자를 비난한 것은 결국 예수님을 비난한 셈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보다도 못한 분이신가? 제자들이 조금만 생각하여 보면 모든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을 터인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분내어 제자들이 더욱 분이 난 것은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책망하기를 바랬으나 도리어 기뻐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불평은 예수님께 대한 불평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께 반항하고 불평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뜻과 제자들의 신앙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바쳐 드리는 것보다 가난한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더 큰 일인 줄로 알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적인 면보다 도덕적인 면을 더 크게 여겼고, 예수님을 위해서 물질을 바쳐 드리는 것보다 그것으로 기독교 사업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더 크게 여겼다. 제자들의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 사회주의요 기독교 도덕주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을 허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러한 일을 하는 자를 어리석게 보아 분히 여겼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위해바쳐 드리는 것을 더욱 귀한 일로 믿었다. 물론 마리아는 구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마리아가 제자들보다 더 많이 구제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위로해 준 것을 보면 마리아가 여러 사람에게 선을 많이 베풀고 덕을 세운 것 같다. 그러나 마리아는 도덕적인 선을 베풀어 구제하는 일보다 예수님을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다 바쳐 드리며, 자기를 희생하여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간절히 원했다. 마리아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 예수님과 깊이 사귀며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첫째이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하며 바쳐드리는 정성이 부족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여 선을 베풀고 기독교 사업을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속죄의 죽음을 바로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거기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려고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하고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기쁘게 하여 드린 사람은 마리아뿐이었고, 마리아의 영적 신앙을 바로 알아 준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었다. 마리아가 기름을 붓는 것을 다른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예수님이 인정해 주셨다. 성인(聖人)이라야 성인(聖人)을 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신령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야 신령한 성도를 알 수 있다. 제자들의 신앙은 아직 마리아의 신앙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기름 붓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분히 여겼다.
.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마리아를 괴롭게 하였다. 언제나 신앙이 깊지 못한 사람은 신앙이 깊은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도리어 괴롭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일 계단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이 계단이나 삼 계단의 신앙으로 걸어나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방하며 괴롭게 하는 일이 많다. 제자들은 향유를 팔아 구제하고 싶은데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볶아 붓고있으니 신앙상 보조가 맞지 않는다.
신앙의 정도에 차이가 생기면 신앙이 낮은 사람은 신앙이 높은 사람을 비방하고 마지막에는 죽이기도 한다. 그들은 높은 신앙을 깨닫지 못하므로 그것이 잘못된 줄로 알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잡아죽이게 된다(요16:2). 환난 때에는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잡아 주고 목사가 목사를 잡아 준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성도는 자기 자녀들을 부모의 신앙에 도달할 수 있도록 힘을 써서 인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부모의 신앙과 자녀의 신앙에 차이가 생기고,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옳지 않게 생각하여 점점 빗나갈 염려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바로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을 길러 나아가야 한다. 주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아니하고 육신의 귀에 즐겁도록 가르치면 아이들의 신앙이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년부 학생들에게도 성경만 가르쳐야 한다. 육신의 귀에 즐겁게, 인간의 이성에 맞도록 가르치면 몇 십년을 배워도 신령한 신자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치면 나중에 신령한 귀가 열려 참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신앙이 말씀에 뿌리를 박고 반석 위에 굳게 서게 된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은 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8절). 그러므로 그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방책을 구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마리아는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을 알았다. 또 예수님의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죽음임을 믿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죽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 여자는 죽음이 임박한 예수님에게 무엇을 바쳐 드려야 가장 합당할까 하고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위해서는 옷이나 음식보다도 향유를 붓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임을 성령으로 깨달은 것 같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다음에 향유를 붓는 것보다 살아 계실 때 부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깨달아 자기의 모든 것을 회생하고 다 팔아서 제일 비싸고 좋은 나드 향유한 근을 구하여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이다. 이 향유는 마리아가 경제적인 힘을 다 기울여 사온 것이다(8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은,
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였다.
② 십자가의 구속의 향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였다.
③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드리는 마음으로 하였다.
④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정성과 믿음을 예수님이 좋게 여기셨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바로 알고 그 죽음의 향기에 참여하기 위해 힘을 다하여 희생적으로 향유를 부어드린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에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므로 제자들이 가난한 자 구제하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다.
나는 너회와 찰상 할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 헌신하고 바칠 기회는 항상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회 사업할 기회는 언제나 있으나 예수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주님을 위해 바치고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 기회가 지나가면 봉사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돈다. 건강도 항상 있는 것이 아니며 물질도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있을 때에 힘써 봉사하지 않으면 그 기회가 지나가 버린다.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아무리 힘을 썼어도 하나님께서 허락치 않으셨다. 그러나 솔로몬에게는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성전 짓는 것도 하나님이 기회 주실 때 전적으로 바쳐서 건축해야 된다. 기회가 지나가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물질과 시간과 환경과 건강을 주실 때, 또 하나님께서 일감을 주었을 때에 모든 것을 희생하여 일하여야 한다.
.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힘을 다하여 마리아가 경제적인 힘을 다하여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다. 있는 힘을 다하지 않고 어느 정도만 바치는 것은 안 된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드릴 때에 자기 마음, 정성, 물질, 몸과 모든 것을 바치는 마음으로 부은 것이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알고 주님을 사랑하며 물질적으로도 힘을 다하여 희생하고 바쳐 드려야겠다.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장사할 때에 향유를 붓는 것은 한 예식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왔을 때에 니고데모가 침향 섞은 것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넣고 장사하였다(요19:39).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나귀를 타고 왕의 의식과 거동으로 올라가신 것도 영적 왕으로서 외부적인 의식을 거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영적인 기름 부음을 받았으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의식적인 기름부음이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것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의식이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구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될 것을 믿고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향유를 부어 드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구속 사업은 영적인 면이 있는 동시에 바른 의식적인 면이 있다. 인본주의와 의식주의적인 의식은 필요 없으나 참된 의식은 필요하다. 예수님을 위하여 영적인 면과 제도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리아는 영적으로 예수님의 바른 구속의 도리를 알고 그 구속에 참여하여 향유를 부어드린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터인데 그것을 제자들도 바로 깨닫지 못했으나 마리아가 자로 깨달아 향유를 부어드렸으니 참으로 귀한 일이었다.
.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위를 기뻐하신 것은 그 향유 때문만이 아니다. 마리아의 중심에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정성과 충성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다. 그리하여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미리아의 믿음을 말하여 본받게 하라고 하셨다.
三. 예수님을 은 삼십에 매매함(10-11)
. 14:10-11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를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시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죽일 방책을 찾고 있으므로 모든 대세가 기울어 져서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가룟 유다가 알았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살길은 대제사장편에 서야 될 줄 알고 그들에게 찾아가 협력한 것이다. 또 유다는 돈을 좋아하였으므로 예수를 넘겨주고 많은 돈을 받을 생각이 났다. 유다는 예수 일행의 돈궤를 맡고 있으면서 그 돈을 사사로이 얼마씩 빼내어 쓰곤 하였다. 요한복음12:6에"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하였다.
유다는 평소에 돈에 대해서 양심을 쓰지 않았다. 돈에 대해서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돈 때문에 망할 날이 온다. 가룟 유다가 평소에 조금씩 돈을 도적질하여 쓰다가 나중에는 선생인 예수님까지 팔아 넘기게 된 것이다. 가룟 유다가 훔쳐 쓴 돈은 요즈음 교회의 헌금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돈이나 물건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자기 개인 것보다 더 아끼고 바로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을 쓰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파는 것은 배신 행위이며, 배신은 불진 사회에서도 큰 패역으로 여긴다.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대제사장들이 기뻐하며 은 삼십을 가룟 유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은 삼십은 종 하나의 몸값에 해당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논아 그 돈으로 짤 살아 보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는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가 외부적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체하고 따라 다니면서 속으로는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四. 유월절 잔치(12-16)
. 14:12-16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 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유월절 준비를 지시 받기 위해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 때 예수님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그 집주인에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잡수실 방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그 사람이 예비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거기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분부하셨다. 이 다락방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다. 그 집에서 다락방을 즐거이 예수님께 제공했다. 예수님이 사용하시기를 원하실 때에 무엇이나 바쳐 드리는 것이 믿음을 쓰는 것이다. 다락방을 예수님이 필요할 때에 내어놓은 사람은 참으로 복 받을 일을 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하여 유월절을 예 비 하였다.
五. 예수를 판 가룟 유다를 내어 보냄(17-21)
. 14:17-20 저물매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누가복음22:15에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서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유월절 잡수실 때에 예수님을 팔 자인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알려 주셨다. 악한 가룟 유다를 성찬에 참여시킬 수가 없으므로 예수님이 먼저 떡 한 조각을 찍어 주어서 내어 보내셨다. 예수께서는 배은망덕한 유다에게도 원수처럼 대하거나 분노하여 저주하시지 않고 내보낼 때에도 떡 한 조각을 찍어 먹게 한 후 내어 보냈다. 가룟 유다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친구여 너의 할 일을 하라"고 하여 끝까지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심령의 평안을 잃지 않으셨다.
. 14: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유다를 원수로 대하거나 분노하시지 않은 이유이다. 예수님을 가룟 유다가 늪아 넘겼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사람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되어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지는 줄 알고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와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한다. 요한복음18:11에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다가 미움을 받고, 멸시 천대를 당하며 죽음에 넘기워져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인 줄 알고 달게 받아야 한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이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가시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판 죄 때문에 앙화와 저주를 받게 된다.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배은 망덕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화가 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께 화를 당한다. 창세기12:3에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으니 그 악명이 이 세상 끝 날까지 갈 것이고, 내세에 지옥 형벌이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언제나 복음 운동을 막는 자는 화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六. 성찬예식을 창설함(22-25)
. 14:22-24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성찬 예식을 창설하셨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성찬식의 떡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이다. 또 포도즙은 예수의 피라고 했다. 떡이나 포도즙이 축복하신 후에 예수님의 살이나 피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떡이나 포도즙 가운데 예수님의 살과 피가 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예수님이 영으로 그 떡과 포도즙에 임하여 계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영으로 떡과 포도즙에 공재(共在)한다고 하면 안 믿는 사람이 성찬을 먹어도 예수님을 영으로 영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혹 불신자가 성찬을 먹는다 해도 예수님과는 영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떡과 포도즙에 예수님이 영으로 계시지 않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은 예수님의 살을, 포도즙은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것이다(고전11:24). 그러나 성찬을 믿음으로 참여하는 성도에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하시므로 믿음으로 참여하는 자는 영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이다.
. 14: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① 천년 왕국시대에 부활한 성도들이 새로 나는 포도즙을 마실 것이다. 미가4:4에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고 했다. 이사야65:21에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라고 했다. 천년 왕국 시대에 포도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 그 때 예수님도 성도들과 같이 마시게 될 것이다. ② 신약 교회 시대에 생명의 은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 교회를 친국에 비유했고(마13:24), 생명의 은사를 포도주에 비유했다. 이사야55:1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다. 젖은 하나님의 말씀, 포도주는 생명적 은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뜻은 성도들이 그 생명의 은사에 참여할 것과 예수님이 영으로 교회에 임하실 것을 가리킨다. 새로운 은사, 새로운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새것으로 마시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七.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함(26-31)
. 14: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예수께서 성찬 예식을 거행하신 후 찬미하며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시기 위해 가셨다. 예수께서 그 곳에서 기도하신 후에 잡혀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함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승리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감람산으로 가신 것이다.
. 14:27-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흩어지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다. 스가랴13:7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하신 말씀이 응하게될 것을 예수님이 아셨다. 제자들은 아직도 신앙의 실력이 없기 때문에 환난이 올 때에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여 갈릴리로 가서 공적으로 제자들을 만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14:29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베드로 자신은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였다(31절).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 정도와 실력을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렇게 말했다.
. 14: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자신 있게 말했으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실력과 앞으로 되어질 일을 다 아시고 "닮이 두 번 울기 전아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다 아신다.
마태복음26:34에는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기록되었으나 마가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하여 좀더 세밀하게 기록했다.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보다 분량은 적으나 더 자세히 기록한 면이 많이 있다.
. 14: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호언 장담하고 나서자 다른 제자들도 다 그렇게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정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심문 받는 자리에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다. 그가 주와 함께 죽겠다는 결심과 뜻은 좋았으나 믿음과 실력이 없었으므로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하지 못하고 주를 부인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에게 어떤 믿음이 없었는가?
① 영적 신앙에 서 있는 믿음이 없었다. 제자들은 그 때까지도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 증거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였고,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마20:20-25). 시기와 분쟁은 육신에 속한 증거이다(고전3:1-3). 육신의 생명이 살고자 하면 영적 생명이 죽고 육신의 생명이 죽고자 하면 영적 생명이 산다(마10:39).
②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였다. 빌립보서1:21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생활은 영적 생명으로 사는 생활이다. 제자들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또 떠나서 그리스도와 같이 있을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빌1:23).
③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믿음이 없었다. 스데반은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사모하여 기쁨으로 순교를 하였다.
④ 육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예수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랑에 삼키워지는 것이 순교이다.
베드로나 제자들은 아직 육신의 생명을 예수님과 그 말씀보다 더 사랑하였다. 그 증거로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을 때 불평한 것이다(14:4-5).
八.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32-42)
. 14:32-33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 하사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에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좀더 멀리 깊은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마태복음26:38에는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앞으로 짊어질 십자가의 고통을 미리 앞당겨 놓고, 그 고통을 마음으로 통과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심히 놀라고 슬퍼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육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 아니고, 십자가를 승리로 통과하는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 제물이 되실 때에 그 큰 고통으로 인하여 아픈 데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순간이라도 중단되면 흠(欠) 있는 제사가 된다. 하나님은 흠 있는 제물을 받지 않으신다. 만일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승리로 통과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마음을 잠시라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과 계속 교통하면서 통과할 수 있을까 에 대하여 심히 놀라며 슬퍼하며 고민하셨다.
.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너무 크지만 그것을 승리로 통과하기 위하여 깊은 기도와 간구를 드리려고 세 제자에게 깨어 있으라 말씀하신 후 혼자서 좀더 나아가 기도하셨다.
. 14:35-36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며, 지금까지 십자가를 목표로 걸어왔다. 제자들에게도 여러 번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 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도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가 당도했을 때에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 된다. 세상의 애국자나 사상가들도 죽음이 올 때에 담대히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죽음이 왔을 때에 그 죽음을 면하려고 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다만 그 고통을 지나가게 해달라는 뜻이다. 즉 고난 없는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는 뜻이다. 십자가는 지되 고난을 면케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다. 이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결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자기 요구만 이루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자기 욕심이요 하나님께 가증한 기도이다. 잠언28:9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고 했다(히5:8).
우리 성도들도 순종하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순종을 배우는 기도가 중요하다. 야고보서4:3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다. 예수께서 그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아버지의 뜻을 순종함이 요,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도 아버지께 순종이요, 기도할 때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도 순종이다. 누가복음22:44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순종의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 도와주시고 십자가를 이길 능력을 주셨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과 그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고난받을 각오를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길 만한 힘을 주시고 도와주신다.
. 14:37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와 졸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고,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환난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50절).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나는 기도를 아무리 하려고 해도 기도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은 기도가 안 된다고 중단하지 말고 하나님께 계속 간구 해야 한다. 마태복음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다.
기도가 막힐 때 계속 하나님께 간구 하면 기도의 문일 열릴 수 있다. 또 자기의 잘못을 찾아서 회개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가 막히는 것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막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막히는 것은 죄와(사59:1-2) 자기의 옛 사람이다. 즉 자기의 교만과 고집과 자기를 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서 돌이키고 옛 사람을 다 벗어 버려 주체로 들이켜야 한다. 그렇게 하여도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을 때에는 주기도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께서 "한 시간"동안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돌아보시고, 베드로에게 한 시동안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고 책망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하루에 최소한 한 시간 이상 기도를 하여야겠다. 루터는 매일 두 시간씩 기도를 했으며, 두 시간 이상 기도하지 못한 날은 마귀에게 지는 날이라고 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를 세 번하셨다. 우리들도 한 시간씩 여러 번 기도하며 부르짖으면 기도문이 열리게 된다.
죄를 회개하고자 해도 죄가 생각이 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당겨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앞에 있는 모든 환난을 앞당겨 놓고 그 환난을 통과할 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입기 위하여 기도해야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매일 작은 환난과 작은 십자가를 승리로 통과해야 앞날에 올 큰 환난도 승리로 통과할 수 있게 된다.
.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고 그 시험을 이기려면 영이 깨어 기도해야 한다. 육신으로 사는 생활은 자는 것이요, 영으로 사는 생활은 깨어 있는 것이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도 이기지 못하고 믿음도 지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기도하는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깨어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 큰 고난의 십자가를 승리로 통과할 수 있었다. 하물며 죄인 된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것은 제자들이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거나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영이 깨어서 육신을 쳐 복종시켰으면 기도했을 것인데, 그렇게 기도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될 기도와 을은 일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합리화 시켜서는 안 된다.
. 14:39-40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두 번째 전과 같은 기도(36절)를 하시고 다시 나와 제자들을 보시니 또 자고 있었다. 영이 깨어 기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자다가 깨어 예수님을 보고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무슨 말을 할 바를 몰랐다.
. 14:41-42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는 자고 쉬라 이것은 육신이 자고 쉬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절에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했으니 자는 자가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이요, 또 누가복음21:36에"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깨어 기도하지 못한 사람은 자고 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도 시간에 깨어 기도하지 못한 사람은 깨어 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환난이 올 때 자고 쉴 수밖에 없고, 기도시간에 깨어 기도한 사람이라야 환난이 올 때에 그 환난을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장소에서 성도의 신앙 생활이 결정된다. 제자들은 기도하는 시간에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잡혀 갈 때에도 심령이 자고 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제는 자고 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九. 예수께서 잡히심(43-50)
. 14:43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장 가까이서 양육 받은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예수를 잡고자 하는 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검과 몽치를 가진 무리들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잡으려고 왔다. 이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으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성경으로 이겼고, 믿음으로 이 겼다.
. 14:44-46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 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가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미리 군호를 짜 가를 유다가 입맞추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니 그를 잡으라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그러면서도 유다는 예수님 앞에 와서 가장 다정한 인사법으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면서 입을 맞추었다. 그 때에 그들이 손을 대어 예수님을 잡았다. 사단의 사자는 사랑의 탈을 쓰고 전사를 가장하여 찾아온다.
. 14:47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이고,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이다(요18:10).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한 것은 좋으나 혈기로 대항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큰 오점이 생길 뻔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고 하시며(마26:52) 말고의 귀를 만져서 낫게 해주셨다(눅22:51).
. 14:48-49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원수들이 강도를 잡는 것처럼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으나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붙잡히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을 이루기 위하여(마26:54) 대항치 않고 순순히 응하셨다. 만일 예수님께서 한 번 기도만 하시면 하늘에서 떨 두 영(열두 사단) 더 되는 천사가 와서 원수들을 일시에 멸할 수 있으나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순순히 잡히셨다.
.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이 조금 전에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정작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치고 말았다. 주를 위해 죽는 일은 자기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된다. 순교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정된 자라야 순교할 수 있다.
十.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침(51-52)
. 14:51-52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한 청년은 마가 요한을 가리킨다. 마가는 요한이라고도 한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이 도망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다른 복음에 이 기사가 없는 것은 마태나 누가, 요한이 마가의 도망한 것을 밤이므로 잘 보지 못했거나 보았다고 해도 중요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 같다.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유월절을 잡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후 가룟 유다가 환도와 몽치를 가진 무리를 데리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예수님을 잡으러 찾아왔던 것 같다. 그때에 집에서 베 홑이불을 덮고 자던 마가가 깨어서 이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빨리 예수님께 알려 드리려고 의복을 입을 시간도 없이 베 홑이불을 몸에 두르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달려간 것이 아닐까!
무리에게 잡히매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가 다락방에서 보았던 베 홑이불을 두른 청년이 겟세마네 동산에 온 것을 보고 연락하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여 마가를 붙잡으매 그가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한 것 같다. 마가가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잘했으나 너무 믿음이 없어서 도망하고 말았다. 마가는 ① 벗은 몸으로 도망친 비겁한 사람이었다. ② 바울과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고생이 너무 심하므로 밤빌리아에서 돌아간 배반자였다(행13:13). ③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바울과 바나바를 심히 다투게 한 장본인으로 말썽꾸러기요 무익한 자였다(행15:37-38). 그러나 회개한 다음에는 바울을 잘 도와 구원 운동에 유익한 자가되었다(딤후4:11). 마가가 잘못한 것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회개하여 좋은 열매가 맺힌 것이다. 처음에는 실수가 많았으나 회개하고 끝까지 복음 운동에 충성을 하므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였다. 누구나 일시적 실수가 있을지라도 부지런히 회개하며 끝까지 복음 운동을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시고 귀히 쓰신다.
十一. 예수께서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심(53-65)
. 14:53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갔다.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공의회로 모이게 되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원이었다. 이 산혜드린 공회는 유대의 최고 의회이며 최고 재판부였다.
. 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않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뜰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먼저 뜰 안에 들어갔고, 요한이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간 것이다(요18:15-16). 요한과 베드로가 제자의 자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요한은 대제사장의 친척으로, 베드로는 구경꾼의 자각으로 들어갔다. 베드로가 구경꾼인 체하고 하속들과 함께 불을 조이고 있었다.
. 14:55-56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정죄할 증거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예수님께 대하여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았으나, 그 증거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닌 것은 서로 일치하기 어렵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첫 번째로 안나스에게로 갔고(요18:13), 두 번째는 가야바에게로 갔고(마26:57), 세 번째는 공의회(눅22:66), 네 번째는 빌라도(막15:1), 다섯 번째는 헤롯(눅23:7-8), 여섯 번째는 다시 빌라도에게 와서 재판을 받게 했다(눅23:11).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이와 같이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았다.
. 14:57-58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예수께서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신 일이 있다. 요한복음2:19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도 삼일 후에 그 몸이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거짓 증거자들은 "손으로"라는 말과 "내가"라는 말을 덧붙여서 "이 성전을 내가 헐고"라고 하여 성전을 모독하는 말로 뒤집어 씌웠다. 또 "그 성전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한 말씀을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고 거짓말을 했다. 말씀을 가감하고 뜻을 왜곡시키는 것은 악한 거짓 증거요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 14:59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사실과 진리는 언제나 일치하나 거짓 증거는 서로 합하기 어렵다.
. 14:60-62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물을 때에 "내가 그니라"고 분명히 대답하셨다. 또 인자가 권능자의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반대하든지 죽이든지 진리는 사실대로 밝혀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명백하게 진리를 말해 주었으나 그들은 참람한 말로 여겨 "이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더 증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참람한 말이란 신성을 모독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구름을 타고 오셔서 악한 자는 심판하고 택한 성도는 구원하실 것을 증거 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지금은 악한 자들에게 불법으로 심문을 받고 있으나 그 때는 그들과 인류를 심판하실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 14: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열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자기 옷을 찢으며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통분함을 나타내는 태도를 보이기 위해 옷을 찢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거짓으로 정죄하면서 이렇게 가증한 외식을 취했다.
. 14:64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참람하다고 정죄하고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참람한 말 하나님께만 돌릴 신성한 것을 사람에게 돌려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 참람하다는 것이요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한 죄라는 것이다.
. 14:65 흑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그들(원수들)이 죄 없으신 예수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조롱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멸시와 천대와 학대를 받으신 것이다. 이사야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한 것은 ① 예수님께 대한시기 때문이요 ② 그리스도관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고(요7:27), 또 그리스도가 오면 영원히 살 줄 알았다(요12:34). ③ 자기들의 종교적 권세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하속들과 백성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들이 사주(使嗾)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十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66-72)
. 14:66-68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아래 뜰에 있더니 베드로가 예수께서 심문 받고 계실 때에 그 되어지는 일을 살피기 위해 아래 뜰에서 구경꾼인 체하고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때에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면서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고 말하자 베드로가 "나는 네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첫 번째 부인한 일이다.
. 14:69-71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또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말하였다(마26:71). 그 때에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또 부인하였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말할 때에 베드로가 이번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것은 "내가 만일 예수를 아는 자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또는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내용일 것이다.
.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점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울었다. 누가복음22:61에는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쳐다보시므로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다. 예수님이 쳐다보신 것은 ① "네가 죽을지언정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느냐"고 쳐다보신 것이다. ② "너는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차고 끝까지 사랑하는 눈으로 쳐다보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데 대해 그 사랑에 감격하여 생명을 내놓고 통곡한 것이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을까?
첫째, 베드로는 영적 생명으로 살지 못하고 육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둘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빌1:21). 세째, 육신의 생명을 예수님과 그 말씀보다 더 사랑하고 귀히 여겼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이 죽고자 할 때에 영의 생명이 살고 육신의 생명이 살고자 하면 영적 생명의 역사가 죽는다(마10:39 참조).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려 했고, 또 육신을 터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빌1:20-23). 성도는 이 세상을 터나 하나님 앞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항상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당시 이 신앙과 소망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번씩 부인하게 된 것이다. 참된 신앙이 있어야 생명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