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년-1604),
-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위업(偉業) -
휴정(休靜)(1520-1604)스님은 호가 청허(淸虛)이며 속성이 최(崔)씨이다.
그가 뒤에 묘향산(妙香山)에서 오래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西山大師)
라고 불렀다. 그는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세에 아버지마저
여의였는데, 군수 이사증(李思曾)의 도움으로 상경(上京)하여 취학하였다. 15세에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였다가 낙제하고 세풍을 개탄하여 동학 몇 사람과 남쪽으로
여행 길에 올랐다. 그 길에 그는 지이산(智異山)에서 숭인장노(崇仁長老)를 만나
불법(佛法)의 오의(奧義)에 눈을 떠서 출가를 결심하였다. 그는 여기서 머리를 깎고
숭인장노(崇仁長老)를 양육사(養育師)로 삼고 부용영관(芙蓉靈觀)을 전법사(傳法師)로
하였다. 그는 영관(靈觀)스님에게서 법을 얻고 명산(名山)을 운유(雲遊)하다가, 33세에
당시 문정대비(文定大妃)와 보우선사(普雨禪師)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僧科)에 응시
하여 급제하였다. 34세에 주지(住持)가 되고, 36세 봄에 전법사(傳法師)가 되었으며,
그 여름에 판교종사(判敎宗事)(敎宗判事)가 되고, 그 가을에 판선종사(判禪宗事)
(禪宗判事)가 되어 줄곧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라는 최고 승직(僧職)에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곧 판사직(判事職)이 출가의 참뜻이 아닌 것을 깨닫고 38세되는
겨울에 양종(兩宗) 판사직(判事職)에서 물러나 다시 운수(雲水)의 길에 올랐다.
이리하여 금강산,두유산(頭流山),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 묘향산(妙香山)등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도(門徒)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선조(宣祖) 22년에
정여입(鄭汝立)의 역옥사건(逆獄事件)에 관련되었다는 무고(誣告)로 잡혔으나,
어전(御前) 심문(審問)에서 공사(供辭)가 분명하여 석방되었다.
이 때 왕은 휴정(休靜)스님의 인품이 비범함으로 한 폭의 어필(御筆) 묵죽(墨竹)에
시를 지어 하사하였고 그도 화답하였다. 휴정(休靜)스님은 다시 산사(山寺)로
돌아가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 뒤 선조(宣祖) 25년에 왜란(倭亂)이 일어나 왕은 왕성(王城)을 버리고 피하여
용만(龍灣)에 이르렀으나 관군(官軍)은 변변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쫓기기만
하였다. 이때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스님이 청주성(淸州城)을 도로 뺏아 크게
이겼다는 쾌보(快報)가 전해졌다.
이에 선조(宣祖)는 감격하여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불러 국난을
타개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이에 73세의 노승 휴정(休靜)스님은 감루(感淚)하며,
국내의 모든 승려를 총동원하여,노병자들은 거사(居寺)에서 분수(焚修)로써 신조(神助)
를 빌게하고 그 밖의 승려는 모두 싸움에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선조(宣祖)는 곧 휴정(休靜)스님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제수하니,그는
그 길로 전국 승사(僧寺)에 격문을 돌려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이리하여 그의 제자
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義僧軍)이 일어나니 그 수가 무려 5천여나 되었다.
이듬해 정월에 제자 유정(惟政)스님이 거느린 관동(關東)지방의 800여 의승(義僧)이
가담된 의승군(義僧軍)은, 휴정(休靜)스님의 지휘로 명군(明軍) 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러 평양성(平壤城)을 회복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왕의 행차가 환도(還都)
할 때에 휴정(休靜)스님은 호위를 맡아 정예 의승군(義僧軍) 700명을 뽑아 왕가(王駕)
호위의 임무를 다하였다.
환도 후에는 노병을 이유로 제자 유정(惟政)스님과 처영(處英)스님에게 총섭(摠攝)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妙香山)으로 돌아 갔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國一
都大禪師) 선교도총섭부종수교(禪敎都摠攝扶宗樹敎) 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의
존호를 내렸다.
그는 선조(宣祖) 37년(1604) 에 85세로 묘향산(妙香山) 원적암(圓寂庵) 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제자가 사명유정(四溟惟政) 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는 선가구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그리고 시문(詩文)을 모은 청허집(淸虛集) 등이 있다.
- 선조(宣祖)와 의승군(義僧軍 -
선조(宣祖)25년(1592)임진(壬辰) 4월에 일본(日本)이 대군(大軍)으로 이 땅에 쳐들어
왔다. 이 왜란(倭亂)은 당쟁(黨爭)으로 문약(文弱)해 빠진 이 나라를 여지없이 짓밟아
온통 휩쓸어버렸다. 왜병이 부산을 상륙한지 불과 20일 만에 왕성(王城)이 무너지고,
국왕(國王)은 북(北)으로 피난(避難) 길을 떠났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삼천리(三千里)
는 왜병(倭兵)의 발굽에 짓밟혀 국가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이러한 때에 유생(儒生)과 위정자(爲政者)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히려 이들에게
핍박과 천대를 받아 산속 깊이 쫓겨간 승려들은 왜적(倭賊)을 무찌르고 국난(國難)을
타개(打開)하는데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의승장(義僧將)영규(靈圭)는 맨 먼저 5-600
명의 의승군(義僧軍)을 지휘하여 청주성(淸州城)을 탈환하고 금산성(錦山城)을 탈환
하기 위한 싸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장렬하게 순국(殉國)하였다. 이에 왜병(倭兵)도
물러가 금산성(錦山城)을 회복하였다.
임란(壬亂) 당시 공주(公州) 갑사(甲寺)의 청련암(靑蓮庵)에 있던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는 속성이 박(朴)씨이며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였다.
이러한 즈음에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은 산(山)을
내려와 왕명(王命)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받고,전국 승려에게 격문을
날려 전 불교도(全佛敎徒)가 일어나 적을 쫓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스스로는 1500여 명의 의승병(義僧兵)을 거느리고 73세의 노장(老將)으로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서 전국 의승군 최고 영도자(領導者)로서 일어섰다.
그의 제자 유정(惟政)사명대사(四溟大師)는 금강산(金剛山)에서 일어나 관동(關東)을
중심으로 800여 명의 의승군(義僧軍)을 모았고, 뢰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은 지리산
(智異山)에서 일어나 호남(湖南)을 중심으로 천여 명의 의승군을 모아 행주대첩
(幸州大捷)에서 권율(權慄)을 도와 용전하였다.이 밖에도 많은 쟁쟁한 의승장(義僧將)
들이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앞장섰다.
8년의 왜란을 겼는 동안 호국(護國) 구민(救民)한 이들 의승군은 총 5,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들의 지휘자들인 승장(僧將)들은 대부분이 학덕(學德)과 행화
(行化)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당시의 고승(高僧)들이었다.
그리고 인조(仁祖) 때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3천의승군
을 모았으며, 허백당(虛白堂) 명조(明照) 등 의승장이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의 의로운 승려들은 총궐기하여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국가의 위기를 구하였다. 이것은 불교인의 본연의 자세로서, 태평(太平)의 꿈에
잠겨 당파 싸움만을 일삼던 유생(儒生)이나 위정자(爲政者)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것은 한국불교의 호국정신(護國精神)과 승려의 애국 이민(利民)
행이 살아 있는 좋은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를 전후하여 의승(義僧) 대덕(大德)들이 국가의 위기를 구제한 것은 물론, 황폐하던
교계(敎界)에도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여 쇠퇘 일로의 불교계를 다시 살리게 되었다.
청허(淸虛) 휴정(休靜)과 동문(同門)인 부휴(浮休)선수(善修)는 조선(朝鮮)일대(一代)
의 드문 고승(高僧)이었으며, 그들의 밑에는 문손(門孫)이 번창하여 선교(禪敎)의 종장
(宗匠)이 수 없이 배출하여 장관(壯觀)을 이루었다.
- 휴정(休靜)의 산승가풍(山僧家風) 확립 -
여말(麗末) 선초(鮮初)에 태고보우(太古普愚), 나옹혜근(懶翁惠勤)의 문하(門下)
법손(法孫)들이 적지 않게 상승(相承) 출세(出世)하여 그 문풍(門風)을 발휘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조의 척불(斥佛) 억승(抑僧) 정책으로 승가(僧家)는 그 가통(家統)과
종맥(宗脈)마저 상실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선대(先代) 상전(相傳)의 가풍(家風)과 종통(宗統)을 다시금 확고하게
일으켜 세운 중흥조(中興祖)가 바로 서산휴정(西山休靜)이었다. 휴정(休靜)은 법조
(法祖)를 벽송지엄(碧松智嚴)이라고 하고 지엄(智嚴)은 휴정(休靜)의 스승인 부용영관
(芙蓉靈觀)의 은사(恩師)이시다. 그리고, 지엄(智嚴)은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의
17대 적손(嫡孫)이면서 또한 임제(臨濟)의 12대 손(孫)인 대혜(大慧)와 임제(臨濟)의
18대 적손(嫡孫)인 고봉(高峰)으로부터 육조(六祖) 혜능대사(慧能大師)의 법맥
(法脈)을 비밀히 직전(直傳)받았다고 한다.
지엄(智嚴)이 대혜(大慧)와 고봉(高峰)으로부터 육조 혜능(慧能)의 법통을 500년을
껑충 뛰어 밀사(密嗣) 받아 부용(芙蓉)에게 전하고, 부용(芙蓉)은 휴정(休靜)에게
그 가풍(家風)과 임제종풍(臨濟宗風)을 상승(相承)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휴정 스스로가 직접 밝힌 그의 가풍(家風)이요 법통계보(法統系譜)의 연원
(淵源)인 것이다(휴정찬 벽송행적). 그러나 여기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 태고보우
(太古普愚) 나옹혜근(懶翁惠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여하간 서산대사
(西山大師)에 의하여 가풍(家風)과 종통(宗統)이 이와 같이 확립되었다.
▲ 서산대사 영정
▲ 대흥사 서산대사탑 (보물 제1347호)
西山大師 詩碑에서..
살아 있는 게 무언가?
숨 한번 들여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뱉어내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표 아니던가?
그러다 어느 한 瞬間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空氣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 다 내 것인 양 움켜 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가는 데는
티끌 하나도 못 가지고 가는 法이리니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나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 追憶 씨앗 뿌려 사람 사람 마음 속에
香氣로운 꽃 피우면 天國이 따로 없네,
極樂이 따로 없다네.
生(삶)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 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 구름 自體가 본래 實體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千가지 計劃과 萬가지 生覺이 불타는
火爐 위의 한 점 눈(雪)이로다
논갈이 소가 물위로 걸어가니
大地와 虛空이 갈라 지는구나.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 浮雲起)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사야일편 부운멸 (死也一片 浮雲滅)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부운자체 본무실 (浮雲自體 本無實)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 역여시 (生死去來& 亦如是)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妙香山 원적암에서 蟄居하시며, 많은 弟子를 가르치던 西山大師께서
85歲의 나이로 運命하시기 직전 위와 같은 詩를 읊고 나시어 많은 弟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가부좌를 하시고 앉아 잠든 듯 入籍 하셨다고 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