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마을 / 교정 중
경북 칠곡군 석적면 성곡 2동 441번지다. 지금은 석적읍 성곡리 441번지로 변경되었다. 구미시 인접으로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지면서 인구가 늘어 나 읍으로 승격이 되었다. 내가 살았던 고향 집 주소다. 유학산에서 시발된 산능선 따라 내려오는 기슭의 계곡과 냇가는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산마루 터와 들판 가의 군데군데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 일대를 진실이라고 한다. 긴 계곡이라는 의미의 동네다. 어릴 적에는 동네 곳곳에 멋난 명칭이 참 많았다. 낟동강 인접의 신마지로부터 유학산 바로 아래 동네 별안 골까지 구역마다 촌집이 있는 곳에는 이름이 있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라는 이유로 중1, 2, 3리와 성곡리로 분류정리 되어 있다.
인동 장가의 여러 문파 중에 종파라고 하며 중리 파라고 하는 종손 문파의 본향이 있는 동네다. 심정만 가지고 있지만. 중리 마을이다. 중리에서 유학산 길 중간지점에 웃골이라는 동네도 있다. 웃골도 윗마 아랫마로 나누어져 있다. 아랫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초가집으로 있다가 새마을 사업으로 슬레이트집으로 바뀌었다. 담장도 돌담으로 되었다가 마당을 더 넓히면서 블록담으로 변했다.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앞의 산은 숲디미 산이고 뒤 산은 봉두암산이다. 좌측으로 발원지 유학산이고 우측은 낙동강 넘어 금오산이 보안관처럼 힘차게 자리 잡고 있다.
진실 중간지점에 장곡초등학교가 있다. 그때는 국민학교라 했다. 나는 14회 졸업생이다. 웃골 마을에서 같이 다닌 친구가 남자 6명 여자 6명이다. 추억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너무 오래된 세월이지만 일찍부터 헤어져 잘 못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등 졸업 전부터 한 명씩 헤어졌다. 그당시 자퇴라는 말은 못 들었다. 세월에 학생의 신분지나 사회활동과 각자의 가정생활이 이루어지면서 더 소원해졌다. 삶에 묻혀 기억도 멀어져 간 것이다. 남자 친구들은 모두 안부 알고 있다. 모임도 한다. 여자 친구들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도 있다. 고향 친구라 하지만 각자의 생활환경과 거리감으로 왕래가 아예 없는 친구도 있다. 일부는 중학교 같이 다녀서 중등 모임에서 보곤 한다. 65라는 나이에 새삼스러운 회상이다. 무심함이 참 안타깝다. 추억 기억 글쓰기 하고부터 일어나는 현상 중의 하나로 취부 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초등학교 가다 보면 마을 어귀에서 오른편으로 도장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시미동으로 넘어가는 인동 장터로 가는 고갯길 계곡이다. 내리막 길 문덕서리라 한다. 도장재료로 사용되는 사각형 돌인 사골이라는 돌이 골짜기에서 난다. 지금은 나무숲으로 덮혀 볼 수 없다. 소시적에는 벌거숭이 산등성이었다. 갈 때마다 그 돌을 주어 놀기도 했다. 약재로도 사용 된다고 하는데 그 때는 몰랐다. 쪼가리 같은 한 편의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이 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오다가 계곡 도랑에서 잠시 놀곤 하였다. 한번은 공부 놀이하면서 내가 선생을 맡는다고 한 것 같다. 그 후로 한때 나의 별명이 도장골 선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에서 보면 뒷산인 봉두암산에 큰 바위가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높이가 쉰 질이 된다 하여 쉰 질 바위라 한다. 소풍을 다녔던 장소다. 정상에는 장수 공깃돌이라는 어른 키만 한 둥그런 돌이 하나 있다. 옛적에 장수가 갖고 놀았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돌이다. 지역의 명소 중 하나다. 지금은 유학산에서부터 봉두암산 거처 시미동으로 연결된 등산로로 소문이 꽤 나 있다 한다. 중간지점에 쉼터도 잘 단장되어 있어 산행으로 아주 좋은 코스로 한다. 고향 떠난 후 한 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앞산과 뒷산은 각 집에서 소를 몰고 나와 방목하여던 산이다. 소몰이하면서 앞산 중간 부분에 볼록 오른 봉우리에서 나무 가지 들고 진지 빼앗기 전쟁놀이 하던 생각이 나기도 한다. 공깃돌 놀이도 했다. 남자 여자 친구 모여서 하는 놀이 내가 좀 실력이 나은 것으로 생각이 나고. 우리 집 뒷산에는 산소 두기가 있다. 좌우에 망 등도 세워져 있다. 가끔 기억이 나서 문구로 차용도 한 그 망 등이다. 미뿔이라며 어리적 사용했던 문자라 우기면서 지금도 활용한다. 망 등을 진지 삼아 편을 나누어 서로 빼앗기 놀이는 모이기만 하면 했다. 소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체.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쪼춤바리라면 처지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에게 꽥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지금의 건강을 만들어 준 추억의 장소들이다.
글을 배우고 쓰면서 기억하지 않았던 어릴 때의 추억거리 소환이다. 수필 지도하시는 선생님 말씀이 그대로 적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걱정마세요. 다 기억이 떠오를 겁니다. 생각날 때마다 짧든 길든 기록 해 보세요.” 단번에 이 정도의 추억을 모았다. 자서전을 위한 조각을 정말로 모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초등 입학 전과 후, 학창시절과 사회인으로서의 생활 조각들이 생각날 때마다 챙겨 두어야겠다. 마음이 어릴 적 동심이다가 공부하는 육순 학생으로 사춘기의 첫사랑 애증도 접근하면서 미소인지 비소인지 머금어진다. 엄니와 함께했던 생활이 내면에서 그 무엇의 엉김으로 돌아다닌다. 더 찾아내어 보자. 아직은 두서가 없다. 가감 없이 그대로로 엮어 보기로 해 본다. 첫출발을 했다.
2024. 03. 19.
그리운 진실 마을 /초고
경북 칠곡군 석적면 성곡 2동 441번지다. 지금은 석적읍 성곡리 441번지로 변경되었다. 내가 살았던 고향 집 주소다. 유학산에서 시발된 산기슭의 계곡과 냇가는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산마루와 들판 가 군데군데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진실이라고 한다. 긴 계곡이라는 의미의 동네다. 어릴 적에는 동네 명칭이 참 많이도 있었다. 신마지로 부터 별 안 골까지 구역마다 촌집이 있는 곳에는 이름이 있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라는 이유로 중1, 2, 3리와 성곡리로 분류정리 되었다.
인동 장가의 여러 문파 중에 종파라고 하며 중리 파라고 하는 종손 문파의 본향인 중리 마을이다. 중리에서 유학산 길 중간지점에 웃골이라는 동네도 있다. 웃골도 윗마 아랫마로 나누어져 있다. 아랫마에 우리 집이 있었다. 초가집으로 있다가 새마을 사업으로 슬레이트집으로 바뀌었다. 담장도 돌담으로 되었다가 마당을 더 넓히면서 블록담으로 변했다.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앞산은 숲디미 산이고 뒤 산이 봉두암산이다. 좌측으로 발원지 유학산이고 우측은 금오산이 보안관처럼 힘차게 앉아 있다.
진실 계곡 중간지점에 장곡초등학교가 있다. 그때는 국민학교라 했다. 웃골 마을에서 같이 다닌 친구가 남자 6명 여자 6명이다. 추억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너무 오래된 세월이지만 일찍부터 헤어져 잘 못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초등 졸업 전부터 한두 명씩 헤어졌다. 그당시 자퇴라는 말은 못 들었다. 세원에 학생의 신분을 지나 사회활동과 각자의 가정생활이 이루어지면서 더 소원해졌다. 삶에 묻혀 기억도 멀어져 간 것이다. 남자 친구들은 안부 정도 알고 있다. 여자 친구들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도 있다. 고향 친구라 하지만 각자의 생활환경과 거리감으로 왕래가 아예 없는 친구도 있다. 65라는 나이에 새삼스러운 회상을 한다. 무심함이 너무 안타깝다. 추억 기억 글쓰기 하고부터 일어나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가기 전 마을 어귀에서 오른편으로 도장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내리막 길인데 문덕서리라 한다. 도장재료로 사용되는 사각형 돌인 사골이라는 돌이 골짜기에서 난다. 지금은 나무숲으로 덮혀 볼 수 없다. 소시적에는 벌거숭이 산등성이었다. 갈 때마다 그 돌을 주어 놀기도 했다. 쪼가리 같은 한 편의 기억들이 하나씩 생각이 난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집으로 오다가 계곡 도랑에서 잠시 놀곤 하였다. 한번은 공부 놀이하면서 내가 선생을 맡는다고 한 것 같다. 그 후로 한때 나의 별명이 도장골 선생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에서 보면 뒷산인 봉두암산에 바위가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높이가 쉰 질이 된다 하여 쉰 질 바위라 한다. 소풍을 다녔던 장소였다. 정상에는 장수 공깃돌이라는 어른 키만 한 둥그런 돌이 하나 있다. 옛적에 장수가 갖고 놀았다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돌이다. 지역의 명소 중 하나다. 지금은 유학산에서부터 봉두암산 거처 시미동으로 연결된 등산로로 소문이 꽤 나 있다 한다. 중간지점에 쉼터도 단장되어 있어 산행으로 아주 좋은 코스로 한다. 고향 떠난 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앞산과 뒷산은 각 집에서 소를 몰고 나와 방목하여 키웠다. 소몰이하면서 앞산 중간 부분에 볼록 오른 봉우리에서 나무 가지 들고 진지 빼앗기 전쟁놀이 생각나기도 한다. 공깃돌 놀이도 했다. 남자 여자 친구 모여서 하는 놀이 내가 좀 실력이 나은 것으로 생각나고. 뒷산에는 산소 두기가 있다. 좌우에 망 등도 세워져 있다. 가끔 기억이 나서 문구로 차용도 한 그 망 등이다. 미뿔이라며 어리적 사용했던 문자라 우기면서 지금도 활용한다.. 망 등을 진지 삼아 편을 나누어 서로 빼앗기 놀이는 모이기만 하면 했다.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했다. 쪼춤바리라면 처지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에게 꽥 인기가 있는 아이였다. 지금의 건강을 있게 해 준 추억의 장소다.
글을 배우고 쓰면서 기억하지 않았던 어릴 때의 추억 소환이다. 수필 지도하시는 선생님 말씀이 그대로 적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걱정마세요. 다 기억이 떠오를 겁니다. 생각날 때마다 짧든 길든 기록 해 보세요.” 단번에 이 정도의 추억을 모았다. 자서전을 위한 조각을 정말로 모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초등 입학 전과 후, 학창시절과 사회인으로서의 생활 조각들이 생각날 때마다 챙겨 두어야겠다. 마음이 어릴 적 동심이다가 공부하는 육순 학생으로 사춘기의 첫사랑 애증도 접근하면서 미소인지 비소인지 머금어진다. 엄니와 함께했던 생활이 내면에서 그 무엇의 엉김으로 돌아다닌다.. 더 찾아내어 보자. 아직은 두서가 없다. 가감 없이 그대로로 엮어 보기로 해 본다. 첫출발을 했다.
2019. 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