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양씨 유래
청주 양씨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시조는 양기(楊起)이다.
고려열전에 보면 삼중대광보국중서성정승 양기의 부는 중서성정승인 양인보(楊仁保)이며, 조부는 양간(楊幹)이며 중조는 역시 중서성정승인 양선재(楊善才)인데 원래는 관서 사람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양기는 중국에서 태어나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 지위가 삼태(三台)에 이르렀으나 청검과 소박함이 천하에 으뜸이라, 사는 집에 누각과 연못이 없으므로 황제께서 공에게 말하기를 공의 청백함은 선세 이래로 자손에게 끼친 바로써 경이 이어받아 그 유풍이 세상에서 칭송되고 중히 여기니 짐이 가상히 여겨 짐의 자손을 부탁하는 바이니 경은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같은 책임으로 짐의 자손도 청백을 본받도록 해달라며 공에게 정승을 맡기시며 공주를 보살피게 하였다. 공주 또한 경중히 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섬기던 중 공주가 고려의 황에게 출가하여 우리나라로 올 때, 즉 공민왕이 북경에 머무르다가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고려 충정왕 3년(1,351) 노국대장공주와 같이 귀국한 때 공이 노빈도령 금자광록대부 체찰사 노국삼명사신으로 고려로 들어올 때 황제께서 공에게 말하기를 고려가 전에 태조에게 공이 있어 국혼이 허락되어 공주로 하여금 동국으로 출가하게 되었으니 경이 이미 부탁 받은 책임도 있는 터이니 더불어 같이 가서 동국을 도와주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고려에 들어오니 임금께서 중국황제의 정중한 돌봄에 감사하고 공이 오신
것을 기뻐하며 말하기를 중국의 귀한 사신을 내가 맡은 바가 되었으니 덕택이 가볍지 않으며, 다행히 하늘이 인자하고 어진분을 인도하여 주시어 우리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본받게 되었는데 어찌 공경치 않으리요 하였다.
홍무말년에 다시 중국에 들어가 지극한 계책을 펴서 말하기를 동국이 궁벽한 바닷가에 있어 읍들도 극히 적고 백성들이 피폐에 지쳐있어 세공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유를 들어 상달하였다. 그리하여 비로소 각종 세공이 감면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가 부하게 되고 백성이 안락하여 마침내 태평함을 얻게 되자 나라에서는 공을 벽상삼한창국공신 상당백에 봉하고 해주와 송화를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나 사양하여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를 봉하였다.
돌아가신 후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고 호를 암곡(巖谷)이라 하고 진사을 송화 묵산 수중사에 모셨으며, 묘소는 백천군 유곡면 영성리 지동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주 한씨로 동정 문길의 따님으로 묘소는 합폄이며 슬하에 6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서원백 성주 둘째가 정승공 천주(天柱), 셋째가 전서공 만수(萬壽), 넷째가 서평군 지수(之壽), 다섯째가 밀성군 근(根), 여섯째가 당악군 포(浦)인데 이들이 다 현달하여 현재 6개파로 나뉘어 졌다. 우리 영천에는 넷째인 서평군파와 여섯째인 당악군파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영천 입향조의 상계로 보면 영천입향조 양효지(楊孝智)의 종숙 양배의 묘소와 효자각이 영천에 남아 있고 그가 영천에 살았던 것은 확실하나 그의 아들이 울산으로 가고 또한 후손들이 경주 등에 거주하는 등 영천에 세거를 하지 않기에 입향조로 보기는 어렵다.
양효지는 청주 양씨 시조공인 양기의 현손이다. 그러므로 그의 상계는 증조부, 조부와 부친만을 기록하면 되므로 양배의 부친 즉 양효지의 종조부까지만 기록한다.
2세 양지수는 시조공 양기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벼슬은 광정대부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으며 또한 노왕의 장인으로서 중국 조정에 출입을 하여 그 권세가 막강하였으나 중국을 드나듬에 행장에는 패물하나 없이 초라했고, 창 밑의 마당이 좁아 말을 밸 자리가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평군과 함께 청백리에 봉해졌다. 먼저 부인은 정경부인 밀양 박씨이며, 나중 부인은 정경부인 죽산 안씨로 신화택주에 봉해졌으며, 전서 국상의 따님으로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홍면 부곡리에 있다. 슬하에 5남 4녀가 있는데 첫째
홍립은 전서이고 둘째 흥야는 참의, 셋째 첨식은 전서, 넷째 천진은 개국공신으로 안악군에 봉했고 시호는 경안이며, 다섯째 천록은 판한성사이다. 사위는 판서 최용과 이문화이며, 셋째 딸은 노왕비이며 막내 사위는 최운해이다.
3세 양첨식의 처음 이름은 천식이며 벼슬은 호조전서를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경주 최씨이며 묘소는 선영 아래 있다. 슬하에 5남 1녀가 있는데 첫째 웅은 전서이며, 둘째 경은 현감인데 따님이 세종의 빈인 혜빈이다. 셋째 화는 대호군, 넷째 후는 가선대부돈지돈령부사이며 다섯째는 맹, 사위는 소감인 조민경이다.
3세 양천진은 보국대부행호조전서인데 주청사로 중국에 들어가 황제를 접견할 때 고려의 실정을 묻자 세공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아뢰고 수년을 체류하며 벼슬을 하였고 공부에 공부에 기록되어 있는 12제국의 세공과 육부의 판적 가운데 있는 것까지 우리 나라 세공을 영원히 삭제하고 공적을 다 정리하고 돌아왔다. 이에 고려에서 안악군으로 봉하고 안악을 식읍으로 하사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자 다시 청백리에 봉하고 시호를 경안이라 하사하였다. 부인은 정경부인 보성 선씨로 밀직부사 천주의 따님이며 묘소는 장진군
북면 마답리에 있다. 슬하에 7남 3녀가 있는데 첫째 배는 통정대부행동래진병마사이며 둘째 수는 검판한성부윤, 새째 혓은 목사, 넷째 억은 주서, 다섯째 치는 병마절도사, 여섯째 제는 사직, 마지막으로 동은 통덕랑이다. 사위는 영의정을 지낸 황희, 주부 문태,사정 최유랑이다.
4세 양화의 자는 포어, 호는 의헌으로 벼슬은 대호군이다. 부인은 정부인 여산 송씨로 병조판서 인수이며 묘소는 선영 할아버지 묘소 아래다. 슬하에 5남 3녀가 있는데 첫째는 효인이며 둘째 효의는참판, 셋째 효보는 첨정, 넷째 효래는 판서이며, 다섯째 효지는 영천 입향조이다. 사위는 임팽손, 안0, 김효숙 이다.
입향조의 내력
청주 양씨 영천 입향조 양효지 그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지금 영천시 화산면 화산리 효지 마을이다. 당시 도성을 떠나 은거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단종이 쫓겨날 때 선왕 즉 세종의 유언을 들어 세종의 혜빈 양씨가 옥새를 내놓지 않겠다고 버티다 참화를 입자 혜빈과 사촌간이며 더구나 지조있고 절개 충만한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정통성 잃은 왕조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처음 은거한 곳은 고향이었으나 수년 후 효지마을로 입향하여 마을 이름조차 효지로 부르게 되었다. 그의 종숙인 양배가 이미
이곳에 터를 잡고 있은 데서 그 연유를 찾고자 했으나 그도 어려웠다. 양배 또한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양배의 처남이 경주 김씨로 처음 영천에 입향한 호연당 김자양이기에 좀더 고증을 지켜볼 일이다. 향중에는 공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덕강서원을 세워 향사를 받들고 있으며 양효지의 인물과 내력 등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신도비명을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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