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종족(宗族)의 역사이며 가문의 이력서이다. 유구한 문화와 화려한 업적을 남기신 조상들의 얼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 종족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수불가결한 보전(寶典)이다
우리 문중의 족보를 처음 발간한지 어언 520년이나 되었다. 우리 창녕 성씨의 수보사를 더듬어보면, 성원(成源)의 고보(古譜)에 이어 판관 성중성(成重性)께서 성종 14년(1493)에 계축보(癸丑譜)를 발간한 이래 대보(大譜) 및 파보(派譜)와 세보(世報)를 수십차례 간행했다.
12세 창산군 수익(昌山君 壽益)께서 속보(續譜)를 만들어 간행코자 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해 난중에 돌아가셔서 발간치 못하다가, 셋째 아들이신 연강공 진선(烟江公 晉善)께서 18년간 자료를 더 수집해 경상도관찰사로 계실 때 족보를 간행케 되었으니 이것이 광해군8년(1616)에 발간된 만력병진보(萬曆丙辰譜)이다.
그 후 유촌공 환(柳村公 煥)께서 숙종 35年(1709) 기축년에 창녕 성씨의 로상(路上)파와 로하(路下)파가 서로 동성이족(同姓異族)으로 알려져 있던 것을 시중공 송국(侍中公松國)의 두 아들 공필(公弼)과 한필(漢弼)이 한 형제임을 밝히고 합보(合譜)를 발간하니 이것이 기축대보(己丑大譜)이다. 또한 공께서는 창효사(昌孝寺)와 세덕사, 물계서원(勿溪書院)을 창건해 8분의 선현(先賢)을 배향하셨다.
우리 창녕 성씨의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 중윤을 지낸 인보(仁輔)이시다.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신라 때 대관(大官)인 성저(成貯)의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약사 成氏略史」에는 시조 인보께서 고려 문종 때 우리 성씨를 처음 만든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 외 문헌사료에도 시조는 인보로서 윗계보는 밝혀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이것이 우리 성씨의 유래이다.
「국조문헌」에는 주(周)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인 성(?)나라 숙무(叔武)의 후손들이 나라이름을 따서 성씨(?氏)로 삼았는데 뒤에 초나라에게 멸망되자 ?을 떼고 성씨(成氏)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승인문학원」에는 당나라 때 학사(學士)로 상곡(上谷) 출신인 성경이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우리 역사기록에 성씨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기원전 108년 북부여의 번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 때 번조선의 신하 5명이 작당해 우거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할 때 끝까지 나라를 지키다가 암살당한 성이(成已) 장군이 있다. 그 후 백제에는 의자왕 때 충신성충(成忠)이 있었으며, 신라 때에는 성저(成貯)가 등장하나 시조 인보와의 연관성은 알수가 없다. 그리고 고려 때 중윤호장 숙창(中尹戶長 淑昌)이란 분이 시조 인보(仁輔)를 낳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