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발꿈치가 상해야 바른 길로 가게 되는 것이며, 고난은 참으로 힘들지만 유익하다.
2) 경건으로 번역한 ‘유세베이아’는 거룩한 뜻은 강한 경외심과 헌신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3) 이미 이루어지고 계속해서 이루어짐이다. 금생이나 내생을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4) 그리스도 예수가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며, 미래격인 금생과 내생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 본론
1) 발꿈치가 상해야 바른 길로 가게 되는 것이며, 고난은 참으로 힘들지만 유익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발꿈치가 상하게 되어야 돌이켜서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된다. 말씀 안에서의 고난은 참으로 힘들다. 과정은 어렵지만 결과는 유익다.
“육체(소마티코스)의 연습(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유세베이아)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현재)생(조에)과 내(멜로 : 현재 오고 있는)생(조에)에 약속이 있느니라(소유 하니라) (딤전 4:8).”
2) 경건으로 번역한 ‘유세베이아’는 거룩한 뜻은 강한 경외심과 헌신적인 뜻을 포함하고 있다.
경건으로 번역한 ‘유세베이아’는 거룩한 뜻으로 강한 경외심과 헌신적인 뜻을 갖고 마음의 속성을 알아내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는 속성을 나타낸다. 종교인들에게는 일어나기가 힘든 일이다.
누스를 온전히 정복할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고난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싸움이다. 그러면 내생으로 오역하고 있는 ‘조에스 테스 멜루세스’에서 ‘멜루세스’는 현재 분사로서 내생인 미래형이 아니다. 지금 현재 계속 오고 있다는 뜻으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약속이다.
3) 이미 이루어지고 계속해서 이루어짐이다. 금생이나 내생을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약속’으로 번역한 ‘에팡겔리안’은 서약에 대한 소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이다. 곧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현재 나타나심을 말씀하고 있다. 지금 현재 내 안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이미 오셨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오시고 있는 것이다. ‘금생’으로 오역한 ‘조에스 테스 뉜’에서 ‘뉜’은 소유격으로 현재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 이루어지고 있고 계속해서 이루어짐이다. 금생이나 내생을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조에스 테스 뉜”은 현재 그리스도 예수와 내가 하나 되어 있음을 뜻하고 ‘조에스 테스 멜루세스’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되어 있는 내(예수 차원의 나)가 계속해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에스 테스 뉜’과 ‘조에스 테스 멜루세스’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4) 그리스도 예수가 결코 떠나는 일은 없으며, 미래격인 금생과 내생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결코 떠나지 아니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미래격인 금생과 내생이 아닌 지금이다. 지금 현재 나와 하나 된 그리스도 예수의 실상을 말씀하고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그리스도 예수로 변한 나(예수 차원)를 말씀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로 변화된 내가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설명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다. 이래서 종교인들이 번역을 하면 크게 오해하여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미래의 예수는 없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