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에 있는 이유
일본 생활을 그만두고 왜 우리 가족이 한국에 사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아직도 우리 가족이 일본에 살고 있는 줄 아는 지인들도 더러 있다. 원래 남의 인생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은 모르면 자기 멋대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여기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내가 아이 때문에 한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한국 사람 만들려고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해 버린다. 뇌암(악성뇌종양)에 걸린 내가 마치 죽기 전에 아이를 한국사람으로 키우려는 욕심에서? 한국이 살기 좋으니까? 일본이 싫어서? 다 틀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를 장애인으로 키울 것인가? 정상인(비장애인)으로 키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시운이는 일본에서 유치원 때 또래 아이들보다 정신연령이 1년 느리다는 것으로 [발달장애아] 판정을 받았다. 소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특수 반에 들어가야 할지 보통 반에 들어가야 할지 고민이었다. 일단은 보통 반에 들어가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고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2015년 4월생~2016년 3월생의 아이들이 입학대상이었다. 시운이는 2016년 1월생이니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편이었다. 입학 후 1학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시운이의 언어능력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뒤떨어진다는 말을 나는 듣게 되었다. 혹시 집에서 한국말을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부부끼리도 일본어로 대화하고 아이에게도 언어적인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일본어만 사용했다. 그런데 시운이는 일본어 어휘가 부족하고 또래 아이들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2학년(2023년)부터는 특수반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와 아내는 담임 선생님의 판단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시운이 입학통지서 날아왔다. 어떻게 할 거냐?] 한글도 모르고 한국말도 전혀 못 하는 아이가 어떻게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나? [그러면 네가 교감선생님에게 직접 말해라] 그래서 나는 밀주초등학교 교감선생님에게 직접 전화했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은 금방 배우고 적응합니다. 한국은 다문화가정 지원정책이 잘 되어있습니다. 수업시간에 한국말을 일본말로 통역해 주시는 분을 찾아보면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위해 통역까지? 그렇지, 한국에는 다문화가정 지원정책이 있었지... 일본에는 없는 말... [다문화가정] 이대로 시운이가 2학년부터 발달장애인으로 특수반 생활을 시작할 것인지, 한국의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인지... 아이의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에 신중하게 결정을 해야 했다. 결론은 당연히 정상인(비장애인)으로 키우는 것. 아내는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두었고 우리 가족은 일단 한국 생활을 해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아이가 한국생활을 힘들어하거나 혹시라도 등교거부를 한다면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각오를 하고 왕복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시운이는 2023년 3월에 입학했다. 2016년 1월생~12월생의 아이들이 강당에 모였다. 시운이는 여기 한국에서는 빨리 태어난 1월생. 일본에서 온 아이라고 입학식에서 시운이를 소개할 때 사회를 맡으셨던 선생님께서는 일부러 일본어로 소개해 주시는 배려까지... 감동이었다. 학교에서는 다문화센터(가족지원센터)를 통해 거의 자원봉사 수준으로 통역해 주실 도우미 선생님까지 알선해 주셨다.
그렇게 1학년 1학기 생활을 무사히 끝냈다. 시운이는 일상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 할 수준의 한국어 실력이 되었다. 이제 통역 도우미 선생님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 아이가 어디 발달장애인 판정을 받아야 할 아이인가 싶을 정도의 성장을 보여줬다. 일본에 있는 소학교에 돌아갈래?라고 물어봤을 때 시운이는 한국의 초등학교가 좋다고 말했다. 학교 급식도 맛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수 있는 학교, 다양성을 인정해 주는 사회 분위기...
결국 아이 교육과 성장에 맞는 환경을 선택했을 뿐, 결코 한국인으로 키우고 싶어서라든지 일본이 싫어서가 아니다. 아이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상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시모토 시운]으로 생활했던 아이가 [박시운]으로 당당하게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불편하게 된 것은 해마다 두 번(4월, 10월) 뇌종양 검사를 받기 위해 도쿄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의 의료상황을 보면, 내가 일본 영주권을 포기할 수 없도록 한다.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어쩔 수 없는 지금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2024년 6월 22일 서울에서
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