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세계]
‘삶의 경계’에서 조감하는 생명성
5월, 신록의 계절이다. 일찍이 노천명 시인이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 것은 이 싱그러운 신록이 절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신비한 시간의 선물인 신록 속에 묻혀 있노라면 생명의 오묘함에 심취하게 된다.
5월은 잎의 달이다. 따라서 태양의 달이다. 5월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도 사랑한다. 절망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권태로운 사랑 속에서도, 가난하고 담담한 살림 속에서도 우유와 같은 맑은 5월의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희열을 맛본다.
이어령의 「茶 한 잔의 思想」에서도 5월은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잎’과 ‘태양’ 그리고 ‘사랑’과 ‘생명’의 ‘희열’은 ‘절망’과 ‘체념’과 ‘권태’와 ‘가난’을 모두 치유할 수 있는 모태가 되고 있다.
우리들 생명은 유한성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짙푸른 신록처럼 다시 소생할 수 없다는 시인들의 사유는 그 ‘삶의 경계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주제 역시 다변적이다.
지난 4월호 『문학세계』에서는 이러한 생명성에 대한 탐색을 형상화한 작품을 많이 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계절(혹은 시간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경계에서 물기를 탈, 탈, 털어낸 진실 / 그 고뇌와 고독 속에서만 사랑을 만나고 / 최후의 축복이 내려지리라는 믿음으로 / 아침 이슬을 머금는 꽃잎에게서는 / 정녕 아름다운 미소로 자유가 맴돌고 있으리라
--박병구의 「물가에 앉은 수선화여」끝 부분
박병구는 ‘삶의 경계에서’ 지금 고귀한 생명의 ‘진실’을 탐구하고 있다. ‘수선화’라는 보편적인 사물에서 그가 추구하려는 예비적 ‘믿음’이 ‘고뇌와 고독’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정서의 전환이다. 그는 ‘자기 안에 매여서 애석하게 버린 / 유한한 시간의 평화와 /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안식처로 / 물가에 반사되는 네 모습은 / 하늘이 비치는 외로운 전설을 맞고 있’는 시적 정황을 설정함으로써 그가 현실을 통해서 직시하는 미래의 생명성을 예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최후의 축복’과 ‘아름다운 미소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쓸쓸한 날들’을 또는 ‘흔들리는 혼불’을 감내해야 하는 자애(自愛)의 의지를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다시 함께 발표한 「안구건조증」에서도 ‘서걱거리는 운명이 / 영겁에 매달린 삶의 궤적 사이로 / 마르지 않던 눈물샘에서 / 뜨겁게 흐르던 눈물이 지워지는 세월’이라는 어조가 ‘삶의 궤적’을 통해서 감지된 ‘운명’이나 ‘영겁’의 ‘세월’이 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그립다는 남루한 의문이 / 헛되고 부질없’음으로 주제를 창출하는 점도 시간성과 병합된 생명의 탐색이 명징하게 도출되고 있다.
너른 습지에 밤 깃들면 / 저들끼리 몸 부비며 눕고 / 찬별들 머리 위로 떨어진다 // 산세 나지막해 편안한 도시 / 상처 진 영혼들 모여든 그곳에 / 질펀한 땅속 깊이 / 생명 뿌리 뻗어가는 너 // 바람이 분다 / 오염된 흙탕물이 서러워 / 소리 없이 흐느낀다 // 또 바람 소리 / 달랠 수 없는 외로움까지 / 어둠을 탄다
- -김하은의 「갈대 습지」전문
한편 김하은 역시 ‘상처진 영혼들 모여든 그곳에 / 질펀한 땅속 깊이 / 생명 뿌리 뻗어가는’ ‘갈대 습지’에서 그 생명들을 탐구하고 있다. 이는 ‘상처진 영혼들’과 ‘생명의 뿌리’가 대칭을 이루면서 화해를 시도하는 시적 발상이나 주제의 추적은 생명성에 대한 강렬한 정서의 반응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람’이 불고 ‘오염된 흙탕물이 서러워 / 소리 없이 흐느낀다’는 정황이 현실과 사유 사이에서 표징되는 갈등 구조의 해소를 자탄하는 변화도 엿보인다. 이러한 ‘외로움’과 ‘어둠’이 포괄하는 현실의 문제가 생명과 조화함으로써 시적 진실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수산시장에서 일출을 보다」에서도 동류의 이미지를 확인하게 되는데 ‘누가 그 아픔을 알까’라거나 ‘생존의 힘든 겨루기가 / 시작된다’는 어조가 바로 생존경쟁에서 획득한 새벽 ‘수산시장’의 생명성이며 「가을 허상(虛像)」에서 ‘온갖 허수아비 활보하는데 / 내 안의 생명은 잠들려 한다 / 아, 사랑을 버린 사람 / 초가을 볕에도 가슴 시리다’는 그의 현실적 조망은 예리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람은 뒤돌아보지 않고 / 달아나 창가에 잠시 머문다 / 흐리던 하늘이 벗겨지고 새벽 숲 냄새가 / 버짐으로 피어난다 // 등산로 가녘 밑둥에 / 조곤조곤 다람쥐 보금자리 들썩이고 / 추위에도 담담한 벗은 가지 / 드문드문 까치집 이고 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럴 / 자선남비 댕그렁 소리에 / 반생도 남지 않은 구름이 무심히 흐른다
--승명자의 「떠나는 세월」전문
승명자의 생명성은 성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추위에도 담담한 벗은 가지’나 ‘반생도 남지 않은 구름’이 내포한 사유의 원류는 ‘떠나는 세월’과 상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강조하는 ‘반생’의 유추가 ‘세월’이라는 새로운 시간에 비례하여 소멸되는 생명에의 성찰이 더욱 깊게 작용하고 있어서 그가 구가하려는 시간과 생명의 동질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가을 여행」에서도 ‘삶의 조각 지천에서 건져 / 화폭에 담아내는 사람들이 / 단풍보다 곱다’는 어조로 보아서 역시 성찰의 한 단면에서 조감하는 생명의 예비적 사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촛불」에서도 ‘생명 산출의 고통은 /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과정은 그가 희구하는 ‘사랑’과 ‘설레임’과 ‘그리움’이 복합적으로 ‘기도’로 승화할 때 그의 생명성은 더욱 무엇인가를 내면에서 갈구하고 있다.
눈 시린 들판에서 헹구고 온 / 태초의 음성이 계단을 높이는 / 오늘은 / 죽음조차도 하얀 펄럭임으로 / 먼길을 재촉하는데 / 하늘의 푸름은 길을 잘못 들어 / 부끄럽다고 문을 닫네
--채수영의「눈 내린 날은」중에서
채수영의 생명성은 ‘죽음’이라는 소멸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소멸도 자기 성찰에서 사유의 진원지를 유추하게 되는데 어쩔 수 없는 현실 적응(혹은 시간 적응)에서 수용해야 할 생명의 순리를 확인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그는 이를 ‘마지막으로 빛나는 / 흰빛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난 호 신인상 당선작인 김회성의 「인생길」에서도 ‘어둠으로 감싸는 처연한 쉼터 / 바스락 낙엽 밟으며 / 호숫가 벤치에 홀로 앉아 노래하다 / 어느 순간 맞이할 아름다운 종착역’ 이라는 생명의 소멸의식을 감지함으로써 ‘인생길’을 형상화하고 있다.
김영화는 「머리칼」에서 ‘흔들리는 머리칼 속에 / 속삭이는 사랑의 전언은 / 보랏빛 가슴의 환희련가 / 한생 마르지 않는 정열의 샘물인가’하고 ‘한생’에 대한 실체를 조감하여 생명성을 언술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설레게 하는 무형을 옮겨다 놓고 / 꽃이 피는 꽃밭에서 고칠 수 없는 모진 열병에 / 저항의 깃발같이 고운 노래 부르고 마는 이름 / 끝나지 않는 생의 영화를 사랑이라 말합니다
--은학표의 「사랑이라 말합니다」중에서
은학표는 ‘생의 영화’에서 생명성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대체하는 시법을 구사하고 있다. 누군가 사랑은 생명의 꽃이라고 했던가. ‘꽃이 피는 꽃밭’과의 상관성도 결국 ‘사랑’으로 귀결함으로써 그의 생명은 예찬되고 있다. 이처럼 삶의 궤적을 반추하는 ‘삶의 경계’에 서서 한 생명의 소멸을 예감하는 시인들의 사유는 단순한 회한(悔恨)도 아니며 현실 타협은 더욱 아니다. 다만 존재의 의미와 결부하여 새롭고 지향적인 순응의 미학을 살리는 성찰의 의식이 내표되어 있는 것이다.
금줄을 쳤다. 왼새끼줄에 고추를 달고 / 부정탄 발길을 모두 막았다 / 어둠의 길, 혼돈의 터널을 빠져나와 / 처음 보는 창공의 눈부심으로 / 웃음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아우성 / 그 시각부터 아아 / 존재의 전류는 흐르고 있었다 / 금줄을 걷어내는 날 / 이미 점지된 큰 붓으로 / 눈물로 얼룩져 가늠되지 않는 / 담채화 한 폭을 그려가고 있었다 / 초롱한 눈빛은 언제나 / 무지개를 염원하지만 / 암갈색 예감의 꽃들이 한 송이씩 / 손에 잡히는 것은 어인 일일까 / 다시 금줄을 걸고 / 정갈한 생명의 불꽃을 피우고 싶었다.
졸시 「길 . 3」에서처럼 ‘정갈한 생명’을 위해서 생명의 끊임없는 혁신을 위해서 새로운 사유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이 현대시의 위의(威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문학세계』 2009. 5.)
시간의 언어 또는 자화상
언제나 하늘의 입을 열고 / 진실을 이야기하는 / 너 나무여 / 바다 같은 귀를 열고 /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 외로운 과실이여 / 지금은 21세기 / 진리를 위하여 / 저 언덕을 넘어야 하고 / 산악 같은 세파도 / 잠재워야 하느니 / 너 진실한 나무여 / 이성의 칼날은 선한 꽃인데 / 불의를 일삼는 / 오늘의 녹슨 파편들이 / 이 시대의 홍수처럼 / 흘러가고 있다 / 나무여 / 이 시대의 선한 나무여 / 사랑과 이해의 열매를 / 열리게 하라 / 간혹 구름이나 / 새들이 날아와 길을 묻거든 / 나무여 / 사랑과 이해의 길이 / 여기 있다고 말하라 / 나무여 / 말하려나 / 진실의 길은 언제나 / 등불 앞에 있다고 / 말하려나.
이 작품은 황금찬 시인의 「진실의 나무에게」 전문으로 문광부와 <조선일보>가 실시하는 ‘책, 함께 읽자’의 일환으로 지난 3월에 한국문인협회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황금찬 시 읽기’를 개최했는데 필자가 이 작품을 낭독했다. 이 ‘책 읽기 문화 캠페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중들과의 호응을 맞추는 대규모 행사로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책 읽기 운동이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되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 국민들이 그만큼 책을 읽지 않는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지만, 요즘처럼 문학잡지나 시집들이 팔리지 않는 풍토에서 다소나마 활력소를 제공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시인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다가가서 문학의 기능적 요소들을 전달하고 어떤 메시지를 공감케 함으로써 존재문제와 인성문제, 자연문제 등을 심도 있게 교감하여 국민들의 정서생활에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호 『문학세계』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해보면 이와 같이 삶에 대한 주제를 많이 또는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서 주목하게 된다. 삶은 곧 존재와 인성이 결합하여 성찰의 단계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우선 다음 몇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세월 / 가을은 축복이다 / 산천초목 아름다운 / 천연색 비단옷 입혀놓고 / 뒤돌아 돌아보며 떠나고 있는데 / 마음의 강가에 그리움의 낚싯줄 걸어 놓고
/ 어느 날 바라보며 / 건져 올리지 못한 꿈 밭에 / 보이지 않는 궂은비만 내리고 / 그 많은 인고의 세월만 낚아서/ 외로운 침묵에 강 건너갑니다
--하옥숙의 「자화상」전문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유성의 파편처럼 / 지난 상념은 흩어져 사라지고 / 고난으로 문드러진 땅 길에서 /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 묻어나는 추억의 흙 내음은 / 가파른 고개를 넘어간 먼 후일 삶의 흔적이다
--이영국의「회상」중에서
희로애락 마음의 본향이 있는 곳 / 흘러온 세월 기약 없는 이별 / 해산의 영롱한 꽃을 안고
// 황혼에 젖어가는 나그네 인생 / 빛바랜 삶의 뒤안길 / 외로운 영혼들 석양 노을이 진다
--최현배의「굿 뉴-스의 화원」중에서
이처럼 보편적인 일상의 삶에서 추출하는 시적 진실이 그들은 ‘세월’과 더불어 음미하는 공통점이 있다. ‘흘러간 세월’과 ‘속절없는 세월’, ‘흘러온 세월’ 등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시간의 언어에 치중하면서 시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일찍이 누군가 말했듯이 세월은 착오를 마멸시키고 진실을 빛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옥숙의 ‘인고의 세월’이 내포하는 ‘침묵의 강’과 ‘낚싯줄’의 상관성은 무엇일까. 바로 ‘자화상’이란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는 함께 발표한 「연지(硯池)」에서도 ‘어제도 오늘도 저 빛바랜 달 그림자 / 덧없는 세월 재촉하지 않는데 / 시간은 알게 모르게 흘러만 갑니다 / 오늘 이 수간에 황무지 같은 부질없는 단상도 / 잔잔한 물 무늬 위에 신화로 띄어 놓고 / 돌아섭니다’는 어조로 ‘더없는 세월’과 ‘부질없는 단상’과 대칭을 이루면서 ‘자화상’의 개념을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구도는 차분하고 단단하지만, 표현법에 있어서 ‘놓고’, ‘있는데’, ‘놓고’, ‘바라보며’, ‘내리고’, ‘낚아서’ 등으로 문장의 연결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이는 산문 문장으로 변할 우려가 항상 도사리고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영국의 ‘세월’도 결론적으로 ‘먼 후일 삶의 흔적’이라는 단정이다. ‘세월이 흐르는 곳에 / 찬바람에 씻겨 빛바랜 잡초처럼 / 떠나갈 삶의 모습’이라는 어조는 하옥숙의 ‘자화상’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시간과 삶과의 불가분성은 공통으로 시인들이 탐색하는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문장의 연결을 고려한 산문 문장화의 방지를 위한 언어의 함축이 있어야 한다. 특히 행과 연 바꿈에서 시법의 기본인 ‘이미지의 한 단락, 의미의 한 단락, 리듬의 한 단락, 강조의 한 단락’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한편 최현배의 ‘세월’도 ‘나그네 인생’과 ‘외로운 영혼’이라는 근원적인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시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도 또한 연 바꿈에 유념해야 한다. 위의 예시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꽃을 안고’와 ‘황혼에 젖어가는.....’의 어조는 어찌보면 한 이미지이며 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연으로 붙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처럼 시의 형태는 시가 담겨지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행과 연의 구분이 시의 내용과 의미가 한결 돋보일 수 있으며 시의 구성에서 우리 문법에서 말하는 낱말(單語), 어절(語節), 구(句), 절(節) 등의 자세한 부분까지는 제 자리 잡기가 어렵겠지만, 시창작상의 통시적 어법은 전통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들은 ‘세월’의 이미지에서 모두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찰출하여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는 ‘자화상’에 가깝다. 이러한 시간적 언어의 표출은 삶과 상관하게 되는데 강혜련이 「오월에 핀 안개꽃 저고리」에서 ‘나는 오늘 제복 입은 / 저 지난날의 시골소녀가 되어 / 삶의 큰 기쁨을 누렸음이어라’거나 최하명이「인생이라는 병」에서 ‘자각으로 병세를 알 때는 / 나이가 들어 인생이라는 의미를 알 때 / 삶의 의미를 부여 받았을 때 // 이 병에 걸이지 않은 건강한 사람은 없다’ 또는 이영국이 함께 발표한 「재(嶺」에서도 ‘구름 머문 하늘이 가까워서 / 저 멀리 산 넘어 / 또 다른 그리움의 만남으로 / 삶의 긴 여운을 묻는다’는 등의 어조가 모두 삶의 시간과 함축된 그리움의 징표가 주제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음 김휘열의 「여울목 어는 밤-금융위기를 느끼며」는 어떠한가.
해거미가 비탈길을 따라 오른다 언덕 언저리 채곡히 쌓였던 낙엽 더미를 초겨울 된바람이 흩어 놓고 간다 / 그나마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아 있던 낙엽 하나가 떨어져 떼그루 굴러 바람개비 돌 듯 멀리 날아간다 / 서로를 부비려는 잎새 없는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있다 여울목이 얼어붙는 밤 별빛조차 서글퍼 보인다 / 감꽃이 피어오르는 따스한 날이 오기까지 오랫동안 설움을 묻어야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겨울밤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약간 시사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어조에서 ‘초겨울’이나 ‘감꽃이 피어오르는 따스한 날’이라는 계절적 언어로 보아서 시간적인 기다림을 묘사하고 있다. 요즘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금융위기에 대한 비유를 적절하게 구사하여 ‘따스한 날’까지 인내해야 하는 이미지를 ‘낙엽’ 또는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겨울밤’ 등의 사물과 대비하여 적시하는 시법이다. 이러한 시간의 언어는 다음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다.
맑은 공기 푸른 산야와 당신의 목소리가 / 영원히 전생과 이생을 맴돌고 / 불사조는 허공에서 별들을 세고 있답니다 // 어찌 이렇게 그립기만 하답니까 / 흘러간 강물 속에 침잠된 수많은 추억들 / 사랑은 떠나가도 꽃을 피우고 / 자연의 섭리는 당신을 그리워 한답니다
--이유식의 「삶 그 아련한 것」중에서
희색 하늘이 주책 떠는 눈비 내려도 / 어제보다 오늘이 즐겁고 / 내일이 행복한 꿈을 꾸는 머리맡에 / 내 발가벗은 몽당붓이 웃고 있어 / 때묻지 낳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좋고 / 홍매향 같은 시향(詩香)이 맴돌기에 / 우리 둘의 자향(自香)이 그래도 / 논두렁 밭두렁에 핀 반지꽃 같잖니 / 우리 가슴에 태극문양 선명하고
-- 문성환의 「인생 현미경 3」중에서
그렇다. ‘전생과 이생’이나 ‘흘러간 강물’과 ‘추억’ 등이 이유식의 시간과 융합하고 있다. 또한 ‘어제보다 오늘’, ‘내일’이라는 시간이 문성환의 사유에서 선회하고 있다. 이처럼 이유식은 시간을 통해서 그리움을 현현하고 문성환은 현재의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이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지표는 현재의 자화상을 스스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삶과 시간의 병합된 일련의 단순한 그리움이나 즐거움일지라도 그들에게서는 진솔한 정감의 발현이며 시적 진실로 승화하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행과 연 그리고 표현 방식에서 자칫하면 하나의 스토리를 곁들인 독백의 묘사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일찍이 리처즈가 말했듯이 시의 소재는 우리의 일상생할과 정서생활에서 별 차이가 없으나 생환의 언어적 표현은 시의 구도나 주제의 도출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한다. 형이상시(形而上詩)의 개념이 더욱 필요한 시대에서 독백의 범주를 벗어나는 작품이 대세를 이루는 작금의 시정신은 볼테르의 말대로 시는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살펴본 3월호의 작품들은 약간 긴 문장으로 이어졌다. 언어의 함축이나 절제의 측면에서 보면 시는 짧아야 한다는 통념을 지울 수가 없다. 시문장이 길어지면 설명이 될 위험이 따르고 압축이라는 시의 본령에서도 상반된 논지가 주제를 미약하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세계』 1909. 4.)
‘포도나무의 시법’과 ‘종합예술’
지난 2월에는 우리 문단에 획적인 일이 성황리에 시작되었다. 조선일보와 문화관광부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문인협회,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연극협회, 한국출판인회가 공동 후원하는 ‘책 읽기 문화 캠패인-책, 함께 읽자’를 전국에서 개최한 일이다.
희망 없는 희망이라니 / 어리송한 말이다 / 그래 봤자 큰 일 중첩산 오늘의 세상은 / 시인의 어법쯤 상관 않는다 // 시인들은 말과의 동거를 / 혼인신고처럼 서약했으되 / 외출복 입은 말부터 애지중지 / 세상에 자랑하고 / 상처 깊거나 죄의식 적신 말들은 / 늑골 갈피에 가두어 본다 / 사후에 발각되기도 하지만 / 덧없어라 / 뿌리 잘린 꽃인 것을 // 말의 비방 / 말의 연금술을 누가 아는가 / 쇠락해가는 대자연과 사람의 영혼에 / 봄을 주입할 / 영묘한 수사학은 무엇인가 // 희망 없는 희망이란 / 시인들 스스로의 정직한 고뇌요 고백임을 / 얼마간 알 듯하다
한국 문협에서 실시한 ‘책, 함께 읽자’ 첫 순서로 ‘김남조 詩 읽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계속 이 운동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말의 연금술」을 비롯하여 김후란, 허영자, 오세영, 김선영, 이향아, 김송배, 한분순, 이승하 등이 김남조 시와 자작시를 읽고 김남조 선생의 ‘나의 시에 관하여’라는 강연이 있었다. 더구나 박정자 원로 연극배우가 출연하여 연작시「촛불」을 낭송하고 詩춤이 어우러지기도 하여 참석자 1백 여명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운동은 금년에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책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고 책읽는 풍토 조성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월호 『문학세계』에 수록된 작품은 보편성을 초월하는 작품이 보이지 않고 평범한 사유의 표현인데 비해서 김경덕과 여주현의 작품이 우선 제목에서부터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늙은 포도나무 밭이 그대로 시집(詩集)을 펼친 것 같다 / 비틀어 논, 비뚤비뚤한, 저 행갈이가 살아서 꿈틀꿈틀 댄다. 멀미 / 울렁울렁한 목청을 한꺼번에 많이도 퍼질러 놓았다 / 속 시원하였겠다 바야흐로, / 서풍이 불려는 사이 /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죄다 떨구고, 버즘나무처럼 제 속을 다 까발리고 / 깡마른 덩굴손이 마지막으로 푸른 하늘에 대고 온몸으로, 전심력(專心力)으로, 시를 쓰는 / 저 몸 시(詩)들의 / 꼬부라진 철자법이 탄탄한 시법(詩法)이다 / 눈을 닦고 / 보고 보아도 / 최후(最後)란, 없다
--김경덕의 「포도나무의 시법(詩法)」 전문
김경덕은 사물을 응시하면서 유추하는 연상작용이 특이하다. ‘늙은 포도나무 밭이 그대로 시집을 펼친 것 같다’는 단정적 상상력은 과히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대사물관에서 비약하거나 축소하는 시적 정황의 설정이 일반적 통념을 초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사유하는 그 범주에는 다양한 사물의 형태에서 응축된 양상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려는 의도 와 의욕이 동시에 발양되고 있어서 그가 구가하려는 시법의 면모를 광범위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이는 ‘포도나무’라는 특정 사물에 관한 이미지의 창출보다는 현재의 형태, 즉 잎이 떨어진 상황을 ‘미사여구는 죄다 떨구고’로 전환한다든지, ‘비뚤비뚤’ 자란 포도나무 줄기에서 ‘꼬부라진 철자법’으로 대입하는 그의 시법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법은 그가 말하는 ‘포도나무의 시법’이다. 굳이 ‘시법’이라고 명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물에서 추출하는 시적정황이나 주제의 근원은 명민하게 작용하는 것이 우리의 시법이다.
그가 ‘눈을 닦고 / 보고 보아도 / 최후란 없다’고 결론을 적시함으로써 시인들이 사물과 시와의 상관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연유가 시법에서 ‘최후’나 ‘최종’ 등의 단정을 유보하게 된다. 이는 한 사물에서 정서의 복합성에 따라 주제나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시인의 상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법은 함께 발표한「법당 안 목탁」이나「느티나무 길」에서도 유효하다. 그가 적시하려는 시적 현현의 구도가 대체로 그러한 시법으로 전개함으로써 스토리나 언어의 탄력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詩人)과 화가(畵家) / 시(詩)가 그림을 잉태하고 / 그림이 시(詩)를 낳는다 // 세월의 그물에 걸린 시인(詩人) / 옹달샘에 빠진 별(星)을 / 항아리에 담는데 / 자기 얼굴뿐이더라 // 만남과 이별 푸른 빛 / 붉은 빛 샛노란 황금빛 / 소나무에 학(鶴)을 그려놓고 / 아침에 일어나 보니 / 소나무뿐이더라 // 어느 시인은 / 천 원짜리와 만 원짜리 지폐가 / 바꿔주어도 아깝지 않은 우정(友情) / 시와 그림 // 시와 그림의 조화가 / 종합문예(綜合文藝)인가 싶어 / 그림을 벽에 걸면 시가 흐르고 / 시를 쓰다 보면 그림이 어른거린다 // 음악을 함께하고 극(劇)까지 조화되면 / 멀어질 수 없는 종합예술 / 인생은 짧고 예술을 길다고 했거늘
--여주현의 「종합예술(綜合藝術)」 전문
여주현의 어조는 김경덕과는 다른 자신의 관념적 언술로 들려주고 있다. 옛말에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것이 있다. 시와 그림은 동질의 생명체를 유지한다. 실제로 시인과 화가는 정서의(혹은 의식의) 흐름이 유사하다. 외형적 스케치에 머물지 않고 영혼을 투영하는 고뇌가 따른다. 이러한 고전을 첫 연에서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종합예술’이라는 소재를 연결하기 위한 상황 설정이지만, 결론적으로 ‘음악’과 ‘극’의 조화를 적시하고 있어서 ‘종합예술’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 특이한 점은 시인이 ‘옹달샘에 빠진 별을 / 항아리에 담았’으나 결국 ‘자기 얼굴뿐이’라는 것과 화가가 ‘소나무에 학을 그려놓고 / 아침에 일어나 보니 / 소나무뿐이’라는 것은 어쩌면 아직도 성취하지 못한 시업(詩業)에 대한 자성일 수도 있다는 점에 유념하게 된다. 이 밖에도 우리들의 안온과 고요함을 노래하는 작품이 있다.
호숫가에는 / 살진 꽃창포 무리가 / 분지에 가득했어 / 소요도 시비도 없이 / 아늑하고 평화로웠어 / 태양이 그곳에만 / 금가루를 뿌려주고 있었어 / 거긴 풍요와 따사로움과 / 적요만 있었어 / 사람은 살지 않았어
--안초근의「꽃의 마을」전문
불평불만 없이 / 다툼도 없는 / 순결한 인성의 무리 속 // 약하고 / 삐뚫어진 세상 / 한탄 접고 / 공연한 바람 없애 / 갈등 없는 깊은 평온
--이영순의「별무리」중에서
여기에서는 안초근이 ‘풍요와 따사로움’을 이영순이 ‘갈등 없는 깊은 평온’을 현현함으로써 현실적 고뇌를 탈피하고 ‘적요’와 안온을 구가하려는 정서의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시법도 사물(‘꽃의 마을’이나 ‘별무리’)에서 탐색하는 그들의 지적사유의 확산이며 자아의 관조적 성찰에 다름아니다. 우리 시인들은 언제나 사물의 응시법에서 남다른 지적 혜안을 열어놓고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하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시인의 탐구정신이며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강렬한 메시지의 탄력이기 때문이다.(『문학세계』 2009. 3.)
사물에 관한 상징적 사유
우리 시인들이 하나의 사물에서 탐색하는 시적 상상력은 무한하다. 그것은 일상적인 사유가 지적인 시 정신으로 전환하면서 발현하는 시적 진실이다. 이러한 지향적 사유가 곧 존재를 인식하거나 성찰하는 고차원의 이상을 그리게 된다. 흔히들 시적 발상은 이처럼 하나의 사물에서만 찾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잠재한 지정의(知情意-조지훈 시인이 말한 지정의의 합일이 시다)에서도 얼마든지 시적 발상은 가능하지만, 이런 외적인 사물과 내적인 관념의 융합이 진실을 창조하게 될 때 우리는 시적이라고 말하며 시의 위의(威儀)에도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서 이처럼 사물을 자신의 내부로 들여와서 내적 인격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동화(同化-assimilation)라고 하여 많은 시인들이 작품 창작에 활용하고 있으며 반대로 시인 자신이 사물 속으로 흡인되어 함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투사(投射-projection)라고 한다. 역시 많이 응용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주시하면서 지난호 『문학세계』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다음과 같이‘담쟁이’라는 사물이 어떻게 동화하고(혹은 투사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박애라의 작품들이다.
처음부터 예정된 /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 몸뚱이 하나로 /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것
극도의 막막함 속에서 / 솟구치는 생명을 위한 본능 / 살 아 야 겠 다 / 오만하게 버티고 선 거대한 세상을 / 기어코 잠식해 버리리라 / 한 걸음 옮길 때마다 / 제 몸을 묶은 흡반을 관절처럼 늘여 /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 소유의 푯말을 세우고 / 허옇게 숨 뒤집는 벽을 향해 / 멈추지 않는 지독한 집착 / 남편을 먼저 보내고 / 맨몸으로 자식 셋을 키워야했던 / 큰어머니의 가시밭길 운명 같은
--박애라의 「담쟁이」전문
여기에서 ‘담쟁이’라는 사물은 시인과 동화하고 있다. 그것을 박애라는 ‘숙명’이며 ‘운명’이라고 단정한다. 처음부터 ‘담쟁이’가 갖는 상징이나 비유 등이 인간의 ‘생명을 위한 본능’으로 형상화하다가 결론에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 맨몸으로 자식 셋을 키워야 했던 / 큰어머니의 가시밭길 운명’으로 환치함으로써 시적 지향적 사유는 확대되고 있으며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박애라는 이러한 시법에 익숙해져 있다. 함께 발표한「오아시스를 찾아」와「바위섬」에서도 동화의식이 잘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몫인 그늘에 드러누워 / 단잠에 취한 사이 / 갈증을 이기지 못한 허리 꺾인 꽃들은 / 샘물에 몸을 담고도 시들어 버렸다’거나 ‘풍상에 잘리고 깎인 / 저 기묘한 형상 / 세상사 부질없다’는 언술들은 그의 내면의식이 이미 그 사물들과 동화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존재의 문제까지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은 시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물의 특징을 잘 살려서 그것이 포괄하는 상징과 이미지가 조합되는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는 표현방식에서 인간과 공존의 시적구도를 형성시킴으로써 시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된다.
다음 이상윤의 ‘담쟁이’는 어떠한가.
죽은 혈관처럼 다닥다닥 말라붙어 있었다 / 아직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지 않은 이 겨울 아침 /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문득 /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이었다 / 언젠가 어깨가 무거워 삶이 황소 같던 아버지 / 아버지는 일흔이 훌쩍 넘으시도록 / 헐벗고 고단한 세월을 맨살로 사시면서 / 얼어붙은 시냇물을 막막한 벌판을 언제나 혼자서 / 명예 하나 없는 이름으로 건너셨다 / 당신을 불어가는 바람 잘날 없는 세상에서 / 행복도 모른 채 희망만 꿈꾸는 발이 큰 짐승이었다 / 이러한 아버지를 닮기 위해 나는 한숨에 / 큰 강을 건너고 산도 넘어보지만 / 나의 삶은 늘 볼품없는 나무에 열매만 매단 채 / 날마다 바람소리만 내고 있다 깊었던 / 아버지의 그늘을 휘적휘적 따라다니고만 있다 / 못난 나의 이 비밀을 위하여 아버지는 이태 전 / 혼자서 달 붉은 가을 길을 가셨다 / 그렇지만 나는 안다 그리고 믿는다 / 저 겨울 담쟁이 떠나간 잎새마다 푸른 봄이 오면 / 내 아버지 마른 혈관에도 / 이승의 따뜻한 피 한 방울 다시 살아오리란 것을 / 살구꽃 환히 사랑 한 번 더 그립게 / 그리움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란 것을
--이상윤의 「겨울 담쟁이」전문
이상윤은 박애라와는 약간 다르게 시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아버지’라는 화자를 대입하였으나 ‘담쟁이’에 관한 속성이나 이미지의 투영과 상관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문득 /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적 정황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에 대한 회고가 시적구도를 모두 차지하고 있어서 사물에의 동화나 투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겨울 담쟁이’는 ‘죽은 혈관처럼 다닥다닥 말라붙어 있’는 형상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반추하려는 창작의도는 이해할 수 있겠으나 ‘저 겨울 담쟁이 떠나간 잎새마다 푸른 봄이 오면 / 내 아버지 마른 혈관’과의 상관성만으로는 시적 비유와 상징 등의 구성요건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시에서 상징이란 용어가 사용될 때는 가시적인 것(보통 물질적인 것)이 연상작용에 의해서 형이상적인 것(보통 비물질 적인 것)을 의미하는 일종의 표현 방식이다. 그러므로 시적 의미의 상징은 이미지(비유), 관념 혹은 개념을 연결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유치환의「깃발」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으로 묘사하여 ‘깃발’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어떤 고귀함과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워하는 정신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작품이 적시하는 상징은 무엇일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 같은 / 대칭으로 만난 한 쌍의 동반자 / 평등 원칙 번갈아 가며 / 한사코 앞을 고집한다 / 한 몸 이룬 너로 인해 / 꿈을 위한 오랜 발자취 남기고 / 또 지워가며 / 부르튼 아픔 얼마나 컸던가 / 애당초 노로 인해 자신의 역사가 시작되고 / 창을 열기 시작한 너와 나, / 질박한 세상 질척이며 / 때론 오르막길 돌에 채이고 넘어지고 깨지고
앞질러 가던 세월 쫓아 / 발부리, 신들메 바람 울던 너의 역사가 되돌아 보인다 / 지난날 그리고 오늘의 걸음, 발부리 / 새 바람 일으키며 자신을 싣고 다니던 / 펑크 없던 한 쌍의 차륜아
--박덕중의「발(足)」전문
여기에서 ‘발’의 상징은 명백하다. ‘대칭으로 만난 한 쌍의 동반자’이다. 또한 ‘창을 열기 시작한 너와 나’라는 화자와의 관계도 분명한 상징적 의미를 투영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이나 기교들이 현대시를 더욱 의미 탐색에 독자들이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그가 함께 발표한 「할매」에서도 동일한 상징성이 현현되고 있는데 ‘잔인한 세월에 / 속살 갉아 먹히고 / 활처럼 휘어진 그믐달’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바람 울던 너의 역사가 되돌아 보’이는 ‘발’이나 ‘어느 저문 골목길로 입항’하는 ‘할매’가 모두 존재문제와 융합하는 결론으로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인간을 지상의 왕자로 만든 것은 상징을 사용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렇다. 보편적인 삶에서도 이처럼 상징을 중시하는데 더구나 시 창작에서는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징이나 바유 그리고 이미지가 충만함으로써 의미적인 요소, 즉 주제의 창출에도 오묘한 정감이 내재되기 때문이다.
긴 밤을 향기와 함께 하고도 / 아프도록 푸른 꿈이 날아 다닌다 / 되돌릴 수 없는 열아홉의 빛깔 / 마침표를 찍기에는 가슴이 떨린다 / 탯줄 풀어야 할 탄생의 기다림 / 또 다른 미소가 따라오고 있다.
--김솔아의「노을빛 낙화」전문
김솔아는 ‘권두시’로 발표한 이 작품에서 ‘노을빛’과 ‘낙화’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그는 결국 ‘낙화’가 ‘탄생의 기다림’을 예비하고 있으나 ‘노을빛’처럼 ‘마침표를 찍기에는 가슴이 떨’리고 ‘열아홉의 빛깔’로 ‘되돌릴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담쟁이’나 ‘발’, ‘낙화’는 다양한 상징으로 변환할 수 있다. 이는 그 시인의 고차원의 정서와 사유가 필요하게 된다. 정봉구가 쓴「상징과 비유」라는 글에서 ‘나는 모든 상징과 비유가 [상위의 것]에서 [하위의 것]으로 옮기어 비유되는 일보다는 [하위의 것]에서 [상위의 것]으로 비유, 상징되는 편이 좋다고 본다’는 언술에서도 이해할 수 있듯이 어떤 사물을 상징적 사유로 변환하는 일은 좋은 시를 창작하기 위한 우리 시인들의 숙명적인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상징주의(symbolisme)를 절대적으로 표방하자는 것은 아니고 어떤 유사한 성질이 있거나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있어서 하나의 것이 다른 것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고 암시하기 위해서 사용될 때 현대시의 맛과 멋이 더욱 명징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문학세계』 2009. 1.)
실험 정신의 새로운 도전인가
벌써 송년호를 대한다. 한국 현대시 탄생 100년을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낸다. 우리 시인들이 새로운 도전과 각오가 필요한 역사적인 한 해를 기억에 남거나 기록해야 할 일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냥 흘러버리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지난 100년 동안 선배 시인들은 시 창작에서 많은 실험정신으로 개척하고 발전시켜 오늘의 현대시를 이 땅에 정립하였다. 우리 현대시문사의 기점인 1908년, 육당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를 발표했던 것도 그동안의 가사문학이나 시조 등 정형시에서 발전시킨 실험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슬프다뎌나무 병들고썩어셔 / 다늙었네 반만셧네 / 심악한비바람 몃백년큰남기 / 이리져리급히쳐 오늘위태
--니승만의「고목가」첫 부분
텨...ㄹ썩, 텨...ㄹ썩, 턱, 쏴...아 / 따린다, 부슨다, 문어바린다. / 태산갓흔 놉흥뫼, 딤태갓흔, 바위ㅅ돌이나 / 따린다, 부슨다, 문허바린다.
--최남선의「해에서서 소년에게로」첫 부분
아아 날이 저문다, 西便하늘에, 외로운 江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의「불놀이」첫 부분
우리 현대시는 이렇게 변모해 왔다. 우리 시의 태동은 고시조의 개념을 넘어서는 창가형태의 글이 1898년 3월 5일자『협성회보』제10호에 이승만(건국 후 대통령)의「고목가」에 게재되었는데 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을 신체시의 기접으로 보느냐, 아니면 신체시 생성과정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하는 견해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도 시조의 변형인 율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주요한의 「불놀이」를 현대시의 기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지가 일부 시문학자들 간에 조용히 거론되기도 했다.
여기에서는 현대시의 기점을 어디로 할 것이냐가 문제가 아니고 위의 작품들처럼 변모하면서 얼마마한 실험정신으로 새로운 시법을 창출했는가하는 문제가 초점이 된다. 이와 같이 현대시의 산문형태는 1910년대에도 실험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이후 황석우의「석양은 꺼진다」, 오상순의「아시아의 밤」, 이상화의「나의 침실로」, 홍사용의「나는 왕이로소이다」, 한용운의「알 수 없어요」, 김관식의「녹야원에서」, 김상용의「우리 포옹한」, 김수영의「도적」, 박봉우의「휴전선」, 성찬경의「추사의 글씨에게」, 이종학의「어둠과 시간과 신화와...」, 장호의「전통의 의미」, 전봉건의「손」, 전영경의「고향」그리고 조향의「붉은 달이 걸려있는 풍경화」등이 1950년대까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소월의「진달래」, 이육사의「청포도」, 서정주의「국화 옆에서」혹은 박목월의「나그네」를 비롯하여 김남조, 정한모, 조병화, 황금찬 등이 구사한 순수 서정적 시법을 탈피하고 소재와 주제, 표현에서도 많은 변화를 실험하고 있다. 특히 이 상은 「오감도」를 비롯한 모든 작품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특징이 있고 그 의미나 형용에 있어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표현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도 하나의 실험정신이라기에는 무엇인가 좀 난해해진다. 1933년 10월, 『카톨릭청년』에 발표된 「거울」을 보기로 하자.
거울속에는소리가업소 / 저럿케까지조용한세상은참업슬것이오
*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잇소 / 내말을못아라듯는딱한귀가두개나잇소
*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 내악수를바들줄몰으는-악수를몰으는왼손잡이요
*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저보지못하는구료만은 / 거울아니엿던들내가엇지거울속의나를맛나보기만이라도햇겟소
*
나는지금거울을안가젓소만은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잇소 /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 또꽤달맛소 /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업스니퍽섭섭하오
이 상의 작품은 모두가 이런 형식이다. 더구나「오감도」에서는 숫자나 기호가 시의 언어로 등장해서 참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당시의 독자나 평론가들은 이런 형식의 아니 이런 형태의 언어융합이나 내용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지난호 『문학세계』를 읽으면서 우리 시의 실험 정신은 계속되어야 발전이 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선 표현이나 내용에서 실험으로 나타난 박종호의 「김 교수의 피아노 연주」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말들이 달려간다-두두두두-쇼팽의 건반을 위한 연주(흑건) / 소리는 공간을 허용치 않고 / 건반을 희롱한다 / 껍질들 남기지 않은 채 하나의 소리가 벗겨지면 / 허공 한 점 남기지 않고 / 방울들 톡 / 방울들 통통-작은 잔물결이 / -그 위에 바람이 휴식-살랑대며-살랑살랑 // 살랑대어 풀어진 공간 사이 / 생(生)의 뚫고 들어와 허무를 얘기하면서도 / 그대로 안락의 소파에 안주(安住)한 평온-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 안주(安住)한 휴식은 공간의 틈에 앉아 / 연단의 지혜를 깨닫고 / 악기의 향긋한 울음-박하향 산책 / -깊은 숨 불어와 화안한 음계 그어-꿈-베토벤의 원광 소나타 // 꿈의 숨이 벌어진 틈으로 스며드는 방울들-또그르르 또그르르 / 해진 문풍지 사이 햇살이 머물며 해잘질-참으로 신비하며
어둠 속 뚫고 오는 강렬한 섬광 번쩍-형언할 길이 없다-꽝 콰앙 // 맨 앞줄 객석에서 / 일산(一山)의 시(詩)는 모차르트를 꿈꾸며........... / 김 교수의 건반은 / 검은 말들과 영원을 향해 달려간다-두두두두
보라. 어쩌면 이 상의 작품으로 착각하리만큼 닮아 있다. 이 상이 시각적 이미지로 보편적인 담론처럼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박종호는 시적 구도에서 청각적인 이미지를 창출함으로써 시의 멋을 살리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시 창작기법의 관점에서 살핀다면 약간 난해해 질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그가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형언할 길이 없’는 희열과 다양한 사유의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 그것이 ‘검은 말들과 영원을 향해 달려’가는 ‘참으로 신비’한 황홀경에 도취하고 있다. 그것이 순간의 심리적인 반응이라고 개의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허공’과 ‘꿈’의 상징으로 형상화하는 ‘허무’와 ‘안주’의 대칭적 이미지를 포괄하는 그의 언어는 실험적이면서도 고차원의 주제를 추출하려는 그의 시법이 보인다.
언젠가 『문학세계』에 연재되었던 오남구의 ‘디지탈 시학’에서 보여준 최첨단 시법의 일부도 동일한 맥락의 시적 구성이나 그 구도를 이해하게 되는데 모더니즘의 시학을 넘어서 포스트모던의 기법과도 유사성을 갖는다.
간밤, 화색 담장의 ‘회색’을 헐고 푸른 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시금파리 ‘반짝’을 빼고 가시장미 ‘가시’를 올렸다 갑자기 ‘푸른가시’ 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가리 찢고 온밤을 으르렁 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 ‘가시’를 내리고 비워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 구름 한 조각 앉아서 쫑긋 꼬리를 들었다 가 사라진다
2008 만해축전 기념사화집에 수록된 오남구의 「푸른가시짐승-빈자리X」전문이다. 어쩌면 이 상의 표현과 동일하다는 느낌이 든다. 현대시에서 중시하는 의미성이나 이미지로 관찰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이러한 시법들이 일정 기간 동안 실험을 지속하여 독자들과 평자들의 관심을 모은다면 또 다른 기법의 창작물이 등장할 가능성이 많다. 하여간 시인들은 다양한 기법의 작품을 연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시인들의 과제로 남는다.
한 젊은 조각가는 / 도장을 빼곡이 눕혀 작품을 만든다 / 질깃해서 선뜻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 / 반갑고 새로운 것들을 엮어 함께 쌓는다 / 틈새 비집고 들어오는 끈끈한 기억 / 그의 조부님 얼굴에선 / 자상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 전시장 대형 벽면은 평생토록 만나도 모자랄 / 수많은 이름들이 들쭉날쭉 세계를 그린다 / 그리운 만남의 흔적들 / 각양각색 자간(字間)의 의미를 / 그는 벌써 깨달았는가 / 거꾸로 힘주어 찍으면 / 바로 서는 예리한 시간의 소리
방지원이 ‘권두시’로 발표한「직유와 은유」이다. ‘도장’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선명하다. ‘거꾸로 힘주어 찍으면 / 바로 서는 예리한 시간의 소리’가 ‘직유와 은유’의 대칭적 구도를 살려내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는 지난 100년 동안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 다양하면서도 개성 있는 실험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실험정신의 발현에 따라서 때로는 난해한 시도 발견되는데 대체로 현대시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인간의 마음을 중요한 소재로 하고 있기도 하고 죽음과 삶, 사랑과 미움 등과 같이 상대되는 것을 두 개의 다른 극점에서 보지 않고 동시에 두 개의 것을 볼 수 있는 ‘상대성 원리(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아인슈타인)’의 영향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한다.
현대시는 아이러니(풍자, 역설)뿐만 아니라, 패러디 등으로 일반적 상식이나 믿음을 뒤집는 기법들이 오히려 시의 주제를 더욱 강렬하게 나타낼 수도 있다는 점은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문학세계 2008. 12.)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시적인 삶과 산문적인 삶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예가 있다. 어쩌면 정적(靜的)과 동적(動的)인 구분으로 삶을 대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먼저 정적이란 것은 구도자(求道者)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용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 혹은 순응의 미학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동적이라는 것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기주의를 조장하여 자신의 윤택한 목적달성을 위해서 공사(公私) 분별없이 분주한 삶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시인들은 다분히 정적이다. 옛 선비정신이 그러했고 전통적 생활관습의 계승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면서 존재의 문제, 인생의 문제, 생몰(生沒)의 문제 등 지적인 가치관의 탐색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동양적 해석에 따르면 시(詩)는 절(寺)에서 쓰는 말(言)이라고 했다. 요즘은 교회나 성당도 많지만, 당시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추출해낸 시의 개념은 어느 한적한 사찰에서 들리는 근엄하면서도 장중한 염불에 비유했을 지도 모른다. 그 염불이 포괄하는 인류 구원의식의 제시와 기원이 바로 시와의 상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단정이 뒤따른다.
또한 시는 많은 사유를 요구한다. 사유하는 자체가 정적이다. 어떤 도가(道家)나 수행자가 깊은 구도를 위해서 몰입하는 형상에서도 우리는 시가 정적이라는 의미를 절간의 언어에 접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종교와는 대립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만큼 우주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넓어져서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대되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 곧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시의 기능은 점점 중요시되어 가고 있고 시인의 존재 이유가 더욱 절실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문덕수의 시론 일부이다. 이처럼 시인은 복합적이고 다원화한 현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 기능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대처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마치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격을 전락시키고 인간관계를 물질적으로 변형하여 인간과 인간의 단절과 사회의 분열 현상을 초래하는 것을 감안하면 시인의 정적 사유는 철저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蔽之曰 思無邪)’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이다.
현대시에서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것은 우선 표면에 나타난 언어의 기준이 아니라, 시인의 사유방식에서 정적이냐, 동적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지난 달 『문학세계』를 일별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상기하는 것은 요즘 시들은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이라는 감응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시인들의 사유가 안일하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주제의 표출이 느슨하다는 결론이다.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해 시는 소갯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등을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시적 순간과 형이상적 순간」에서 좀 길게 인용한 시창작의 지침이다. 형이상학이라는 고차원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여 약간 생소할지 몰라도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키는 시의 표정에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이인해가 ‘흙에 가는 그를 꺾어 뿌리와 분리해도 / 그들의 비명을 사람이 듣지 못할 뿐 / 그들도 이성과 사고가 있는 인격체라니 놀랍다(「외경(畏敬)」중에서)’는 사유가 결론적으로 ‘모든 생명의 존재 이유는 아름답고 갸륵하다 / 오염된 개천에서 신음하는 피라미 한 마리의 / 그 위에 서식하는 하루살이 한 마리의 / 존재 이유는 두렵도록 성스럽다’는 형이상적(혹은 시적) 순간을 탐색하고 있다.
고희(古稀)가 삼 년여 남았는가 / 먼 여울 안개 속에 / 물소리 차가워지는 11월 /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목욕을 하네 / 꼭 떠나간 것만큼만 고여 오는 / 진득한 하루의 찌꺼기 씻어내 버리고 / 그나마 높은 덕장에 내 널어 말려야 할 / 세월에 발효된 나를 더운물에 휑구네 / 된장에라도 버무려 입맛 돋울 / 시래기 같은 여생 아닌가 / 부드러운 수건으로 물기 닦아내고 / 한참 고요히 앉아 / 허튼 인간사 털어내 버리고 / 시집 펴 시 읽으며 // 찬이슬 내리는 이 새벽에 / 나도 몇 줄 시를 쓰네
이인해는 「여일(餘日)」 전문에서도 ‘고희’라는 ‘세월에 발효된 나를 휑구’면서 ‘몇 줄 시를 쓰’고 있다. 이는 ‘시래기 같은 여생’을 통해서 관조한 ‘허튼 인간사 털어내 버리고’ 참선하듯이 정좌하여 시를 읽거나 시를 쓰고 있는 형상의 근저는 참으로 시적이다. 그리고 주제의 추출에서도 형이상적인 사고와 시적인 사유로 정적인 탐색을 통해서 가치관의 접근을 축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슐라르의 영혼과의 교감을 시도하는 단계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자기 본래의 흰색을 찾기 위해 / 실같이 가는 꽃대를 통해 푸른색은 병에 토해내고 / 꽃들은 점차 흰색으로 변해가고 있(「외경(畏敬)」중에서)’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푸른색’이 ‘흰색’으로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의 변화이다. 어제 청춘이 오늘 백발이라는 일상어가 적중하는 인간과 인생의 변화, 그것은 순응의 미학으로서 성찰하는 그의 시정신이다.
구름을 불렀지 / 그 구름 속에 네가 있었다 / 작은 별빛 날개 / 천사가 펴든 / 신비한 손수건
황금찬 선생님의 「구름을 찾아-모빌」전문에서도 ‘구름’의 형상화는 바로 영혼이다. ‘그 구름 속에 네가 있다’는 화자 ‘네’는 의식의 흐름에서 형성된 그리움의 대상으로서 다양한 의미를 흡인하고 있다. 바로 영혼의 상징이다. ‘천사가 펴든 / 신비한 손수건’이 이를 형이상적인 의식으로 명징성을 드러내고 있다.
밤이 여물어 가는 시간 / 잠 못 이룸을 훔친 / 여명은 깨어나고 있는가 // 구름이 나에게로 내려와 / 깊숙이 덮을 때 // 상황을 극복할 /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 잠시 있을 세상을 벗고 / 영생의 샘물을 퍼 올리며 / 상상의 별을 헤아린다.
여기 승명자의 「구름이 내려올 때」 전문에서는 ‘구름’에 관한 이미지가 암묵적인 영혼으로의 인도를 위한 매체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믿음’과 ‘구름’의 대칭적 구도는 현실적 상황과 영생의 세계에 대한 가교설정을 위한 접목으로 역시 영혼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 정황은 어떠한가.
색을 잃고 / 관념을 버린 / 어이없는 허위 / 지금 나의 언어는 / 방황하고 있다 / 시류에 합하려는 말의 유희 / 작은 것에 고이던 눈빛이 / 새삼 그리운 오늘 / 고독한 얼굴인 채 / 나는 살아있어야만 했다 / 먼 기다림 끝에 싹튼 / 무제한의 사색 / 충동을 겨우 벗은 몽상이 / 가라앉은 시어를 / 휘저어 놓고
하 은의「시(詩) . 1」전문처럼 그의 언어는 ‘방황’이다. ‘시류에 합하려는 말의 유희’에서 그는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정황이 산문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사유에서 구가하려는 진실은 시여야 한다. ‘무제한의 사색’을 통해서 획득한 ‘시어’들도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들의 아픔이며 비극이다. 인격의 파괴나 소외, 도덕 불감증 등의 고뇌가 현대 사회에서 인류 공동 운명적 불안요소가 가중됨에 따라 시인들의 시적 과제가 더욱 숙명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가 함께 발표한「시(詩) . 2」에서도 ‘불합리한 / 시적 현실 속에서 / 안락한 자리를 / 찾기도 전에 / 한 군데로 모은 연유가 / 대체 무엇이더냐고’ 되묻고 있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라는 말과 같이 산문적 사유의 골을 탈피하지 않고는 시적 사유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백해 진다.
우리는 시적이라고 하면 정적이면서 고매한 관조의 삶을 연상하고 산문적이라고 하면 대형 백화점에서 바겐세일 기간 중 고객들이 와글거리는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작품의 주제나 언어의 기능에서도 시적이냐, 산문적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한 시인의 삶의 방식에서 탐구된 시 정신과 절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문학세계 2008. 11.)
---------지구문학
‘나 속의 나’를 찾는 일과 詩의 이유
누구나 송년을 맞으면 지나간 한해를 뒤돌아보게 된다. 그 한해의 시간성에는 ‘나’라는 주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하는 반성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 시간성에 용해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는 사람은 행복하다. 지난해도 경제가 어렵다는 국가적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안도감에서이다. 그러나 요즘 날씨처럼 찌푸린 채 무엇인가 좀 풀리기를 기대하면서 조바심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통계를 접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나 속의 나’를 찾는 일은 간단하지가 않다. 이런 문제라면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 해답을 구해야지 왜 시에서 그런 의문을 제기하느냐고 이의를 달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문학의 목적과 효용의 측면서 보면 결국 ‘나’를 성찰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인식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실재의 ‘나’에서 시적인 ‘나’의 진실을 구명하는 일이다. 이것이 존재의 이유와 시의 이유를 동시에 성찰하는 시 정신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위의(威儀)나 본령에 성실하게 몰입하면서 인간의 불합리한 정신세계를 정립하려는 시인들의 사유가 곧 주제로 승화하는 시 정신에서 출발하게 된다.
2008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현대시가 100년을 맞았다는 현실에서 당대의 시인들 업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으로 굳게 자리하고 있어서 앞으로 우리 현대시가 지향해야 할 방향 모색이라는 책무가 따른다는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지난호 『지구문학』에서는 이처럼 ‘나’를 찾아가는 작품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우선 문상금의「그림자」에서 ‘또 다른 나’와 ‘나 속의 나’를 만나거나 찾는 시적정황이 실재의 ‘나’와 어떻게 화해하고 있는가를 적시하고 있다.
소나무 밑 벤치에 앉아 / 또 다른 나를 만난다 / 매일 만나면서도 /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 그 이름도 모를 나를 만난다 / 몇 억 년 전일까 / 어느 바다를 헤매다 패류 화석지 쯤에서 만났을 / 어둠과 불을 동시에 품고 있는 / 나 속의 나를 만난다 / 손을 꼭 잡는다 / 바늘로 꿰매어 꼭꼭 숨겼다 / 꺼내어 보곤한다 / 요즘은 너무 외롭기만 하다.
문상금은 ‘매일 만나면서도 /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 그 이름도 모를 나를 만났다’는 어조는 약간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불투명한 ‘그림자’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이 ‘모를 나’에 대한 인식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둠과 불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요즘은 너무 외롭기만 하다’고 결론을 적시함으로써 실재의 자아와 이상 속의 자아가 공존하면서 어떤 갈등을 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작품들은 어떠한가.
페르조나에 짓눌려 /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 남산 체육공원에 올라봅니다 / 부족할 땐 인내하고 / 남아돌 땐 숨겨둔 / 햇살도 바람도 나무도 풀도 / 모두 다 그곳에서 기다립니다
--이종미의「남산 체육공원」끝 연
텅 빈 허름한 산사 / 달이 문틈 비집고 들어와 / 달빛 단소가락을 타신다 / 절간 덩그러니 혼자 있는 부처 / 귀 간질이는데 / 움찔움찔 미소짓던 부처 호통 치신다 / 이 야반, 나 말고 또 누가 깨어 있냐고! / 혹시 문틈으로 엿보고 있는 나를?
--이희선의「달빛 소네트」전문
우선 이종미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그는 ‘페르조나(persona-타인에게 비치는 외적인 성격)에 짓눌’린 ‘나’를 찾아서 ‘남산 체육공원’을 오른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내’와 ‘기다림’이 있다. 이것은 그가 탐색하면서 살아가는 자아에 대한 허탈이 자신뿐만 아니라, ‘햇살도 바람도 나무도 풀도 / 모두 다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희선은 ‘문틈으로 엿보고 있는 나’가 부처님의 호통을 듣고 있는 정황을 설정하여 ‘산사’, ‘절간’, ‘부처’ 등의 어조가 융합해서 고뇌에 찬 나 또는 방황하는 나를 성찰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구도에서 ‘부처의 호통’이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뇌와 갈등으로 번민하는 중생들에게 던지는 화해의 메시지이다. 굳이 불경(佛經)을 옮기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들이 갈구하는 번뇌의 해소를 위한 해법의 제시임에 틀림 없다.
먼 후일 / 어느 정원에 다시 피어도 / 너와 나 옆에 서서 꽃이나 되자 / 바람결에 볼 비비는 꽃이나 되자
--우석규의「해바라기 송(頌-아내에게」끝 연
내 가슴도 저 사발꽃만큼이나 / 부풀어 보았으면 / 내 얼굴도 저 장미만큼이나 / 붉어봤으면 / 그럼 나도 / 도회지 정원에서 / 세인들의 질투에 몸부림칠 텐데
--성진수의「찔레꽃」첫 연
여기 우석규와 성진수의 ‘나’는 인간의 여망을 표현하고 있다. 우석규가 단정적 어조로 ‘되자’라고 하는 반면, 성진수는 바램(기원)으로 ‘봤으면’ 하고 동시성의 여망을 형상화했는데 ‘해바라기’ 와 ‘찔레꽃’이라는 사물(꽃)에서 추출한 이미지라는 점도 동시성을 갖는다.
그러나 우석규는 ‘아내에게’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너와 나’는 서로 쳐다보는 형국의 ‘해바라기’ 꽃으로 ‘먼 후일’까지 사랑을 기약하는 내밀한 언약의 어조로 나타나지만, 성진수의 ‘찔레꽃’은 세인들이 자신을 응시할 수 있었으면 하는 여망으로 ‘부풀어 보았으면’ 또는 ‘붉어봤으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공간 설정이 ‘정원’이라는 점이다. 우석규는 ‘어느 정원’으로 미래의 공간, 미지의 공간이지만, 성진수는 ‘도회지의 정원’으로 현재보다는 더 광활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로운 색정 色情 / 얼마나 깊은 잠이 들면 / 저렇게 아름다운 꿈을 꿀까 // 절정에 불사르는 헤어짐의 몸부림 // 동반 떨어짐을 거부하는 아우성 // 먼저 가고 남아 있고 / 네 속 타는 오열 속에 / 내 몸도 던지고 싶어
--이명숙현의 「설악 단풍」 전문
여기 이명숙현의 여망은 ‘싶어’라는 어조로 나타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꿈’과 ‘타는 오열 속’으로 ‘나’를 던져버리는 여망, 어쩌면 이상 세계로의 여행을 기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여행은 단순하지가 않다. 그것은 ‘단풍’의 ‘몸부림’과 ‘아우성’이 실재 인간들의 갈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형상화들은 바로 ‘나’를 찾는 일이다. 자아를 인식하는 일은 시인들에게서 의미 있는 화두(話頭)가 된다. 대체로 시 속에 투영하는 자아 인식의 단계는 회상을 통해서 자신의 궤적을 살피는 일→ 인식→ 성찰→ 재생된 이미지를 창조적 이미지로 전환 → 현실적 갈등과 고뇌에 대한 해법 찾기→ 미래지향적 기원 등의 순서로 나타나는 현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개념을 너무 집착하거나 편승해서 시적 화자인 ‘나’를 직접 시어로 등장시킴으로써 자칫하면 독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 개인의 넋두리에 머무는 작품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물을 소재로 하여 그 사물 자체가 ‘나’ 또는 ‘너’로 변신하는 의인화가 바람직하며 설령 나 자신이 하고픈 언술이 많다고 할지라도 의인화한 나(그 사물)를 통해서 대변하도록 하는 시적 구도가 이미지나 상징에서 더욱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는 작품 속에 화자를 드러내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설정이나 화자의 언술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시인의 진실을 적시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보면 이러한 시법이 공감대를 확산하는 중요한 매체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렘의 초경 치룬 / 풀꽃 / 미명의 수줍음일라 / 영롱한 햇살로 칵텔해 / 달콤한 신음 바치리라 // 아, 거룩한 첫잔 / 영혼의 향기요 / 황홀한 고백일라
이양순의 「황홀한 고백」 전문에서처럼 ‘고백’이라는 시어에서 우리는 ‘나’ 혹은 ‘너’라는 화자를 작품 속에 감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사이에 언어소통을 위해 이미 ‘나’가 포괄되어 있음을 말한다. 시는 볼테르의 말대로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의 음악이어야 한다는 점은 나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구문학』 2008. 겨울.)
자연 서정의 시적 구도
2009년 봄을 맞이한다. 우리 시인들은 계절 감각에 민감하다. 시적 소재의 취택이나 주제의 투영은 대체로 시간성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춘하추동 사계의 향취에 젖으면서 정경 묘사와 더불어 존재의 문제에 심취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현대시의 발상이나 시적 원류를 조감해보면 자연 서정에서 탐색하는 섭리의 순응에서부터 인간의 궤적(軌跡)에서 추출하는 존재의 문제 등 다양하게 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시각적 이미지의 창출에 보다 효과적으로 교감하거나 상상력과 실재(實在)의 융합을 지적 혜안(慧眼)으로 조화를 이루려는 의식의 흐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겨울호 『지구문학』에 수록된 작품들에서 이러한 자연 서정의 시적 구도를 많이 대하게 되는 것도 시각적으로 분해된 시인들의 감응이 시간성과 연결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서정적 시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학에서 말하는 자연은 철학에서처럼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문학의 중요한 제재가 되어 왔고 테마가 되어 왔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며 자연의 형상이라는 정의처럼 자연은 문학의 진실성의 기준으로서 그 개념을 지닌다.
우선 ‘꽃’이라는 자연 사물에 투영하는 이미지나 주제의 향방을 찾아보기로 한다.
넓은 꽃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 화려한 꽃은 그 자태만으로 / 향기로운 꽃은 그 향내만으로 / 온갖 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 그런 꽃밭 하나 있었으면 // 푸른 하늘 아래 피는 꽃은 그 푸르름으로 / 깃발 위에 펄럭이는 꽃은 그 펄럭임으로 / 낡은 울타리 헐어내고 / 이랑 사이 새끼줄도 걷어내고 / 더러는 잡초들도 섞여 자라며 / 나비, 잠자리, 동네 강아지도 함께 뛰노는 / 그런 꽃밭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우석규의 「꽃밭」 전문
자연을 연주하세요 / 연주자의 미소가 꽃처럼 유혹한다 // 물위로 수련꽃 피어나듯 / 은은한 음악이 강바닥에서 부화한다 / 갑자기 / 소나기가 그립다 / 물수제비 뜨고 싶다
--공영구의 「강물 위의 건반」 중에서
이 두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재는 ‘꽃밭’과 ‘강물’에 대한 형상화를 구도화하고 있으나 화자의 어조가 일차적으로 ‘꽃들이 함께 어우러지는’과 ‘수련꽃 피어나듯’이라는 ‘꽃’과의 상관성에서 이미지를 추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석규와 공영구는 공통적으로 ‘좋겠다’ 그리고 ‘싶다’로 현현함으로써 그들이 여망하는 기원의 의식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이 기원은 자연에서 수용하는 존재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우리 시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우석규는 자연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동심처럼 무념무상의 세계를 갈구하면서 원천적인 낙원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으며 공영구 역시 ‘달이 건반 위를 조용히 밟고’ ‘자연의 연주’를 통해서 우리들 그리움을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소망이나 희구가 성취되기를 염원하는 정서들이 자연 사물을 통해서 형상화하는 것은 사물적 이미지를 여과해서 관념과 융합하여 시의 어조나 나아가서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시의 형태라고 말한다.
우리 현대시의 자연성은 고전시가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으나 본격적인 자연시는 1940년대 청록파에 의해서 가시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연의 재발견을 통해서 시대적인 감각과 문명적인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오늘 이 시간 / 불꽃으로 산다 / 계절 꽃 다 지고 / 서리 내리는 가을 / 붉어붉어 타는 바다 / 피 쏟아 탄생된 시(詩) / 그 기상 그 열정 바람인들 막을손가
--이지영의 「사루비아」 중에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 힘겹게 기어오르는 모습 // 이젠 / 돌아가는 길마저 잃어버렸구나 // 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낸 채 / 검게 익어버린 이파리 사이에서 / 피돌기를 멈추고 / 벼랑 끝 낯선 세상으로 / 힘겹게 타오르고 있구나
--윤수아의 「담쟁이」 중에서
이 두 작품에서는 자연과 계절이 만나고 있다. 이지영이 ‘서리 내리는 가을’을, 윤수아는 ‘앙상한 뼈마디’라는 시적 정황을 통해 잎이 모두 떨어진 후의 시간성, 그러니까 겨울의 이미지가 풍기고 있다. 이지영은 ‘피 쏟아 탄생된 시’가 ‘사월 때까지 부르리라’는 낭만적 자연관의 원리인 동화(同化)를, 윤수아는 ‘잃어버렸구나’ 혹은 ‘타오르고 있구나’라는 객관적인 어조로 보아서 투사(投射)의 원리를 적용하여 시를 완성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주관과 객관(혹은 주체와 객체)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서 어느 쪽이 독자들의 공감을 획득하고 또 어느 쪽이 표현과 주제의 표징에서 효과가 있느냐하는 것은 시인이나 독자들의 정서의 순도(純度)에 따라서 크게 작용하게 된다. 자연은 시간에 따라서 그 형태가 변한다. 개화에서 결실까지의 과정이나 낙엽에서 소생까지의 시간은 시인들에게 다양한 사색과 정서의 순환을 제공하기도 하고 또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그러한 자연을 자신의 정서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인 인격화로 표현하는 것(동화)과 자연을 어떤 다른 존재로 채워서 그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것(투사)으로 나누어 형상화하는 것이 통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삼태별자리 서산으로 기울 때쯤 / 새벽이슬 맞으며 돌아오는 산기슭 / 부엉이 구슬프게 울어대고 / 하늘 가득 부서져 내린 달빛 / 초가지붕 위, 박 한 덩이 낳았다
--권규학의 「가을밤」 중에서
순간마다 호흡하는 / 슬픈 노래를 / 허공에 담아 // 목을 빼고 불러도 / 사라지는 눈꽃이여 // 수십년 묵은 고목에서 / 머물다 / 겨울빛으로 섰다
--박은석의 「첫눈」 중에서
여기에서는 ‘가을밤’과 ‘첫눈’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성을 시적 정황으로 설정하고 있다. 권규학은 서정적 자아를 추구하면서 계적 감각을 살리고 가을 산촌의 정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박은석은 시간성을 존재의 문제까지 좀더 구도를 확대해서 적시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상승시키고 있는데 ‘첫눈’이 ‘수십년 묵은 고목에서 / 머물다 / 겨울빛으로 섰다’는 이미지의 융합이 또한 공감의 영역을 확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자연은 신의 예술이라고 했다. 신이 창조한 예술을 우리 시인들은 그 이상의 진리를 수용하고 내면에서 분사하는 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파스칼이 그의 『팡세』에서 말했듯이 자연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신학까지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부터 배우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연을 깊이 존중하는 사람이다.
이 밖에도 한혜숙은 「단풍」에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 어미의 붉어진 눈시울’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허소라의 「봄이 오는 소리」에서 ‘신이 흘리고 간 그 한 말씀으로 집짓기 위해 / 검불대기 물어 나르던 저 피멍던 부리를 보아라’라는 어조는 ‘봄’이 만물과 혹은 인간들과 ‘이제 만상이 하나 되는 화해의 비탈’로 인도하는 계절의 신비를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김서연의 「자색란」과 기우표의 「낙엽 애모」, 이종숙의 「가을 소리」 등에서 자연과의 심도 있는 교감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특히 이종숙은 ‘혀끝에서 심장을 타고 / 차갑게 터지며 / 죽음인가 / 삶인가’를 자문하고 있어서 존재에 관한 인식까지도 접근하고 있어서 앞으로 그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투명한 유리에 갇힌 / 사람이 서로의 거리를 재고 있다 / 한 시절 그리움에도 / 어긋남과 고통이 있는 법 / 가질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이 / 쉬지 않고 걸어가는 발길은 커피잔과 입술 사이의 / 흔들어 마시지 못하는 / 뜨거움처럼 남아 / 억센 세상 뒤돌아보면 / 남아 있는 것은 박제된 시간뿐 / 그 안으로 찾는 / 기억된 모든 아름다움의 착각들
이와 같이 이종숙이 함께 발표한 「박제된 시간」전문에서도 자연과 시간과의 상관성을 간결하게 적시하고 있어서 존재의 인식과 성찰에 이르는 그의 시법은 예사롭지가 않다고 할 수 있다.(지구문학』 2009. 봄)
‘세월’과 동행하는 삶의 형태(形態)
현대시의 구조나 구성요소에는 이미지의 작용이 크게 나타난다. 영국의 비평가 I. A 리처즈의 말에 의하면 ‘통합적, 마술적 상상력’으로 여러 가지의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전체적인 통일체를 구성하는 능력, 그러니까 ‘생산적 상상’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연상(聯想)작용(연합적 상상-associative imagnation)과 창조활동(창조적 상상-creative imagnation)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다시 풀어보면 이미지란 사물로 그린 언어의 회화이기 때문에 언어 이전의 사물로 그러지는 대상 사물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강이건, 달이건 간에 일차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이 경험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언어로 재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그 시인이 삶을 통한 체험의 산물이며 체험을 성립시키는 대상 존재나 대상 사물에 의해 떠올리는 상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대체로 직접 외계의 자극에 의하지 않고 기억과 연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像)인데 시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서 구체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직접적으로 상상된 어떤 형상을 비춰 주게 된다. 이것을 실재적(實在的)인 것보다도 순간적으로 다양한 것이 요약된 인상 깊은 연상이며 심리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나 상상은 모두 과거에 체험된 그 어떤 것이 동기가 되는데 시는 그것들의 기능을 살리고 언어의 감촉으로 심상적인 세계, 바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현대시는 노래하기보다는 더욱 생각하는 것이 되었고 위로가 된다고 하기 보다는 추구(推究)하여 발견하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의식과 사고(思考)와 결부된 이미지를 중시함으로써 종래에 없었던 표상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음악적이어서 도취적인 시에 대하여 이미지는 지성적이며 의식된 구성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마음의 움직임-환상과도 다른 새롭게 창조된 조형적인 사실성을 지니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산문과도 달라서 사상을 시각(視覺)이나 청각(聽覺) 등에 의해서 느끼게 하는 중요한 시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봄호 『淸溪文學』에 발표된 작품들은 새롭게 맞이하는 한 해의 시발점에서 재생해보는 자신의 체험에는 ‘세월’이라는 시간성이 지나온 삶의 형태를 반추(反芻)하면서 인식하는 시법이 많이 응용되고 있어서 흥미롭다.
늦옥수수 수염 같은 오후 / 옥수수 알 닮은 말들이 / 톡톡 터지는 시간 / 오랜만에 찾은 빈집에서 / 손가락으로 튕기는 아르페지오 / 스트로크 리듬 치는 심장 / 여섯 신동의 기타연주 소리가 / 화면을 흥겁게 수놓는다 / 보폭이 길어도 / 쫓아갈 수 없는 / 잉여의 시간 / 함박꽃으로 핀다.
-조현묵의 「잉여의 시간」 전문
우선 조현묵의 시간은 ‘보폭이 길어도 / 쫓아갈 수 없는 / 잉여의 시간’이다. 아무리 많이 소비해도 남아도는 잉여(剩餘)의 이미지가 자신의 과거 체험이 현실적인 생활에서 교차하고 있다. 여기에서 ‘늦옥수수 수염 같은 오후’라는 시간성을 직유법으로 표현한 것은 ‘옥수수 알 닮은 말들이 / 톡톡 터지는 시간’을 의미적으로 극대화하려는 효과가 이미지로 승화하고 있다.
대체로 이미지의 교차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조현묵은 오후에 찾아간 ‘빈집’과 연결되고 있는데 이는 과거의 회상에서 획득한 시간과의 동행이 그의 인식에서 ‘흥겁게 수놓’거나 ‘함박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또한 그는 시각에서 투영한 것 외에도 ‘기타연주 소리’로 청각에 까지 회상반경을 확대하고 있으며 ‘손가락으로 튕기는 아르페지오 / 스트로크 리듬 치는 심장’에서 그에게 내재된 삶의 깊이에서 탐색한 시적 진실을 이해할 수 있개 한다.
어제 그제 / 익숙했던 날들이여 / 잘 가라 / 끝없이 / 새로운 것을 찾아 / 흐르는 세월 / 오늘 내일 / 속절없이 갈망하는 / 세월의 강 / 어느 새 / 흰머리가 희끗희끗.
--장현경의 「세월이 흘러」 전문
여기 장현경도 ‘세월’에 대해서 그가 ‘어제 그제 / 익숙했던 날들이여 / 잘 가라’는 어조로 지나간 과거가 익숙한 체험을 뒤로하고 재생의 인식에서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이는 ‘끝없이 / 새로운 것을 찾아 / 흐르는 세월’이며 ‘오늘 내일 / 속절없이 갈망하는 / 세월의 강’이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인생의 진실을 창조하려는 시적인 구조를 잘 현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과 모색은 ‘어느 새 / 흰머리가 희끗희끗.’ 하다는 아쉬움을 인생행로에 무겁게 뿌리고 있다. 일찍이 어떤 철학자가 시간은 일종의 지나가는 사람들의 강물이며 그 물살은 세다. 그리하여 어떤 사물이 나타났는가 하면 연방 스쳐가 버리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경험론이지만, 인간의 재치가 얼마나 무상하며 하찮은 것인가를 눈여겨보라고 시간(혹은 세월)에 대한 나의 몫은 그렇게 많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연희동 뒷산, 궁동공원 산책로를 한 바퀴 걷는 동안 / 어제 피었던 산철쭉이 꽃잎을 떨구고 있다 / 산책로 길섶에 문득 뿌려진 / 시간의 바람결이 출렁거리고 / 바람결 틈사이로 스며든 / 아침 햇살이 이슬을 핥아내고 있다 / 꽃대공이에 머문 한 점 사랑의 징표가 / 지워지고, 지워진 자리에 다시 도지는 / 사랑하는 시간이여, 아 이럴 수가 / 버려진 꽃잎 우에 겹쳐지는 운명 / 언제부터인가 / 공원 산책로 초입에 암시된 계절의 향훈 / 그들은 이미 예비된 안개를 / 오늘 아침에도 표정 없이 흩뿌리고 있다.
--김송배의 「시간에 대하여 . 27」 전문
이 작품은 본인의 졸작이다. 나는 이 시간을 소재로 하여 약 30편의 작품을 썼다. 이러한 집념은 시간과 체험의 함수관계에서 연작으로 형상화하는 작엄으로 변모했다. 어떤 글에서 ‘나에게 배당된 시간은 얼마일까.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은 어림잡아 얼만큼의 길이일까. 지금쯤에서 돌아본 시간은 과연 적절함과 최선으로 함축한 창조의 행보(行步)였던가.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집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 어느 날 내가 홀로 서 있음을 알았다. 시간은 빛깔이 없다. 동시에 향기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새겼다. 시간은 자아 성찰과 희망을 제공하는 마력에 공감한다. 옛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도 시간의 허비를 경계하고 있다. 존재의 확인을 통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는 창작배경을 설명한 바가 있다.
- 어둠이 내리는 공원의 오후 / 부슬부슬 내리는 비 / 산 중턱에 구름 띠를 두르고 / 흘러 가는 모습은 / 세월타고 날아가는 선녀의 모습(류선모의 「늦가을 비」중에서)
- 안개 자욱한 길 / 등 굽은 등걸 하나 걸어간다 / 세월의 옹이가 박혀있는 / 손과 발(김금 자의 「나뭇등걸」중에서)
- 타인에게 용서받을 순 있지만 / 엄한 역사에게까지 / 용서받을 순 없는 법이다 / 과거, 현재, 미래의 세월 앞엔 / 강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김석태의「나의 진리관」중에서)
- 세월은 무심히 / 흘러가고 또 오는 것 / 슬퍼할 겨를도 없이 // 여름날은 가고 / 아득히 먼 시절들은 / 그리워지나니.(김영미의 「가을」중에서)
- 해야 할 말 가슴에 새겨둔 사랑 / 아쉬움만 남아 / 돌아눕는 세월 / 끝자락에 매달려 흔 들리고 있다(김재삼의 「갈대 인생」중에서)
- 시퍼런 군무 속에 엮인 세월이 / 무수히도 스쳐 간 흔적을 보여준다 / 둥지 속을 대동하 여 뒤척거린다(김화순의 「아름다운 화음 소리」중에서)
- 세월은 무정하게 / 앞만 보고 가네 / 한 번쯤 쉬었다가 / 뒤도 옆도 살피지 않고 / 외로 운 구름 가듯 / 바람에 부딪히며 / 흘러가는 물결 위에(박주연의 「부평초처럼」중에서)
- 떨어지는 낙엽 밟고 / 달려가자 / 흘러가는 저 세월도 / 사랑 싣고 달려가네!(유성복의 「가을」중에서)
- 하늘이 주신 성품을 따라 / 바른 삶 닦아가는 길은 / 인연들과 지혜롭게 어울려 / 세월 위에 삶 길을 빛내리(윤영석의 「지혜의 해」중에서)
- 세월 따라 변화하는 / 바이오리듬 속에 / 건강식 챙겨준 당신이 있었기에 / 이 내 몸 건 강함은 당신의 덕이지요(정송옥의 「고마운 당신」중에서)
- 서리 고인 주름 / 세어나간 세월 / 자식은 객지로 / 영감은 이승 떠나고(허태기의 「할미 꽃」중에서)
그렇다. 이번 호에서는 ‘세월’에 관한 제재(題材)가 많았다. 이는 그만큼 우리들의 뇌리와 정서의 향방이 시간성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이 ‘세월’은 ‘흘러가’는(혹은 ‘흐르는’) 유수(流水)의 상징성을 부각하는 특이성이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 세월의 그늘 속에 내려앉은 / 바람처럼 공허한 이야기들 / 마냥 흔들리고 속절없더니 / 뒷모습의 고영(孤影)이 애처롭다 / 바람이 일어 마른 잎 구르는 들판 / 조바심에 갈증 나는 그 서늘한 옷자락 / 깃발처럼 펄럭인다 / 휑하니 빈 가슴
기막히게 해맑은 가을빛에 / 내걸어 놓고 /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치는 / 아릿한 쓴맛 안으로 깨물고 있네.
--마영임의 「늦가을」전문
끝으로 마영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 세월의 그늘 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영(孤影)’의 이미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늦가을’의 이미지나 상징은 대체로 고독함이며 ‘공허’함으로 현현된다. 그래서 그는 ‘휑하니 빈 가슴 / 기막히게 해맑은 가을빛에 / 내걸어 놓고 /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치는 / 아릿한 쓴맛 안으로 깨물고 있’어서 공감의 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청계문학 2016. 여름)
간명한 표현과 명징한 주제
현대시의 읽기에서 주요한 쟁점은 표현력에서만 관찰할 것이냐, 아니면 주제로 투영되는 메시지가 감응을 갖게 하느냐는 등의 문제로 독자들이 왈가왈부하는 표면적인 양태를 두고 많은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어쩌면 독자들의 지적 한계와 지향점의 탐색에서 다양한 독시법이 있겠으나 시가 가지고 있는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에 충실하게 탐색하는 작품의 전개나 주제의 승화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법(詩法)은 대체로 현실이나 과거를 통한 체험의 산물인 상상력의 재생으로 보편적인 체험을 중심으로 생성하는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으로 이어나가다가 결론에서 주제를 강렬하게 형상화하는 시법과 또 하나는 표현의 생소화 곧 낯설게 하기의 시법으로 이미지를 투영해서 새로운 비유로 시의 멋을 충족시키는 해법을 자주 응용하는 경우를 많이 대하게 된다.
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것은 외적 사물에 착목(着目)하면서 내적으로 감응(感應)하거나 동화(同化)하는 상상력은 한 편의 작품과 상관하면서 우리가 공통으로 향유하는 칠정(七情)이 접맥하는 어떤 메시지를 창출하게 되는데 이때에 발현하는 것이 주제로서 독자와 공감하게 된다. 대체로 요즘의 시적 경향은 실생활(real life)에서 탐색하는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에 많은 표현력을 할애하고 있지만 우리 시의 본령은 서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사물과 시인 사이에서 전개되는 언어의 마력은 실로 시의 깊이와 맛을 더욱 감미롭게 가중하는 효과를 획득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는 표현의 필수요건인 시의 언어(혹은 시어)가 풍부하게 또한 적절하게 현현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언어의 중요성은 수필이나 산문문장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살펴본 『청계문학』 지난 겨울호에서는 많은 양의 작품들이 수록되었는데 모두들 심혈을 기우려서 자신의 진실을 묘사하고 현현하였으나 더러는 너무 진부한 문장들이 주제를 첨예하게 적시(摘示)하지 못하는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명제(命題)에서 출발한다는 정의를 생각한다면 문장의 간명함과 주제의 명징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간결한 표현의 작품 몇 편을 골라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초대시로 게재된 졸시 「묵향」전문을 살펴보면 창작의 의도와 표현한 언어가 가지는 메타포어를 이해함으로써 작품의 이해와 주제가 명징하게 드러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향내가 꽃으로 피었다 / 하얀 꽃 / 검은 향기 / 흠뻑 / 적막 한 모금 머금은 채 / 마음 끝자락 / 청순한 구름 함 점 흐른다. /
여기에서 ‘묵향(墨香)’이라는 소재에 주목하면서 작품의 전체를 의식해야 한다. 묵향은 서예에서 하얀 백지 위에 까만 글씨를 쓰기 위한 준비로 먹을 갈 때 풍겨나는 향기를 일컫는다. 이때 스며드는 그 향내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소재도 지필묵(紙筆墨)을 소재로 한 비교적 간명하게 구성되었다. 필자의 시창작법 『시가 보인다, 시인이 보인다』에서 살펴보면 이 작품의 초고(草稿)에 ‘손끝에서 / 꽃 향기로 은은하다 / 하얀 화선지 위 / 문득 번지는 검은 향내 / 내 마음 한 자락 뿌리고 / 구름처럼 흠뻑 취한다 / 청순한 모습이여 / 작막한 향기여’라고 일종의 메모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도취된 감상적인 느낌을 받게 하고 있었다. 또한 감상적인 정경의 묘사가 정적인 언어로 보여서 쉽게 접근할 수도 있겠으나 ‘화선지’나 ‘내 마음’ 혹은 ‘처럼’ 그리고 ‘이여’ 등의 상용어인 화자나 직유 그리고 감탄사를 최종 퇴고(推敲)를 통해서 줄이고 간명하게 필요한 언어만 취택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어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전문
여기에 소개하는 김종삼의 ‘묵화’도 먹으로 그린 그림의 한 폭인데 ‘묵향’과 거의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 먹는 소’와 ‘할머니의 손’ 이 두 화자가 시적 정황을 도입해서 하루를 마감하면서 서로 쓰다듬는 정경에서 우리는 무엇을 감지할 것인가를 살펴야 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외로움, 쓸슬함 내지는 고독함을 서로 교감하는 우리 인생의 진실이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고독함을 단 6행으로 표현했어도 우리는 거기에 흡인(吸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의 묘미는 바로 이러 곳에 존재한다.
산굼부리 흰 억새꽃 구름을 먹는다/ 용두암 해녀가 / 숨비는 휘파람 소리 / 바람 불고 그믐달 뜨면 / 바다를 향한 손수건 / 당신을 향해 하얗게 울고 있다.
--고경자의 「산굼부리 억새꽃」전문
이제부터 『청계문학』작품을 읽어보자. 고경자는 착목한 ‘억새꽃’에서 알 수 없는 비애, 숨겨져 있는 눈물이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삼굼부리’와 ‘용두암’과 ‘바다’라는 특수한 상황이 이미 제주도라는 지형을 짐작하게 되지만 ‘억새꽃’과 ‘당신’ 그리고 ‘해녀’와 ‘휘파람 소리’의 상관성이 그에게서 어떤 강렬한 체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는가하는 유추를 하게 한다. 그가 주제로 정립하는 하는 것은 마지막 연 ‘당신을 향해 하얗게 울고 있다.’는 결론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바다’와 ‘당신’과의 울음이 복합적으로 교감하는 심리적인 형상화가 간명한 시법으로 현현하고 있어서 그의 시적 진실은 공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의 무더위와 눅눅함을 안고 / 곰팡이처럼 얼룩진 고뇌를 털려고 / 안간힘 / 산들바람 스치는 외로움에 / 못생긴 얼굴 털어내고자 / 가시에 찔린 가슴 / 몸살 알아도 자신의 몸 / 품고 / 유혹 같은 사랑의 향기 / 다 퍼부어도 남는 아쉬움 / 노란 잎사귀로 날리고 있네.
--김정희의 「모과」전문
김정희 ‘모과’에서는 사물이 의인화하는 시법에서 작품의 묘미를 탐색하게 되는데
‘모과=인간’이라는 비유에서 사물이 사람에게 사람과 동일한 성질을 부여하고 비인격적인 생물이 인간의 인격화에 기여하는 비유법을 응용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고뇌와 외로움 그리고 아쉬움 등이 ‘모과’라는 나무를 통해서 분사(噴射)하는 시법이 대체로 현대시에서 많이 응용하는 경향인데 여기에 특이한 점은 나와 너 등의 인칭대명사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생략하면서도 그 의미와 주제의 메시지를 간명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 공감을 유로하고 있다고 하겠다.
드높은 하늘 / 파랗다 / 하늘 저편에서 /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 가을을 짖는 소리 / 우리도 함께 / 하늘빛 옷을 입는다 / 가슴에 하늘을 품다.
--김지현의 「가을 하늘」전문
김지현 ‘가을 하늘’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우선 읽기 쉼고 가슴에 빨리 와 닫지만 ‘가을’과 ‘하늘’이란 언어는 이미 제목에서 채택이 되어 있는데 본문에서 구태여 자주 사용함으로써 작품을 설명으로 표현하는 결점을 알 수 있다. 우리 시법에는 대체로 제목으로 사용한 언어는 내용에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필자는 왜 그럴까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더니 제목의 언어를 반복해서 쓰게 되면 자칫 내용을 설명해서 이미지나 주제를 약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정점에서 보면 언어 절감의 효율성도 제고할 수 있는 간결성의 영역에 해당하지만, 어찌보면 우리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경시(輕視)하는 경향도 있을 수 있으므로 유념해할 부분이다.
가을이 불타고 있네 / 세풍에 휘둘린 침전된 열정 / 구멍 나 시린 가슴 / 벌건 단풍처럼 활활 타올랐으면.
--마영임의 「소묘」전문
마영임의 ‘소묘’도 인칭 화자는 숨어있다. 우주 공간과 만유(萬有)의 지상의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갈구하는 메지시이다. 이처럼 간결한 시 문장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다. 가을 단풍이 펼쳐내는 그 ‘열정’이 바로 우리들의 소망이며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원으로 발현되어 그의 시적 진실을 감응(感應)하게 된다. 이번 계절에는 간명하게 현현된 작품을 골라보았다. 간명하면서도 무엇인가 명징(明澄)한 주제를 던져주는 공감의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서 설레일 것이기 때문이다(청계문학 2016.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