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은 조문국 박물관이 있는 마을로 조문국 시대에는 말을 풀어 놓고 풀을 뜯기던 아름답고 조용한 초지가 많은 마을이었다. 이곳엔 말 무덤이라는 곳도 있다.
나는 광산 김가 37대손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지금은 마을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광산 김씨 일족이 모여 사는 씨족 마을로 타성이라곤 농사를 거들기 위해 흘러들어와 있던 몇 집뿐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대소가이고 일가들이 사는 세거지(世居地)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육 남매가 한집에서 살았으나 할아버지께선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셔서 많은 기억이 없다.
할머니 말씀에 할아버지께서는 젊어서 금강산 유람을 하시는 등 풍류를 즐기셨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찍으신 아기 손바닥 크기의 빛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께사는 경향 각처에 지인들이 찾아와 우리 집 사랑방엔 항상 손님들이 넘쳐났다고 하셨다.
화백에서부터 서예가 풍수와 한학자들까지 오시면 며칠씩 사랑에 묵다가 가시면서 흔적으로 그림을 남기시거나 글을 남기고 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집 사랑방 미닫이를 열면 둘둘 말아둔 매화도를 비롯해 각종 학과 대나무 등 낙관이 찍힌 그림과 옛 서적들이 족히 40여 점은 있었던 것 같은데 50여 년 전 대구로 이사 오는 과정에서 어머니께서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꼭꼭 싸서 8촌 댁에 맡기셨는데 후에 찾으러 가니 잃어버렸다고 하셔서 지금 생각해도 아깝기 짝이 없다. 그러다가 방송을 통해 훈민정음해례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렸을 때 사랑방 벽장 속에서 보았던,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던 냄새 나던 그 책에 아래아와 여린 시옷 등 한글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보았던 그 책이 이 세상에 글자가 만들어진 과정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단 한 권의 책 훈민정음해례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몇 날 며칠 잠을 설치기도 했다. 컴퓨터를 통해 해례본 원본의 내용을 찾아보고 나서야 내가 보았던 내용과 서로 다른 책인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지도 개운 한 건 아니다.
이때까진 우리 집이 잘살았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정도전의 풍수지리에 영향을 받으시는 바람에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풍기로 이사 가서 5년 남짓 사는 동안 가진 돈을 모두 소진하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살림살이가 이렇게 쪼그라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께서 집안 어른의 자리에 오르셨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우리 형제들에겐 무척 인자하셨으나 어머니껜 다르셨다. 한번 회가 마시면 머리에 띠를 두르시고 식음을 전폐하시며 누우셔서 시위하셨다. 어머니께서 밥상을 들고 들어가 여러 차례 잘못을 빌고 울면서 몇 차례의 용서를 구하신 후에야 숯불에 약탕관을 올려 달인 인삼 물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셨다. 회가 마시면 늘 이런 패턴으로 진행되곤 했다.
젊어서 아버지 성품은 불 칼 같으셨다. 출타하시려고 와이셔츠를 입으시다가 단추 한 개가 떨어졌다고 화를 내시면서 와이셔츠를 북북 찢으시는 모습을 어렸을 때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있다.
그 불같은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은 형제는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또한 아버지는 오 남매 중 맏이셨는데 어릴 적 백일해를 앓으시다가 한쪽 눈을 실명하는 바람에 한쪽 눈에 의안을 넣게 되면서 안경을 쓰게 되셨고 안경 쓴 사람은 선생님 앞에서 공부할 수가 없었던 시대라 지척에 학교를 두고도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셨다. 그러나 마을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도 생기면 개인 간의 일이 건 관공서와 관계되는 일이든 모두 아버지께 와서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모두 아버지 차지가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말없이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타성으로부터는 영주 어른으로 존경을 받고 계셨다.
우리 마을은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나뉘었는데 100여 호에 가까운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며 지금은 조문국 박물관이 된 터에 초등학교를 품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배산임수의 풍수 이론에 맞게 마을 뒤론 산이 둘러있고 앞으로 신작로를 건너면 벼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색깔로 바뀌는 검푸른 초록빛의 너른 들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 보면 작은 면적의 논이지만 어릴 적 내 눈엔 무지무지 너른 들판이었다.
들을 지나면 개천이 흐르고 장마철에 접어들어 비가 많이 내리려 홍수가 나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걸어 나와 시내 앞에 서서 엄청나게 불어난 물에 과일이랑 가구와 또 각종 농기구를 비롯한 생활용품들과 뿌리째 뽑힌 나무까지 휩쓸어서 흘러가는 누런 황토물 구경을 하는 것 또한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홍수만 나면, 수해로 피해를 본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나를 포함한 동리 사람들은 불어난 물을 구경하기 위해 냇가로 몰려나왔다. 그러다가 억세게 운이 좋은 날엔 흙탕물에 섞여서 둥둥 떠내려오던 사과를 건져 올려 먹는 행운도 있었다.
어렸을 땐 집안에 농사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 농사 일을 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는 줄 알고 낫질 한번 풀 한 포기 뽑지 않고 자랐다. 그래서 아직도 낫질이 서툴다.
난 엄마의 등 더욱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데리고 온 부엌일 하는 ‘온범’이의 등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엄마의 등은 기억이 없는데 온범이 등에 업혀 옥수수밭에서 놀기도 하고 작은 옥수수 대를 꺾어 다듬어 주면 죽죽 빨면서 잘근잘근 씹었던 기억도 세월이 흐를수록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러다 차츰 자라 우리 집 형편을 직시하게 되면서 지금껏 내가 하던 생각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게 되었다. 집에 머슴은 있었으나, 농사가 많아 머슴을 들인 게 아니고 일할 사람이 없어 머슴을 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머슴을 드려 일을 시키고 새경을 주고 나면 살림살이는 더 힘들고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난 봄이면 나뭇지게 끝에 꽃 혀 있는 진달래꽃을 얻으려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머슴의 지게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묻어난다.
아버지께선 양반이고 선비라 농사일을 안 하신 게 아니고 어려서 앓으신 백일해의 뒤끝으로 해소 천식이 심하셔서 몸을 조금만 빠르게 움직이시거나 힘을 쓰시면 숨이 차고 기침이 나서 힘든 일은 하려야 할 수가 없으셨단 것을 어느 날 저녁 엄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해 가을 마을 뒷산 조상님들 산소에 묘사를 지내려 산길을 오르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어린 나도 잘 오르는데 어른이신 아버진 몇 걸음 걸으신 후엔 기침과 함께 숨을 몰아쉬시며 쉬셔야 했다. 그때마다 나는 곁에서 왜 저러실까? 하는 의아한 생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다 가기를 반복했다.
그날 저녁 낮에 산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그랬구나! 하시더니 내 등을 쓸어 주시면서 차근차근 들려주셨다.
우리 집은 아랫마을 한 가운데 위치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오른쪽엔 거름 무더기와 사랑채 화장실이 있고 왼쪽으론 채 전이 있는 곳을 지나면 집으로 들어서게 된다. 집과 채 전은 담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ㄱ’자 형태로 된 초가집이다.
앞에서 보았을 때 정지. 큰방, 대청마루, 상방, 사랑방 순으로 되어 있고 아래 체는 부엌 옆으로 있는 장독대를 지나면, 앞으로 두지, 디딜방앗간; 머슴방, 외양간 순으로 되어 있었다.
마당에서 계단을 오르면 뜨락이 나오고 섬돌을 딛고 올라서면 대청마루에 오를 수 있다. 안 채 화장실은 부엌 뒤편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앞으론 채소밭 밭이 있고 밭 끝머리엔 대추나무들이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밭과 골목길의 경계 역할을 겸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 집 마당은 왁자지껄 놀이터였다. 친구들과 동네 제기차기와 구슬치기, 자치기, 땅따먹기, 말타기 놀이 등을 하면서 해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형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어느 집이나, 장자의 권위가 하늘 같던 시대라 할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어른들은 맏손자만 귀여워하시고 맏손자에게만 힘을 실어주시니 나와 두 살 터울인 동생은 형의 지배 아래 살았다. 형은 먹는 것부터 우리와 달랐다. 형은 할아버지와 함께 온갖 맛있는 반찬은 다 먹었다. 그게 불만이 쌓일 법도 한데 모든 식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나도 한 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러다가 보니 형은 우리 위에 군림했고 형의 말은 곧 법이었고 형은 황태자이자 우린 형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동생과 다투거나 잘못을 저지르거나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면 형이 나타나서 너희들 내게 몇 찰 씩 맞을 것 있다면서 맞을 대수를 정해 두고 착한 일을 하거나 동생들을 잘 보살피면, 그때마다 맞을 찰 수를 탕감해 준다고 형 마음대로 규칙을 만들어 통보한 뒤 시행에 들어갔고 한 달이 지나면 어김없이 남은 대 수만큼 반드시 손바닥을 때렸다. 그러다 보니 나와 두 살 터울인 내 동생과는 서로 덜 맞기 위해 집안일 거들기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부엌일을 돕던 온범이가 시집가면서 나와 동생은 어린 동생이 싼 똥을 치우고 오줌을 닦고 울면 없어 달래고 가족 식사가 끝나면 부엌에 가서 숭늉을 떠 오는 등 집안일을 도우면, 맞을 찰 수가 내려갔다. 동생과 나는 맞을 대수를 한대라도 더 내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서로가 쉬운 일을 먼저 하려고 다투는 날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날엔 일은 일대로 하고 맞을 대 수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올라가게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억울하다 하소연도 해보지만 귀 기울여 들어 주는 사람도 없다. 형 말을 들어야지 하는 말뿐 주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장손이 집안의 권위를 대변하는 시대였으니까 어른들이 모두 장손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게 장손이 만든 규칙이니까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이 규칙은 슬그머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