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만난 초등학교 은사님
김성규 명예교수
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국어 책에 나오는 시를 모두 외웠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늦은 밤 흥이 나면 자건거를 타고 반월성이나 황룡사지에 가서 바위에 걸터앉아 윤동주의 서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육사의 광야,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조리기도 했다. 벚꽃 만발한 4월이면 간혹 고등학교 시절에 꿈꾸었던 신라 천년의 꿈과 그리움이 아련히 가슴에 고이기도 한다.
소월의 진달래꽃을 보면서 간단하고 평범한 단어를 연결하여 가만히 가슴에 젖어 들게 하는 시구를 만들어 내는 소월은 문장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진달래꽃이 지극한 사랑이었는데, 요즘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돌아보니 세월의 무상함과 꿈과 영광이었다.
197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하고 공부를 마치고,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종양학과에 교수로 발령을 받고 1987년부터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영남대병원은 개원한 지 얼마되지 않아 영남대학교의료원의 거대한 건물도 새 건물이었고, 일하는 사람도 젊었고 병원은 활기가 넘쳤다. 특히 한국에서 방사선종양학과는 전국 대학병원에서 막 개원하는 추세였다.
영남대학교병원 방사선종양학과도 1986년 4월 1일에 개원하였다. 개원과 더불어 일을 하게 되었다.
암을 치료하는 방법은 외과적 수술하는 방법과, 고에너지의 방사선으로 방사선치료 하는 방법과. 항암 약제를 혈관에 투여하여 치료하는 항암요법이 있다. 국소 부위의 암은 수술로 치료하며, 암 부위와 전이가 염려되는 주위 인접 부분을 포함한 암 치료는 방사선치료로 접근하며, 전이 및 전신에 대한 암 치료는 항암요법으로 치료한다.
방사선치료는 현대과학의 발달로 상상을 초월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국소암 부위는 수술하지 않고 방사선으로 수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사선수술요법(stereotactic radiosurgery), 암 부위에만 집중적으로, 주변 장기에는 최소의 방사선을 조사할 수 있는 세기조절방사선치료(intensity modulated radiation therapy, IMRT)가 방사선치료의 꽃이다.
방사선치료기의 발전은 끝이 없다. 세계의 추세는 고에너지의 X선 치료에서 양성자 치료, 중입자 치료로 넘어가고 있다. 국립암센터와 삼성병원은 양성자 치료기가 가동 중이며, 연세 세브란스병원은 중입자치료기가 가동 중이다. 참고로 양성자 치료기는 500억에서 1,000억 정도, 중입자치료기는 2,500억 정도 가격이다.
근무 한지 10년쯤 되니 고등학교 은사님들께서 병원 진료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 연락이 왔을 때 전화를 받고 은사님의 별명만 입 속에서 맴돌 뿐 성함은 생각나지 않아 식겁하였는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백곰, 하마, 얌세이(염소) 등 그 후에 오신 은사님들도 별명만 입 속에서 맴돌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접 우리 과에서 진료는 받지 않았지만 소개와 안내만으로도 안심하고 진료 받으시고 내려가시는 모습에 가슴 뿌듯하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행운도 있었다. 초등학교 3, 4, 5, 6 학년 담임선생님들을 뵈올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김상율 선생님과의 해후이다. 어느 날 김상율이라는 환자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로 방사선종양학과로 왔다. 치료계획 CT를 하면서 물었다. 조금은 눈에 익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혹시 경주 계신 적이 있느냐고. 경주 계림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성동 살았던 성규인데 3학년 때 담임하셨는데요.”
김상율 환자가 큰소리로
“니가 성규가?”
성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어릴 때 모습이 남아있다고도 하셨다. 어린 눈에 비친 선생님의 인상은 조용하면서 한결 같으셨는데, 그 모습 그대로 살아오신 같았다. 치료 시간 때마다 선생님을 뵈었지만 그냥 옆은 미소가 전부였다. 그래도 가시는 길 마지막까지 잘 보살펴드릴 수 있었어 다행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은 강수균 선생님이셨다. 1987년 교수로 발령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이 교수불자회를 창립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불자들의 교수 모임이 없었다.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대학교 마다 학교 게시판에 공고하여 운문사에서 수련대회를 개최하니 관심 있는 교수님은 참석하라고 하여, 20명의 교수님들이 참석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1988년에 법륜불자교수회를 창립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전국 선방으로 도인 스님들을 찾아 법을 찾아 성지순례법회를 다녔다. 전성기에는 300명의 교수님들이 활동하였다. 강수균 선생님은 법륜불자교수회 활동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행운을 가졌다. 선생님은 대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계셨다. 창립 후 5년쯤 되어 대구대 강수균 교수님이 나오셨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하고 성함이 같으시네. 그 당시 강수균 교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번은 인도성지순례에 대하여 강 교수님께서 발표를 하셨는데 발표 내용 중에 경주 봉황대 사진도 있고, 젊은 시절 경주서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하셨다. 발표를 마치고, 계림초등학교에 근무하셨는지 물었다. 교대 졸업하고 초임지가 계림초등학교라고 하셨다.
“제가 선생님께서 담임하셨던 4학년 7반 성규니더.”
“그 성규가. 아직도 너희 악동들 기억에 선하다. 주대, 문원, 여익이 모두 잘 있나?”
건강하시고 체육을 잘 하신 선생님은 학생들의 영웅이었다. 초임이었던 선생님에게 참관 수업은 부담이 되셨던 것 같았다.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하여 박수 갈채를 받으며, 악동들은 너무 잘 하였다. 선생님께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학생들에게 고마워 한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4월 1일, 만우절
“선생님 교문에 웬 아가씨 한 분이 선생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하시면서 교문까지 가셨다가 찾다가 기다리다가 한 시간 수업 제대로 못하고 우리들은 줄행랑 치고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을 잡으러 오셨다. 그때는 초등학교 교사하면 군 복무 면제라고 하여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교대 지원을 많이 했다고 하셨다. 군 혜택이 안 되어 2년 근무하시다가 군 복무 마치고 계속 공부 하셔서 박사학위 받고 대구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때는 야간 숙직하시면서 우체국 교환원과 사건이 자주 있었다. 지금도 한 번씩 뵙는다. 너무나 건강하시다. 간혹 사모님 안부도 여쭙곤 한다.
5학년 때 담임은 박경동 선생님이셨다.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선생님이셨다. 장난도 가장 많이 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 방에 놀러가면 간혹 의견이 달라 선생님과 몸싸움 하기도 했다. 다리 하나에 학생 한 명씩 붙어 한참을 다투고 나면 배가 출출하고 짜장면을 사주신다.(그때는 항상 배가 가난하였다) 지나고 간혹 생각하면 그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하늘 같았음을 느낀다. 계림초등학교 앞길과 계림문방구 등 선생님 계시던 곳이 눈에 선하다.
내용과는 좀 엇나지만 어린 시절 계림초등학교 주위 성동동에 살았던 아이들에게 2022년에 조그마한 기적이 일어났다. 성동 아이들이 매일 모여 놀았던 큰 당수나무가 있었다. 저녁마다 성동의 윗마을, 중간마을, 아래마을 아이들이 연탄재를 던져가며 서로 잘났다고 전쟁을 쳤지만, 날이 밝으면 가장 친한 친구로 변해있었다. 그 당수나무는 산림청에 근무하셨던 정일이 할아버지가 1912년 심었던 것이다. 정일이 친구가 주동이 되어 연락하고 당수나무 세수 100년 기념행사를 추진했다. 성동 살았던 친구들 약 25명과 후원해 준 경주고 친구들과 시 관계자와 100여 명이 모여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행사를 하였다. 40년 만에 많은 친구들을 보는 행운이 있었다. 당수나무에 인접하여 월성이발소와 경주상업고등학교가 있었고 북쪽으로 몇 백 미터만 가면 북천이 흘렀는데, 그때 보니 산전벽해가 되었다. 당수나무 주위 외에는 시가지가 들어서 있었다. 당수나무 옆에 있는 월성이발소 사장님이 참석하셨는데 아버지로부터 그때 그 이발소를 물려받아 계속한다고 했다. 당수나무 세수 100세 기념행사 사진과 대단한 정일이 친구가 기억을 더듬어 국보급 1960년대 계림초등학교 근처 살고 있던 친구들 집과 주위 약도를 그렸다.
박경동 선생님께서도 군 복무를 마치시고 계속 공부를 하셨다. 부산 수산대학교 교수로 근무하고 계셔서 대학시절 부산대 다녔던 한기 친구와 한번씩 찾아뵙기도 하였다.
정년하고도 한번 찾아뵙지 않은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6학년 때 담임은 최병익 선생님이셨다. 어느 누구도 선생님의 소식을 몰랐다. 정말 선생님의 소식이 궁금했다. 선생님께서는 음악에 소질이 없어 다른 반에 체육을 대신 해주고 다른 반 선생님을 청하여 우리들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10년 쯤 전 어느 날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
“나 최병익인데.”
“아, 예 선생님 저 성규입니더.”
초등학교 때 보다 덜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해서 만나 뵙게 되었고 우리 과에서 방사선치료를 받게 되었고, 정성을 다해 해 드렸다. 치료 받으러 오시면 연구실에서 차 대접을 할 수 있는 행운이 자주 주어졌다. 마지막까지 잘 보살펴 드릴 수 있었다. 우리 담임을 마치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다시 대학에 진학하셔서 대구서 성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고 하였다.
그 당시 김상율 선생님은 연세가 좀 있으셨고, 강수균 선생님, 박경동 선생님, 최병익 선생님은 20대였다. 최병익 선생님도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셨고, 강수균 선생님과 박경동 선생님은 더욱 젊음을 불태워 일가를 이루셨다. 되돌아보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신 그런 성품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위대한 선생님들이여! 오늘의 저를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생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해후는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무심한 세월은 가기만 하고 육신은 낡았고 가슴에는 무상함과 꿈과 그리움만 남아있네요.
가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젊음만큼 소중한 것은 없더라.
부디
바다같이 살아 지극한 삶 이루소서.
이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상만큼 위대한 것은 없더라.
부디
하늘같이 살아 빛나는 삶 이루소서.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도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더라.
부디
바람같이 살아 투명한 삶 이루소서.
첫댓글 '일등'으로 들어온 원고에 감사드립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제가 약대나 의대 가기를 바라셨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제가 약대나 의대로 갔으면 '엄마'가 좀더 오래 사셨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은사들에게도 약대나 의대 제자가 좀더 '효자 제자'가 되나보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뿐 아니라 오래전 은사, 또 아는 친구들...... 등등 세월이 가면서 점점 연구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요? 특수한 분야의 고유한 체험을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쨌든 '효자 제자'를 보며 기쁘고 부러워합니다. 은사님이 나오는 사진도 있으면 찾아 보아 주셔요. 감사합니다.
보아도 보아도 삽입하신 약도는 압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