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책 소개
우회 화법과 반어의 묘미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남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녁이란 말 참 좋지요』가 시인동네 시인선 229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서 이남순 시인은 재난의 시기를 거쳐 왔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내면의 고투를 글로 간추려 낸다. 친밀한 상대를 지칭하는 ‘이녁’에 담긴 훈기가 전해오는 이 시집은 우리에게 어느 날 그 정감을 잃어버린 이의 마음에 공감케 한다. 재난 통과 후 사후적으로 그것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아픔과 고통을 다독이는 기록물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미완료형 서사로서 지금 이곳 삶의 현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남순 시인은 늘 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으로 인해 이남순의 시가 시단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 해설 엿보기
시에서 흔히 죽음을 다루는 것은 삶을 사유하려는 방편이다. 죽음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삶을 실감하지 못하고,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이는 우리가 현재를 사는 존재자이며 과거도 미래도 현재라는 기반을 통해서만 가능한 시간 개념이라는 의미다. 이남순 시에는 사고·전쟁·재난·병치레를 겪는 인물이 빈번히 등장하고, 여기에 죽음 사건이 끼어들면서 살아남은 자의 정념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얽혀 있고 이러한 얽힘 속에서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자리가 확인된다. 죽음이 만연한 사회를 향하여 건강성을 묻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남은 자에게도 쉽사리 행복을 주문하지는 못한다. 시인이 그 죽음의 내면에 천착하는 바를 간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숱한 죽음들에 도사린 현실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살 터울
열 살 형이 동생을 감싸 안고
뜨거운 불의 혀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아 저런,
동생이 먼저 형의 곁을 떠나다니
겁먹고 파고들어 숨통이 막혔을까
무늬만 찬란했던 이 도시 벌건 대낮
타다 만 라면 봉지만
증언하듯 날렸다
― 「라면 먹을래?」 전문
시집의 앞머리에 놓인 이 시는 두 살 터울의 형제가 불길에 휩싸이자 형이 방패 역할을 하지만 동생을 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부모가 모두 일터로 나갔거나 결손 가정에서 주식을 대체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고 화기를 다루다가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를 필두로 시인은 대사회적 발언을 이어가면서 죽음을 강력한 시대적 병증으로 진단한다. 죽음을 질병보다 깊은 위험으로 자각하는 시인에게 미투 해시태그의 여파는 여권운동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이면으로 잠입해 들어가 어떤 죽음의 이유를 짚어보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긍휼히 여기소서」). 삶의 조건이 위험한 일들로 점철되는 사회에서 관계성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위험한 것일 수밖에 없고, 타자에게로의 지향조차 유해한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의 사망사고를 다룬 시(「봄눈 백서」)에서 보여주듯이 그에게 맡겨진 과업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불사하는 것이다.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노동자가 품었을 희망은 결코 죽음이나 불행이 잠식할 수 없는 것임에도 위험한 사회의 안전장치는 전방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안전이 불명의 타자가 불안전을 통과한 뒤에 주어진다는 점은 또 다른 노동자의 삶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이런 점은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노동 현실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투신하는 노동자를 돌아보게 한다. 그를 영웅시하는 것을 넘어 불안전한 환경 속에서도 모두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위험에 처한 이들을 기리는 데서 이남순 시인의 모럴이 드러난다. 이때 모럴은 개인 차원의 윤리에 머물지 않는 대사회적 태도를 뜻하며 이어지는 시편에서도 이 같은 시인의 태도는 보여주기식 나열에 머물지 않는 확산성을 지닌다. 20년 차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 텔레비전과 짝이 된 58세 ‘돌싱’의 고독사, 로드킬 당한 동물과 다름없는 고압선 노동자, 대공습으로 죽은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시민들, 일일 노동자인 물류창고 화재 사망자. 이들이 처한 현실은 위험성을 기준으로 보면 평범을 상회하지만 하위 계층이 떠맡아야 할 위험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이뤄내기 어려운 위험사회를 향해 이들 각자가 지닌 최종 조건인 온몸으로 항거하는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김효숙(문학평론가)
목차
제1부
라면 먹을래?•13/늪•14/서녘이네•15/긍휼히 여기소서•16/모기떼•17/꿈꾸는 바벨탑•18/봄눈 백서•19/플랫폼•20/독도를 보았다•22/데자뷰•23/로드킬•24/뿌리는 아십니까•25/통배추론(論)•26/소화기도 못 참아•27/16개월•28
제2부
봄눈입니다•31/길 밖의 길•32/우렁꾼•33/여행•34/성탄절 주변•35/불똥•36/허새비•37/한가위•38/눈꽃 만장•39/소화기 놓이듯이•40/밥줄•41/프레지오•42/풍등•43/요로결석•44/한철 메뚜기•45/빈 병•46
제3부
능소화 목덜미•49/징검돌•50/부분일식•51/폐차장 생이별•52/등•53/뭣이 중헌디•54/탯줄 둥지•55/북촌 자명고•56/함안역•58/남명매•59/별빛 피사체•60/말씀 끝에 아멘,•61/함박눈 쿠데타•62/둥근 호박전•64/이녁은 좋겠슈•65/섣달•66
제4부
개밥바라기•69/새경•70/토피어리(topiary)•71/빈손•72/드라이플라워•73/명줄•74/빨간불•75/잘 먹었다 하실 테지•76/불가부득•77/배롱나무 아래•78/스크린에 불은 꺼져도•79/합천골, 쉼터•80/늦은 당부•81/애매미•82
제5부
어떤 공양•85/그늘막 사이•86/늙은 호박•87/울타리 목•88/미궁(迷宮)•89/얼척없네•90/다저녁때•92/초흔(焦痕)•93/발아래 공손히•94/시시포스 돌덩이•96/내 곁의 한 그루•97/겨우살이•98/자연학습•99/데칼코마니•100
해설 김효숙(문학평론가)•101
이남순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민들레 편지』 『그곳에 다녀왔다』 『봄은 평등한가』가 있다.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박종화문학상〉, 〈여성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