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엘로힘은 하나님, 쟈칼은 남자, 네케바는 여자, 베레쉬트는 태초로 각 오역하였다.
2) 창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모두 1인칭으로 대상이 아니다.
3) 본래 나의 성품을 만나려면 매개체(목사)나 매개행위 곧 예배나 기도가 전혀 필요치 않다.
4) 아브람 시대의 사건 기록에서도 사람을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기록이 있다.
나. 본론
1) 엘로힘은 하나님, 쟈칼은 남자, 네케바는 여자, 베레쉬트는 태초로 각 오역하였다.
엘로힘은 하나님, 하느님으로, 쟈칼은 남자로, 네케바는 여자로 번역하였고, 베레쉬트는 태초로 번역하였는데 모두 오역이다.
이는 모두 근본, 근원, 본성, 본래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모두 임시방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불교(붓다)에서는 무아로 설명한다.
개역성경의 번역에서 보면 모두 하나님이다.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모두 대상으로 느껴진다.
2) 창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모두 1인칭으로 대상이 아니다.
창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모두 1인칭이다. 1인칭은 대상이 아니다. 이래서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오해가 생긴다.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성품’으로서 임시방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3) 본래 나의 성품을 만나려면 매개체(목사)나 매개행위 곧 예배나 기도가 전혀 필요치 않다.
본래의 나의 성품(하나님)을 만나려면 매개체(목사)나 매개행위 곧 예배나 기도가 전혀 필요 없다. 어릴 때는 잠시 머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냥 나 자신을 알면 된다. 마음이라는 렌즈를 치워버린 나 자신이다.
이를 설명하자면 오식, 육식, 칠식, 팔식을 치워버린 나다. 보는 나, 듣는 나, 느끼는 나, 생각하는 나에 대하여 정견을 갖춘 내용이다. 마음이라는 집을 철거해버렸다는 뜻이다. 매일 매 순간 그냥 이러한 나 자신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4) 아브람 시대의 사건 기록에서도 사람을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기록이 있다.
하나님으로 번역하였기에 매개체나 매개행위가 등장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이를 행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먹고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해하여 자신들의 신에게 그렇게 아부하는 것이다.
생명의 그 빛과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