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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도 순조롭게 본연의 주어진 이야기들을 담아 내는 중 입니다
아직은 코로나의 심술에 방역이라는 꼬리표를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꼬리표를 떼어내는 날을 대비 하여 준비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주어진 지금의 시간에 최선을 다 하는 중 입니다
그 말 한마디가 지닌 의미를 배송 해 드림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성당에서 한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 곁에서 시중들던 복사(服事) 소년이 그만 실수를 해서
성찬례에 사용하는 포도주 잔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잔은 깨어지고 포도주가 성당 제단위에 쏟아졌습니다.
이에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가 노하여 복사 소년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마라." 하고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성당의 신부는 화를 내지 않고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말했습니다.
"얘야, 괜찮다. 신부님도 어렸을때 복사일을 하며 실수를 많이 했단다.
오늘일을 교훈삼아 좀더 노력하며 잘 하길 바란다." 라고 하면서
당황해 하는 복사 소년을 다독였습니다.
그렇게 성당에서 신부에게 쫓겨났던 소년은 커서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유고의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독재자로 더 알려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입니다.
(*유럽의 독재자/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유고슬라비아 서기장/
공산주의자/ 무종교인/ 무신론자.
1953년~1980년까지 28년간 유고슬라비아 통치- 티토주의 창시)
신부님을 도와 복사까지 했던 그가
무종교인,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쏟고도 따뜻한 위로를 받은 소년은 성장해서
천주교 대주교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은 '풀톤 쉰' 대주교입니다.
(1940년대부터 30여 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 강연을 통해
큰 감명을 주었으며, 1952년
〈인생은 살아 볼 만합니다. Life Is Worth Living〉라는 프로그램으로
‘최우수 TV 방송인’ 부문에서 에미상을 수상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수상 후보에 올랐다.
20세기의 새로운 매체인 TV와 라디오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전한 뛰어난 강연자요 신학자였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979년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영웅적 덕행으로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2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 가경자
<可敬者: 가톨릭에서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붙이는 존칭> 올랐다.《영혼의 평화 Peace of Soul》, 《인생은 살아 볼 만합니다》,
《십자가 바라보며》외 수십 권의 영적인 책을 썼다.
1895 ~1979 미국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 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인자한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칭찬의 말 한마디가 하루를 즐겁게 합니다.
유쾌한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삶의 용기를 줍니다.
함부로 뱉는 말은 비수가 되지만,
슬기로운 사랑의 혀는 남의 아픔을 낫게 합니다.
한마디 말! 그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철저하게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어차피 하는 말이라면, 긍정과 기쁨과 사랑의 말로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세요.
💝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 건강하세요.
💝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젊은 남녀가 연애 중이었는데
남자는 여자와 잠자리를 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며
남자를 한사코 거부를 했다.
그날도 둘이 티격태격하다가 남자가 화가 나서 하는 말,,,
"수박을 살 때도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먼저 맛보고
사는 거 몰라??......." 하자. 여자가 대답했다.
"한 번 맛본 수박은 안 팔리는 거 몰라 이 맹꽁아??......."ㅋㅋㅋ~~~
[커뮤니케이션 기술] 시소 타듯 맞춰주면 된다
대인관계는 시소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시소 탈 때 유능한 사람은 항상 상대방에 맞춰줍니다.
상대가 무거운 사람이면 자기가 조금 뒤로 앉아 무게를 맞춰주고, 상대가 가벼운 사람이면 앞으로 나와서 앉습니다.
자기를 먼저 내세우고 고집하면서 “나를 따르라” 하지 않고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보다가 반응해 주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과 문제가 생기는 것은 명상하시는 분들에게는 화두입니다. 그런 문제가 왜 왔는지 생각해 보시고,
내가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분별하시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해서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가족이나 친구가 내가 하는 일에 우호적이지 않고
빈정거리는 게 고민이라면 한번 원인을 분석해 보십시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인이 본인에게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본인이 무턱대고 밀고 나갔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면에서 불신을 준 일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원인을 찾아내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현재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냉철하게 판단해 보시고요.
그러고 나서 해결책을 만들어 개선해 나가시면 됩니다.
제가 여성개발원에 있을 때 한번은 저보다 일곱 살 많은 선배와
팀을 짜서 국제기구에서 하는 연수를 갔습니다.
여성개발원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청사진을 컴퓨터로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컴퓨터가 두 사람당 한 대씩 주어졌는데
같이 같 선배가 너무 열의가 많아서 컴퓨터를 계속 혼자서만 쓰더군요. 저는 어깨너머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요.
다른 팀 사람들이 그 선배가 너무 이기적이지 않느냐,
어떻게 저렇게 혼자서만 하느냐, 말할 정도였지요.
그분이 선배인데다 의욕이 너무 많으니까 계속 비켜줄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있다가
참다못해 나도 컴퓨터 좀 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의외로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랬느냐고 하면서 양보를 하더군요. 그분이 너무 열의가 많다 보니 미처 알아채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같이 사용했습니다.
말이 전혀 안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다르더군요. 얘기해서 안 되는 일은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이 미처 알아채지 못해서 오해가 생기는 일이 많습니다. 상대방이 충분히 내 입장을 이해해서 알아서 해주겠거니 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렇게 생기는 오해가 많습니다. 알아서 해주겠지, 했는데 각자 자기 생각에 열중해 있다 보면
미처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이지요. 일깨워 주고 대화하면 다 해결이 나는데 일방적으로 생각해서 자꾸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해가 생기다 보면 불신이 쌓여서 점점 벌어지고요.
대화로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서 차근차근 대화하면 다 되는데
사람들이 남의 비위 맞추는 걸 참 못하더군요.
주도권을 자기가 쥐고 “따라오라” 하는 사람은 많은데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직장 다닐 때 따돌림 받는 사람,
아예 돌려놓은 사람하고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보고 어떻게 그런 사람하고 친한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했지요. 제가 회색분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할 말 다 하고 아주 분명했는데도 그랬습니다.
비결은 딱 하나, 상대방에 맞춰주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대하면 됩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합니다.
둘은 결혼해 살게 되었습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을성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은 마주 앉아 얘기합니다.
문제를 잘못 풀어놓으면 큰 사건이 되고 맙니다.
소와 사자는 다툽니다.
끝내 헤어지고 맙니다.
헤어지고 서로에게 한 말,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소가 소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자가 사자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혼자 사는 무인도입니다.
소의 세상, 사자의 세상일 뿐 입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를 못 보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맙니다.
나는 지금도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그것도 나 위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보지 못하는 최선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럽디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고 그럽디다.
능력 있다고 해서 하루 열 끼 먹는 거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남들 쓰는 말과 다른 말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버둥거리며 살아봤자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깁디다.
백원 버는 사람이 천원 버는 사람 모르고,
백원이 최고인 줄 알고 살면 그 사람 이 잘 사는 것입디다.
만원 벌자고 남 울리고 자기 속상하게 사는 사람 보다
맘 편히 천원 버는 사람이 훨씬 나은 인생입디다.
어차피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 그 세상 원망하고 세상과 싸워봤자
자기만 상처 받고 사는 것,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자기 속 편하고 남 안 울리고 살면 그 사람이 잘사는 사람입디다.
욕심 그거 조금 버리고 살면 그 순간부터 행복일 텐데,
뭐 그렇게 부러운 게 많고,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전생에 뭘 그리 잘 처먹고 살았다고
그렇게 버둥대는지 내 팔자가 참 안됐습디다.
그렇게 예쁘게 웃던 입가에는 어느덧 싼 미소가 자리 잡아 있고,
적당히 손해 보며 살던 내 손에는
예전보다 만원짜리 몇 장이 더 들어 있습디다.
그 만원짜리 몇 장에 그렇게도 예쁘던 내 미소를
누가 팔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도매로 넘겨버렸습디다.
그럽디다. 세상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넓은 침대에서 잔다는 것이 좋은 꿈꾸는 것도 아닙디다.
좋은 음식 먹고 산다고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아닙디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다 거기서 거깁디다.
다 남들도 그렇게 살아들 갑디다.
내 인생인데 남 신경 쓰다 보니 내 인생이 없어집디다.
아무것도 모르며 살 때 TV에서 이렇다고 하면 이런 줄 알고,
친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살 때가 좋은 때였습디다.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디다.
언젠가부터 술이 오르면 사람이 싫어집디다.
술이 많이 올라야 진심이 찾아오고
왜 이따위로 사느냐고 나를 몹시 괴롭힙디다.
어떻게 살면 잘사는 건지 잘살아가는 사람은
그걸 어디서 배웠는지 안 알려줍디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려 하면
내 눈에는 피눈물 난다는 말, 그 말 정답입디다.
누군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물을 때
난 그날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깨가 굽어 있습디다.
죄 없는 내 어깨가 내가 지은 죄 대신 받고 있습디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다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고
정말로 기쁘고 유쾌해서 웃어본 지가
그런 때가 있기는 했는지 궁금해집디다.
알수록 복잡해지는 게 세상이었는데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고 어련히 알아지는 세상
미리 알려고 버둥거렸지 뭡니까.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질려 버립디다.
알아야 할 건 왜 끝이 없는지,
눈에 핏대 세우며 배우고 배워가도 왜... 점점 모르겠는지,
남의 살 깎아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내가 남보다 나은 줄만 알았는데
돌아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둘러보니
이제껏 내가 깎아먹고 살아왔습디다.
그럽디다. 세상사는 일 다 그렇고 그럽디다.
망태 할아버지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무서워하던 그때가 행복했습디다.
엄마가 밥 먹고 어여 가자하면 어여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물 마른 밥 빨리 삼키던 그때가 그리워집디다.
남들과 좀 틀리게 살아보자고 버둥거리다 보니 남들도 나와 같습니다.
모두가 남들 따라 버둥거리며 지 살 깎아먹고 살고 있습디다.
잘사는 사람 가만히 들여다보니 잘난 데 없이도 잘삽디다.
많이 안 배웠어도 자기 할 말 다하고 삽디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다 거기서 거깁디다
그저 허물이 보이거들랑 슬그머니 덮어주고 토닥거리며 다독이며
둥글게 사는게 인생 입디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럽디다.
*생활의 금언들*
좋은 생각을 가지면 어긋날 일이 없고,
부드러운 혀를 가지면 다툴 일이 없고,
온유한 귀를 가지면 화날 일이 없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불편할 일이 없습니다.
인생을 유연하게 물처럼 부드럽게 살면 막히는 것이 없고
고집대로만 살면 매사가 힘들고 어려움이 옵니다.
자연의 흐름은 달팽이도 개미도 산을 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상대와 친해지고 싶다면 공통점을 찾고,
상대와 멀어지고 싶다면 차이점을 찾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만사 빠르게 먼저 간 사람이 이긴 것이 아니라,
" 正道 "로 끝까지 간 사람이 아름다운 최후의 승자인 것입니다.
오늘도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하루가 될 것입니다
내 몸이다 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내 몸은 순간 순간 허물어져 갑니다.
내 몸이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흙으로 돌아갑니다.
윤이 나던 머리카락과 새하얀 이빨 길고 도톰하던 손톱과 발톱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보드랍던 피부와 쇠심줄 같던 근육
강건하기만 하던 튼튼한 뼈대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물로 돌아갑니다.
행복에 겨워 흘리던 기쁨의 눈물도 슬픔에 겨워 흘리던 비탄의 콧물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맛있는 음식에 입 안 가득 고이던 침도
몸 안 곳곳을 부드럽게 적셔주던 진액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썩은 살에서 배어나던 피고름도 냄새나고 더러운 대변 소변도
한 방울 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순간 온기로 돌아갑니다.
고운 이를 쓰다듬던 그 손길의 따스함도
미운 이를 증오하던 그 분노의 열기도 한 순간의 온기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거칠 것 없이 휘저으며 걷던 씩씩한 몸짓도
고아한 자태로 눈길을 끌던 우아한 몸짓도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갑니다.
내 몸이다하여 아끼고 치장하고 보살피지만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방울 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순간 온기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한 점 바람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그렇게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난 뒤
나의 몸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내 몸이다하여 뻗대고 자랑하고 지키려 애쓰지만
내 마음은 강가 돌멩이에 낀 누런 때와 같습니다.
밝고 어둡고 아름답고 추한 빛깔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고요하고 시끄럽고 솔깃하고 거슬리는 소리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향기롭고 지독하고 풋풋하고 비린내 냄새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달고 짜고 쓰고 매운 맛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부드럽고 거칠고 차갑고 따스한 감촉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이것과 저것, 옳고 그른 생각의 강,
그 강물의 때가 낀 자리가 나의 마음입니다.
아름답고 추한 빛깔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솔깃하고 거슬리는 소리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향기롭고 지독한 냄새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달고 쓴 맛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부드럽고 거친 감촉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옳고 그른 생각의 때를 강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온 곳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나의 마음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쉼과 못 쉼
당신 안에는 쉼과 못 쉼의 영역이 같이 있다.
당신은 항상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
누가 이길까? 당신이 선택하는 쪽이 이긴다.
누구나 다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습관적으로 못 쉼 쪽을 선택한다.
지금도 마음은 양 갈래 길앞에 서있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마음 깊은 안쪽엔 항상 큰 바다처럼 쉬는 공간이 있다.
그러나 마음의 표면은 항상 파도처럼 소란하다.
어느 쪽이 나을 것인가? 당신이 택하는 쪽이 현실이 된다.
쉬느냐 못 쉬느냐? 결국은 당신이 만드는 삶이다.
오늘 태어나서 처음 아웃백에 갔다. 나는 엄마 얼굴을 잘 모른다. 내가 5살이 되던 해, 엄마가 죽었다. 빠듯했던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식당 일을 나가고 돌아오던 길에 차에 치였다고 한다.
엄마가 죽고 난 후 일용직 노동자- 소위 말하는 노가다 꾼인 아빠는 8살배기, 5살배기 딸 둘을 혼자 키웠다. 우리를 없게 키우지 않기 위해 아빠는 피눈물을 흘렀지만, 애석하게도 아빠의 피눈물의 대가는 크지 않았다. 그냥 나와 내 언니와 아빠, 세 식구가 죽지 않고 살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너무나도 예쁜 원피스를 입고,
공주같은 구두를 신고, 누군가가 잔뜩 신경 써 준 머리를 하고 등교했던
내 짝의 외모에 홀려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갔다.
그 때 많은 것을 처음 알았다. 집 벽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 수 있단 것을, 집에 신선한 과일이 준비되어 있을 수 있단 것을,
집에 미끄럼틀을 놓을 수 있단 것을, 그리고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언니는 집이 가난했기에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해 상고를 갔다. 빨리 취직하고 싶다나. 나도 당연하게 언니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래에 대한 꿈이란게 없었다. 꿈을 꿀 형편이 아니었기에.
학교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그냥 심심해서, 할 일이 없어서,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 나의 재능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줄까 하는 기대감에 들었다. 결과는 전교 1등이었다. 내 재능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라는 희망이 현실로 다가온 첫번째 순간이었다.
중학교 시절을 ‘공부 잘 하는 아이’로 보낸 나는
지역에서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에 갔더니 성적이 팍 떨어졌다, 이런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었다.
첫 고등학교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다. 자부심이 컸다.
학원 하나 안 다니고,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 야금야금 사서 전교 2등을 했다는 게.
계속 공부하면 되겠다, 우리 가족에게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겠다 생각하며 기뻐했다. 그런데 아빠가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났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나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나 하나 일을 안한다면,
일 년에 한 번 새해를 맞아 다 같이 모여 먹는
두 마리에 8000원짜리 바싹 마른 전기구이 통닭을 못 먹게 되는 정도의 가난으로 끝날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엄청 울었다.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쉴때까지 울었다.
언니가 나를 안아줬다. 그리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해줬다. 어떻게든 언니가 돈 벌어올 테니,
너는 공부 해서 개천에서 용 한번 제대로 나 보라고.
언니가 너무 고마웠고 너무 미안해서 죽을 지경으로 공부했다.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을 샀고
언니가 보태준 돈으로 인터넷 강의 무제한 수강권을 샀다.
힘들어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는 고3을 보냈다.
나에겐 두 번의 기회는 절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죽어라 공부만 했다. 그리고 아빠가 싸준 기름범벅 김치볶음밥을 싸들고 수능장으로 향했다.
수능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 채점을 할 때 까지 계속 다리를 떨었다. 언니랑 아빠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것이 아무 소용 없어질까봐.
심호흡을 하고 채점을 했다. 국어 2점짜리, 지구과학 2점짜리에 X표가 쳐져있는 가채점표를 붙들고 온 가족이 목놓아 울었다.
아빠가 엉엉 울며 언니와 나에게 사과했다.
언니와 내가 그렇게 가자고 조르던 아웃백 한 번 못 데려다 준
못난 애비 밑에서 잘 커줘서 너무 미안하다고.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연세 의대생이 됐다.
현역 정시 연의라는 여섯 글자가 참 대단한 것이더라.
근 세달 열심히 과외해서 밀린 월세 300을 갚고도 400만원이 남았다.
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언니와 아빠에게 반반 나눠 줬다.
그리고 오늘, 아빠가 아웃백을 사 줬다.
그것도 4인 랍스터 세트로. 언니와 내가 스파게티와 스테이크와 랍스터까지 먹는 모습을 본 아빠는 또 울었다. 아빠가 울어서 나랑 언니도 또 울었다. 울면서 4인 세트의 모든 음식을 다 먹었다.
배가 찢어지게 부를 때까지 음식을 먹어 본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배가 찢어질 때까지 음식을 먹어 본 아빠와 언니의 모습도 처음이다. 정말 좋아보였다.
인생의 한 줄기 빛이 열린 우리 모두의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다짐했다.
우리 아빠, 우리 언니에게 생일이 아니라,
새해 첫날이 아니라,
무슨 특별한 날이 아니라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먹고 싶으니까
아웃백에 가서
4인 랍스터 세트를 시켜 먹을 수 있는 인생을 선물해 주기로.
인간 심리
기특하게 혼자서 열심히 한국말을 공부하는 독일 친구가 질문한다.
“요즘 속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게 누워서 떡 먹기가 아니야.”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며시 내 표정을 살핀다.
분명 ‘누워서 떡 먹기’를 최근에 배웠고,
나한테 써먹어보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영리한 친구는 한국말 교재를 사다가 단어와 표현을 달달 외워다가는
한국 사람한테 써보고는 그것이 적재적소에 쓰인 표현인지 아닌지
한국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확인하고는
자신의 학습에 피드백을 받는 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 친구와 만날 때면 친구를 만난다기보다는
뭔가 언어 교환 상대를 만나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고,
심지어는 그에 의해서 이용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가 쓴 ‘누워서 떡 먹기’에 아무 반응을 안 했더니 친구는 거기에 포기하지 않고 또 다른 표현을 쓴다.
“있잖아. 속담 공부하는 게 식은 죽 먹기가 아니야.”
예전에는 그런 친구에게 칭찬도 해 주고, 격려도 해주었지만
그랬더니 내 이용가치가 더 높아졌나 보다.
친구는 집요하고, 나는 이번에도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속담 공부가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니라고.”
못 말려. 한국말에 쉽지 않다는 표현이 그렇게나 많이 있었나.
나는 한 마디 한다.
“잘했긴 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진부한 표현 안 써.”
내가 좀 심했네 싶었지만
친구는 내 핀잔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속어 표현을 쓴다.
“그럼, 이건 어때? 속담 공부가 장난이 아니야.”
그래, 내가 졌다. 너 잘났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는
친구의 노력이 가상해서 친구의 속담 공부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새와 쥐가 똑똑해서 사람처럼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이제 복수할 때가 왔다. 이 참에 내 외국어도 연습해 보자.
“너네들은 이럴 때 ‘벽에도 귀가 있다’라고 하지.”“아, 그렇구나!”
자기들 말에 있는 표현을 인용해 주니까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네.
“그럼, 이건?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이 사람 눈이 나쁜 거야? 아니면 떡을 잘못 자른 거야?”
“옆집의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인다고.”
“아, 그 말이었어? 그건 그렇고 한국사람들은 정말 떡을 좋아하나 봐. 떡에 관련되는 속담이 많이 있잖아.
그림의 떡,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못 먹는 떡 찔러나 본다…”
와, 이 친구. 정말 공부 많이 했네.
그제야 나는 친구에게 그동안 아꼈던 박수를 쳐준다.
“근데 말이야.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속담이 있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왜 배가 아프지?”
“그건 정말 배가 아프다는 말이 아니라 질투한다는 거지.”
“아니, 사촌이 땅을 샀는데 왜 질투를 해? 축하해 줘야지.”
“부러우니까 질투할 수도 있지.”
“아니, 사촌이 땅을 사면 부자가 됐으니까
내가 나중에 필요하면 돈을 빌릴 수도 있고 좋잖아.”
친구는 영 그 말이 이해가 안 되나 보다.
영어 속담에 비슷한 말이 없으니 답답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독일어 표현이 생각이 난다.
“샤덴프로이데” “아!!!!”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심리를 뜻하는 독일 단어이다. 일본어에도 남의 불행을 보면 밥맛이 좋아진다는 표현도 있다.
그러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그들의 표현과는 정반대로 남이 잘 된 것을 보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의 심리는 꽤 복잡하다.
보통 인간은 선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짓궂고, 못됐기까지 하다.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렇게도 복잡하고 사연많은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단한가지 [정보]랍니다.
그래서 삶이란 생명이 정보를 갖고 한바탕 놀아보는 것뿐입니다.
생명이라 스스로 인식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능력이 바로 생각,감정,느낌입니다.
이 생각,감정,느낌들이 어울려 활동하다보니
세상이 이토록 복잡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몸, 느낌, 생각, 의지, 분별)을 공으로 보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나라고 인식하는 이몸이나 생각, 감정, 느낌들이 전부 다
결국은 일시적으로 생멸하는 정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식이 감각 인식하는 정보로서 세상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이미 양자물리학에서 입증된 지극히 과학적 결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정보의 바다속에 빠져서 혼미한채 헤메는데 있습니다. 석가는 이러한 삶의 본질을 인류최초로 정견하고 깨치신 분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것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고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한 인류가 공유하는 주관적인 정보다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질이 정보의 바다이기에 삶의 본질도 결국은 생명이
정보를 갖고 한바탕 창조체험하며 놀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질적으로 하나도 긴장하거나 심각할게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스스로 살아움직이는 생명현상이듯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생명은 마치 물,불, 전기, 화학원소들처럼 영원한 우주의 기본원소입니다. 정보가 인연따라 모여 수많은 몸과 마음을 만드는 창조놀이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와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창조놀이에 같이 동참하세요.
그때 당신은 피조물신세에서 벗어나 창조주의 대열에 동참하게 됩니다.
견성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은 다 이본질현상속에서
일어나는 부분적인 현상에 대해 이름붙인 관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중간개념에 속지 마시고 가장 본질적인 것을 정견이해하십시오.
살아지는 인생 vs 사는 인생
🌱 진화,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 🌱
♤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 ♤
4. 우주 만물은 진화하도록 창조되었다
말씀드렸듯이 조물주가 우주 만물을 창조한 목적은 진화입니다.
완성이 아닙니다.
원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 우주의 스케줄입니다.
아주 미개한 하등동물에서부터 영장류인 인간까지
차등으로 가는 스케줄로 창조했습니다.
광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영장류로······,
이러한 순환 사이클을 통해서 인간에서 선인으로,
선인에서 조물주의 반열로 가는 스케줄로 창조한 것입니다.
식물이 한 자리에 붙박이로 계속 있다 보면 움직이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1년생 식물은 수명이 긴 나무가 되고 싶어지고요.
동물도 기어 다니는 동물은 걷고 싶고,
걸어 다니면 날고 싶고··,
이렇게 발전의 욕구를 갖게 하여 그것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도록 창조했습니다.
인간도 다 차등을 두고 창조되었습니다.
우주인들도 제각각 수준이 다르고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불완전합니다.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 인간의 스케줄입니다.
호리병 같은 홀통으로
오랜 세윌 바닷물로 빗어낸
살아 꿈틀대는 해산물로 몸보신하고
곰솔 우거진 해송이 쏟아주는
향기 속에 며칠 차 박 하면서
쳇바퀴 돌아가는 분주한 일상으로
지치고 고단한 삶을 회복시킬 수 있다.
밀물 되면 투명하고 평온이 가득한 호수 되어
하늘과 빙 둘러 싸인 산이 가슴 속에 빠져들고
썰물 되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드러나면
온갖 생명 살아 숨 쉬는 구멍 찾아
어린이와 함께한 가족들 바다고동과 조개
잡으며 오손도손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한다.
아침엔 동쪽에서 붉은 빛 덩이 햇살
소나무 사이로 찬란히 스며들고
저녁엔 서쪽 산 너머로 황홀한 일몰과 함께 잠들 수 있다
해년마다 개최되는 윈드서핑대회는
세계를 향한 젊은이들의 꿈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진다.
작년과 금년 코로나로 해수욕장 개장이 막혀있지만
머지않아 코로나도 종식되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에서
온 가족 함께 수영하며 자유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방역 에는 소홀함이 없으시도록 든든 하게 챙겨 주세요~
상대를 품는다
상대를 잘 안다고 하지만 아는 만큼 알지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한 이불 덮고 살아도 죽을 때까지 다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서로 알아 가면서 서로 도움이 되고, 그렇게 해서 인연이 됩니다. 그래서 잘 안다고 상대를 품으려 하는데 절대 품으려 하지 마십시오.
갖춤의 질량만큼 품어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가까워지려는 사람은 나중에 당하고 멀어지게 됩니다.
원하지 않는 친절은 상대를 힘들게 하여 언젠가는 뒷통수를 칩니다.
품어야 되는 것만 알고 가면 됩니다.
갖춤의 질량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품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과하게 품으려는 것은 욕심이 됩니다.
욕심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자연의 법칙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품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관계성을 잘 하고 가면 품어질 환경이 저절로 형성이 됩니다.
상대를 꼭 품어 주고 싶은 집착이 생겼다면
한발 물러서는 정리의 시간이 필요하고,
조금의 시간을 보내면 제 자리로 가게 됩니다.
*사람 괄세하면 않된다*
옛날에 현풍 곽씨의 문중에 한 노총각이 있었는데,
집안이 패가망신하여 그래서 외삼촌집에 얹혀 살게 되었습니다.
곽씨는 사랑방을 쓸고, 요강을 비워주며 밥을 얻어먹기를
한 삼 년을 했는 데, 하루는 외삼촌이 어떤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손님은 관상을 잘 보기로 소문난 사람인테, 곽씨를 유심히 쳐다보고, 여기에 와 있는 연유를 묻는 거였습니다.
그래서,형편이 좋지 않아 집도 아내도 없어서 여기에 와 있다고 하니,
그 손님은 외삼촌에게 저렇게 훌륭한 사람을 사랑채에 두고 썩히게 하고 있느냐며, 깨끗한 옷과 하루 쓸 노잣돈만 주고 내보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현풍 곽씨는 속으로
‘외삼촌이 자기가 보기 싫어 어떤 사람을 시켜 내쫓으려고 저러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외삼촌이 주는 노잣돈을 들고 외삼촌 집을 떠나 산을 넘어 어느 샘 앞을 지나는데, 어떤 소복을 한 부인이 빨래를 하고 있다가,
현풍 곽씨를 알아보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따라 가다보니 그녀는 커다란 거각(巨閣)의 기와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랑방에서 술과 저녁을 줘서 얻어먹고는 쉬는데,
내당(內堂)으로 들라하여 곽씨는 내당에 들어갔습니다.
내당에서는 그 부인이 나오더니 연유를 설명하는데, 자기는 과부인데,
어제 저녁에 꿈을 꾸니 친정아버지께서 내일 몇 시경 쯤에 지나가는 분이 현풍 곽씨인데, 그 분이 천상배필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곽씨가 이 말을 듣고,갈곳이 없는 몸이라 넘 좋아서 흔쾌히 허락해
두 사람은 그날 부터 바로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홀어미와 홀아비로 너무 오래 혼자 살아서
부부관계가 잘 안 되는 것이라 부인은 아무리해도 부부관계가 되지 않자,
남자에게 전 남편이 복용하던 해구신 가루를 먹이고 다시 시도 했는 데도 안돼니까? 곽씨에게 노잣돈을 후히 줘서 쫒아 보내버렸습니다.
곽씨가 ?쫒겨나서 가다가 주막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땅거미가 지려고 할 때에
어느 양반집 규수가 수행원들과 함께 그 주막집을 들었는데,
방이 모자라서 하인들을 모두 곽씨가 있는 방으로 몰아넣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하인들이 술을 먹고는 곽씨에게 주정을 하는 기라,
곽씨는 화가 나서 주정을 부리는 하인을 때리면서,
하인들이 감히 양반을 욕보일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호통에 놀라 옆방에 있던 사람이 건너와서 자기집 하인들의 잘못을 사죄 하며 말하기를, 자신은 서울 모 정승의 둘째 아들이고,
자기 일행 중에는 과부 누이가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누이를 수절하라고 하고,
어머니는 어디 가서 제발 아무 사람에게나 부탁해서 짝을 맞쳐주고 오라고 해서 그래서 많은 패물을 가지고 마땅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중인데,
오늘 당신의 의기를 보니 매부 감으로 알맞아 보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곽씨가 과부 누이와 함께 살 것을 허락하고는 그날로 바로 부부관계를 맺으니, 전날 그 과부가 먹인 해구신 가루약이 그제서야 약효가 온몸으로 퍼져가서인지? 고게 곽중에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끝내주는 밤을 보내고 나니, 허허허 참, 과부 누이는 끝나자 마자 곽씨에게 얼른 옷을 입히고는, 빨리 쫒가낸 그 과부에게 가 보라고 재촉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곽씨가 정신을 가다듬고,
사내구실 못한다고 쫒가낸 과부 집에 갔드니,
그 과부는 꿈에 나타나 자기에게 중매를 해준 친정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명주 수건으로 목을 달아매려고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곽씨가 들어와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곽씨는 어제의 누이 과부와의 인연을 말하고 다시 부부관계를 요구해서 시도했드니, 허허참...성능이 해구신의 약효가 온몸으로 퍼져서인지?
그 성능은 독일제 탱크 처럼 막강해져서...! 과부댁 입이 짜~악 째지게 해, 고게 다물지를 못하게 하고 마는 기라~! 그래서인지?
그 과부댁이 아침이 되자마자,
요로코롬 독일제 탕크로 만들어준 주막에 있던 과부 누이 일행을 빨리 모셔오도록 해서는...?모셔오자, 과부는 다짜고짜로 자신이 큰집이 되고, 과부 누이는 작은집으로 하자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두 과부가 지니고 있던 그 많은 재산까지 덤으로 다~현풍 곽씨가 찾이하고 살게 되서 이를 보고는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사람팔자 알 수 없다는 말이 요래서 생겨난 말이구나!"라고, 했고
고리고 이말이 사방팔방으로 퍼져서
요즘은"사람 팔자 시간 문제다"라고 변해지드니...
"사람 괄세는 하면 안된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