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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정 인문학 여행 (7월 강좌)
나무와 함께 떠나는 대구 인물 기행
마을 어귀나 골목의 끝자락 또는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늙은 나무는 비록 말은 못하지만 대구의 역사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강의 : 이정웅 교수
일자 : 2015년 7월 15일, 29일 오후 2시~4시 (2회)
장소 : 심원정 (송림사앞)
수강료 : 무료 (선착순20명)
신청 : 조호현(사무국장) 010-9575-1783
주관 : 심원정문화예술사업단
후원 : 칠곡군, 동명면, 넬슨바이오에너지,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정웅(1945년)
* 경북 의성 출생
* 계명대학교 정책대학원 졸업
* 대구시 녹지과장 역임
* 대구카톨릭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 달구벌 얼찾는 모임 전임 대표
* 현 팔거역사문화연구회장
* 현 (사)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
* 현 대구생명의 숲 위원
저서
* 팔공산을 아십니까, 대구인물기행,
* 나의사랑 나의자랑 대구, 대구경북의 명목(名木)을 찾아서
* 대구가 자랑스런 12가지 이유
* 푸른 대구이야기
* 단소 강좌 안내
8월 13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지도 강사 : 박세홍(기헌국악예술단 예술감독)
심원정은 곳곳에 이야기가 있는 공간입니다
심원정은 사회단체(공공단체)에 기증한 유산입니다. 우리 지역민 전체가 가꾸고 지켜야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돌하나 풀한포기도 소중히하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공간입니다.
매주 음악회(국악, 시낭송, 통기타, 새미클래식)를 열어 휠링공간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연 관련 및 심원정 사용 문의
심원정문화예술사업회 사무국장 조호현 010-9575-1783
서상돈 선생과 천주교 대구교구청 히말라야시다
그러나 전 국민에게 크게 알려진 것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부터이다. 남녀의 차별이 극심했고, 반상(班常)의 차이가 엄격했던 시절, 성별과 연령,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민족 전체가 참가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의 자랑거리이자 다른 도시의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대구사람 그 중에서도 서상돈 선생이 주도한 민족자존, 자강운동이었다.
선생은 세례명이 아우구시티노로 1850년(철종 1) 아버지 서철순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김천시 지좌동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에는 경상북도 문경, 상주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1859년(철종 10) 대구 죽전에 정착했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는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해 버렸다. 1868년경 선생의 나이 18살 때 쌀, 소금, 지물(紙物) 및 포목상을 시작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구천주교회 로베르(Robert, A. J., 金保祿)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다.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 갑부 대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대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독립협회 재무부 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회의를 마친 뒤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했다. 주요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 모금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을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1913년 63세로 돌아가시고 묘지는 범물동천주교묘역에 있다. 대구교구청에 선생이 심은 히말라야시다가 있다. 교구청 내에는 성모당, 성 김대건기념관, 등이 있는 대구가톨릭의 심장부이다. 그 입구 계단 양 쪽에 크기와 굵기가 비슷한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고 그 밑에 서상돈 수식(手植)이라고 쓴 표석이 있었다. 아쉽게도 심은 년도와 목적이 없어 언제, 무엇 때문에 심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대는 선생이 희사한 땅인 만큼 대구대교구가 설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히말라야시다를 우리말로는 개잎갈나무라고 한다. 성서에서는 백향목(柏香木)이라고 하며 구약성서에 무려 70회나 등장하는 성스러운 나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기둥으로 사용되어 천주교와 무관하지 않는 나무이기도 했다.
의료선교사 존슨과 청라언덕의 사과나무
대구하면 지금도 사과를 연상할 만큼 한 때 사과의 명산지였다. 그러나 도시화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동구 평광동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사과밭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실에서 최근 사과이야기가 다시 시민의 관심을 끌었다. 5월 31일 대구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 최초의 사과나무 3세목(?) 기념식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9년 의료선교사 존슨이 대구에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의 2세목의 순을 채취해서 접을 붙여 키운 나무였다. 존슨 사과나무의 3세 3세
100여 년 전 존슨이 가져 온 사과나무의 2세목은 현재 수세가 너무 약해 삼단(三段)으로 설치한 지주로 보호하고 있으나 언제 훼손 될지 모를 만큼 노쇠해 있다. 그런데 이 나무의 가치를 눈 여겨 본 시의 녹지공무원들이 접목 묘를 키워 행사를 마련한 것은 놀라운 발상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할 일이다. 1999년 개원 100년을 맞은 동산의료원은 초대 원장을 역임했던 존슨이 처음으로 가져온 사과나무의 2세목을 동산에 심었다. 그 때 필자는 대구를 상징하는 귀중한 생명문화유산이 살아있다는 기쁨에 수령이 70년 밖에 되지 않는 이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가을에 찾았더니 열매가 너무 작아 원조 사과나무의 2세목이 아닌 것 같은 의문이 들었고, 면밀하게 검토하지 아니하고 지정하도록 한 것 같아 내심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새로 접을 붙인 나무를 심는 다고하니 반갑기도 하지만 이번 기회에 대구사과의 도입경위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오래된 사료는 일제강점기에 간행한 <대구부사, 우에노 히꼬하찌, 1943 ,번역 손필헌>였다. 그 책에 의하면 1892년 영국인 선교사 푸렛쳐(A. G. Flecher)가 ‘스미스사이드’, ‘레드베아민’, ‘미조리’ 등 3개 품종을 가져와 자택이 심었다고 했다. 다음은 <대구시사,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광역시, 1995년>로 역시 1892년 영국인 선교사 프렛차에 의해 소개된 후 대구 농업의 상징이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간행된 <경북능금백년사, 경상북도 중앙개발주식회사,1997, 3>에서도 대구부사(大邱府史)의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이런 기존 사료의 푸렛처 도입설에 대해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박영규(전 대구MBC 전무)였다. 그는 <대구능금 내력의 오류, 중악집 제2호, 1992>에서 <대구부사>나 <대구시사>의 잘 못을 지적하면서 대구에 최초로 서양사과나무를 도입한 사람은 닥터 존슨(한국명, 장인차)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산의료원 100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1999>에서는 존슨 이외 아담스(한국명, 안의와)도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서양사과나무를 교인들에게 보급할 때 ‘존슨은 수입 묘목을 그대로 나눠주고, 아담스는 (우리나라산 토종 능금나무에) 접을 붙인 후에 나눠준 것에 차이가 있으며, 수입처도 존슨은 미조리주이고, 아담스는 켄서스주라는 사실이 다르다.’라고 했다. 이어 동산의 2세목 앞의 <사과나무 100년>표석(標石)에서는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 최초의 서양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초대 병원장인 존슨(Wood bridge O, Johnson, 한국명, 장인차)박사가 미국 미조리주에 있는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재배한 것이 대구 서양사과나무의 효시이다.’ 라고 적어 놓았다. 이상 여러 가지 자료들을 검토해 볼 때 <대구부사>나 <대구시사><경북능금 100년사>는 하나 같이 오류를 범했다. 그들이 최초로 대구에 사과나무를 들여온 사람으로 지목한 푸렛처는 존슨 후임으로 2대 동산의료원장으로 재임(1911~1941)한 사람이기는 하나, 국적도 영국이 아니고 영국계의 미국인이며, 사과도입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조사를 하면서 또 하나 발견한 새로운 사실은 존슨이 보급한 사과나무가 접을 붙여 큰 열매가 열리도록 개량한 나무가 아니라, 수입한 묘목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열매가 작을 수밖에 없어 한 때 품었던 의문을 해소 할 수 있었다. 이런 사료를 볼 때 대구에 서양사과나무가 최초로 도입된 해는 1899년이고, 보급한 사람은 존슨(장인차)과 아담스 (안의와) 두 사람이며, 현재 동산에 서 있는 것은 존슨이 가져온 나무의 2세목이며 금번 새로 심은 나무는 이 나무의 순을 채취해 접을 붙인 나무이다.
육영사업가 김울산 여사와 동부교육지원청의 벽오동나무
개회기를 맞아 뜻있는 인사들에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의욕에 비해 자금조달 등 어려움이 많아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대구의 애국부인회장 서주원 여사가 설립한 명신(明信)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09년 대구에 온 순종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금 200원으로 개교하였으나 두 해를 겨우 버티고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 후 몇 차례 경영주가 바뀌었다가 1925년 마침내 김울산 여사가 인수했다. 이 미담은 당시 민족의 단합을 표방하든 시대일보(발행인 최남선, 1925, 12, 22,)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보도했다.
‘대구의 독지가 김울산 여사가 71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명신학교를 인수했다. 남산동 아미산록에 2,000평을 구입하여 3만원으로 건물을 짓고, 매년 3,000원을 출연하여 학교를 경영하기로 했다. 이에 서병오 등 대구의 유지들이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김 여사는 학교 이름을 복명여자보통학교로 바꾸고 개교를 준비 중이며 유치원도 설립할 계획이다.’ 라는 기사다.
복명(復明)이란 조국의 광복을 의미하는 뜻이라고 한다. 그 후 복명학교는 남학생 취학인가를 받아 복명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소외되고 가난한 학생들의 배움터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공동화로 학생이 줄면서 1999년 마침내 남산동시대를 마감하고 범물동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김울산 여사가 암울했던 시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은 분이라는 이외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858년(철종 9) 울산에서 통정대부를 지낸 아버지 김철보(金哲甫)와 어머니 이봉순(李奉順)사이에 두 딸 중 맏이로 태어났다고 한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됐다. 통정대부라면 정3품의 벼슬인바 지체 높은 집안에서 곱게 자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떤 연유였던지 ‘향이’(香伊)라는 이름의 관기(官妓)가 됐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정미소와 술집을 경영하면서 재력을 키웠다고 한다.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상당한 땅을 하사 받았다는 설도 있다. 거처는 동산동 (구 동산파출소 부근)이었다. 대구천 주변이라 범람이 잦은 곳이다. 수해를 막기 위해 사재로 둑을 쌓고, 이재민이 생기면 도와주었으며, 흉년이 든 해에는 많은 양의 쌀을 내놓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를 비롯해 현풍, 고령, 하양 등에 땅을 부치는 소작인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해 후한 인심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극도로 인색해 문풍지가 찢어지면 헌 종이로 때워 바르고, 빗자루도 몽당비가 될 때까지 사용했다고 전한다. 대구시가 도로를 개설할 때에도 편입된 많은 땅을 희사하는 등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1936년 여사의 청동좌상이 복명학교에 세워졌으나 2차 대전 당시 일제가 공출해 가고 대신 돌로 작은 흉상을 만든 것이 현재 범물도 신 교사에 있다 1944년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해방은 보지 못하고 87세를 일기로 가장 천하게 여겼던 기생으로 출발해 가장 존경 받는 육영사업가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북구 조야동에는 당시 여사의 전답을 소작하던 농민들이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송덕비가 있다. 자신의 이름을 바꿀 만큼 깊은 애정을 가졌고,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인재양성을 위해 거금을 투자했던 옛 복명학교(현 동부교육지원청)에서 여사를 추모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시 복명학교 교목(校木)이었던 벽오동나무밖에 없다. 이 나무를 ‘육영사업가 김울산 여사나무’라고 명명하고 표석이라도 하나 설치해 여사를 기렸으면 한다. 벽오동나무는 상서로운 새, 봉황이 깃든다는 나무다. 그러나 현재 범물동으로 이전한 학교에서는 교목을 느티나무로 하여 설립 당시의 전통이 단절된 것 같아 아쉽다.
관찰사 이용익과 달성공원 참느릅나무
대구에 최초로 거주한 일본인은 오카야마현(岡山縣)에서 온 히자쓰끼 (膝付)와 무로(室)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대구부사> 1893년(고종 30), 9월 대구에 정착하여 남문 안에 자리 잡고 의약품과 잡화를 팔았다고 한다. 그 후 경부선철도 개통을 전후 많은 일인들이 몰려와 1904년(고종 41)에는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때 대구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다. 주로 철도 건설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었지만 생필품을 파는 상인이나, 투기꾼, 여관, 요리점을 경영하며 돈을 벌여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늘어나자 그들은 ‘대구일본동포회’를 조직하여 대구 제일의 경승지 달성에 천황을 기리는 요배전(遙拜殿)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관찰사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은 국산품을 장려한다며 달성 서 씨들로 하여금 뽕나무 밭을 조성하도록 하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또한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 소유의 토지를 사는 것조차 금지 시켰다. 만약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서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따라서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로서는 이 관찰사가 눈에 가시였다. 급기야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앞에서 차별이 부당하다며 시정을 요구하는 집단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호가 석현(石峴)인 이용익은 1854년(철종 5)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아버지는 고산현감을 지낸 병효(秉斅)였다. 선대는 무과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이었으나 금광에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를 장호원으로 피신시키고 민영익과의 사이에 비밀연락을 담당하여 그 공로로 감역(監役)을 제수 받았다. 초기 관직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으나 광산 경영에 대한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 업무를 총괄했다. 러. 일 전쟁이 일어날 무렵 탁지부대신(오늘날 기획재정부장관)으로서 조선의 중립을 주장하며 독립을 유지하려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일본이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자 강력히 반대했다. 일본은 그가 조선의 식민지화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일본으로 압송해 10개월간 감금했다. 1905년 귀국하여 보성 중, 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설립했다. 이후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으나 일본의 공작에 의해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고 고종의 밀명을 받고 비밀리에 출국하여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을 세계열강에 알리려고 했다. 프랑스로 향하던 중 중국 산둥성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혔고 조정에서는 비밀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그를 공직에서 박탈해 버렸다. 1907년(순종 1) 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을 얻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운명했다. 왕권강화로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 등 열강의 보장 하에 조선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던 우국 지사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공은 1905년, 2월 17일부터 1905년 5월 18일까지 3개월 여 경북도관찰사로 재임했다. 그 와중에도 대구의 상징이자 대구시민의 자존심인 달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훌륭한 목민관의 자세를 보였다. 공의 고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공원 내 잔디광장의 오래 된 참느릅나무를 ‘관찰사 이용익나무’라고 하여 그를 기렸으면 한다. 참느릅나무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부지했던 시절 어린잎을 식량대용으로 먹었던 구황(救荒)식물이다.
경상감영을 유치한
체찰사 한음 이덕형과 선화당 앞 회화나무
충청남도나 경상북도의 도청 소재지 이전에서 보듯이 어느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행정청
의 설치가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서로 유치하려는 지자체 간의 갈등으로 조정에 애를 먹는
다. 그러나 대구는 이런 문제없이 경상감영이 들어섰다. 이 점 혜택 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
다.
757년(경덕왕 16) 최하 말단기관인 대구현(大丘縣)에서 1419년(세종 1) 차 상위 기관인 대구
군(大丘郡)으로 승격하기까지 무려 662년이 걸렸다
.
1601년(선조 34) 감영이 설치되고 지방행정의 수장 관찰사가 집무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감영(監營)은 행정은 물론 사법, 군정까지 통괄하는 기관이다
.
경상감영은 한 때 상주, 안동, 경주 등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혹독한 국난을 겪으
면서 대구로 이전되었다. <대구부사>나 <대구시사>는 그 이유를 3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
첫째, 군사작전 상 중요한 곳이라는 것이 인식되었다. 임란 중 조선군은 물론, 왜군, 명나라
군까지 진주했다
.
심지어 왜란의 주범 풍신수길은 조선에 출병한 왜군 지휘총본부를 대구에 두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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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상주나, 안동, 경주는 한 쪽에 치우쳐 경상도 전체를 통할(統轄)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
은데 비해 대구는 경상도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
그러나 경상감영이 대구에 오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한 관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 때문
이었다. <대구부읍지>에
‘체찰사(비상 시 군대를 지휘하는 직책) 이덕형이 장계(狀啓)하여 본부(대구부)에 유영(留營)
하여(감사로 하여금)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고(부에는) 별도로 판관을 설치할 것과 경산, 하
양, 화원 등 여러 현을 본부에 할속(割屬)시키도록 청하였다.’
즉 체찰사 이덕형(李德馨, 1561~1614)이 임금께 보고하여 대구로 오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
후 대구는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방할 때까지 309년간 경상도(오늘날 대구, 부산
, 울산광역시, 경북, 경남) 제일의 도시로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국제도시로 발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의 대구가 있기까지 제일의 공로자는 한음(漢陰)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본관이 광주(廣州)로 1580년(선조 13)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의 관원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때 정주까지 왕을 호종했고, 명나라와 교섭해 파병을 성취시켰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로 훈련도감 당상을 겸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 그들을 위무하였다. 그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고 그 뒤 영의정에 이르렀다.
1601년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방에 노력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관직에서 물러나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 <한음문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경상감영공원 선화당 앞에는 감영의 역사와 함께했을 수령을 알 수 없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체찰사 한음 이덕형나무’라고 하여 대구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 준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울러 옮겨온 날을 시민의 날로 지정했으면 한다.
당시 감사는 선산인 김신원(金信元, 1553~1615, 재임기간, 1600, 3, 17~1601, 1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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