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3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6.01|조회수199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신동문이 경향신문기자로 있을 때다. 1963년, 아마 그의 직책은 특집부장, 아니면 문화부장 이었을 것이다. 그는 출장을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천안에서 경부선 열차를 탔다. 지금이야 비행기 못잖은 기차도 있고 고속버스도 있고 자가용 등 여러 가지 교통편도 많지만 그때야 기차만 타도 호강일 때인데 신동문은 신문기자의 특권으로 제일 좋은 통일호를 탔다.
통일호, 말이 좋아 통일호지 일반석이 있는 열차에 특등 칸이라고 해서 2량 정도를 별도로 연결한 좀 깨끗하고 조용한 차량일 뿐이다. 다른 게 있다면 일반열차는 나무의자로 되어있고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앉아가지만 특등 칸은 소파처럼 쿠션이 있고 흰 커버를 씌웠으며 차장이 지키고 있어 일반인은 출입을 금할 뿐더러 두 사람이 푹신하게 앉아간다는 차이일 뿐이다. 가는 시간, 오는 시간 통일호라고 해서 시간이 길고 짧은 게 아닌 일반열차에 돈 더 내고 부대끼지 않는다는 것, 그게 통일호다.
그건 그렇고 경부선이나 호남선엔 군용 칸이 연결되어 장병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다보니 가끔 차안에서 엉뚱한 풍경이 일어나곤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여자가 앉아가는 맞은편에 사병들을 인솔하는 헌병대의 장교가 앉았는데 그는 술에 취해 부인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부인들은 좌불안석이었고 차안의 승객들은 누구하나 아무 말도 못했다. 보다 못한 신동문이 호통을 치자 군인은 물러갔고 열차는 서울역에 닿았다.
서울역에 도착한 부인들은 마중 나온 남자와 포옹을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여인은 뒤에 서있는 신동문을 가리키며 열차 안에서 자기들을 구해준 사람이라고 인사를 시켰다. 여인과 포옹을 한 남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신동문을 떼밀듯 기다리는 차에 함께 올라타고 서울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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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은 한정식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잡은 네 사람 중 먼저 신동문이 그 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신동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수인사가 끝나자 인사를 받던 그 남자는 깜짝 놀라며 ‘혹시 시인 신동문 씨 아니십니까?’ 라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저는 이병주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인사를 받던 신동문도 자지러질듯 놀랐다. 그러면 부산 국제신보의 이병주……?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인과 논객, 논객과 기자, 주간과 논객은 그렇게 우연찮게 만났다. 참으로 먼 거리를 그것도 두 해를 건너뛰어 조우 아닌 조우를 했다.
서울과 부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지만 1960년대의 시대상황으로 봐선 서울과 부산 간의 거리는 미국만큼이나 먼 거리였다.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제약에 묶여 사는 그런 지난한 시절 탓이었으리라.
그들의 만남이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을 위한 극적수단이었을까. 그들은 그렇게 필연의 운명으로 만나야 했다. 1960년 초반 종합지 새벽의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논객다운 논객을 찾다보니 이병주를 논객으로 초빙했고 결국 이병주는 2년이나 영어의 몸으로 지내야 했다.
우연이 필연이 된 만남 치곤 정말 별스런 해후의 아이러니다. 그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감정에 목이 메었다. 오랜 별리 끝에 만난 가족 간의 상봉은 두 사람의 우연한 해후로 인해 부산으로 시간을 이어가야만 했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그동안 글로써 부산과 서울을 왕래했을 뿐이다.
잡지 새벽에 실린 논설이야 우편으로 보내고 받으면 되는 것이지만 사람과의 만남은 서로를 마주 보게 될 때 해후라는 사실에 전율하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한다. 하물며 생사의 고비에 섰다가 풀려난 이병주와 그를 본의 아니게 영어의 몸이 되게 했던 신동문으로서야 말해 무엇 하리오.
두 사람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지만 이미 봇물은 터진 것, 두 사람은 이 만남을 계기로 이후 이병주를 서울로 불러들여 종로바닥을 휘젓고 다니며 글쟁이들을 인사시켰다. 이제 이병주는 논객으로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시쳇말로 용도폐기다. 그렇지만 신동문은 호락호락 이병주를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이게 화근이었다. 그를 부산바닥이나 서울 아무 곳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놔뒀더라면 ‘광장’ 이후의 지진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종내 신동문은 광장 이후의 광장에 지진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1964년의 겨울은 눈의 포신砲身을 끝내고 1965년의 봄으로 옮겨갔고 그 겨울마저 긴 봄의 열기에 이미 겨울의 분진은 어디론가 증발했다. 이제 남은 건 5월의 희색열기였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지만 그마져 봄의 기운은 모두를 외면한 채 따사로운 햇살을 선사했다. 그 봄은 그렇게 왔다. 1965년의 5월과 함께.
1960년대 들어 한국문학사에는 두 번의 충격이 있었다. 잡지 새벽의 종간 호에 실린 최인훈의 ‘광장’과 세대지에 실린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가 그것이다. 전쟁을 끝낸 이후 이데올로기의 와중에서 나온 ‘광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장용학과 손창섭에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벗겨내려는 듯 ‘광장’은 그간의 한국문학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그리고 5년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한국문단은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긴 기적소리를 울리듯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1965년의 5월은 분명 희색빛깔인데 문학은 뜨거운 태양처럼 화사한 햇살로 대지를 지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