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2일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날 오후 제주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 입실절차를 밟고 있을 때 류승남 목사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난 4월 4일 제주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화해와 상생을 위한 신구범 장로 초청 4ㆍ3 세미나>에서 신 장로님께서 ‘제주 4·3사건과 제주 사람들의 소명’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때 신 장로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기독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고 화평에 대한 소명이 있으므로 기독인이 중심이 되어 제주 사회에서 화해와 상생을 이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강연이 신 장로님 마지막 강연이 되었습니다. 결국 화해와 상생은 신 장로님의 유언이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희로서는 마음의 부담이 있습니다. 또한 큰아들도 신 장로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전합니다.”
장례를 마치고 4ㆍ3의 큰 아픔이 있는 제주 사회에서 어떻게 화해와 상생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4ㆍ3 관련 두 개의 진실이 있습니다. 보수가 바라보는 진실, 진보가 바라보는 진실이 그것입니다. 두 개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면 그 진실을 바탕으로 화해와 상생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개의 진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법이 뭘까 하고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두 개의 진실은 계속 평행선을 그릴 뿐입니다. 보수나 진보 그 어느 쪽도 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주문하셨구나. 아버님의 유언이지만 따를 수가 없네.”
그러다가 올해 3월 15일 김인순 대한노인회 제주도연합회장님 취임식 때 우연히 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류 목사님은 신구범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라고 합니다) 산하에 기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조직을 하나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답변을 드렸지만 사실 좀 막막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화해와 상생을 이루라는 아버님의 유언을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성경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아!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있구나. 4ㆍ3 관련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 두 개의 진실을 하나의 진실로 통합하려는 생각 자체가 인간적인 생각이다. 그런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화해와 상생을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서로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는 악마화까지 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 믿고 나아간다면 어떨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화해와 상생을 이루시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인간적인 생각 다 내려놓고 그저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지난 6월 20일 기념사업회 기독인 자문위원 십여 분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화해와 상생의 기도회를 여는 기독분과위원회를 기념사업회 산하에 만드는 것을 제안했고 참석했던 모두가 찬성해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이사회에 안건으로 상정이 되자 비기독교인 이사들 중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초대 민선 도지사의 공적인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에서 특정 종교의 분과위원회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에 어머니가 아버님의 삶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므로 아버님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당연히 기독인으로서 아버님의 삶과 신앙도 기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설득했고, 결국 그 설득이 통해 지난 8월 17일 이사회에서 분과위원회가 아니라 특별위원회 형태로 사업회 산하에 ‘기독위원회’를 두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신구범 기념사업회 기독위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위원회의 사명은 아버님의 정신과 신앙을 계승·발전하고, 아버님의 유지에 따라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화해와 상생의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갈등과 대립이 만연한 이 땅에서 사람의 의지와 능력을 외면한 채 오직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화해와 상생의 세상을 이루겠다는 것은 무모할 정도로 미련한 짓이고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약한 짓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