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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01장. The Mustard Seed/겨자씨 하나 (2/4)
종교는 신뢰를 통해서 일한다, 그대가 더욱 신뢰할수록 그대는 더욱 종교적으로 된다, 과학은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러한 기적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종교는 더 큰 기적들을 이루었지만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느 깨달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가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은 이는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눈으로 보기에 그는 단순히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다, 육안으로 보기에 그는 그저 그대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육안으로 보기에 그는 늙어갈 것이며 어느 날 죽게 될 것이다.
영혼의 눈으로 보면 그에게 죽음은 없다, 그러나 그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없다, 그대에게는 그 미지의 깊은 중심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신뢰를 가진 눈만이 점차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민감하게 되어갈 것이다.
그대가 신뢰할 때 그것은 두 눈을 감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 맹목적인 것처럼 신뢰 역시 맹목적이다, 아니 신뢰는 사랑보다 맹목적이다.
그대가 두 눈을 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의 내적인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가 밖으로 향하는 두 눈을 감아버릴 때, 그 눈을 통해 나아가는 에너지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 에너지는 안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에너지는 눈으로부터 밖의 대상물을 향해 흐를 수가 없다, 그것은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역행을 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한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대가 한 출구를 닫는다면 그 에너지는 다른 출구를 찾기 시작한다, 양쪽 눈을 감았을 때, 두 눈을 통해 흐르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그대 안에 있는 제3의 눈을 타격한다.
제3의 눈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두 눈을 통해 외부의 대상물을 향해 흐르던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어 그 근원을 향해 다시 돌아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제3의 눈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세상을 보는 제3의 방법이 된다.
오직 이 제3의 눈을 통해서 깨달은 이를 볼 수 있다, 오직 이 제3의 눈을 통해서 예수를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이 제3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예수가 그대 곁에 있을지라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놓쳐버렸다.
고향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다, 아무도, 아무도 이 사람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를 못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내적인 현상이다.
예수가 "나는 신의 아들이며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있다"라고 선언하였을 때 사람들은 비웃으며 "너는 미쳤거나 바보이거나 아니면 아주 교활한 사람이다, 어떻게 목수의 아들이 갑자기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육체로부터는 오직 육체만이 태어난다, 내면의 참된 자아는 육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신성의 것이다, 그러나 먼저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예수를 이해하기란 아주 미묘한 일이다, 그대는 하나의 대단한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그대가 생전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된다면 그대는 "무슨 음악이 이래?"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묘한 것이어서 긴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해 동안의 듣는 훈련이 있어야 하고 그런 후에야 그대의 귀는 그 미묘한 음감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클래식 음악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보통 때 들었던 음악, 말하자면 영화음악 같은 것은 전혀 음악이 아니며 단순한 소음에 불과하고 유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대의 귀는 훈련되지 않은 채 그런 소음과 더불어 살면서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 관한 한 그대는 매우 귀족적인 귀가 필요하다.
듣는 훈련이 필요하며, 훈련을 거듭할수록 그 미묘한 음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서 클래식 음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는 우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 존재 속에 어떤 움직임도 없이, 생각의 어떤 동요도 없이 그렇게 침묵해야만 한다, 오직 그러할 때에 그대는 예수를 들을 수 있고 예수를 이해할 수 있으며 예수를 알 수가 있다.
예수는 거듭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나를 이해할 수 있다, 눈 있는 자는 보라! 내가 여기에 있다."
왜 예수는 이 말을 거듭 되풀이해서 말해야 했을까? "눈 있는 자는 보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왜? 그의 이야기는 오직 제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이해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했다, 그 소수의 무리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학의 교수들이 아니었으며, 박사 또한 아니었고, 철학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부이고 농부였으며, 제화공이었고 창녀였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소위 특별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서는 사라져버린 그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겸손과 신뢰이다.
그대가 지적인 훈련을 많이 받을수록 믿음의 가능성은 작아지며 그대가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을 때 믿음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농부에게는 믿음이 있다,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밭에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날 것을 믿는다.
씨들은 싹을 틔울 것이다, 농부는 기다리며 기도한다, 제때에 뿌려진 씨앗들은 때가 되면 자라날 것이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는 나무와 식물들과 강물과 그리고 산과 더불어 살아간다, 거기에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무는 속이지 않는다.
그대는 나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산도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 산은 정치가도 범죄자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방어 수단도 마련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들에게 그대 자신을 열어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대가 산에 오를 때 황홀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으로부터? 아니다, 그것은 산에서는 그대가 자신의 무장을 버려도 되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한 그루의 나무에게 걸어갈 때 그대는 돌연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느낌은 나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집에서 쉬는 것처럼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꽃은 갑자기 그대를 공격하지 않는다,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다, 그대에게서 무엇을 훔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산에 오를 때, 바다에 갈 때, 나무에게 갈 때, 그리고 숲으로 갈 때 그대는 자신을 방어했던 내면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더 깊다, 산업화나 기계화나 기술 발달이 덜 되어 있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일수록 더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뉴욕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이유이다,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광신자들은 거기에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광신자들은 정신병자이며 예수는 단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절대로 그대는 예수가 거기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비록 예수가 뉴욕에서 태어난다 해도 아무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비록 예수가 거기에 있다 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기술공학과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으며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어느 이른 아침, 예수는 호수가로 왔다, 태양이 아직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때였다, 거기에서 두 명의 어부가 막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때 예수가 걸어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보라! 그대들은 왜 그대들의 삶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 수 있다, 왜 그대들은 그대들의 에너지를 쓸데없이 고기잡는 데 쓰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사람낚는 어부, 오라, 나를 따르라!"
만일 그대가 사무실이나 또는 상점에 앉아 있을 때 예수가 와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가 주세요! 나는 바쁜 사람이오, 내 시간을 뺏지 말아요!"
그러나 그 두 명의 어부는 예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를 바라보았다, 태양은 떠오르고 있었고 이 사람, 예수는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호수보다 더 깊었고 그에게서 나오는 광휘는 태양보다 더 위대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단 하나의 의문도 없었다, "낯선 이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같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를 전혀 본 적이 없었고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의 부름, 그의 초대만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그 초대를 들었다, 그들은 예수를 바라보았고 진실함을 느꼈으며 그리고 그를 따랐다.
그들이 막 마을을 벗어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뛰어와서 두 어부에게 "어디들 가는 거요? 당신들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셨소, 돌아들 와요!" 하고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저희가 집에 가서 돌아가신 부친 장례를 치르고 다시 와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가 대답했다, "죽은 사람 일로 근심하지 말라, 마을에는 죽어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의 일로 마음을 쓰지 말라." 그리고 그 두 어부는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들은 예수를 듣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말했던 의미,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가 죽었을 때 그는 그저 죽은 것이다, 그 곳에 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을에는 죽어 있는 상태에 있는 자들이 충분히 있다, 그들이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를 것이다.
그들이 너희 아버지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랐고 되돌아가지 않았다,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믿음이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되돌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 있는 마음은 언제나 되돌아본다, 언제나 다른 수단을 생각하고 언제나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생각하며, 언제나 자신이 한 일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한다, 되돌아갈까? 아니면 이 미친 사람을 따라가야 하나?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하느님의 아들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저 우리의 모습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어부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만일 그대가 예수와 같은 사람을 따른다면 머지않아 그에게 전염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 그러면 곧 그대는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그대 역시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대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처음부터 의심을 갖는다면 문은 닫히는 것이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지난 3세기에 걸쳐 과학의 성공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과학은 그렇게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과학은 기적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과학이 만들어낸 기적들이란 물론 쓸모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만일 기적을 통해 행복이 증대되지 않는다면 그런 기적은 쓸모 없는 것이다.
오히려 행복은 감소되었다, 기술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편리해지지만 행복은 감소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과학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기계장치에 의해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지만 그대를 필요로 하는 일은 적어진다.
그리고 그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적어질수록 그대는 점점 자신이 쓸모 없고 무의미하며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머지않아 컴퓨터가 그대를 대신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대는 전혀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컴퓨터가 모든 일을 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어디론가 사라져 자살할 수도 있다.
행복이란 자기 존재의 필요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필요로 할 때 그대는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음을 느끼게 되며 삶에 대해서도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필요한 존재이며 그대 없이는 모든 일들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그대가 없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일은 그대 없이 잘되어갈 것이다, 기계가 그대보다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저 방해물일 뿐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일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해마다 모든 것들이 신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새 모델의 포드 자동차든지 모든 것이 새 모델로 나온다, 오직 인간만이 구형의 모델로 남는다, 수많은 새로운 물건들 중에서 오직 그대만이 구형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아무도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조차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사회복지 부서에서 그들을 보살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늙은 부모들도 그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나 사회 단체의 양로원이 그들을 보살펴줄 것이다.
누가 그대를 필요로 하겠는가? 이제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신은 단지 쓸모 없는 짐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대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지나간 시절에 그대는 필요한 존재였다.
유대의 신비주의자 중에서 힐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믿음이 강했고 신앙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나만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당신 역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나 힐렐이 없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우러러보겠습니까? 나만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지만 당신 또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주 전체가 그리고 하느님까지 그대를 필요로 했을 때 그대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어떤 향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쉽게 방치될 수 있고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 기술은 안락함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대를 방치된 상태로 만들었다.
과학 기술은 그대에게 보다 나은 집들을 제공했지만 보다 나은 인간들을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인간들에 관한 한은 어떤 다른 차원이 필요한데 그 차원이란 기계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차원이란 의식의 차원이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은 붓다나 예수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은 붓다와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왜 요즘은 붓다나 티르탕카르나 예수 같은 인물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들이 그런 단순하고 또 그렇게도 순수한 사람이 존재하기에는 점점 불가능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사람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 해도 그대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세상 속에 깨달은 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그들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대는 매일 사무실에 나가면서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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