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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되지도 달라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은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아침부터 힘들지 않았습니까’
아까 그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못 했다. 아침부터 힘든 게 아니고 지금 모든 게 힘들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이제 정신이 좀 드셔요?!’
‘미호야..’
‘아가-….아니지 마마! 아까부터 정신을 못 차리시네’
여전히 미호는 자기를 아가씨..아니 조금 전부터는 마마라고 부르고 있는 이 상황도 어렵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마마 쓰러지시고 난리가 났죠!’
‘..아니 그거 말고.. 그 사람은?’
‘누구요? ..전하요? 전하께서는 혼인식을 곧장 중단하시고 합방을 미루셨어요’
‘..합방?’
‘원래 혼인식 날에 합방을 진행하는데 마마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정하겠다 하시고는 돌아가셨어요’
‘…’
어떤게 꿈이었는지,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지,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초에 돌아갈 수는 있는 건지…은하는 다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어지럽다.
그때쯤 생각나는 건 이 복잡한 상황에서 그 때 나와 같이 온 검은 수첩 뿐이다.
‘…미호야!’
‘..예! 마마!’
‘혹시 내 짐 정리하면서 검은 색 책 같은 거 못 봤어?!’
‘아~ 그거…잠시만요’
미호는 옷깃을 뒤적이더니 검은 수첩을 꺼낸다.
‘이거요?’
‘고마워. 그거 나 줘. 그리고 나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미호야 너도 돌아가서 쉬어’
‘..마마. 괜찮으시겠어요?’
‘나 혼자 좀 쉬고 싶어서 그래. 괜찮으니까 너도 돌아가’
‘마마 필요하신거 있으시면 꼭 저 찾으셔요..!’
물러가는 미호가 문을 닫자마자 검은 수첩을 다시 열어보는 은하.
여전히 수첩에는 처음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지만..유일하게 나와 같이 온 건 이 수첩 하나라 믿을 수 있는거,,뭐로든 진짜로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은 이거 하나이려나 싶어
수첩을 처음부터 끌까지 샅샅이 넘겨본다.
처음에는 차마 보지 않았던 수첩 마지막 장 옆 가죽 커버에는 검은색으로 적혀있다.
“서지환”
‘서지환…이게 서지환이라는 사람 거였구나..’
미호가 여기 있는 것처럼 이 수첩 주인도 여기 어딘가 있으려나..하고 수첩을 다시 덮는 은하다.
‘꿈에서 안 깨면 여기서 살아가야 되는 건가..’
중얼거리던 은하는 창 가까이 몸을 움직이고 밖은 오늘도 날이 저물고 있다.
‘또 깼을 때 여기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하며 저물고 있는 해를 따라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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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아침 드셔요!’
나흘째 이곳이다. 이제는 체념한 은하다.
이번 아침은 소갈비에 감자국이다.
‘전하가 기운 차리라고 고기를 내어드리라 했대요-‘
‘..전하가?’
‘오늘 아침 드시고 전하에게 인사 올리러 가셔야 해요. 그러니 얼른 드셔요-‘
흰 쌀밥에 고기를 얹은 밥 한술을 은하에게 먹이는 미호에 은하는 대답도 못 하고 밥만 받아먹으며 만난 첫날도, 혼인식 날 첫인사도, 합방을 미룬 것도..어느 것 하나 이기적인 면모가 없는데 어디서 폭군이라는 소리가 나왔을까 생각하는 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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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연보라색 연지를 바르셨으니까 오늘은 앵두색 연지를 바시고 가셔요-‘
미호 말에 ‘퍼스널컬러 진단 받고 올 걸..’하고 시답잖은 생각이나 해보며 그렇게라도 웃어버리는 은하다.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꿈에서 깨면 못 가볼까 아쉬웠던 저잣거리를 한 번 더 나가볼 수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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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마마 인사 오셨습니다’
그때처럼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나면 이 방에는 전하와 은하뿐이다.
또 여전히 그때처럼 얇은 천을 걷어내고 전하를 마주하는 은하다.
‘몸은 많이 괜찮아졌습니까’
또 여전히 걱정하는 전하..라는 저 사람은 그냥 걱정이 많은 사람인가..? 싶은 은하
‘덕분에요. 아침에 갈비 잘 먹었습니다’
‘…아.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언제든 궁인들에게 청하십쇼’
‘….’
‘인사는 잘 받았습니다. 어서 돌아가서 몸-‘
‘..전하는요’
역시..사극 드라마 시청자 짬바는 개나 줘버린 은하는 여전히..버릇없는 말투를 시전한다.
‘..어떤 게 말입니까’
그런 은하 말투에도 화를 낼 기색은 전혀 없는 그 사람이다.
‘전하는..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습니다’
‘..전하도..고기 드셨어요?’
‘…나도 먹었습니다’
은하는 사실..아직도 지금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런지. 원래 살던 현실을 찾으려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혼인이 망설여지는 거라면 내 좀 미루라 일러두겠습니다. 몸부터-‘
‘그게 아니고-..그건 아닙니다. 그냥..’
‘….그럼 무엇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혼인식 그렇게 된 게 죄송해서요..또..’
‘…또..’
‘전..하가 걱정돼서요. 그래서 온 겁니다’
‘…’
고작 세 번째 마주하는 얼굴에 자기를 걱정한다는 저 여자가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 그 사람이다. 처음부터 걱정하던 저는 알지도 못하고
‘…나는 괜찮습니다. 걱정마세요’
‘…네..’
사실 은하는 합방을 더 미뤄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혼인을 한 것도 억울한데 다짜고짜 합방을 할 순 없어서.
‘…전하..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겁니까’
말하는 은하는 여전히 이 말투가 어색하다.
‘..말씀하세요’
‘..합방을 미뤄주세요’
‘내 이미 미루라 일러뒀습니다’
‘말고 더 미뤄주세요’
‘…알겠습니다. 또 있습니까’
‘..아니요’
‘어서 돌아가서 몸을 편히 하세요’
‘..네’
오늘도 내시 뒷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은하와 그런 은하를 보고 웃어버리는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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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이제부터 합방날이 오기 전까지 전하라는 사람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적어도 합방하는 사람이 누군지, 몇 살인지, 이름이 뭔지, 혈액형은 뭔지
소개팅할 때 받는 정보보다는 많이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미호야-!’
미호를 찾는 은하다.
‘그니까 여기가 어디야’
‘..마마.. 진짜 왜 그러세요.. 여기가 어디라뇨..!’
‘미호야.. 지금 너가 그냥 머리가 좀 아픈 사람하고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고 알려주면 돼’
‘하..참..’
‘자- 다시 물어볼게. 여기가 어디야’
미호를 캐내서 알게 된 정보들
의외로 여기는 내가 생각한 조선이라던가 고려라던가 그런 곳이 아니다. 옥국이란다.
역사책에서도 본 적 없는 이 나라에서 뭔가를 미리 예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호칭이며 말투며 복장까지 묘하게 다른 듯하다.
전하는 이번이 첫 혼인이다. 여태 여자를 한 번도 곁에 둔 적이 없단다.
옥국은 지금 지나친 출생률로 고생하고 있다. 넘쳐나는 아이들로 집안에 울음이 멈추질 않고 애들에 얽매여 엄마도 아빠도 일을 나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으니 경제가 돌지 않는다. 이게 지금 옥국의 가장 큰 문제이자 전하가 가장 고민하는 나랏일 중 하나라는 것 같다.
‘아- 내가 여기서 키즈크리에이터를 했어야됐는데-‘
‘키..키즈..뭐요?’
‘어? 아니야아니야 계속 해’
옥국은 전쟁이 없다.
전하는 31살이다. 나이치고는 결혼이 늦었는데 한사코 혼인을 미루다가 갑자기 결정됐다고 한다.
‘근데 그럼 그 혼인자가 왜 나야?’
‘…그건..마마님..진짜 왜 그러세요-..’
‘왜~ 진짜 왜 나야- 몰라서그래’
‘…그니까…아- 저는 말 못 해요. 말 못 해’
크게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는 건지 쉽사리 입을 떼지 않는 미호다.
‘아침점심저녁 다 안 먹어버리면 그때 말해줄래?’
‘…마마..진짜..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해요..-‘
‘말해봐~ 괜찮아’
‘…마마님 댁 가문 대감님이 마마님을..바..치신거죠..’
‘..뭐로?!’
‘…재물로요’
미호가 말하길 내가 옥국 31살 전하와 혼인을 하게 된 계기는 제물이란다.
친자가 아닌 자기를 가문 이름 앞에 달만한 이름뿐인 관직 하나랑 바꿨단다.
어쩐지~ 딸내미가 혼인하러 간다는데 코빼기도 안 비친다 했다. 은하는 다행히 이 세계에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딱히 감흥이 없다.
‘근데 나는 무슨 제물이야? 여기 뭐 딱히 필요할 만한 게 없어보이는데?’
순수하지만 무서운 질문에 미호는 마마님이 진짜..충격받아서 마마님이 미쳤구나 싶어서
궁에 들어오는 게 아닌데…사람 잘못 걸렸다 싶은 거다.
‘..지금 옥국의 문제를 해결할 제물이요’
그러니까 지금 옥국은 울음이 멈추질 않고 경제가 돌지 않는데..이걸 어떻게 나로 해결을 하겠다는 건가 싶은 은하. 그전에 그 재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 길이 없다.
‘근데 제물이 한다고 해서 다 되는게 아닐 거 아니야. 뭐 조건같은 게 없어? 선착순이야?’
‘마마님 댁 가문이 유명한 무속 가문인 건… 아시죠?’
‘오~우리 집이 무속으로 유명해?’
그러니까 무속 무당으로 유명한 우리집 대감이 빨 다 떨어진 어디 잡신을 데리고 와서 지금 나를 바쳐야 이 나라가 안정된다고 전하랑 딜을 쳤다는 이 말이다.
‘아니 전하 어디 멍청해? 그 말을 믿고 지금 나랑 혼인하는 거라고?’
‘..마마! 말을 조심히 하셔야죠..! 궁은 사방이 듣는 귀예요..’
‘..알았어. 그럼 제물이 어떻게 바쳐지는데?’
‘…그거야..전하만 아시겠죠. 대감님이랑 직접 대화하신 건 전하니까..’
제물은 죽음으로 바쳐지는 게 정석이다. 그 말은 고이 넣어두는 미호. 그 사이 은하와 정이 들었나 보다.
‘아무튼 마마. 이거..절대 제가 말한 거라고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 죽어요 진짜..’
‘알겠어.알겠어. 오늘 너 할 일 끝! 너도 돌아가서 쉬어! 나도 들은 게 많아서 생각이 바빠졌어’
다시 혼자가 된 방에서 은하는 딱히 풀이 죽거나 제물이 된다는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거나 하진않았다. 애가 울어? 은하에게는 해결할 방법이 세고 샜다.
대감이 전하와 딜을 친 것처럼 은하도 딜을 치면 된다는 대범한 생각을 하며 어느새 이곳에서 살아갈 궁리를 하는 은하다.
아주 작게는 ‘절대 그 전하는 사람 안 죽여’하는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아 맞다. 전하 이름이 뭔지를 안 물어봤네’
전하 이름이 뭔지는 내일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며 처음으로 내일 어딜까하는 걱정 없이 잠에 드는 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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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이 되게 넓네.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미호가 아침상을 물린 틈에 은하는 혼자 나와 전하 방을 찾는 중이다. 생각보다 넓은 궁에 똑같이 생긴 문들 사이에서 어디가 그 방이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여긴가?’ 하며 나도 마마 인사 올리러왔습니다- 같은거 말해야하나 하다가 낯간지러워서 그냥 문을 열어재낀다.
보이는 얇은 천. 어제처럼 얇은 천을 걷어냈더니 아무 언질도 없이 들어와 버린 은하의 모습에 서신을 보던 그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전하.안녕하세요.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몸…몸은 좀 어떻습니까’
‘전하. 제가 제물로 온 걸 알고 있습니다.
‘..그..그건’
‘전하와 딜을 하러 왔습니다’
‘..딜-..? 딜-..이란 게 뭡니까’
아차차. 외래어
‘..거래하러 왔습니다. 전하랑’
답지 않게 말을 버벅이는 전화와 당찬 은하의 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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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전하와 은하.
‘…제물에 대해서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말 제물로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혼인을 결정한 건 아닙니다’
‘…에-이’
‘……’
‘…어떻게 해야 믿으실 겁니까’
‘저랑 딜..거래를 해주시면 믿을게요’
‘…하. 뭘 거래하겠다는 말입니까’
‘전하가 가장 급하신 거. 그거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유치원을 만들어요’
‘..유치원..?’
해가 저물 때까지 은하는 유치원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을 둬야 할 건지, 그 사람을 어떻게 선정해야 할지 한참이나 이야기했고 전하는 그런 은하의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진중하게 듣더니 한지에 얇은 붓으로 적어내기 시작했다.
전하의 태도에 은하는 봐. 저 사람은 절대 폭군이 아니라니까. 하며 확신했다.
어떤 폭군이 자기보다 아래 사람 이야기를 이렇게 귀 기울여 듣고 필기를 하겠어.
‘…어때요. 전하’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봐야겠습니다. 이걸… 혼자 생각한 겁니까’
‘사실 생각했다기보다는 있는 거 베낀 건데..뭐..제가 생각한 걸로 할게요..!’
겁없는 은하는 여전히 전하 무서운 줄 모르고 가끔가다 높임말도 쓸 줄 모르고 당차게 굴지만 그런 은하가 전하는 밉지 않은 것 같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오늘 저녁은 여기서 같이 드시지요’
웃으면서 말하는 전하는 오히려 따뜻한 성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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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도 소갈비다.
어제 아침도 소갈비, 오늘 점심도 소갈비였는데..여기는 소가 특산품인가.. 힌끼도 안 거르고 매일 소가 나오네..
‘..옥국은 소가 많은가요?’
‘없지는 않습니다. 농가를 일구는 데 많이 필요해서 소를 적극적으로 양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끼니마다 소고기가 나오는 건가요?’
‘..그건..’
갑자기 말문이 막힌 전하에 은하는 수저를 내려놓고 전하의 답을 기다린다.
‘…궁인에게 소갈비가 맛있다고 말씀하셨다기에 매끼니마다 내어드리라 일러뒀습니다’
하더니 제 눈을 피하며 모르는 척 반찬에만 눈을 두는 전하에 은하는 웃었다.
‘네. 소갈비 맛있습니다. 잘 먹을게요 전하’
그런 은하 대답에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는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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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상을 무르고 내시 걸음으로 방으로 나서려던 은하를 전하는 멈춰 세운다.
‘..차 한잔하고 가시지요. 밤 공기가 찹니다’
민들레를 띄운 따뜻한 차 한 잔에 다과를 먹는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푹 잤더니 좋아졌어요’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습니까’
‘푹신하고 좋습니다’
‘…찬 공기가 새어 들어오지는 않습니까’
‘온돌이 너무 세서 뜨거울 지경이에요. 춥지 않아요’
‘…다행입니다’
‘전하는요?’
‘……’
찻잔을 내려놓은 전하는 은하를 바라본다. 여태껏 백성들은 하인들은 궁 안 사람들은 하며 안부를 물어만 봤지. 자기 안부를 궁금해했던 사람은 없었다.
‘전하는 잘 주무세요? 나랏일이 바쁘시다는 것 같아서요’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괜찮습니다’
분홍색 한과를 은하 접시에 놔주는 전하는 말한다.
‘..집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까’
‘…집..집..가고 싶죠. 근데 이제 며칠 있었다고 여기가 더 편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유튜브 촬영할 때 눌렀던 카메라 on 버튼이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은하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하인을 두고 왔다 들었습니다’
‘..14년이라고 했으니까.. 애틋했겠죠..?’
‘..내가 갑자기 혼인을 결정하는 바람에 정든 사람과 헤어지게 돼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지금 은하는 단 하루 봤을 뿐이라 감흥이 없었다. 소녀가 했던 마지막 충고들 말고는. 정을 주지 마라. 어디서부터 정을 주고받는 걸까. 차와 다과를 함께 먹으면서 조금씩 초점이 엇나가있는 말들로도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우리 둘은 정을 주고받은건가.
‘여기서 또 오랫동안 정들 사람을 찾으면 되죠’
‘…’
‘전하도 드셔보세요’
은하는 전하에게 노란색 한과를 건넨다.
‘사실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 사이사이에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요’
‘…서재라도 안내해 드리라 일러두겠습니다’
‘책 읽는 거 싫어해요. 하고 싶은 게 있긴한데-…’
‘그게 뭡니까’
‘저잣거리를 한번 나가보고 싶어요’
‘궁인에게 모시고 나가라 일러-...’
‘일러두지마시고 내일 같이 나가주세요’
당돌하고 막힘이 없고 주저하지 않고 고민이 없는 은하의 말들이
망설이고 주저하고 막혀있고 고민이 많은 전하를 자꾸만 계속 움직이게 한다.
‘…내일은 나랏일을 좀 서둘러야겠습니다’ 하며 웃는 전하에 은하도 접시에 놓인 분홍색 다과를 씹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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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된 종교 외에는 신앙 숭배가 금지되어 있던 옥국에서 은하 가문의 무속신앙은 깊이 뿌리내려져 암암리에 성행했고 음지에서 자라난 세력이 더 이상 양지에서도 숨길 수 없게 됐다.
그런 무속 신앙 가문의 대감은 어느 날 감히 국왕을 찾아와
‘서민들의 고혈을 빨아서는 더 이상 긁어 모을 것이 없습니다. 저희 가문은 더 이상 돈이 아닌 신분이 필요합니다’
하며 대담을 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저희 가문 딸아이와 혼인하시고 신분을 주시지요’
‘그렇다면 내가 얻는 게 무엇입니까’
‘저희 가문의 무속신앙 세습을 그만두겠습니다’
‘…’
‘저희 가문은 신분을, 전하께서는 그리 고대하시던 무속신앙의 해체를 이루신다면’
‘….’
‘꽤나 좋은 거래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는 조금 더 이상적인 백성과 나라를 위해 평생을 미루고 미루던 혼인을 단 하루 만에 결정했다. 이런 그를 누가 폭군이라 했는가.
그러나 비열한 자는 궁 밖을 나서는 마지막까지도 함부로 입을 놀렸다.
‘거리 아이들의 울음이 멈추기 위해서는 전하가 결혼하는 여자가 죽어야 한대’
말 한마디는 홀씨처럼 퍼져나가 어느 새 아이들의 울음을 멈춰 줄 재물이 궁으로 들어갔다며 전하고 전해졌고 소문은 결국 결혼여자를 죽이고 재물로 바치려는 폭군이되어 도착하기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