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케렌시아
신 언 필
이미 다른 투우사들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은 소는 극도로 흥분해 있다. 이윽고 마타도르(수석 투우사)가 물레타(붉은 천)를 흔들자 이를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한다. 뒷덜미엔 다른 투우사들이 내리꽂은 반데리야(일종의 작살)가 그대로 매달려 있다. 그의 노련한 솜씨에 몇 차례 헛심을 쓴 소는 이내 다리가 풀리고, 탈진 직전 피범벅이 된 채 어딘가로 달려간다. 소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마지막 결전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곳, 케렌시아다.
스페인어 케렌시아(Querencia)는 피난처, 안식처 등을 의미한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위협을 피할 수 있는 경기장의 특정 장소를 머릿속에 표시해 두고 그곳을 케렌시아로 삼는다. 대개 이곳은 자신이 들어온 통로의 문과 투우장의 벽이다. 그곳이 가장 낯익고, 등에 기댈 것이 있어서 뒤쪽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투우장의 소에게 케렌시아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라면, 현대인에게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즉 나만의 힐링 장소를 의미한다. 그곳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인 내 방(房)이나, 퇴근길에 들르는 동네 포장마차가 될 수 있다. 조용한 산책로나 낚시터 그리고 어릴 적 추억이 서려있는 고향을 케렌시아로 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내 삶에 있어서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에서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던 고교 시절은 나의 첫 시련기였다. 고향에서 어렵사리 보내주는 학자금은 늘 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숙식을 의지해 온 형님 집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숫기 없는 나에게 그곳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다시 고향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할지 아니면 휴학을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독서실이었다. 그곳이 당시 나에게는 케렌시아였다. 형수의 따가운 시선을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었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향을 떠나올 때의 꿈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나의 시련기는 군 복무 시절에 찾아왔다. 직업군인이 되어 한동안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항하였다. 때로 작은 걸림돌도 있었지만 의도하던 대로 보직도 잘 풀려 주위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네 번씩이나 함께 근무하며 공동 목표를 향해 땀을 흘렸던 전우이자 선배로부터 배신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남이 아닌 내 자신으로부터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떠오른 것이 성당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와 결혼할 때, 나도 영세를 받기로 한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밤중에 군종신부 사제관의 문을 두드렸다. 신부님은 방황하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고, 무너진 자존감을 다독여 주었다. 그 후 가톨릭 신자로 거듭 났고, 성당은 군에서 퇴직할 때까지 케렌시아가 되어 주었다. 매주 그곳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구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며,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요즈음 나의 케렌시아는 목욕탕이다. 몇 년 전부터 조금 무리를 하면 무릎이 시큰거리더니 허리에 이상 신호가 오고 어깨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물리, 주사 치료를 받아도 그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용객이 적은 평일을 골라 동네 목욕탕을 찾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관절 통증도, 쌓였던 피로도 따스한 햇살에 봄눈 녹듯 사라졌다. 세월은 슬픔도 지워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데, 시간이 흘러도 무시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도 그곳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도 목욕탕을 찾아 온탕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투우장의 케렌시아에서 다음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소를 떠올려 보았다. 투우 경기 1막에서 피카도르(기마 투우사)와, 2막에서 반데리예로(작살 투우사)와 싸워 목과 어깨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소. 문득 지난 시절 거친 세파와 싸우며 몸과 마음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안은 채 인생 2막을 맞고 있는 내 모습과 겹쳐진다.
헤밍웨이는 그의 저서 「오후의 죽음」에서 케렌시아를 ‘소가 가고 싶어 하는 링 안의 일정한 곳, 투우 중 자신의 집으로 삼게 되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비록 궁지에 몰렸지만 소는 그곳에서 사력을 다해 마지막 힘을 모으고 다시 투우장에 나선다. 그렇듯 나도 이 케렌시아에서 심신의 상처를 떨쳐버리고, 다시 힘을 내서 한때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