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3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상담 및 교리 진행 ★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공(空)은 충만하다★ 253~288p
<.명상이란 무엇인가? >
▷ 일 시 : 불기2569(2025)년3월17일 (월) 오후1:00~4:00
▷ 장 소 : 서울구치소 소법당
지도법사: 보광-조철주
2025년3월17일(월) 서울구치소
최고수 정기 자매 상담 및 교리를 진행하였다.
-----------------------------
삼귀의와
한글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상담 후 생활법문 및 교리를 전하였으며,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했다.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_()_
============================================
★교리내용:
선지식 라즈니쉬 오쇼의 가르침( 반야심경 The Heart Sutra)중 ★공(空)은 충만하다★
< 라즈니쉬 오쇼의 반야심경 The Heart Sutra> ★공(空)은 충만하다★ 253~288p
<.명상이란 무엇인가?
-자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無)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지복(至福)이 있다. 279~286p
▶명상은 이를 위해 그대를 준비시킨다.
명상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점점 더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발견하지 못할수록 그와 정비례해서 은총과 지복이 성장할 것이다.
서서히 그대는
내면 세계의 산술적 공식을 배운다.
즉 나가 많을수록 지옥이 그만큼 더 커지고, 나'가 적을수록 천국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최후의 집에 당도한 것이다.
이제 그대는 완벽한 원(圓)을 이루었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다.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명심하라.
진정한 자유는 자기의 자유(freedom of the sell)'가 아니라
자기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self)' 를 의미한다.
샤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자기의 자유'다.
자유가 형벌로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자유 안에는 '자기'가 남아 있다.
자유로워지기는 했지만
'자기'가 남아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라진 자유라면, 오직 자유가 있을 뿐 '자유로운 자'가 남아있지 않다면,
이때 누가 두려움에 떨 수 있겠는가? 누가 불안을 느낄 것이며,
누가 그것을 형벌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자유 안에는 그럴 자가 남아 있지 않다. 이렇게 되면 선택의 문제는 없다.
자유 자체가 스스로 행동한다. 모든 행동이 무선택(無選擇)에서 나온다. 280
그리고 어떤 책임의 문제도 없다. 책임을 느낄 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無)가 행동한다. 위무위(爲無爲), 행위없이 행한다.
이것은 내면의 무(無)와 외부의 무(無)사이에 일어나는 감응(感應)이다.
여기엔 걸림돌이 없다.
보디사트바가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무득無得) 때문이다.
이제 사념의 장막(thought-covering)은 없다.
사념의 장막은 그대를 외부의 무(無)와 분리시키는 장벽이다.
이것이 내가 지난 밤에 마크(Mark)에게 말했던 것이다.
어제 저녁 그는 산야스(sannyas-힌두교의 탁발승.)를 받았다.
그에게 닐람버(Neelamber)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닐람버'는 푸른 하늘을 의미한다.
무엇이 외부의 하늘과 내부의 하늘을 나누는가?
바로 사념의 장막이다.
사념의 장막은 옷과 같다. 그 옷이 그대의 알몸이 하늘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 옷이 그대의 알몸이 하늘과 연결되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힌두교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공산주의자이다' 라는 생각이
이 접촉을 방해한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추하다'는 생각이 이 접촉을 가로막는다.
나는 지성적이다' 나는 비지성적이다' 라는 생각이 이 연결을 방해한다.
어떤 종류의 생각이든 분리를 만들어 낸다.
그대는 수많은 생각으로 들끓고 있다.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그대 자신을 벗겨 나가야 한다.
하나의 껍질을 벗기면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 껍질을 벗기면 또 하나의 껍질이 나타난다.
그리고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대 존재의 껍질을 벗기는 훨씬 더 괴로운 일이다.
이것은 옷을 벗는 것처럼 쉽지 않다. 마치 피부를 벗겨내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계속해서 껍질을 벗기면 양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81
오직 무(無)가 남는다. 이 무(無)가 지복이다.
붓다는 보디사트바가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한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아니다. 그는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관념이 없다.
그는 사념이 없다.
그가 사념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사념을 사용한다.
지금처럼 그대에게 말할 때 나는 마음과 사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념들이 장막처럼 나를 가리지는 못한다.
나는 필요할 때 마다 사념을 이용한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지 않을 때 사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안에 있는 하늘과 밖에 있는 하늘은 하나다.
나는 사념을 사용하는 중에도 이 사념이 나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념은 유용한 도구다.
내가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도구들이 나를 가리지는 못한다.
사념의 장막없이 안주할 수 있는 것은....
붓다는 사념의 장막에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카르마 아베르나(karma averna)' - 미완결된 행위이다.
전체적이지 못한 행위는 그대의 존재를 장막처럼 덮어 버린다.
모든 행위가 완결되기를 원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완결시키려는 본래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어떤 행위를 완결짓지 못했을 때
그 행위는 주변을 맴돌며 그대 존재의 하늘을 가려 버린다.
카르마 아베르나, 즉 그대 실존의 하늘을 가리는 카르마가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클레샤스 아베르나(klesas averna)' 다.
탐욕, 증오, 질투 같은 것들이 클레샤, 즉 불순물(物)이다.
이런 불순물들이 그대를 덮어버린다.
이런 현상을 관찰해 보았는가? 282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화가 나 있다.
어떤 때는 조금 화가 나 있고, 어떤 때는 몹시 화가 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화가 나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즉시 성을 낼 준비가 되어 있다.
구실만 있으면 언제라도 성을 낼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다.
그의 내면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질투를 잘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질투할 구실을 계속 찾아낸다.
질투심이 많은 부인은 혹시 무슨 구실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남편의 호주머니와 편지,
그리고 서류철을 계속 뒤진다.
물라나스루딘이 퇴근해서 집에만 돌아오면
그의 부인은 어떤 트집을 잡아서든 싸움을 걸었다.
그녀는 항상 무엇인가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혹시 물라의 수첩에 낯선 전화번호라도 적혀 있으면 즉시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의 코트에 머리카락 한 올만 묻어 있어도
이 머리카락은 누구 것이지?' 하면서 따지고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없었다.
그날은 물라가 어떤 트집도 잡히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인은 엉엉 울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물라가 물었다.
"또 무슨 문제야? 내 코트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묻어있지 않을텐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안 울게 생겼어? 이젠 대머리까진 년이랑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대머리 여자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283
그러나 이것이 질투심 많은 사람의 마음이다. 이런 것들이 장막(幕)이다.
붓다는 이것을 클레샤, 불순물(不越物)이라고 부른다.
에고이스트(egoist)는
항상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찾아다니거나
또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것들을 찾아다닌다.
소유욕이 강한 사람은 항상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소유물을 찾아 다니거나
또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찾아내서 그것을 차지하려고 열심히 싸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그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대의 마음을 살펴보라.
그대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하룻 동안 그대의 마음을 관찰해 보라.
그러면 이 모든 사념의 장막들, 이 모든 아베르나(averna)를 그대 안에서 만날 것이다.
세 번째는 가야 아베르나(ghaya avernas) 라고 불린다.
믿음, 견해, 이념, 지식이 여기에 속한다. 이 모든 것이 장막이다.
이것들은 올바른 앎을 방해한다.
그대가 제대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세 가지의 장막을 거두어 내야 한다.
이 세 가지의 장막이 떨어져 나갔을 때 우리는 무(無)안에 안주한다.
이 안주(dwelling)' 라는 말 또한 이해되어야 한다.
붓다는 보디사트바가 무(無)안에 안주한다고 말한다.
무(無)가 그의 집이다. 그는 무(無)안에 거주한다.
무(無)가 그의 거처이다. 그는 이 집을 사랑한다.
이 집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집은 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는 나는 지금 호텔에 와 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라는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이 집은 그의 거처이며 안식처이다.
사념의 장막이 떨어져 나갔을때에는 무(無)가 그대의 집이다.
그대는 무(無)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키에르케고르와 샤르트르는 한 번도 거기에 가본 적이 없다. 284
다만 그것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상태일까?' 하고 상상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두려움을 느낀 이유다. 그는 다만 생각해 보았을 뿐이다.
그대가 그렇듯이.
그대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라.
그대는 장작더미 위에 놓일 것이고 영원히 끝날 것이다.
그 후로는 이 아름다운 나무, 아름다운 사람들을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다시는 웃을 수도 없고, 다시는 사랑할 수도 없다. 다시는 별을 볼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계속 되는데 그대는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그대가 없어도 모든 것이 계속될 것이다.
새들은 노래하고, 태양이 떠오르고, 바다가 포효하고, 독수리는 높은 하늘로 비상하고
꽃이 피어나 향기를 날리고, 촉촉히 젖은 땅 내음... 이 모든 것이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대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대의 육체가 죽어버린다.
그대와 함께 살던 아름다운 육체,
그대가 그토록 정성스럽게 손질하던 육체가 병들고 그대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다가 육체가 죽어 아무 쓸모도 없게 되는 날,
이 육체를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장작더미 위에 그대의 육체를 올려 놓는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라. 두려움의 전율을 느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그는 매우 공포심이 많은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그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부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많은 돈을 물려 주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었다.
은행에 충분한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매달 첫날이 되면 그는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
이것이 그가 한 일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명상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명상은 사색을 뜻한다.
이것이 'meditation'이라는 영어 단어의 의미이다. 285
이것은 '드야나(dhyana)' 의 올바른 번역어가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명상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무엇에 대해 명상합니까? 하고 묻는다.
영어 단어의 명상(meditation)은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도의 '드야나(dhyana)는
어떤 것에 대해 숙고(熟考)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 안에 존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드야나는 하나의 상태이지, 활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곰곰이 생각하고 사색했다. 철학적인 사색에 잠겼다.
그러던 그가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현상 자체가 그에게는 두려움의 전율이었다.
그는 3년 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마침내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는 평생동안 그녀를 잊지 못했다.
평생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불행을 한탄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왜 그랬을까?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에게 두려움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일종의 죽음이다.
진정으로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는 그 사람 안에서 죽는다.
그의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사랑을 나눌(make love) 때 ・・・
나는 불가피하게 이 'make'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맞지 않지만 어떠한 말도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단어를 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그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사랑은 만들어질 수 있는게 아니다. 'making love' 라는 표현은 틀린 표현이다.
사랑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happen)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과 함께 사랑의 공간 안에 있을 때 두려움이 밀려든다. 그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르가슴은 일종의 죽음이기 때문이다.286
키에르케고르는 이 여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내가 이 여자 안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 정도로 사랑했다.
그 두려움은 견디기 힘들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혼에 대한 생각을 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그는 '그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하는 생각 때문에 평생동안 괴로워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는 참으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철학적인 사색만 하면서 살았다.
그의 죽음에 관해 이런 일화가 있다.
그는 은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 날도 어떤 달의 첫째 날이었다. 그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돈이 마지막 남은 돈이었다. 그는 노상(路上)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것은 이제 은행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던 같다.
그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아무 병도 없었다.
따라서 그렇게 갑자기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은행원이" 이게 마지막입니다.
이젠 잔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는 집까지 가지도 못했다.
도중에 길 위에서 죽어버렸다.
그는 붓다가 말하는 무(無)를 경험한 적이 없다.
다만 그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두려워한 것이다.
샤르트르 역시 명상이라고 불리는 공간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명상가가 아니다. 그는 사상가였으며, 철저하게 서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내면으로 들어가는 동양의 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자유가 형벌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자유가 괴로움으로 보인 것이다.
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자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무(無)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¹⁾지복(至福)이 있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불리는 완전한 죽음 안으로 들어간다면,
거기에 ²⁾사토리가 있고 ³⁾삼매(三昧)가 있다.
---------------------------------------
*¹⁾ 지복(至福): 그 위에 더없는 행복.
*²⁾사토리(satori): ‘깨달음“ 이나 영적 각성 “직관적 이해”득도(得到)를 뜻하는 일본 신(神)의 용어, 삼매(三)와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³⁾ 삼매 (三昧):〔산-samādhi〕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 삼매경(三昧境).
===================================================================================END
★-원문출처:오쇼라즈니쉬 강의(손민규 옮김)『반야심경』초판2쇄;서울:태일출판사,2001
*動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