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명계(冥界)에서 전하는 전언들
우리 시인들은 어머니에 대한 시를 써보지 않은 시인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나 상징은 한마디로 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현존(現存)의 삶을 영위하도록 그 기반을 창조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영원한 불망(不忘)의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는 나에게 베푼 모정(母情)이 있는가 하면 지극히 사모(思慕)하는 사모곡(思母曲)의 두 가지 갈래로 시상(詩想)을 떠올린다.
모정은 생전의 어머니가 베푸는 사랑의 손길이지만 어쩐지 못다 갚은 은혜, 불효의 정감이며 사모곡은 사후(死後)에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여운을 되새기는 점을 형상화하는 시법이다. 일찍이 김남조 시인은 어떤 글에서 “어머니! 이렇게 부르면 지체 없이 격렬한 전류가 온다. 아픈 전기이다. 아프고 뜨겁고 견딜 수 없는 전기이다.”라는 말로 어머니에 대한 뜨거운 혈류(血流)가 나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진솔한 고백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선 모정에 대한 작품을 썼다. 이는 생전에 어린 자식을 성장하도록 정성을쏟았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불안정으로 가난이라는 갈등을 감내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섣달 그믐날 밤/ 내 심연에 등불 하나 켜 들고 섰다.[시집 『황강』]
어머니
섣달 그믐날 밤/ 이슥하도록/ 지등 하나 켜들고/ 사립문 앞에서 마냥 서 있었다/ 검둥개 짖는 소리/ 동구 밖까지 적막을 흔들어/ 겨울바람은 잠들지 못했는데/ 오래 전 별이 되신 아버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입니다.[문협 시분과 사화집]
MY MOTHER
New Year' Evve/ I'ill late at night/ With a paper-coverred lamp/ My mother was standing in front of a brushwood door./ The barking of a black dog/ Shook the silence our of the village,/ And the winter winds didn't fall asleep/ But mother was still waiting for my father/ Who became a star a long time ago./ The scen was a picture.
(Trans, by Yong-jae Kim)
母 情
합천(陜川)고을 황토길에/ 바람따라 이월은 오네/ 초하룻날 정결한 새벽/ 한 바구니 정성으로/ 개똥논 앞 실개천에/ 영등(靈燈)할멈 있다던가/ 의성김씨(義城金氏) 아무아무아무...../ 소지(燒紙)올린 울엄매야/ 새 바가지 물 떠놓고/ 촛불 합장(合掌) 울엄매야/ 자식 걱정 손 비비고/ 그게 모두 내 마음이재.[시집 『서울허수아비의 수화』]
이번에는 사모곡이다. 명계(冥界)에서도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준다. 나는 그것은 소중하게 받아 적어서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모심첩운(母心疊韻) • 1
지금은 무척 안온하단다/ 미동도 할 수 없는 내 육신은/ 비록 어둠 속에 갇혀 있다만/ 멀었던 여정을 끝내고/ 이젠 뒷산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따수운 햇살과 함께 편히 쉬고 있단다//하마 이승에서의 일쯤은 잊을만도 하다만/ 어쩐지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이면/ 이미 푸석푸석해진 내 등골을 긁는/ 한스런 한 생애가 섬광처럼/ 밤벌레 서러운 울음으로 떠도는데/ 어쩔 수 없구나, 한 줌 흙으로 깊숙이/ 얽어맸던 그 사슬을 묻어두었다/ 저 동녘, 막 솟는 태양에 취해/ 진하거나 혹은 여리게 영육(靈肉) 짓무른 한 살이/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하소연이지만/ 그러나 나의 살점, 너희 세 핏줄/ 이토록 알싸한 비명 같은 음률들이/ 언제나 내 영혼 곁에서 아아로와/ 더러는 너희 꿈결에서나 만나고 있단다.
모심첩운(母心疊韻) • 2
이승에는 지금 비가 쏟아지느냐/ 내 흙 이불자락 적신 빗소리가/ 이곳 명계(瞑界)까지 들려온다/ 네 아버지가 떠난 그 길을 따라와/ 무상(無常)의 깊은 늪에 젖어 있지만/ 지금은 마지막 유골 한 점이/ 시간을 정지시킨 채/ 문 밖까지 오련한 신음을 눈치 챈다/ 아아, 내 살점 그 생명의 신비가/ 지지리 복도 받지 못한 채 살다가/ 다시 네 아비처럼, 이 어미같이/ 영면을 위해 황토 속으로 돌아오느냐/ 건너 중간댁 큰 조카도, 장밭 큰댁 작은 조카도/ 이번엔 너마저 한 세대가 이곳을 찾아/ 짧은 육십 평생은 그저 운명이려니/ 산새들 울음이 멎고/ 네 가솔(家率)들 통곡은 지축을 흔들지만/ 어쩌랴, 돌릴 수 없는 천명(天命)/ 가끔 저승의 경계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름들 그들의 모진 아픔 모두 지우고/ 이젠 나와 함께 무지개 속을 날자꾸나/ 이승에 쏟아지던 비는 아직도 멎지 않았느냐.
모심첩운(母心疊韻) • 3
오늘은 날개를 달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히로시마 어디쯤(당시 원자탄 투하로 폐허가 / 된 땅에 새로 계획된 도시라서 지금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네 아버지 팔뚝 태엽에 빨려 들어가/ 부러진 어느 하역 부둣가를 찾다가/ 너희들을 잉태케 한 단란한 그 집을 찾다가/ 부랴부랴 경상도 고향 산골로 돌아온 날/ (달래, 냉이, 쑥부쟁이, 쇠비름, 명아주, 고들빼기, 돈나물……)/ 이곳에선 연명할 수 있었다/ 윤사월 보릿고개 시절을 기억하겠지/ (청보리죽, 송기죽, 쑥버무리……)/ 가난은 진한 주홍색 눈물이었다/ 허리 꼬부라지도록 땅을 팠지만/ 너희들이 바라는 장도(壯圖)는 읽어주지 못했다/ 우짜겠노, 유산으로 남긴 가난죄/ 이 영혼은 영원히 씻을 수가 없는데/ 지국천왕이시여,/ (……허락만 하신다면)/ 오늘도 남아있는 저들 곁으로 날아가/ 살아가는 모습을 살피고 싶습니다/ 무언가 부족함이 저들을 괴롭힌다면/ 아니 이태껏 그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내 죄로 하여 씻어주고 싶습니다.[시집 『꿈, 그 행간에서』]
思母曲
삼경이 지나도록 紙燈을 밝힌 채 배곯아 집 떠난 어린 자식 이제나 저제나 삽짝에서 오매요, 부르면서 돌아올 나를 기다렸다. 동구 밖 개 짖은 소리 어둠에 묻히고 개골개골 너는 그렇게 울어쌌노. 주르르 타내리는 눈물을 소매 끝에 훔치면서 보리고개 삼짇날 쑥버무리 송기죽 한 사발 눈물로 말아서 가문 하늘 한번 쳐다보고 자식 생각하다가 별이 되신 어머니-
내 나이 쉰 가까이서 잠 못이루는 밤, 지등보다 밝은 마음의 등불 켜들고 별빛 속을 헤맨다. 어디메쯤에서 밝게 더욱 빛나고 있을 어머니별 찾아서 떠돈다. 따숩은 봄날 아지랑이 함께 들꽃들이 흔들리고 은은한 새 소리 가락을 따라 허공을 떠돈다. 떠돌던 하늘 한 모퉁이에서 어둠을 가르는 어머니의 저 목소리 인제사 사랑이어라, 하마 말라버린 사랑의 눈물이어라.[시집 『백지였으면 좋겠다』]
물 詩 . 22
-어머니의 물
늦은 밤 별빛으로 부르던 자장가/ 젖꼭지를 문 채 잠든 새 생명// 포근함과 매서움이 함께 고인/ 영원의 영천(靈泉)이었다// 아마 내가 중년을 넘고서야 / 보았던, 이미 말라버린 젖샘// 갈래갈래 제 갈 길을 가듯이/ 모두들 그의 품안을 떠나고// 양지바른 고향 뒷산에 잠들어/ 육탈된 그의 물길은 멈춘 지 오래다 // 하지만, 그 물줄기는 지금도 / 내 온몸에 질펀히 흐르고 있음에야.[시집 『물의 언어학』]
나의 자친(慈親)은 김녕김씨로 1978년 8월 19일 별세하고 고향 합천군 용주면 공암리 음실골짝 마을 뒷산에 영면하셨다. 이렇게 흩어진 모정애(母情愛)에 대한 작품을 찾아서 모아두는 것은 나도 나이가 들수록 사모치는 그리움이 문득문득 엄습(掩襲)하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