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나무와 늙은 다람쥐의 기억
깊은 밤나무 숲에 가을이 찾아오면, 노랗게 물든 나뭇가지마다 통통하게 익은 알밤들이 가득 열렸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밤송이들이 토옥, 토옥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고, 숲은 가을의 풍요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숲의 거대한 밤나무 아래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늙은 다람쥐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젊은 날의 다람쥐는 숲에서 가장 빠르고 똑똑하여, 어떤 밤이 좋은지 척척 알아채고 자신이 숨겨둔 먹이 위치를 하나도 잊지 않는 명수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눈이 어두워지고 기억력이 자꾸만 희미해진 늙은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부지런히 알밤을 주워 땅속 깊은 곳곳에 숨겨두고서도 돌아서면 어느 나무 아래에 묻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아, 이를 어쩌지…… 분명 이 커다란 바위 곁에 알밤 세 개를 묻어둔 것 같은데 아무리 파헤쳐도 나오지 않는구나."
늙은 다람쥐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텅 빈 앞발을 내려다보며 낙담했습니다. 다가올 추운 겨울에 먹을 알밤이 부족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예전 같지 않은 자신의 희미해진 기억력과 완벽하지 못한 실수가 너무나 슬프고 속상했습니다.
늙은 다람쥐가 나무 아래 주저앉아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때, 가을 바람을 타고 밤나무의 굵은 나뭇가지가 살포시 내려와 다람쥐의 머리를 다정하게 다독여주었습니다.
"작은 친구야, 왜 그리 슬프게 울고 있느냐?"
"밤나무님, 제 기억력이 자꾸 나빠져서 큰일이에요. 당신이 정성껏 내어준 그 고운 알밤들을 땅에 숨겨놓고는 어디에 두었는지 자꾸만 잊어버려요. 소중한 알밤들을 땅속에서 썩혀 버리는 것 같아 제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요."
다람쥐의 서글픈 탄식을 들은 늙은 밤나무는 잎사귀를 살랑이며 그윽하고 포근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슬퍼하거나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네가 잊어버려 찾지 못한 알밤들은 결코 버려지거나 썩는 것이 아니란다. 땅속 깊은 곳에 묻혀 네 온기를 머금은 알밤들은 차가운 겨울 눈을 견뎌내고, 봄이 오면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 푸른 새싹을 피워 올릴 거란다."
밤나무의 뜻밖의 말에 늙은 다람쥐는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습니다.
"네가 잊어버린 그 정직한 알밤 하나하나가, 훗날 이 숲을 더 풍요롭고 울창하게 만들 나의 어린 밤나무 아이들로 다시 자라나는 거란다. 네 작은 건망증과 실수가 알고 보면 이 숲의 내일을 가꾸는 거룩한 씨앗이었던 셈이지."
늙은 다람쥐는 그제야 밤나무의 깊은 뜻을 깨닫고 가슴속에 차오르는 따스한 위로를 느꼈습니다. 자신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 잊어버리고 흘려보낸 실수조차도 자연의 커다란 품 안에서는 세상을 한층 더 푸르고 아름답게 가꾸는 뜻밖의 결실이 되어 싹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늙은 다람쥐는 알밤을 묻어둔 장소를 잊어버려도 더 이상 자책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봄날, 자신이 땅속에 묻어둔 기억들이 어여쁜 새싹이 되어 숲을 환하게 밝혀줄 것을 믿으며, 온화하고 행복한 미소로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