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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의 피아니스트가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은 눈보라치는 1951년 한국전쟁을 헤맸다. 그해 겨울 서울대 의대를 나온 젊은 군의관 발가락이 얼어터지고 진물이 흘러나왔다. 두 발을 절반이나 잘라낸 날 그는 밤새 울었다. 죽고 싶었다.
어느 날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 선생(1908~1979)이 병실에 찾아왔다. 안 선생은 "나는 소아마비에 걸려 절뚝거리면서 다니지만 일부러 가슴을 열고 다닌다. '음악이 나에게 있다'는 자존심 하나로 살았다. 비관하지 마라. 너에게도 피아노가 있잖아"라고 위로했다.
잊을 뻔했다. 젊은 군의관은 전쟁 직전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다. 라디오방송국 연주에도 자주 불려갔다. 안 선생이 다녀간 날부터 '한국 피아노 음악의 대부' 정진우 서울대 명예교수(84) 음악인생이 다시 시작됐다. "음악이 죽음과 절망을 밀어냈죠. 속상할 때 죽으라고 치면 화가 풀렸어요. 피아노는 내 말을 다 들어주는 친구이자 선생이었죠."
이듬해인 1952년 11월 15일 부산에 피난 온 이화여대 강당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전쟁 중이라 그랜드 피아노를 겨우 빌려 리어카에 싣고 왔다. 그 독주회 이후 '비운의 삶을 딛고 일어선 의지의 피아니스트'와 '소생한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들이 붙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음악이 깊어졌어요. 음악 속에 뛰어들어가 몸무림쳤죠. 내가 깊게 느끼니까 남도 내 마음으로 들어오더군요."
1957년 그는 또 한 번 도전을 한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로 유학을 떠난다. "한국인이 한 명도 없었어요. 외로워서 천장을 보고 '이 놈아, 저 놈아'라고 소리쳤죠. 한국어를 잊어버릴까 걱정됐어요."
어렵게 공부하고 귀국한 그는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70), 이대욱 한양대 교수(65), 강충모 줄리아드음대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52) 등 한국 대표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제자다.
그는 화를 잘 내지 않고 레슨할 때 노래를 불러주던 선생이었다.
"손 모양과 움직임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어요. 대신 음악 흐름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쳤어요. 학생이 음악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연주 능력이 생기거든요."
거동이 불편한 그는 아파도 제자들 독주회는 꼭 참석한다. 일주일에 3~4번 음악회에 간다. 제자들도 그의 참된 사랑을 잘 안다. 지난 4월 30일 제자 67명이 그의 독주회 60주년, 그가 창간한 잡지 월간 '피아노 음악' 창간 30주년을 축하하는 연주회를 열었다. 제자들은 "선생님은 우리의 영웅"이라며 찬사를 보낸 후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피아노 8대로 연주했다.
객석에 앉은 백발의 스승에게선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2시간에 걸친 연주회가 끝난 뒤 쏟아지는 갈채 속에 지팡이를 짚고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 ‘한국 클래식의 대부’가 말했다.
“가슴이 메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이런 날이 오기를, 이런 날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산 것 같습니다. 내일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한국 피아노계의 역사를 쓴 거인’ 정진우(85)에게 바치는 ‘오마주 콘서트’가 20일 경기 수원시 인계동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에서 열렸다.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린 이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 신수정과김영호가 짠 프로그램은 음악으로 풀어낸 정진우의 일생이다.
피아노를 사랑했던 청년 정진우는 일본 도쿄 음악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거센 반대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평양의전에서도 ‘음악광’ ‘피아노광’으로 불린 그는 광복 후 경성의전에 다니면서 서울합창단의 반주를 맡았다. 6·25전쟁 때 군의관으로 입대했다가 동상으로 양쪽 발가락을 모두 절단하고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1957년 한국인으로 첫 오스트리아 유학을 떠났고,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정진우 사단’이라 불리는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정진우는 “일 년 내내 제자들의 음악회가 열린다”고 했다.
제자들은 무대가 전환될 때 출연해 스승과의 지난날을 회상했다. “선생님은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상처보다는 평안을 주셨다”(윤철희), “연습을 안 해 가면 ‘무슨 일 있어?’라고 한마디 물으시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마다 뭔가 일이 있었다”(박은희).
일생이 곧 한국 음악사인 스승의 함박웃음을 둘러싼 감사와 존경의 박수가 오래도록 멈추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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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독주회를 준비하던 1952년 11월의 스물넷 정진우
당시 비엔나 동회 모습(고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셋째줄 맨 왼쪽 정진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식으로 처음 유학 온 사람은 정진우(피아노, 전 서울대 음대학장)였다. 그는 1957년 3월 미군이 쓰던 활주로를 개조한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 홍콩, 싱가폴, 이스탄불, 로마, 뮌헨을 거쳐 빈에 도착하였다. 정진우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도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었다.
1956년 유럽에 들렀던 임원식 KBS 교향악단 초대 상임지휘자가 돌아가는 길에 빈 국립음대(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 입학원서를 가져다준 것이 계기가 되어 빈으로 오게 되었다. 정진우는 원래 빈 국립음대에 입학했으나 새로운 현대음악을 배우기 위해서 빈 콘서바토리움(Konservatorium der Stadt Wien, Privatuniversität은 2005년부터 명칭으로 붙음)으로 옮겼다. 어렵게 유학 왔는데 대부분 익숙한 고전음악만 배우고 가느니 현대음악을 배워 가는 것이 낫겠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른 결정이었다.
두 번째 유학생은 한양대학교 음대에서 피아노를 오랫동안 가르쳤던 권기택이다. 원래 독일의 프라이부르크를 목적지로 정하였지만, 관광을 위해 빈에 들렀다가 정진우의 권유로 머물렀다. 세 번째 유학생은 광주대학교에서 오래 봉직한 서양사 전공의 이태영이었다. 그 밖에 조상현(전 한양대 음대학장), 김달성(전 단국대 음대교수), 그리고 물리학, 화학, 원자력 공학 등의 자연과학 전공 유학생들이 다수 합류하여 1958년 학기가 시작할 때쯤에는 10여 명의 한인 유학생이 빈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인 유학생회 이름을 ‘비엔나 동회洞會’로 명명했는데, 초대 회장으로는 정진우가 추대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생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권기택은 정진우의 도움으로 그의 집 근처에 방을 구하였다. 김달성, 조상현 등은 방값이 싼 국립 오페라 Staatsoper극장 부근에서 살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휴일에 서로의 하숙집을 방문하여 회포를 풀곤 했는데, 때때로 고국에서 사진이 오거나 슬픈 사연이라도 전해오면 서로 붙잡고 울었다.
당시 파리 유네스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을 여행하던 현제명(서울대 음대학장)이 정진우를 만나기 위해 빈으로 왔다. 화창한 봄 날씨에 학생축제가 열리던 시즌이라 마침 정진우의 연주회 프로그램도 있었다. 정진우가 연주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뒤에서 그를 기다렸던 현제명은 눈물을 흘리고 “정 군을 보니 불원천리하고 달려온 보람이 느껴진다”며 격하게 부둥켜안고 감격스러워 하였다. 현제명은 일제 말기 연희전문학교에서 오래 봉직하다가 미국 시카고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해방 후에는 경성음악학교를 설립하여 음대학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음악교육을 주도하고 있었다.
현제명은 정진우에게 국내로 올 것을 제안하였다. “이보게 정 군! 우리가 할 일은 우선 교육이네! 토양이 있고, 나무가 길러져야 이 빈의 숲 같은 음악 사회도 만들어질 것 아닌가?”정진우는 1959년 4월 한국으로 귀국,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부임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한국 피아노 음악의 명실상부한 대부가 되었다.(참조: 정진우, 음연, 2008)
정진우가 귀국한 해에 파리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양해엽 전 서울대 음대교수가 빈 국립음대(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로 옮겨 빈에 체류하였다. 오랫동안 서울대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쳤는데, 그의 두 아들(양성식, 양성원)은 바이올린과 첼로의 세계적인 연주가들이 되었다. 1959년 이후 다양한 분야의 유학생들이 빈으로 오게 되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가 한국의 가난한 유학생을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1959년에 대구 출신인 김병옥(철학), 김봉양(철학), 김진균(음악학, 역사학)이 처음으로 왔고, 1960년부터는 인원이 늘어났다. 김혜자(피아노), 이우영(행정학), 박명(생물학), 박일희(약학), 서정희(독문학), 손재준(독문학), 이경인(교육학), 이광규(인류학), 이종희(물리학), 이혜정(약학), 정창식(의학), 전봉덕(수학) 등이다.
피아니스트 한동일
교회 찬양대 지휘자였고 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팀파니스트가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만 4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월남하였다. 10살 때 미군 위문 공연 휴식 시간에 무대에 올라 연주하던 모습을 본 병사들이 모은 5천 달러 유학 기금을 前 주한 미 제5 공군 사령관인 새뮤얼 E 앤더슨 중장의 후원으로 마련하였다. 13살의 나이로 미국으로 이주하고, 1954년 7월 25일에는 CBS TV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한국에서 온 피아노 신동으로 소개되었다. 뉴욕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 로지나 레빈과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뉴욕 필하모닉이 주최한 영 피플스 콘서트 경연대회에 합격한 후, 1956년 4월 28일, 카네기 홀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 번(지휘: 윌프리드 펠레티어)을 협연하였다. 1962년에는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를 가졌다. 1965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한국인 최초로 국제대회 입상자가 되었다. 1969년 인디애나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북 텍사스 대학교, 보스턴 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마치고, 2005년 영구 귀국하였다. 2005~2007년 울산대학교에서 석좌 교수, 음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순천대학교에서도 석좌 교수 임기를 마치고, 일본 히로시마 엘리자베스 음악 대학교의 초청 교수로 활동 중이다. 2013년에는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국 백악관에 초청돼 연주
‘음악신동 1호’ ‘유학파 음악인 1호’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 한동일(70·사진)씨를 따라다닌 수식어다. 그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크게 두 번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한동일의 해’로 꼽는 것은 1954년이다. 6·25 종전(終戰) 이듬해 그는 미군 헬기를 타고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군 사령관이 그를 위해 유학 자금을 모았다. 한국 현대음악사에 ‘신동’이란 개념을 처음 심었다. 65년도 극적인 해다. 뉴욕 리벤트리트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한국 최초 콩쿠르 우승’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한씨가 꼽는 결정적 전환기는 68년이다. 그는 이때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연주를 끝내고 혼자 호텔 방에 누워 “천장이 무너지고 사방의 벽이 좁혀져 오는” 경험을 했다. “담요를 뒤집어 쓰고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 삶이 달라질 거란 걸 예감했다”고 말했다.
연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한씨는 열셋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혼자 떠났다. “한국 사람들은 굶어 죽느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하던 때였다. 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천국으로 떠났다 여겼다.”
행복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연주해야 했다. 미군이 모아준 유학 자금은 떨어졌다. “물건을 들고 해외를 떠도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었다. 68년 즈음, 독일에서 연주 하는데 큰일이 생겼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음악인데도, 일부러 연주를 망가뜨렸다. 내 자신을 망치고 싶었다.”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싫어졌다. 뉴욕 필하모닉, 러시아 내셔널 심포니,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그였다. 런던 필하모닉과는 스무 번 넘게 함께했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연주했던 스타였다.
하지만 무대를 떠날 시간이 왔다. 마침 인디애나 음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28세부터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레슨실에 찾아올 때마다 ‘이제야 나도 가족이 생겼다’라는 안도를 했다. 나는 열세 살부터 10여 년을 혼자 다녔다. 황량한 무대 뒤를 지켰다. 어른 세상에 홀로 온 아이 같아 무서웠다.” 그는 37년 동안 인디애나·보스턴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2005년 돌아온 한씨는 현재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다. 서울에는 자그마한 연습실 겸 스튜디오만 있을 뿐이다. “이제 나에겐 정해진 직함이 없다. 50년 동안 몰랐던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한국 음악사의 각종 기록을 세웠던 그는 영광 대신 가족과 안정을 선택했다. “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 같은 어려운 작품을 연주하던 시기는 지났다. 나는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한다. 이젠 영적이고 정신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나의 후배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돕는 일이 내가 할 일이다.”
10대의 ‘신동’ 한동일에게 음악은 구원이었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연주는 내게 연주가 아니다. 삶을 축하하는 행위다. 70세에 접어들면서 행복하다 말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며 친구들과 같이 잔치를 벌이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한씨가 13~20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피스 앤 피아노 페스티벌’에 11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한다. 그는 13일 오프닝 콘서트에서 베토벤 협주곡 4번 연주를 맡았다. 신수정(69)·이경숙(67)씨부터 김영호(55)·김대진(49)·손열음(25)씨, 조성진(17)군까지 출연하는 축제의 최연장자다. 그가 ‘1세대’로서 고통스럽게 지났던 길에서 ‘3세대’ 피아니스트들은 팡파르를 울리고 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차이콥스키와 바흐를 쳤던 신동 한동일이 카네기홀에 데뷔한 시기는 그의 미국진출 다음해인 1955년3월이었다. 14세의 나이로 전쟁속에 피어난 천재 피아니스트로 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그였으므로 콘서트 입문이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미국에 오자마자 인기 앵커맨 월터 크롱카이트와의 인터뷰를 비롯, 에드 설리반 쇼등 TV출연, 각지방 오케스트라의 초청연주가 봇물처럼 터졌다.
덴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았고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영 피플스 콘서트 경연대회에 출전, 입선하면서 이듬해 뉴욕필과 협연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때 그가 연주한 곡은 차이콥스키 협주곡 1번. 이른바 카네기홀 데뷔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기대속에 그를 보냈던 온국민이 열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축전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붉은 장미 두다발을 축하의 선물로 보내왔다.
그가 행운을 얻기 전 구걸 피아노를 치던 시절은 한국전 휴전 무렵인 1953년경. 아들의 천재성을 높이 샀던 그의 아버지가 수소문한 끝에 서울의대 자리 미제5공군 사령부에 놀고있는 피아노 한대의 교섭이 잘 이루어져 그곳서 매일 몇시간씩 연습을 할수 있었다. 조그만 행운이었다. 이 조그만 행운은 곧이어 엄청난 행운을 몰고 왔다. 연습이 계속되던 어느날 공군 사병 한사람
이 찾아와 며칠후 중요한 인사들을 초청하는 쇼가 있는데 그자리에서 한곡 쳐줄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며칠후의 쇼에는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미제5공군 사령관 새무엘 앤더슨 중장이 참석하게 되어있었다. 그날 소년 한동일의 바흐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앤더슨 장군이 무대 뒤로 그를 찾아왔다. 통역을 통해 한동일의 부친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뜻밖에도 미국 유학과 함께 학비 전액을 부담해 주겠다는 제의였다.
먹고 살기조차 힘든 전쟁시절 그와같은 은인을 만나게된 행운은 하늘의 별따기 였다고 한동일은 회상했다. 이렇게 시작된 앤더슨 장군과의 인연은 그가 타계할때 까지 계속됐다. 앤더슨 장군의 약속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의 유학자금을 모금하는 연주회가 그해 11월과 12월 두달간에 걸쳐 주한 미공군 기지들을 돌며 진행됐다. 연주가 끝나고 통역 아나운서가 "이 소년을 줄리어드에 유학시키기 위해 장학금을 모으자"고 호소하면서 장내에 모자가 돌려지고 5센트, 10센트짜리 동전이 수북히 쌓인 모자가 돌아올때면 꽤많은 액수가 모여졌다. 54년에 있었던 일본 공군기지에서의 모금은 5천 달러에 달했다. 때마침 6월1일 본국으로 전임되는 앤더슨 장군의 군용기에 동승해 한동일 소년의 미국 유학길은 활짝 열리게 됐다. 당시 배재중 1학년으로 병역 미필자의 해외출국은 불가능할 만큼 엄격했던 시절이었는데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무사
히 출국할수 있었다.
프로펠러 군용기 편으로 동경-존슨 아일랜드-하와이-샌프란시스코-텍사스주 포트워스-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한 한동일이 거기서 작별인사를 하고 뉴욕행 기차에 오르면서 12세 소년의 외톨이 인생 여정이 펼쳐졌다. 이때쯤 뉴욕의 매스컴은 이 천제소년을 맞아들이는데 성의를 표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중인데도 줄리어드의 로지나 레빈 교수등 전직원이 대기상태에 있었고 뉴욕타임즈. 데일리 뉴스, 저널 아메리카등 미디어들이 대대적으로 그의 도착을 알렸다. 다음날에는 월터 크롱카이트(CBS 유명앵커)와 인터뷰를 했다. 이 엄청난 홍보는 그의 미국 아버지 앤더슨 장군이 소리없이 진행시킨 사전 준비작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며칠후 실시된 줄리어드의 오디션에서 바흐의 몇곡이 연주되었고 미숙한 면이 있었지만 그의 입학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전쟁터에서 자라난 천재라는 동정심리도 어느정도 작용했다. 예나 지금이나 줄어리어드에는 기숙사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일은 그의 어머니와 이화여전 동창생인 성악가 김자경의 아파트에 임시로 기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자경의 자녀들이 다니던 세인트 힐더 사립중학교에 입학했다. 줄리어드는 예비코스였기 때문에 토요일에만 다녔다. 학비와 생활비는 앤더슨 장군이 보내오는 특별장학금 계좌를 통해 적시에 지원을 받을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5년 카네기홀 데뷔 컨서트에 당당히 서게 되었던 것.
줄리어드 졸업등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고 한동일은 1965년 제24회 리벤트리트 국제콩쿨에서 우승함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 음악콩쿨 입상 기록이었다. 한국인의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무대였고 이때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모차르트'라고 했다. 이후로 그의 연주경력은 차근차근 쌓여져 갔다. 미국, 캐나다, 유럽, 아시아등
지를 돌며 활발한 순회연주를 가졌다. 뉴욕 필하모닉을 비롯, 시카고 심포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디트로이트 심포니, 미네아폴리스 오케스트라. 신시내티 심포니, 인디애나폴리스 심포니, 워싱턴 내서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로열 필하모닉, 스코틀랜드 내셔널 오케스트라,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즈, 할레 오케스트라, 로텔담 필하모닉, 오슬로 필하모닉등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과 돌아가며 협연했다.
한편 연주에 못지않게 교육 쪽으로도 눈을 돌렸다. 후진 양성을 통해 음악인생의 정체성을 찾으면서 인대애나 주립대 부교수, 텍사스 주립대 교수, 보스턴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제 70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그는 평소 바라던 대로 고국의 후진양성(울산대 음대학장)에 마지막 열정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의 기나긴 여정으로 볼때 어린 나이에 일찍 화려한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이 꼭 행운으로만 여겨질 일은 아니었다. 너무 일찍 연주생활에 뛰어든 감이 없지 않았다. 한참 공부에 전념해야 할 나이에 연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결과가 아닐수 없었다. 다른 한편 인간 한동일 그자신으로서는 너무 일찍 세상을 터득하게 되고 조숙한 나머지 평범한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아쉬움도 있었다. 최근 타계한 마이클 잭슨도 그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고 필
자는 생각한다. 부모는 계시되 고아 아닌 고아로서의 외로운 인생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때 심각한 우울증과 함께 신경쇠약 증세까지 보였던 그는 베를린 연주때 일부러 틀린 건반을 두드린 적도 있었으나 노력끝에 용케도 그 터널을 벗어날수 있었다.
한동일의 후견인이자 아버지 앤더슨 장군
특별 장학계좌 통해 학비.생활비 지원
▲한동일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새무엘 앤더슨 장군
한동일의 인생을 행운아로 만들어준 미국인 아버지 앤더슨 장군이 도움을 주는 방식은 좀 특이했다. 장학금을 직접 손에 쥐어주는것이 아니라 국제교육기관의 기금에 집어넣고 그가운데 한동일 교육기금이라는 특별항목을 만들었다. 그 계좌를 통해 학자금, 생활비, 용돈등이 일정하게 지급되는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다. 앤더슨 장군은 한동일의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끔 연주여행을 주선해 주었다. 거저 주는게 아니라 무엇인가 노력을 해야 얻는게 있다는 식의 교육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후 앤더슨장군은 워싱턴 국방성 근무중 58년 대장 진급과 함께 앤드루스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전임됐다가 파리의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 부사령관을 끝으로 은퇴, 지난 81년 타계했다. 말년 어느날 앤더슨 장군은 그를 찾은 한동일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토니(한동일의 미국 이름), 나는 정말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모든 기회를 주셨습니다" " 그렇지만 네 자신이 모든걸 해내지 않았느냐"
피아니스트 이경숙
지속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선보임으로써 국내 음악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피아니스트 이경숙
한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이경숙은 서울예고 재학 중 장학생으로 도미, 커티스 음악원에서 호로조프스키와 루돌프 제르킨을 사사하였다. 유학 전 국내에서 이화∙경향 콩쿠르 특상을 수상하였으며 커티스를 졸업하던 해 1967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것을 비롯하여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콘체르토 오디션에서 우승함으로써 국제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1968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그 실황이 전 미국에 방영되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경숙은 커티스 음악원 졸업 후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꾸준하면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펼쳐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연주자이다. 크리스찬 페라스, 피에프푸르니에, 유디스 샤피로, 아론 로잔드, 줄리어스 베이커, 마르시알 세르베라, 필립 뮬러, 드미트리 야블론스키, 알토 노라스, 폴 토르틀리에 등 세계의 거장들과 협연하였으며, 스위스 로망드, 홍콩 필하모닉, 로얄 필하모닉, 프라하 심포니, 모스크바 필하모닉, 동경 필하모닉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경숙은 지금까지 수많은 연주 무대에 섰으며, 꾸준히 열리고 있는 독주회와 오케스트라 협연, 그리고 실내악 연주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팬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1988년 국내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 32곡을 완주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미 1987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 5곡을 완주한바 있는 그의 이 같은 업적은 한국 음악계에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어서 1989년에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 19곡을, 1991년에는 프로코피에프 피아노소나타 전 9곡을 완주하는 과업을 이루었고, 1993년에는 부천시향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3곡을 협연하였다. 또한 2000년에 샤무엘 바버의 피아노 전곡을 연주하였고, 2003년에는 슈베르트 페스티발을 통해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쉬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경숙은 자타가 이정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로서 주요 수상경력으로는 1985년 음악동아 선정 제 1회 올해의 음악가상, 1985년과 1988년 올해의 예술가상, 1987년 난파 음악상, 1988년 한국 평론가협회상, 김수근 공연예술상, 1994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95년 옥관문화훈장(“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2000년 우경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독일 뮌헨 국제피아노 콩쿠르와 일본 소노다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한국 예술종합학교 초대 음악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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