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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에 이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知友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란 바로 더이상 더하거나 덜할것도 없는 지금 그대의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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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모든것을 다 느껴보고 이런저런 체험을 다 할수 있으며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하며 깊은 사랑과 고귀함까지도 마음껏 창조해볼수 있는 당신,
또 반면에 너무나 추하고 악하기도 하며 보잘것없고 화도 잘내며 게으르며 성격나쁘고
남의 말에 빠져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기도 하며 <이건가 저건가?>하는 못난 당신,
혹은 열심히 진리를 찾겠다고 출가하여 수행하는 당신, 혹은 지금 이런 제말에 의심하며 반신반의하는 당신입니다.
왜그럴까요? 전지전능하므로 그어떤것이든 다 만들어내고 다 누려볼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진정한 참뜻입니다.
아아! 여기서 더 무엇을 말할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이 할수있는 자유를 다누리며
제 마음대로 이세상을 창조하여 누리고 있는것이며 ,
우리가 바로 모든 잘남과 못남,선(善)함과 악(惡)함까지도
창조하고 체험해보는 무한한 창조성의 존재라는 바로 이진실!
부자유함까지도 창조하는 자유,
모름과 무지까지도 창조하는
이절대의 능력앞에 더 무엇을 말할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나>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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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가지고 노력하면 안되는게 없다는
성공학의 진리명제들이 공연히 있는줄 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는대로
다 되는 놀라운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한 가능성의 나, 본성의 나를
자각하고 통찰하여 발견하는것이 바로 참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며
과거의 나로부터 참으로 깨어나는 길입니다.
지금 여기 내속에 숨어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
앞으로 너무나 고귀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자신을 체험할 운명이 지금도 꽃피어나는 바로 나,
그자체가 바로 이미 완성된 존재이며 빛나는 신성(神性)을 지닌 나이며
나아가 이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바로
그러한 너무나도 고귀한 살아있는 진리의 꽃송이 그자체들이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안에 전지전능한 하느님,부처님이
지금 깃들어 살고 계신다는 성경과 불경말씀의 숨은 참뜻이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우치게 하여
우리가 자기자신이 누구이며
이세상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데서 그치지않고
더나아가 그렇게 깨달은 바를 바로 지금여기에서
우리의 내면과 외면에 진정한 천국극락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진리가 이세상에 물질화 하여 나타난 궁극적인 목표인것입니다.
하지만 머리로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아직 부족한 것이니
그것은 스스로 체험을 통한 증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체험을 통한 증득과 변화를 통한 자기확신
그리고 그를 통한 진리와의 현실적인 합일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자세한 수행방법은
다음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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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1)
앞장에서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의 개요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면
이제 여기에서는 <진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합시다.
근데 여러분,
진리가 뭡니까?
하느님,부처님인가요,
아니면 그분들의 말씀인가요,
아니면 이세상이나 우주인가요?
성경에 보면 "네가 이세상을 다얻고서도 너의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 네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새겨볼수록 이말씀은 참으로 명언입니다. 이말씀에서 뜻하는 것처럼 진리란 바로 <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으면 그어떤것도 아무것도 존재하거나 성립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성경말씀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나아닌 모든 다른것을 총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비단 재물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하는 나아닌 모든것 즉 하느님이나 부처님 심지어는 우리가 진리라고 인정하는 모든 성경이나 불경같은 것까지도 다 소용이 없다 이말입니다. 이말씀 가만히 새겨보면 새겨볼수록 대단한 선언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디로 유학가거나 책속으로 파고들어가지말고
바로 그모든것을 있게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바로 자기자신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한다 이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처럼 모든것에 최우선하는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다른것만 찾아다닐뿐만이 아니라
설사 <나를 살펴보라>고 말한다해도 제몸뚱아리나 자기가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생각체계나 들여다 보고 있다 이말입니다.
자기가 이미 받아 누리는 살아있는 진리는 안보고
자기가 만들어 가진 생각속의 허깨비같은 <나>란 것 이나 들여다본다 이말입니다. |
하느님은 아니계신곳이 없으므로 바로 우리안에도 깃들어 계십니다.
심장을 뛰게하여 피를 돌려주시고
아까먹은 밥을 소화시켜주시며 눈에 뭐가 들어갈새라 깜빡거리게 하시고
세균이 내몸에 들어오면 백혈구로 하여금 잡아먹게 하시는 분이 과연 누구십니까?
그것을 설마 나자신이 전부 열심히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시겠지요?
우리의 몸과 마음안에 이미 이처럼 하느님,부처님이 살아 그크신 사랑으로 같이 움직이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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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기가 아무리 많은 책을 다 읽고 외워도
그것들은 저많은 책들과 똑같은 정보량으로 있어도
내안에서는 전혀 무겁지않으며,
어디다 쌓아두어야 할지 걱정조차 되지도 않으며,
내가 제아무리 많은 체험이나 기억을 다 한다해도
그것들은 다 허공같은 내안에서 아무때나 부르면 척척 나타납니다.
내가 아름다운 추억과 애틋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
그사람들을 다시 만날때마다
내게 다시 온세상을 다 채우고넘치는 큰 기쁨과 사랑이 일어나는것 역시도
내가 일부러 만들거나 안잊을려고 꼭꼭 싸매고 지키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신비로운 나란 존재안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제가 수행을 통해 온세상이 다 또다른 나, 더큰 차원의 나(The Great I )임을 자각하고 알았을때,
이세상과 온우주가 다 내가 꿈속에서 보는 세상처럼 이미 <나>라는 이물질몸이나 마음안에 같이 들어있는 세상이란것을 깨우쳤을 때,
제가 이신비로운 <나>에 대하여 깊이 자각하고 눈을 떴을때,
저는 밥을 먹을때나 물을 마실때조차도 감사한 마음에 목이메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찬송가를 꺼내 부를때에도 목이메어 노래가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존재인<나>는 나에게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놀라운 존재요, 큰 선물이었기에. |
그러면서 저는 깨우쳐 알았습니다.
바로 죽은 개념이 아닌 이놀라운 살아있는 <나>안에 계시며 모든것을 다 나타내시며 보여주시며 느끼게 하시며 나와 더불어 한몸으로서 늘 같이 하신다는것을.
모든 모습과 형상을 넘어서 계시는 모습없는 상(相)이시나
그분이 지금도 눈부시게 살아계시어 이렇게 이세상전체를 나타내셨으며(相)
이세상과 이우주는 온통 바로 통째로 그분의 창조된 생각이자 그분의 물질화된 화신들임을(用). 또 하느님,부처님은 나와 따로 떨어져 멀리계신 분이 아니라 부족하고 죄많고 무지한 존재라고 내가 정죄(定罪)했던 바로 <나>자신임을 저는 깨우쳐 알았습니다.
그분은 항상 그렇게 저와 같이 제속안에 분리할수 없는 하나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제안에서 당신의 형상없이 저로서 계시며 저를 보호하고 먹이고 입히고 잠재우고 소화시키며 저의 삶을 이끄셨던것입니다.
알고보니 이한몸뿐만이 아니라 온세상이 다 그러했으며 모든 생명의 활동이 사실은 다 그분의 위대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부처님이 계시는 방식입니다. |
진리는 이렇게 나와 분리할수 없이 계시니 서로 둘이 아니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짓을 다하건
무조건적으로 하나인것만도 아니니
내안에 계신 그분이 나를통해
내게로부터 안팎을 향하여 드러나게 하는것이
바로 <구원>이자 <깨달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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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깨달음이란 무엇인가(2)
이제 우리는 진리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하는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늘항상 <나>와 함께 내안에서 초월적인 모습으로 ,
그리고 또한 내밖에서 온누리에 넘치는 세상그자체라는 형상적인 모습으로
동시에 계시면서 이모든 우주를 친히 움직이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진리가 그러하기에
예수는 <너의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였고
석가는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 아님이 없다>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그말이 곧 깨달음이란 말과 다를바가 없는 말입니다. 단지 방향성을 가진 차이만이 있는 말로서
구원이란 우리가 신(神)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측면으로 볼때 그관계를 수동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고
반대로 깨달음은 우리가 신(혹은 부처님)에게 나아가는 측면으로 볼때, 우리와 신의 관계를 우리입장에서 능동적으로 표현한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깨달음이
바로 이<진리를 깨우쳐 아는것>일진대
우리가 온전하게 <깨닫는다>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깨닫는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존재방식(體)과
그의 형상초월적인 모습(相)을 직관하며
그의 활동 및 그결과의 창조물들을 다 깨닫고
그것들을 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神)으로 대하며 더나아가
나의 생명활동을 온전한 신(부처)의 그것으로 만드는 행위(用)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치가 바로 이러하기에 예수는
"길가에 버려진 병자와 어려운이들을 돌보는것이
바로 <나(The Great I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 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이러하기에
우주전체를 하나의 생명으로하는 위대한 영혼으로 거듭난 석가도
"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만약 모든형상을 그형상이 아닌 그형상을 넘어선
더크고 위대한 하나의 존재로 본다면 즉시 부처를 보리라 하고 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여태까지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다>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에 대해 독점적으로 말하고 가르쳐온
화두참선법이나 위빠사나 관법, 염불법수행등이
과연 이렇게 온전한 체계로 말하고 이렇게 우리를 깨우쳐 주었습니까?
또한 요즘 국내외적으로 널리 유행하는
다양한 명상의 스승들이 그렇게 가르쳐주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런것 같지 않습니다.
화두참선수행법은
<색즉시공>과 동시에 <공즉시색>의 진리로서
이세상을 움직이는 진리의 본체를 <색즉시공>만에 입각하여
진리의 체(體)를 마치 모든것이 다끊어지고 사라진
적멸의 자리만으로 제한하고 집착해온 부족함이 있고,
위빠사나관법은
진리의 활동 즉 용(用)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느냐만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며 전체를 통찰하지 못한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들은 온전한 진리전체를 깨닫는 방편이 아니라
진리의 체상용(體相用)중 어느하나만을 하나의 관념(첫생각)속에서
진리라고 붙들고 그것만에 집착한 내재적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자칭 깨달았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이
재색이나 명예에 관하여 남들로부터 비난받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적지않고
남들을 업신여기거나 자기종부리듯이 하는 것 역시
제가 보기엔 덜깨치고 덜성숙하여서 그렇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나를 중심으로하여 내안에서 나를 있게 하시며 나를 사시는 그초월적 자리(진리의 체)의 본래면목를 아는것,
그리고 두번째로는 온누리에 다양하게 나타나신 그분의 참모습이 어떠한가를 보는것(진리의 상),
마지막으로 내가 그분안에 있고 그분이 내안에 있으니 그진리가 내안팎에서 되찾은 진리답게 활동하고 나타나시도록 나의 언행(진리의 용)을 통해 적극 실천하는 것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진리의 깨달음이며 구원이며 동시에 내안에서 과거의 내가 죽고 더크고 위대한 <나>로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은 또한 이세상적인 관점으로 볼때에도
지금 개체적인 이나의 완전한 삶이며
나의 자아실현이자 나의 변함이고 인격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 아닐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진리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을 깨달아 아는것(진리의 체),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적 피조물이자 그분의 세상적인 나타나심을 보는것(진리의 상),
더 나아가 그러한 존재로서의
나와 모든 존재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하는것(진리의 용)에 해당하니
바로 성부(聖父),성령(聖靈),성자(聖子)에 대한 깨우침이요,
그에 대한 실천적인 공부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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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무아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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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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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백이면 거의 아흔아홉명의 사람은
다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데요?"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럴까요? 여러분,
우리는 개념의 착각에 속아 살고 있습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무(無)라는게 개념이나 생각으로 말고
실제로 이세상에 실존적으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수 없는것입니다.
무(無)라는 것은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것이
다른것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홀로 실존적으로 존재하고 있을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속에서는 무(無)라는 개념이나 말을 잘쓰지만
그것은 어떤 상대적인 비교 상태를 말하는 단어일뿐
(예컨대 내의식이 없다든지 돈이 없다는 등)
그것이
홀로 실존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늘 항상 그어떤 주체가 다른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있느냐 없느냐의 분별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無)는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얘기를 왜하는가 하면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란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무아란 말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나란
개성의 자기정체성(Identity) 이랄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체험하다시피 수십년이상 살아온 과거가
우리속에서조차 제대로 기억되거나 보존되지 않은채
지워지고 잊어버려지는데서도 알수가 있습니다.
<호킨스 박사의 의식속에서 기억한다는 점에 대하여도 생각해보라>
치매에 걸리면
우리는 완전하게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무아(無我) 바로 이런 뜻에서의
무아(영원히 나라고 홀로 보존되는게 없음)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갓난 어린애와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간 우주생명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아오면서 그렇게 다양한 윤회를 통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과거의 나들은
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윤회를 거듭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끈질기게 삶을 되풀이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내가 나라고 여기는 상념(想念)에너지입니다.
그에너지가 나를 그렇게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소멸시키면
나는 적멸에 들고 더이상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래서 무아(無我)가 드디어 실현되었으니 좋아지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논리라면 좋아질 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는 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기모순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상태가 절대무(絶對無)라면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적멸이었다면
어떻게 우주에 수많은 생명이 이렇게 쏟아져 나올수 있었으며
최초의 무명번뇌가 생겨날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홀연히 생겨났단 말은
달리말하면 A는 아니었지만
A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가
마참내 생겨났단 말이 되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죽어서 다 아무것도 없는것이라면
영계도 없고 천당지옥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라야 맞는 말이고,
설사 양보하여 윤회의 상념에너지만 있고
깨달아서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부처가 된다는 논리라면
그렇게 완전히 자기가 소멸되어
아무것도 안남고 없어지는 부처는
싫다고 할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또 그렇다면 굳이 수행할 필요도 없는것이고
살때 자기가 하고싶은짓 다하고 살면 그만이다란
사람들만 세상에 넘쳐나게 될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지해서 그렇다고 싸잡아 비판하기엔
그것은 인생을 고해로보느냐
아니면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볼만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보느냐의 가치관문제이지
무엇이 더 옳고 틀리고의 정답여부의 문제라고 볼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또한 게다가 대승경전에 의하면
석가는 원래 오랜옛날에 이미 부처를 이루었으나
열반에 들어계시다가 마음을 일으키시어
다시 사바세계에 중생제도를 위해 나타나셨다는 얘기와도 모순될수 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없어졌는데
어떻게 다시 마음을 일으켜 나타난단 얘기입니까?
그러므로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본래 개체의 나란것이 없다는 얘기이지
전체의 영원한 우주생명의 나,
전체성의 나는 있다고 보아야 논리가 맞고 진리에도 부합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개체의 내가 의식이 있을때 그개체의 잠재의식을 자기안에서 지워버리고
(그렇다고 치매환자상태가 목표란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치매환자는 자기라는 개체의 촛점의식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며 자기안에 여전히 내재한 잠재의식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전체성의 나의 자리를 내안에서 찾아서 그것과 하나됨으로서 개체의 나를 초월하고 전체성의 영원한 생명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
자,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눈을 감았을때 거기에 과연 무엇이 있다고 말해야 옳겠습니까?
그래서 그어떤 하나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런저런 존재도 다 될수 있는 영원한 우주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물질적 감각만으로 보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전체생명으로서의 더큰 나(The Great I )가 살아서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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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없다고만
개념과 생각속에 가둘것이냐
아니면 있음을 실제로 직접느껴보고
그실재를 아름답게 꽃피울것이냐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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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는 나
우리가 태어날때부터
<내가 죄많은 번뇌중생이구나, 그러니 진리를 닦아야겠다>하고
스스로 알고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우린 다 어느날
우리가 죄인이거나 중생에 불과하니 진리를 찾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나 글들을 보고
그것(생각)을 옳다고 받아들인 나머지
그말들에 따라 스스로 이 수행이란 것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접수된>사람들을 위하여
이세상에는 아주 많은 종류의 종교나
여러 수행법들이 이미 백화점식으로 잘 전시되어있습니다.
또 그들은 서로 자기방법이 최고라하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같은 큰 종교에 몸담은 사람들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하고싶은 말은
바로 이런 모든 이세상의 종교나 수행법들은
다 <생각>들이고
그생각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이 얻는것은
다 결국은 이런저런 <체험>에 불과하단 것입니다.
물론 그체험들은 소중하지요.
마음이 깨끗해지거나 고매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평화를 얻거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를 얻거나
심지어는 꿈속에서 예수석가를 만나거나
제가 제마음속에서 부처가 되어보거나
우주를 자기안에 품어보는 등등 그것들은
다 매우 훌륭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이란 그릇안에 무엇이 담기느냐하는 체험의 문제이지
여러분들 존재자신의 문제는 아니다 이말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어렸을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성품(기능이라해도 좋다),
듣는 성품,느끼는 성품,생각하는 성품등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든지간에
그대상들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그보고 듣는 성품(기능)들은
전혀 변함없이 그대로 똑같이 그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진짜 <나>입니다.
이것이 그릇이며 불교식용어로는 체(體)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여러분이 이런저런 수행법을 대하고
이게 옳은가 아닌가 판단하시는것들은
다 본질상 하나의 <생각>들이며
그생각에 의해 수행해오시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은
그생각이 가져온 결과물들로서 일종의 <체험>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전부 마음의 쓰임새에 불과하니 용(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대단한 마음의 경지나 평화를 얻었다 하여도
그것은 다 여러분의 본질은 하나도 안변했고
다만 그본질이 가진것만이 변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는다는것은
또 진정 구원을 얻는다는것은
바로 이런 이치를 알고
자기의 참모습을 제대로 자각하는데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각하지 못한이는 술취한이와 같습니다.
술취한 사람은
똑바로 못서고 못걷는 거와 같이
자기의 참모습을 모르면
제아무리 대단한 수행을 하고 경지를 가졌어도
그경지는 다오고 가는것들 뿐이라
늘 그것을 유지해야한다는 착각이나 스트레스를 갖게 됩니다.
불교에 사자와 개의 차이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개는 그돌을 쫓아가 삼키지만
사자는 그돌을 던진 사람을 좇아와 문다는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나 도에 대하여
그누가 무어라 대단하고 기막힌 얘기를 해도
그것은 다 그들의 <생각>일뿐입니다.
그들의 그생각을 따라서 열심히 수행해보면 얻는것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기막히게 좋고 대단한 <체험>이구요.
사람들은 여기에 속아
개처럼 그들이 던지는 돌(생각)만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자유롭지 못한것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그돌(생각)을 던진자
(그생각을 자기안에서 에너지를 부여해서 힘을 쓰게 만든자는 바로 자기의 또 다른 생각이다)를 직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일 뿐이야>하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기자신
즉 의식하는 <나>를 봅니다.
늘 이렇게 자기자신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의식하고 생각하는 <나>를
계속하여 자각하고 느끼는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의 體(참나)를 찾는 옳바론 길인 것입니다.
그렇지않고 남들이 <이게 진리다>하는것을 따라다니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은 평생 그것에 구속되어서
그생각과 체험들을 굴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에 끌려다니고 매여사는 개(犬)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즉 제말의 요지는 체험(用)을 본질(體)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지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그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것도 또하나의 생각입니다)에만 그쳐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창조와 체험이 되풀이 되는 연속성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속에서만
진리를 탐구해서는 안되며(그것이 어떤 생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런 생각에서 더나아가 창조와 체험을 통해
그리고 최고최대최상의 체험을 통해
자기를 확장시켜보고 그결과 자신을 무한하게 성숙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이우주에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서 이처럼 지지고 볶고 사는것은 자신을 자각하기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위해서 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자각하든 못하든 자기는 실제상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아 알고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부처)의 자녀들이 아니지요.
그것은 마음의 불구자들이며 그래서 이세상엔 마음이 병에 걸린사람들 (마음이 불구인 신,부처의 자녀 )이 많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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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기의 실상(體)를 먼저 깨달아 알아야하지마는
그것에 그치는것이 아니고 그다음단계,
즉 자기 마음(用)을 한번 질적,양적으로
최대화,극대화시켜 체험해 보아야 하는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윤회하는것도 바로 이까닭때문입니다 .
제가 본래 신이나 부처라면
그것만 알고 그칠것이 아니라 그답게 자기의 마음을
이존재의 마당에서 무한하게 한번 발휘해보고 느껴 보아야합니다.
신묘하게도 불교나 기독교에 전부다 <삼위일체>란 말이 있지요. 불교에서는 법,보,화신불의 <삼불>이란 말이 있고 기독교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연한 말이 아닙니다.
즉 자기를 자각하여 자기를 깨치고 아는것이 법신불(하느님,성부)을 아는것이라 한다면
마음은 그것의 굴림새 즉 보신불(성령)을 아는것이요,
그결과로 나온 이몸에 집착하는 작은 마음을 버리고 이세상삼라만상 전체를 자기몸으로 삼아 크게 되는것은 화신불(성자)을 깨닫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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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세가지 삼위일체로 부처(신)를 완전히 깨달아 알고 실현하여야
참으로 대각(大覺)이라고 말할수가 있다 이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종교나 명상수행법은 법신불만 아는데 그치거나
혹은 또다른 보신불이나 화신불들만 깨달아 아는데 그치니
골고루 완전하지 못하다 이말씀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우선 첫째로 자기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자신이 뭐 아주 어렵고 별스러운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종교속에서 책에다 아주 어렵게 써놨기 때문에
거기에 속아 빠져서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하고 의식하는 여러분자신 그게 바로 법신불입니다.
의식하고 듣고 보고하는 <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죽은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말입니다.
그다음엔 거기서 그치면
전체와 개체와의 관계를 모르게 됩니다.
너와 나의 관계도 깨치지 못하고
또 성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이
왜 중요하고 자비가 중요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려면은 보신불
(마음자리는 크고 작기도 해서 커지면 온생명을 다 사랑하고
우주를 다덮을정도로
자유자재하게 커질수 있다는것을 깨치는것)을 알아야하고
또 그다음단계에 가서는 화신불
(이몸개체하나만이 자기가 아니라 알고보니
우주삼라만상전체가 다 또하나의 <나>더라 를 깨치는것)을
증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완전한 공부를 하는것입니다.
즉 그순서가 처음엔 법신불을 알고
그다음엔 보신불을 알고,
마지막으로 화신불을 깨우치는것입니다.
그런데 이삼불은 다 증득해보면
그모두가 다 현재그대로의 우리의 지금모습과 하나도 다를것이 없으면서도
다만 우리가 겉모습에 속아
우리속에 이미 들어있던 그놀라운 힘과 능력들을 못써왔었던것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에 관한 책이나 글이나 말들,
즉 바꾸어 말해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들(바꾸어 말해 체험들)을에 빠져
더이상 무작정 따라기지말고
잠깐 멈추고 진짜 자기부터 우선 찾아라 이말을 드리는 겁니다.
참된 <나>는
모든 체험들을 넘어서 여기 지금 이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몸과 마음을 거느리고 쓰고있는
당신,바로 그대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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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면의 행복과 평화를 찾아서
저는 삶과 욕망쫒기에 지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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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공허한 말이며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아직 익숙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걷는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홀로 걸을수 있을때까지
누군가가 손을 붙잡아주거나 몸을 지탱해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앞서간 수행자나 정신적인 스승들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이 가르키는 방향을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우리자신은 이미 완벽하며 이미 모든것을 만들수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우리안에 깃들어 있는 그의 화신이라는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작은 나(小我)를 초월하고 우리안에 살아계신 위대한 하느님과 합일해 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자기가 스스로 만든 회로안에서 생각하고 그안에서 자기가 만든 욕망에 스스로 한숨쉬며 스스로 스트레스로 괴로와 합니다.
자기를 괴롭히는것도 자기요, 불안하게 만드는것도 자기이며, 화나게 하는것도 다름아닌 자기자신입니다.
다만 우리가 남이나 환경이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하고 핑게를 대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것도 자기 스스로가 할수있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건만
육신을 가지고 사는 물질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돈이나 물질이나 멋진 이성이나 명예,인기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것이라고 스스로 논리회로를 만들어 놓고 그안에서 꼭들어앉아서 전혀 벗어나올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천신만고끝에 그것을 얻었다하더라도 얼마안가서 자기가 그렇게 갈망하던 대상에 대해 이제는 싫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거의 대다수를 돈벌기에다 바쳐지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자기가 만든 생각회로안에서는 돈이야말로 <행복해지는 최고의 지름길>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실현하려는 과감한 의지를 가지고 첫발자욱을 떼어야 합니다. 실제로 자기가 변하지 않으면서 명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익히는것은 번뇌만 더할뿐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향한 끝없는 정열을 가지지 않는한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현대문명은
누리기에 좋은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또 오늘날의 매스컴은 쉬지않고
우리를 성적 충동과 오감의 즐거움,
그리고 세상의 지식적권위등에 자신을 맡기고
그저 세상이 시키는대로 일하고 먹고 즐기며 소비하며
그들이 이끄는대로 따라만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들은
아무아무개 배우가 섹시하다느니 멋있다느니 하며
그대의 마음을 그쪽으로 쏠리게 합니다.
또 누가 땅투기를 하여서 돈을 벌었다거나,
사업을 해서 얼마나 벌었다느니하며
그대마음을 돈에 얽매이게 합니다.
또 누가 어느좋은 학교에서 무슨 학위를 받았느니하며
그대를 지적인 열등감으로도 몰아넣습니다.
뉴우스는 매일같이
그런 사회적인 가치관을 따라 가다보니
자기충동을 억제하지못해 사고치고 거짓말을 해서
문제에 빠진 사람들 얘기로 가득합니다.
실로 병주고 약주는 격입니다.
이게 현대문명의 본질입니다.
그래야 현대문명은 유지가 되니까요.
<욕망의 극대화및 복잡한 전문화>
바로 이것이 인구가 늘어나는데
그들을 먹여살리는 유일한 길같이 제시됩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욕망이 많아져야 소비도 많아지고
욕망이 충동적이 되어야 각종사고도 많아져서
현대사회는 유지 됩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수많은 직업들은
다 그래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러나 다같이 인정하지만
그어느 누구도 현대문명안에서
영원한 행복과 진실을 찾아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현대문명의 아이러니요,패러독스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평범한 일상에서는
더이상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로또당첨같은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나길 바라며 욕구불만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결과 자기가 만든 세계안에
자기가 갇혀버리게 됩니다.
<나에겐 그것만이 행복이야! >라는.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자기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고
오히려 나이지리아같은 나라나 방글라데시같은 못사는 나라국민들의 행복도가 훨씬 높다는것은 너무나 우습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나라일수록 현대문명에서 거리가 멀고 상대적인 박탈감이 적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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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현대문명안에 갇혀
사육되고 육감적 감각을 개발당하며 자극받는 그들은
욕망만 내면에 자꾸더 더쌓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풀지못한 욕망은
그들이 자꾸만 이세상에 돌아와서 삶을 다시 살아야하는 윤회의 근본원인 됩니다.
즉 현대산업자본은 인간을 욕망의 늪으로 몰아넣고
그대신 거대한 이윤을 착취하여
황금이란 허상의 바벨탑을 쌓아올리는것입니다.
종교도 여기선 예외가 아닙니다.
말로는 구원과 해탈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상당수의 사람들도 그런 사회구조에 편붙어서
그들의 조직과 신도수,그리고 그에따른 수입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어느누구도 현대문명의 병폐를
감히 나서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병들어갈수록
영적인 환자는 늘어나니까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입니다.
거대한 교회건물과 사찰들...
대를 이어가며 목사가되고
진리를 탐구해야할 승려가 사찰을 팔고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노는것이 나쁜것만은 아닙니다.
진리아닌게 있습니까?
그러니 자기를 찾고 놀면
참으로 노는것이거니와
자기를 못찾고 놀기에만 빠진다면
그것은 놀이에 오히려 먹히는것입니다.
따리서 진정한 수행자는
무작정 현대문명에 빠져들고 따라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자극과 도전을 무력화시키는
내면의 강인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힘이 우리의 영성을 되찾아주고
나아가서는 마침내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행복과 평화는
이처럼 우리가 우리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흔들림없이 지켜내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은 외부의 공격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서 마치 여린 아기떡잎과도 같지만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과 정성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내면은 언젠가는 마침내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리지않는
거대한 거목처럼 될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자기성장은
누가 거져 갖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내가 하면 언젠가는 마침내 이루어지는 일이고
안하면 그냥 그럴뿐 내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안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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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삶은 흐르고 지켜볼 뿐이다
삶은
우리앞을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가만히 그대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세요..
그러면 그대는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것은 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다가와 잠시머무르다가 이윽고 사라져간다는것을.
다만 어떤것은 빠르고 어떤것은 느릴뿐.
그래서 삶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건져내거나 가질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는 인생을 바쳐서
많은 땅과 재물을 소유하려 노력해왔습니다.
어쩌면 그대는
나름대로 적지않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그러할까요?
그대는 사실
아무리 작은것이라도 영원히 소유하거나 가질수 없습니다.
그대는
단돈일원이라도 진짜로 영원히 소유할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가진것이라는 것은
다만 당신과 여러사람들의 생각이
그것은 당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뿐입니다.
그러니 불과 몇십년후만 되어도
그것은 이미 다른사람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육신조차도
그땐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다만 우리는 체험하고 흘려보낼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근본우주허공위에 나타난 이지구라는 흙덩이위에서
내가 그무엇을 해야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우주위에서 하나의 생각이 육체란 도구를 가지고
허상을 쫓아 허우적거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나고 보면
우리가 그토록 집착했던 대상과
그것을 쟁취하기 위한 행위들은
결국아무것도 아닌 헛동작과도 같은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린 삶이란
강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여.
삶이란 강물속에서 그대가 제아무리 큰물고기나 조개를 잡아올렸다하더라도
더깊은 강물로 뛰어드는 나머지 그대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자기의 신발을 벗어놓은 최초의 장소를 잊지말아야 합니다.
또설사 그대가 제아무리 큰 고기를 잡다가 놓쳤거나
큰조개에 발을 베였다할 지라도 너무 그것에 연연해 하지말아야 합니다.
삶이란 거대한 강물속에서
우리는 소꿉장난을 하는 어린애들과 같이
강이 제공해준 모래로 집을짓고 밥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삶속에서 아무리 많이 얻거나
혹은 잃었다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는 그저
다 실제로는 얻은것도 잃은 것도 없으며
다만 똑같이 <체험>들을 하고 있을뿐입니다.
이렇게 그대의 영혼안에 삶을 흐르는 강물처럼
바라다볼줄아는 여유롭고 고요한 내면의 눈을 가진다면
그눈이 이윽고 그대를 영원한 근원으로 안내할것입니다.
혹자는 이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일은
오직 서로 사랑하고 나눔뿐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는 바로
그본래자리에 들어선다면 그대는 알것입니다.
그자리에선
그런 사랑조차 불필요한 가짐임을.
모든이들은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고있고
모든것들은 이미 완전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그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나누라는 얘기는
이미 깨달은 사람에게 다시또 깨달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이 불필요한 헛동작임을.
이미 그안에서는 모든것이 사랑그자체요,
모든것이 그안에서 빛나고 있는데
어찌 물속에서 다시 물을 찾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큰 사랑을 나누어주고 보여준다 하여도
그것은 실로 우리가 하는 행위가 아니요,
우리를 존재케하는 그 위대한 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일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요,
그근원의 힘이깊은 섭리가운데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한 사랑그자체 이시니 어찌 감히 허깨비같고
이슬같은 우리가 그행위의 주체가 되겠다고 나서겠습니까?
이처럼 자기자신을 바로보고 알때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된 사랑을 할수있습니다.
그전에는 그것은 가짐의 사랑이라
왼손이 한것을 오른손이 아는 사랑이라
인조꽃처럼 향기없는 겉모습만의 흉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내면을 겸허히 비웁시다.
그때 참으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제대로 알게 될것입니다..
삶이란 강물속에서
그무슨 행위라도 자기가 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자신에게서 물러나고
이세상이란 강물에 빼앗긴 그마음속에서도 물러나
이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다보는 내면의 <주시자>가 되어봅시다.
그이후에 내면에서 부르는 어떤 소리가 있거든
그소리를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어봅시다.
그리고 그음률에서 우러나오는 나만의 춤을 추어봅시다.
내안에서 솟아오르는 그어떤 에너지그자체가 되어봅시다.
이제 이삶이란 강물속에서의 체험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더이상 맛보아야할 쾌락이나 아직도 아쉬운그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억겁을 이강물속에서 이리저리 헤메며
손발이 부르트고 조개와 바위에게 베어져 피흘렸건마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나요?
우리존재의 중심을
이삶이란 강물에 두지말고
그를 지켜보는 나자신에게 두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머지않아 깨달을 것입니다.
그저 삶은 흐르고
나는 다만 영원히 지켜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저 헛되이 마음은
그흐름을 좇아 분주히 다니며 기뻐하고 슬퍼하지만
그것은 다 한때의 부질없는 분주함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고요한 자기성찰가운데에서
이렇게 흔들림없이 지난세월동안
그렇게 바라보기만 해왔던 참된 나를 느끼고 자각할때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되고 진정한 본래의 진면목이 우리자신속에서
생명의 빛속에서 아침해가 떠오르듯이 찬란히 드러나는 소식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