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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바보들의 중남미 일주
이유
경호는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제선 탑승구로 발길을 돌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출국장은 분주하고 활기가 넘친다.
비행기는 5분에 한 대씩 이륙한다. 경호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뜻모를 두려움과 책임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경호는 LA행 탑승을 재촉하는 안내방송이 한 차례 더 나오자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며 탑승한다. 경호의 오랜 습관이다.
경호는 여권이 든 가방을 기내 선반에 올리지 않고 무릎 앞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여권을 목숨만큼 챙기는 것 또한 경호의 오랜 습관이다.
두 번째 기내식이 나온다.
LAX에 도착하려면 3시간이 더 남아 있다.
비빔밥을 먹은 경호는 양치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통로를 앞서 걷던 여성이 경호 앞에서 쓰러진다. 경호는 여성을 부축하고 싶지만 몸을 만지지는 못하고 승무원을 부른다. 여성은 잠시 후 깨어났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다.
경호는 양치도 잊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일행은 아니겠지?’
여행사에서 보낸 명단을 머리 속에서 훑어본다.
입국수속을 마친 경호가 출구를 빠져나오자
“팀장님, 여기예요.”
경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중남미유적탐사단’ 피켓을 들고 있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하나, 둘, 셋, 넷……. 20명 모두 모이셨네요. 저는 LA에서 여러분을 모실 ‘송지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버스를 빨리 빼야 해서 일단 버스에 타시고, 나머지 가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저 따라오세요.”
일행은 행여 송지석을 놓칠세라 경쟁적으로 따라간다. 기내에서 쓰러진 여성도 송지석을 따라간다. 경호는 그녀 뒤를 따른다.
그녀가 맨 앞자리에 앉는다. 경호는 그녀 옆자리에 앉는다.
인솔자가 그녀에게 뒷자리로 이동하라고 지시한다. 그녀는 멀미를 한다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녀는 ‘광주’에서 온 박현숙이다.
송지석이 마이크를 들고
“멀미하시는 분은 알아서 약 챙겨 드세요. 그리고 맨 앞자리는 사고 나도 보험 안 된다는 것 아시죠?”
송지석이 영문일정표를 나누어준다.
“잠 못 주무신 분들도 있을 텐데, 아침이라 호텔에 들어갈 수는 없겠죠? 저랑 ‘그리피스천문대’와, ‘할리우드’를 관광하시고, 호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피스 공원은 뉴욕의 ‘센트럴파크 공원’보다 5배 더 넓다. 미국 전체를 통틀어 도심에 있는 공원 중에서 가장 큰 규모다.
일행은 더워서인지 천문대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대부분 약속된 시간보다 빨리 안으로 들어온다.
송지석이 인원을 확인하고
“버스가 올라오다 사고 났답니다. 가벼운 접촉사고인데, 미국은 교통법이 정비소에 가서 점검을 받아야 다시 운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다른 버스가 오는 거니까, 좀 기다리는 게 낫겠죠? 커피는 제가 쏘겠습니다.”
모두 지하 카페로 따라간다.
박현숙이 과일주스를 주문 한다. 송지석은
“모두 커피로 주문해 주세요. 주스는 가격이 다릅니다.”
박현숙은
“추가금액은 제가 낼게요.”
고집한다.
‘울산’에서 왔다는 노양순이 경호에게 말을 건다.
“여행사에서 팀장님과 같이 방을 쓰라고 했는데, 제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 했데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경호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둔다.
송지석이 나타나
“버스 왔답니다. 여기는 주차할 수 없는 곳이라, 먼저 가서 기다리다 타야합니다. 절 따라오세요. 하나, 둘, 셋, 넷……. 스물.”
“고객님들 짐은 안전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저희 여행사 직원이 확실하게 옮겨 싣는 걸 확인했다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호텔에 도착하기 전까진 짐을 확인할 수 없으니, 걱정 마시고 나머지 일정 관람하시면 되겠습니다.”
일행 모두가 궁금했던 말을 한다.
일행에게 LA는 멕시코로 가기 전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다.
긴 머리카락 전체를 밝은 보라색으로 탈색하고, 검은 반타이즈에 주름진 미니스커트를 입은, ‘강남’에서 왔다는 30대 중반의 강소현이, 경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경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셀카봉을 보며, 일본 중학교 교복패션을 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둔다.
버스는 하루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향한다.
박현숙이 멀미가 심해 남은 거리를 송지석과 걸어서 가기로 한다. 강소현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엄살을 떨지만, 버스에서 내리지는 않는다.
경호는 박현숙에게 멀미약 한 알을 주며
“일단 이거 드시고, 멀미약 준비하세요.”
박현숙이
“약 더 주세요.”
약 내놓으라는 식이다.
경호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며
“비상약 외는 곤란합니다. 약은 함부로 드릴 수 없습니다.”
“가이드가 한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묻네요. 챙겨서 데리고 다닐 생각을 해야지, 다시 가라니까 서운해서 오기가 생기네.”
그녀는 기분이 상해있다.
“약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팀장님이 주세요. 가이드는 나더러 알아서 사 먹으라네요. 뭔 일 생기면 자기 책임이라고.”
“저도 마찬가집니다. 규정상 약은 본인이 해결해야 합니다.”
박현숙의 눈동자도 한 바퀴 돈다. 예사로운 표정이 아니다.
경호와 같은 방을 배정받은 사람은 강소현이다. 그녀는 12시가 넘도록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정리한다.
경호는
“강소현씨, 미안한데, 내가 잠들 동안만 조용히 해줄래요? 5분 정도면 충분해요.”
“아~ 넵.”
쿨하게 대답한다.
강소현은 시계를 본다. 두 개의 보스턴 가방에 든 짐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5분 후 다시 부스럭댄다.
경호는 여행 가방에서 저런 소리를 낼만 한 것이 무엇일까 소리의 정체가 궁금하다.
추워서 일어난 경호는 차디찬 몸을 문지른다.
에어컨이 계속 켜져 있다.
강소현은 추리닝을 입고, 담요를 덥고, 겨울파카를 뒤집어쓰고 잔다.
경호는 잘 때 에어컨 끄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한다.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강소현은 자고 있다.
일행 모두 버스에 오르자, 송지석이 인원을 확인한다. 오전에 LA시내를 관광하다 공항으로 간다.
맨 앞자리를 지키던 박현숙이 보이지 않는다.
“박현숙씨는요?”
송지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호텔에서 공항으로 바로 온대요.”
둘이 싸운 모양이다. 중요한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경호는 박현숙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 이르고, 호텔과 현지여행사에 박현숙이 호텔에 남았다는 것을 알린다. 그리고 박현숙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요청한다.
박현숙은 같은 방을 배정받은 노양순에게 같이 호텔에 남아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강소현에게도
“멀미 한다면서요? 나하고 호텔에서 쉬다가, 오후에 공항으로 갈래요? 택시비는 내가 낼게요.”
생각해 주는 척 물었지만 거절당한다.
박현숙은 혼자 호텔에 남으려니 심통이 난다. 전화로 하소연 할 사람도 없다.
“인정머리 없는 것들. 다들 지옥에나 가라.”
싸잡아 저주를 퍼붓는다.
오후 2시 ‘탐 브래들리’ 국제공항에 박현숙이 먼저 와 있다.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다.
강소현은 영어를 잘한다. 일행에게 보란 듯이 불필요한 말을 영어로 한다.
외국어 한 마디 못 하는 노양순이 거슬리는지 트집을 잡는다.
“쟈는 옷꼬라지가 저게 뭐꼬?”
울산 사투리가 심하다.
60대 후반의 ‘밴쿠버’에서 온 한인 교포 박줄기가 편든다.
“여행 한다고 나름 신경 썼나 봐요. 아직 멋 부릴 나이잖아요?”
“30대 중반이면 적은 나이가? 쟈는 지가 중학생인 줄 아나?”
더 큰소리로 말한다.
경호는 거리를 두고 박현숙의 뒤를 따른다. 그녀는 과일후르츠를 사 먹는다.
멕시코행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강소현이 보이지 않는다.
공항직원이 빨리 탑승하라고 재촉한다. 이륙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좌석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어디 가서 뭐하는 거야?’
강소현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안 탔으면?’
탑승여부를 확인하고 ‘코리안 강소현’을 강조하며 안내방송을 요청한다.
잠시 후, 강소현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아직 안 타셨네요? 전 저만 안 탄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경호는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시간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행은 이미 장시간 비행을 경험한 터라, 멕시코시티까지는 지루하게 느끼지 않는다.
AA257은 매끄럽게 ‘베니토 후아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한다. 승객들의 박수가 터진다.
공항은 유럽과 남아메리카 환승공항으로 24시간 운영된다. 고도 2,230m로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엷은 탓인지, 산소호흡기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송파’에서 왔다는 50대 중반의 기관수가 공항에서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는다.
“여러분, 3일 만에 드디어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했습니다.”
연출 한다.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설렘으로, 모두 상기된 얼굴들이다.
다음 날 아침,
경호는 알람소리에 겨우 일어난다.
몸이 만근이다.
에어컨은 어제처럼 켜져 있고, 강소현은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다.
경호는 차디찬 몸을 뜨거운 물에 녹이며 강소현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호가 식당으로 내려가자 박현숙이 경호를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강소현은요?”
“준비되면 내려오겠죠?”
반문으로 대답한다.
박현숙과 노양순은 사이좋게 아침을 먹는다. 간밤에 둘이 대판 싸웠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출발 시간이 지나도 강소현이 버스에 오르지 않는다.
“어딜 가나 젊은 것들이 느려 터졌어.”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하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일행은 대학 휴학 중인 기관수 아들을 빼고, 모두 강소현보다 20살 이상 많다.
가이드가 객실로 올라가 강소현을 데리고 나온다. 화장을 하다만 얼굴이다.
멕시코시티의 관광이 시작된다. 경호는 문화해설사를 앞에 가이드를 뒤에 배치한다. 그리고 자신은 일행 모두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걷는다.
‘메트로폴리탄 대 성당’ 안에는 건물 기울기를 측정하는 추가 달려있다. 스페인 침략당시 아즈텍문명을 말살하기 위해, 그들의 신전 위에 세운 성당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멕시코당국은, 지하철 공사도중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중식은 선인장 요리가 포함된 식사를 한다.
가이드 ‘원구식’은 선인장하면 멕시코니 꼭 맛보라 한다. 다들 약을 먹는 표정이다. 거리에는 가로수 대신 선인장이나, 선인장 정원이 있다.
일행은 ‘템플로 마요르’ 등 아즈텍문명 탐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귀환한다.
멕시코의 7월 날씨는 한국보다 후텁지근하다.
일행은 연신 부채질을 한다.
‘티오테와칸’에서 동영상을 찍던 기관수가 뒷걸음질 치다 계단에서 넘어진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핸드폰 액정에 금이 갔다.
박현숙이
“쌤통이다.”
혼잣말을 한다.
긴소매를 입고 장갑을 끼고 있는 경호에게
“땀띠 나겠네.”
빈정댄다.
아메리카 대륙 최대 고대 유적 테오티와칸은 ‘해와 달의 피라미드’ ‘물과 농경의 신’ ‘인신공양의 거리’로 나뉜다.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 없는 수수께끼 유적이다. 테오티와칸이라는 명칭은 멕시코 중부의 고대문명 또는 고대문화의 중심지로서 대변 된다.
유적은 피라미드 건축물 외에도 ‘죽은 자의 거리’로 불리는 대규모 주거단지와 아직도 색이 변하지 않은 선명한 벽화들이 있다. 신대륙 발견 이전의 미주대륙 도시들 중 가장 큰 도시이며 서기 원년~500년 사이에 가장 번성한다. 인구는 10만에 육박하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전 세계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구 수다. 벽화를 그리는데 사용한 염료는 선인장벌레에서 추출한다.
칸쿤에 도착하자 기관수가 카리브해변에서 술파티를 하자고 한다.
강소현의 눈이 빛난다. 식사를 대충하고 룸으로 올라가 술안주라며 과자를 한보따리 챙겨 내려온다. 경호는 바스락거리던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다.
경호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기관수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주식으로 큰돈을 번다. 그러나 그는 공직에서 발을 뺀 자신을 바보란다. 후배가 청장으로 승진한 이후 내밀 명함 한 장 없는 자신이 초라하다.
독실을 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진주리가 보이지 않는다.
경호는 원구식에게 진주리가 룸에 있는지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30분 만에 돌아와 진주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기관수가 웃기는 말을 했는지, 일행 모두는 박장대소 한다.
경호는 진주리에게 전화한다.
받지 않는다.
룸에 올라가봤지만, 호텔직원이 올려다놓은 진주리의 가방이,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호텔과 현지여행사가 발칵 뒤집힌다. 경호는 일행 모두를 다시 로비로 불러 진주리를 마지막에 본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여행사에 상황을 알렸지만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소용없는 일이다.
경호와 원구식은 진주리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보낸다.
아침에 식당으로 내려가자 박현숙이 기다렸다는 듯
“진주리는요?”
잠을 못 잤다는 표정이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내가 기도했어요. 찾게 해달라고.”
“좋은 일 하셨네요.”
경호와 원구식은 진주리를 찾을 때까지 호텔에 머물러야 할지, 일행 모두와 의견을 조율한다. 아무도 호텔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행을 태우고 떠날 버스가 도착한다. 그런데 진주리가 버스기사와 함께 나타난다.
모두의 시선이 진주리에게 꽂힌다. 진주리가 원망의 눈빛으로 박현숙을 노려본다.
모두의 시선이 박현숙에게 꽂힌다.
박현숙은
‘내가 뭐?’
하는 표정이다.
경호는
“시간이 지났으니 일단 모두 차에 타세요.”
짐칸에 진주리 가방까지 실리는 것을 확인하고, 진주리 옆에 앉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용히 묻는다.
진주리는 눈물을 흘릴 뿐, 입을 다물어버린다.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경호는 박현숙 옆자리로 간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박현숙의 눈동자가 한 바퀴 돈다.
경호는 운전기사에게 가서 진주리와 어떻게 같이 왔는지 묻는다. 기사는 진주리가 버스에 있었다고 한다. 진주리는 하룻밤을 버스에서 보냈다.
경호는 이해할 수 없다. 어젯밤 다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에 내렸는데, 어떻게 진주리가 버스 안에 있었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출발한 버스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치첸이사’에 도착한다.
무더위로 모두 땀을 흘리고 있다.
신전 계단을 오르던 노양순이 강소현을 보며
“쟈는 미쳤나. 꼬라지가 저게 뭐꼬? 궁디 다보이네.”
신경질을 낸다.
강소현은 듣지 못한다.
울창한 ‘치클나무’ 정글 가운데 우뚝 선 피라미드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마야인 들이 그들의 천문학적 지식을 건축물에 담아낸 그들만의 예술적 건축물이다.
피라미드는 1년 365일을 의미하는 91개의 계단이 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멕시코 당국에서는, 유물의 보존을 위해, 계단 오르는 걸 금지하지만, ‘유적탐사단’에게 특별히 허락했다고 문화해설사가 너스레를 떤다.
박현숙은 일행 전체를 헤집고 다닌다. 이것저것 캐묻고, 챙기는 척 기도를 해준다며 말을 옮긴다.
노양순은 월세가 많이 들어온다거나, 옷은 어디 명품이고, 신발은 얼마짜리라고, 돈 자랑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호는 여행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여행을 즐길 뿐,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일정이 끝나 인천에 도착하면 제 갈 길 바빠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번 일정은 32일이다 보니, 날짜가 지날수록 각자의 본색이 드러난다. 모두 개성이 강하고 한 성깔 한다. 그 중에서 박현숙이 가장 날카롭다. 그녀는 남을 찍어 누르는 말투가 몸에 배어있다. 강소현에게 챙기는 척
“경호원이 까다롭고 깐깐해서 한방 쓰기 피곤하지?”
둘 사이를 벌려놓는다.
노양순이 거든다.
“말 안 해도 다 안데이. 같은 방 쓴다고 편드나?”
경호에게는
“칠칠맞아서 같은 방 쓰기 짜증나죠? 시간개념도 없고, 멋 부릴 줄만 알지 속이 없어서 힘들죠?”
경호는 그녀들의 속셈을 알기에
“아닙니다.”
한 마디로 끝낸다.
경호와 강소현은 그녀들을 상대하는 것이 점점 피곤해진다.
진주리와 강소현을 제외한 50대 후반의 독신녀 4명은, 드디어 한편이 된다. 서로 야자를 하기 시작하며 살뜰하게 챙긴다. 4명이 같이 몰려다니며 사진도 찍고, 계속 모임을 하기로 했다는 둥, 일행 앞에서 보란 듯이 어울린다. 그러나 돌아서면 서로 험담하기 바쁘다.
경호와 강소현은 경호원과 고객의 사이로 친하지는 않다. 강소현은 경호가 자신을 특별히 챙겨주길 바라지만, 경호는 독실을 쓰는 진주리를 더 챙긴다.
그녀들이 나눈 대화는 아주 빠르게 다시 경호 귀로 들어온다. 경호는 그녀들이 심심해서 그런다는 것을 알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박현숙이다.
박현숙은 강소현의 속을 간파했는지 흔들기 시작한다.
강소현은 말이 없는 경호보다 살갑게 구는 박현숙이 더 좋다.
분위기를 감지한 노양순이 경호에게 접근한다.
“경호원이랑 내랑 성격이 맞는 것 같은데, 경호원이 내랑 방 같이 씁시데이~. 박현숙이 너무 날카로워서 엄청 스트레스라.”
경호는 누구와 써도 상관없지만, 방을 바꿔달라고 여행사에 요청했다는 말이 떠올라 못 들은 척 한다.
날짜는 빠르게 지나 일행을 태운 CU152비행기는, 멕시코 칸쿤에서 1시간 30분 만에 쿠바 하바나 ‘호세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일행은 쿠바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마르티기념관’을 돌아보고,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혁명광장’등을 둘러본다.
사회주의인 쿠바가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핵개발에 주력하는 북한과 달리, 쿠바는 이웃나라 미국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와 손잡는다. 덕분에 한국관광객이 쿠바를 여행할 수 있게 된다.
쿠바는 관광객이 늘어날 것에 대비해, 매년 10명씩 북한에 보내, 어학연수를 시킨다. 한국은 연수비가 비싸지만, 북한은 쿠바에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연수비도 저렴하다.
저녁나절 투숙한 ‘아바나말레호텔’ 야외수영장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일행은 저녁노을의 장관을 지켜보며 수영을 즐긴다.
5성급 관광호텔이라지만 내부는 엉망이다.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아 강소현이 다른 방을 요구한다. 옮긴 방도 마찬가지다.
경호가 불만을 재기하자, 직원이 와서 에어컨을 고치고 청소를 하긴 하지만, 뭔 사람들이 이리 까다롭나? 하는 눈치다.
강소현이 그들에게 팁으로 5달러를 준다.
쿠바에서 USD1=CUP24다. 외국인과 내국인이 사용하는 화폐가 서로 다르다. 같은 물건을 사도 외국인이 USD1을 주어야 하면 내국인은 CPU1이다. 그러다보니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모기들이 왕왕댄다.
룸에서 꾸물대다 노을의 장관을 찍지 못한 기관수는 못내 아쉬워하며 모기를 벗 삼아 술을 마신다.
그날 밤 ‘인천’에서 온 박성진과 김성윤이 경호와 강소현, 독신들을 룸으로 초대한다. 강소현은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챙겨 얼씨구나 간다.
경호는 감기를 핑계로 가지 않는다.
그녀들은 혼자 놀러 온 강소현에게, 경호가 강소현을 싫어한다고, 알아두라는 듯 말한다. 강소현은 언니들 앞에서 기분이 상하고, 기가 죽는다.
강소현은 타고난 미모덕분에 높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직장을 그만 두고 이런 저런 일을 경험한다. 하지만 첫 직장만 못해, 좋은 직장을 그만 둔 자신이 바보란다. 결혼도 어려워져서 자신이 초라하다.
쿠바 일정 중에 항공사 사정으로, ‘파나마 운하’ 대신, 쿠바 일정이 하루 더 늘어난다. 경호가 현지여행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일행의 관심이 더 많았던 운하를 못 보는 것을 문제 삼겠다고 한다. 가이드 ‘쿠도르’는 중남미 항공은 한국과 달라, 언제 어떻게 바뀔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항공사 사정상 변경되는 거라,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며 선처를 바란다.
경호는 일정이 변경되는 것이 경호 탓이 아니라는 것을 일행에게 보여준 것으로 끝낸다.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살 때, 항상 부둣가에서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지금은 쓸쓸하게 그의 흉상만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많은 어부들이 성황을 이룬 곳이다. 헤밍웨이는 이 부둣가에서 늙은 어부와 그의 손자를 보고, ‘노인과 바다’라는 명작을 쓰게 된다.
일행은 바뀐 일정에 불만이 없어 보인다. 시간 여유가 생겨 여자들의 수다가 더 길어진다.
김성윤과 박성진이
“우리여행사는 일정이 이틀이나 더 늘었는데, 추가비용 없이 여행하게 해주더라고.”
자랑을 한다.
강소현이
“저는 출국 날짜 바뀌는 걸 양보했다고, 할인 10% 해주더라고요.”
노양순이 빠질 수 없다.
“일행 중에 200만원 더 주고 온 바보도 있데이.”
옆에 있던 의사부부의 눈빛이 흔들린다.
박현숙이
“우리여행사는 추가비용 일체 없다고, 카드만 있으면 된다 해서, 난 룸 팁도 안 내는데, 꼬박꼬박 내는 바보들도 있다면서?”
그녀들의 입담에 일행 전체의 분위기가 술렁인다. 여행경비가 서로 다른 것과 경호는 상관관계가 없지만, 경호는 일행을 위해 설명한다. 하지만 모두를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한국에 도착한 이후 불거진다.
대구에서 올라온 의사부부는 병원내부 인테리어공사 기간에 함께 여행한다. 그러다보니 여행경비를 비교하고 따지기보다, 공사 기간에 다녀올 수 있는 상품을 선택한다.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자신들이 바보란다.
김성윤이 같은 숙소, 같은 음식, 같은 일정으로 관광을 하는데, 더 비싸게 온 건 말이 안 된다며, 한국에 가서 크레임을 걸어야 한다고 충동질 한다.
전 구간 비즈니스 석에 독실을 사용하는 진주리는, 일행의 평균 여행비보다 2배의 요금이다. 처음엔 비싼 여행한다고 바보라던 여자들이, 샘을 내며 자신들도 비즈니스 석으로 바꿔주길 원한다. 경호는 남미에서는 이미 발매된 항공권을 바꾸기 어렵다고 단호하게 자른다.
카도르는 50대 초반으로 평양에서 공부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울의 표준어 억양을 구사하고 있다. 애교가 많은 성격으로, 쿠바인이 한국말을 한국인보다 더 감칠 나게 구사하여 일행에게 인기가 많다.
하루를 쿠바에서 더 머물게 된 일행은 헤밍웨이가 마셨다는 ‘모히또’를 식사 때마다 마신다. 모히또는 한국의 소주 같은 술의 완제품이 아니라 물에 사탕수수와 오렌지즙, 알코올을 개성대로 추가하는 칵테일이다. 경호도 알코올을 조금 넣어 맛을 본다. 기대했던 일행은 ‘그저 그러네. 하는 눈치다.
쿠바에서 경호와 김성윤, 노부부가 배앓이를 한다. 물은 생수만 마셨기에 문제없었지만, 식당에서 제공한 과일주스 때문인지, 여행이 고행이다. 하루 만에 진정됐지만, 위생상태가 불결한 쿠바에서 하루 더 묶게 된 것이 불만이다.
쿠바 전통식은 풀풀 날아가는 흰밥에, 삶은 팥과, 팬에 볶은 양배추를 넣은 것이 전부다. 관광객에게는 특별히 튀긴 만두와, 작은 빵이 추가로 나오긴 하지만, 노부부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70대 중반의 ‘안양’에서 온 노부부는 출국하기 전 갈등을 겪는다. 해약하려 했지만, 상당한 금액의 위약금이 아까워 출국한 것이 바보란다. 체력의 한계로 고통을 겪는다.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도 없다. 더위까지 먹었는지 속이 울렁거린다며 계속 불편을 호소한다.
남편은 아내를 탓한다.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고. 아내는 남편을 탓한다. 오고 싶으니까 왔으면서 그런다고 싸운다. 그들은 개고생이 따로 없다며 힘들다는 것 뻔히 알며 온 자신들이 바보란다.
여러 명이 구토 증세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몸으로 중남미 왔냐고 일행에게 무시당할까봐 내색하지 않는다.
쿠바의 서민층 젊은이들은 결혼을 해도, 분가할 능력이 없어 부모와 함께 산다. 주거문제가 가장 큰 문제다. 좁은 집에서 대가족이 산다. 깨끗해 보이는 큰 도로의 이면은 한국의 60년대 모습이다.
공항에서 쿠도르가 출국수속을 돕는다.
진주리가 애교 많은 그에게 팁을 10달러 준다.
강소현이 5달러 더 내놓는다.
쿠도르는 금방 부자 되겠다며 입이 딱 벌어진다. 그리고 일행에게 자신의 아내가 한국 믹스커피를 무척 좋아한다고, 혹시 남는 거 있으면 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이 먹고 싶은 마음보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 더 커 보인다.
부부 팀과 가족 팀이 가방을 뒤져 몇 개씩 꺼내준다. 그는 아내에게 사랑받겠다고 행복해 한다.
일행은 파나마운하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프랑스에서 1880년에 건설을 시작했지만, 댐이 무너지는 사고로 21,900의 사망자를 내고 포기한다. 미국이 1900년 재건설하여, 결국 총 27,500의 사망자를 내고, 1914년 8월 15일 완공한다. 운하의 소유권은 미국이지만 100년 후에 파나마에 이양된다.
파나마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배가 남아메리카 최남단 ‘드레이크해협’이나, ‘혼곶’을 지나 위험도 따르고, 시간과 운송비용 부담도 컸다. 파나마운하 건설은 배를 이용한 화물운송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해수면의 높이가 달라, 배는 계단식으로 해협을 통과하게 된다. 반대편에서 오는 배의 압력을 이용해, 운하의 높이는 낮아졌다 높아졌다를 반복하며 배를 통과시킨다. 수에즈운하와 함께 제1세대 운하였던 파나마운하는 지금은 전체 물동량의 20% 밖에 소화하지 못한다. 낙후된 시설과 배의 규모가 커져 우회하는 선박이 많아졌다.
CU759 비행기는 하바나 공항을 떠나 6시간 10분 만에 페루 ‘리마공항’에 도착한다.
일정에는 콜롬비아를 먼저 관광하게 되어 있지만, 항공사 사정으로 페루를 먼저 관광하게 된다.
일행은 리마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날 쿠스코행 국내선 LA315에 탑승한다. 구름 아래를 나는 소형비행기는 기류변화로 많이 흔들리고 소음도 심하다.
간식으로 초콜릿과 머핀이 나온다.
1시간 31분 만에 도착한 쿠스코는 해발 4800m 고지대다.
저지대 출신들은 고산병을 조심해야 하는 구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몸이 적응 한다지만, 폐활량이 적은 노약자들의 몸이 붓기 시작한다.
다들 다리가 코끼리처럼 부어, 종아리와 발목이 구분되지 않는다.
경호도 운동화 끈을 풀어 느슨하게 묶는다.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고,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다. 대부분 처방 받아 온 고산병 약을 먹기 시작한다. 약효는 바로 나타난다. 가슴이 두근두근, 손발 끝이 찌릿찌릿하다. 기침을 하면 몸의 중심부분이 밖으로 튀어나가는 느낌이다.
모두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건강이 염려되니 가지 말라고 반대하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국한 자신들이 바보란다.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다고 한국의 가족을 그리워한다.
쿠스코에서 이틀이 더 지났다. 일행은 잉카제국의 흔적을 돌아보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수다를 떨던 그녀들도 조용하다. 심심찮게 싸우던 부부도 말이 없다.
박현숙은 재미가 없는지, 경호와 강소현이 싸우는 꼴을 보고 싶어 한다.
“소현아, 경호원이 깐깐해서 같이 자기 힘들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에그 착한 것.”
본격적으로 이간질을 시작한다. 노양순이
“둘이 말 안하고 지내제? 우리가 그런 눈치도 없는 줄 아나? 내가 대신 혼내줄까?”
박성진도 거든다.
“경호원이 무시하지?”
강소현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은근히 반가운 말이다. 과묵한 경호가 말 많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다.
저녁에 박성진과 김성윤이 룸으로 독신들을 초대한다.
경호는 불참한다.
강소현은 짐도 풀지 않고 간식을 챙겨 간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진주리였지만 왕따가 무서워 참석한다.
김성윤은 초대해도 오지 않는 경호가 얄밉다.
‘우르밤바’ 호텔은 지역 특성상 물과 전기 사정이 좋지 않다.
경호는 세수만하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들지 못한다.
그녀들이 경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객과 어울리는 것이 더 위험하다.
12시 넘어서 돌아온 강소현이 경호에게
“언니, 할 말 있는데요?”
강소현에게 언니라고 부르라고 한적 없으나 언니라고 한다.
술 냄새가 난다.
경호는 그냥 자는 척 하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일어나 앉는다.
“지난번에 박현숙 언니가, 다음 날 노양순 언니가, 또 박성진 언니가, 말 해 줬는데, 언니가 내 흉보고 다녔다고 하더라고요. 언니가 날 싫어한다고, 언니하고 방 같이 쓰지 마라는데, 전 방 같이 쓰고 싶으니까, 앞으로 제 말하고 다니지 마세요.”
경호는 침착하게
“한 가지 물어보세. 내가 그대 앞에서 남 말하는 거 들어봤나?”
“아뇨.”
“그럼 한 가지 더 물어보세. 그대가 판단하기에, 내가 일행에게 남 흉보고 다녔을 것 같나?”
“아니요.”
“그럼 뭐가 문제나?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게. 아직 세상 덜 살아서 그러니, 남이 하는 말보다, 그대 생각이 더 중요한 거라네. 그리고 누가 그러더라. 누가 뭐라더라 하는 ‘하더라 통신’ 하는 것 아니라네.”
강소현은 경호가 너무 어른스럽게 나오자
“어쨌든, 앞으로 제 욕하고 다니지 마세요.”
강소현의 말투는 경호의 말보다 그녀들의 말을 더 믿는다.
‘너 욕하고 다니는 건 언니들이란다. 눈치가 그렇게도 없니?’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호원이 그러더라, 하더라. 통신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하다.
경호는 잠을 청하지만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잠들지 못한다.
에어컨을 켜놓고 자서 걸린 감기가,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심해지는지 목도 아프고, 몸살 증세가 심하다.
강소현은 경호가 기침할 때마다 주눅이 든다. 칠칠맞다고 하는 것 같아 경호가 더 싫어진다.
알람이 울린다.
경호는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힘들다.
손이 부어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거울을 보니 얼굴도 퉁퉁 부어있다.
부었던 다리도 자고 일어나면 말끔히 가라앉았는데, 부기가 그대로다.
위장병까지 겹쳐 속까지 쓰리다. 그러나 고산병 때문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여독이려니 한다.
강소현을 깨워놓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그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온다.
“얼굴이 부었네? 밤에 무슨 일 있었어?”
처음엔 ‘팀장님’이나 ‘경호원’이라 부르며 존댓말을 하더니, 하루 이틀 날짜가 지나면서 나이가 위면 언니, 아래면 성을 뺀 이름을 부른다.
경호는 강소현이 한 말이 떠올랐지만
“추워서 잠 못 잤어요.”
무심하게 대답한다.
그녀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소현이가 아무 말 안 했나?”
오히려 의아해 한다.
버스는 이른 시간에 ‘욜란타이탐보’ 기차역으로 향한다.
현지인솔자 ‘사미자’가 페루까지 와서 살게 된 건, 그녀의 외모가 페루인을 닮아서라기보다, 스페인어를 전공하다 보니, 스페인어권 남자를 사귀게 된 거란다. 그녀의 말솜씨는 아나운서를 능가한다. 학식 또한 역사학자를 능가한다. 그녀는 살기 좋은 한국을 떠나 척박한 페루에서 사는 것이 바보란다. 남자 하나 때문에 부보형제, 고국을 떠나 이국에서 사는 것이 외롭고, 힘들지만 남편이 한국에서 살 수 없으니 페루를 떠날 수 없단다.
기관수는 아들과 마주앉아 맥주를 마신다. 식사 때는 물론, 비행기나 버스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맥주가 들려있다. 강소현과 진주리가 옆에서 술친구를 해준다.
경호는 강소현에게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말이 통할 것이라며 진주리 옆으로 자꾸 보낸다. 박현숙이 진주리 옆에 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기차에서 내린 일행은 다시 대형버스를 타고 ‘마추픽추’ 초입에 도착한다.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둘러보며 필요한 모자도 사고, 초콜릿을 달라는 꼬마에게 사탕도 쥐어준다.
독신들은 관람은 건성이고, 강소현에게 이것저것 캐묻는다.
“밤에 아무 말 안 했니?”
“너 바보니?”
“경호원이 너 무시하는 거 안 보여?”
“나라면 벌써 방 따로 썼다.”
“밤에 잠꼬대 한다며?”
“너도 참 안 됐다.”
서로 다투어 돌아가며 강소현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놓는다.
노양순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여행사에서 경호원이랑 내랑 방 같이 쓰라고 했는데, 나는 경호원 싫다고 바꿔달라고 했데이~”
박현숙이 노양순을 째려본다.
‘네가 방 바꿔 달라 안 했으면 난 지금 너랑 한방 안 쓰잖아?’
못마땅한 눈빛이다. 노양순이 카톡도 제대로 못해 일일이 챙기려니 성질 급한 박현숙은 졸도할 지경이다.
강소현은 경호와 같은 방 쓰는 것이 싫지 않다. 그러나 언니들의 말을 들으면, 한방을 쓰면 바보다. 고로 각 방을 써야겠다고 맘먹는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냈다가
“내 독실 요금까지 그대가 다 낼 건가?”
할 것만 같고, 혼자 쓰다 왕따 당할까봐 겁나기도 하다. 아침에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서 못 일어날까봐 부담도 되고, 혼자 잠자는 것이 걱정도 된다. 이럴 때, 영리한 박현숙이 해결책을 내놓으면 좋으련만, 박현숙은 결정적인 순간엔
‘나, 아니?’
하는 눈빛이다.
일행은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마추픽추’에 도착한다.
강소현은 마추픽추를 관람하는 내내 박현숙 옆에 바짝 붙어 다니며 비위를 맞춘다.
“언니는 머리가 좋으니까, 각방 쓸 좋은 아이디어 있을 것 같은데요?”
유도해 보지만
“같은 방 쓰는 사람은 너지 내가 아니잖아?”
쏘아본다.
옆에서 노양순이 거든다.
“잠꼬대 한다며? 잠 못 자서 같이 못 쓰겠다고 하면 되잖아? 바보~”
강소현은 그것으로는 약하다는 것을 안다. 깊이 자는 사람은 듣지 못할 수도 있다는, 다른 사람과 바꿔 자게 하면, 매일 밤 자신이 술을 마셔야 잠들고, 아침에 혼자 못 일어난다는 것이 들통날까봐 무섭다.
마추픽추는 스페인 침략자들을 피해 잉카시대 원주민들이 험한 산꼭대기에 건설한 ‘공중도시’다. 그들은 침략자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험한 곳에 도시를 건설한다. 하지만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에 떨다가 도시를 버리고 도망간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걷지 못하는 아이와, 힘없는 노인, 약한 여자를 지하에 생매장하고, 그곳을 떠난 것으로 추측한다.
그 후 공중도시는 500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잊혔다가 항공촬영을 하던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럼 빙검’에 의해 1911년 모습을 드러낸다.
잉카사회의 주요 범죄는 도둑질과 거짓말, 게으름이다. 특히 생활환경이 어려운 산 정상에서의 게으름은, 공동체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에, 무거운 벌로 다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동물 ‘라마’가 풀을 뜯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익숙한 듯, 만져도, 먹이를 줘도, 귀찮다는 식이다.
다음 날,
잉카인들의 ‘태양신전’ 위에 스페인정복자들이 세운 ‘산토도밍고성당’을 둘러본다. 당시 어린 소녀들은 성당에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현지가이드 사미자는
“소녀들이 성당 안에 갇혀 무엇을 했을 지는 다 아시죠?”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잉카제국의 ‘켄코유적’과 ‘삭사이와만 요새’를 오른다.
일행은 한 발, 한 발, 발을 떼기 힘들어 한다.
70대 남자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것을, 다행히 옆에 있던 경호가 붙잡아 불상사를 면한다. 경호도 자신의 몸을 감당하기 힘들지만, 낙오자가 없는지 살핀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쿠스코 원주민들이 스페인 정복자들과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잉카인들의 혼이 남아있는 곳이다. 성벽은 돌 하나의 크기가, 큰 것은 한국의 가정에서 쓰는 대형냉장고보다 크다. 잉카인들은 어떻게 아무런 장비도 없 큰 돌을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정교하게 쌓을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놓고 진화론자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돌의 상태가 단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증거들이 이집트 등에서도 발견된다. 무른 상태의 화강암을 쌓으면 위에서 누르는 힘에 의해 틈이 없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지금과 같은 틈 없는 돌 벽을 쌓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잉카인들은 정복자들에게 쿠스코를 내주지 않으려고, 요새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신무기와 말 등, 병력의 차이로 침략자들에게 함락당하고 만다. 하지만 스페인들이 원주민을 말살하기 위해,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쓰던 담요와 손수건을 잉카인에게 선물로 주어, 그들을 몰살하는데 성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요새에서 쿠스코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붉은 지붕의 집들이 바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다.
경호는 고산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편두통이 매우 심하다.
숙소까지 오긴 했지만 만사 귀찮다.
강소현의 잡다한 말에 대꾸하기도 힘들다.
강소현은 경호가 자신에게 짜증내는 것이라 여기는지
“제가 뭐 잘못했어요?”
냅다 소리를 지른다.
경호는
“내가 아파서 그래.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해요. 오늘은 쉬게 나 좀 놔둬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토사를 한다.
더부룩한 속은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두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소현은 화장실 문을 닫은 경호에게 트집을 잡는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문을 닫아요?”
작정한 듯 악을 쓰며 억지를 부린다.
경호는 더 대거리할 기운이 없다. 간신히
“나중에 얘기해요. 나 누워야할 것 같아요.”
양해를 구한다. 그러나
“사람이 말하는데 누워요?”
강짜를 부리며 어깃장을 놓는다.
경호는 어이가 없다.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럴 기운이 없다.
강소현은 경호의 속을 긁다가, 제 성질에 제가 넘어가, 제 발등 제가 찍는다.
“우리 방 따로 써요.”
경호는 귀찮다는 듯
“맘대로 해.”
강소현을 달래지 않는다.
“맘대로 하라고요?”
강소현의 말이 더 들리지 않는다.
강소현은 먼저 싸움을 걸었지만 화가 난다.
고래고래 악담을 하며 울다가 그길로 ‘사미자’를 찾아간다.
사미자는 강소현을 달래며 오늘은 일단 룸으로 돌아가 자라고 한다.
하지만 영리하고 눈치 빠른 사미자는 일행의 분위기를 이미 간파하고 있다.
다시 룸으로 돌아온 강소현은 경호에게 들으라고
“가이드님이 세상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또 하더라 통신을 한다.
경호는 강소현이 제 생각을 제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남에게 덧씌워 하는 단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호는 귀에서 모터소리가 들린다.
잠들면 좀 나아질까 싶어 수면제를 먹는다.
그러나 잠들지 못한다.
고산병 약을 추가로 먹는다.
효과가 없다. 약 때문에 아직 숨을 쉬고 있는지, 약 때문에 상태가 더 안 좋은 지 알 수 없다.
너무 추워 챙겨 온 겨울 파카를 입고 눕는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다.
속이 울렁거리고 더부룩하다.
다시 토사를 한다.
속을 다 비웠지만, 몸에 가스가 차는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민망할 정도로 방귀가 계속 나온다.
몸이 땅속 깊은 곳으로 꺼지는 느낌이다.
저체온증이 온다는 것을 몸이 알려준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온다.
강소현은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경호는 이곳에서 고산병으로 죽은 한국인 관광객이 있었다는 말이 떠올라, 힘을 내어 어둠속에서 사미자의 방 번호를 누른다.
그러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경호의 기척에 잠이 깬 강소현이 짜증을 낸다. 정이 뚝 떨어진다. 결혼 하고 싶은데 아직 못했다기에, 외모는 그만 하면 됐고, 성격도 착한구석이 있는 것 같아, 다리를 놓아주려 미혼 후배들을 떠올린 자신에게 실소한다.
경호가 열쇠를 챙겨 호텔로비로 내려가자, 직원이 산소 호흡기를 씌워준다.
5분쯤 지나자 두통이 사라진다.
경호는 사미자가 준 약을 가지고 다시 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경호는 자신이 바보라 생각한다. 주치의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하다. 다시는 해외에 나오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한다.
그날 밤 사미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노부부가 산소 호흡기를 요청하고, 교수팀에서도 경호와 같은 증세를 보이는 여성들이 세 명이나 도움을 청해, 그들을 살피느라 밤을 새운다.
버스 출발 시간이다.
경호와 강소현이 로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사미자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룸으로 뛰어올라간다.
둘은 태평하게 자고 있다.
버스는 출발하지만 70대 남자가 극심한 두통을 호소한다.
산소 호흡기를 씌운다.
사미자는 정신이 없는지 숨을 몰아쉬며
“비행기만 타면 산소가 공급돼서 괜찮아지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리마에 도착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괜찮아지세요.”
동요하는 일행을 안심시키느라 애쓴다.
사미자는 쿠스코공항에서 증세가 심한 사람을 휠체어에 태워, 꼬불꼬불 긴 줄을 앞질러 먼저 수속을 끝내버린다. 공항직원들이 그들이 탄 휠체어를 밀고 검색대를 통과한다. 나머지 일행은 1시간 넘게 서서 수속을 기다린다.
독신들은 서서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다.
너무 건강해서 자신이 싫단다.
LA105비행기는 산소가 잘 공급되는지 일행 모두는 다시 컨디션을 회복한다.
리마에 도착한 일행은, 구시가지와 대통령궁 관람을 위해 버스에 오른다.
그러나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한다.
실업자들과 청년들의 생계를 위한 시위군중으로 도로는 마비상태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한국의 시위군중과는 다르다.
그들은 관광객을 볼모로 잡고 있다.
버스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자 멀미를 안 하던 사람들도 속이 울렁거린다고 한다.
사미자가 멀미를 핑계로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박현숙과 강소현을 뒷자리로 이동하게 하고, 멀미하는 사람을 앞에 앉힌다.
뒷자리로 밀려난 강소현은 속이 거북하다고 차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사미자는 비닐봉지를 줄 뿐, 차 문은 안전상 열어줄 수 없다고 한다.
박현숙이
“약 안 먹었어?”
날카롭게 핀잔을 준다.
아무도 강소현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경호는 강소현이 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울렁거리는 속은 술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강소현은 멀미를 핑계로 앞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강소현의 한계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행동으로 여자들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걸 모른다.
리마 구시가지 관광이 끝나고, 중식을 위해 남미식 뷔페식당으로 들어간다.
식당에는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리랑’과 한국가요가 연주된다.
악단이 1달러씩 걷자 독신들이
“우리가 연주해달라고 한 적 없잖아?”
“우리가 돈으로 보이나 가는 곳마다 팁이야?”
경호가
“저 사람들은 식당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고, 연주를 해주고 받는 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예요.”
설명하며 먼저 1달러를 내자 일행 몇 명이 따라 낸다.
노양순이 안하니 만 못한 말을 한다.
“난 룸팁도 안 내는데 바보들이가? 뭐 하러 내노?”
팁을 낸 사람들이 노양순을 노려본다.
영리한 사미자는 강소현에게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킨다. 강소현은 자신이 반장이라도 되는 양 우쭐해 한다. 기사 팁을 걷어라, 물 값을 걷어라, 룸팀을 일괄적으로 걷어라 한다. 물 값이며 팁을 안내고 넘어가던, 박현숙과 노양순도 이때만큼은 안 낼 수 없다.
강소현이 운동화 끈을 고쳐 매기 위해 엎드린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미니스커트 안에 검은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는 것을 깜박한 행동이다. 강소현의 엉덩이가 박현숙의 얼굴과 마주친다. 박현숙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리마의 위성도시 ‘미라폴로레스’와 신시가지 ‘라르꼬마르’를 관람한다. 페루의 사회적 계층들이 선호하는 페루의 신문화가 자리 잡은 곳이다.
독신들은 남녀 한 쌍이 키스를 하는 곳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진주리는 혼자 바닷가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있다.
경호가 자유시간에 쇼핑몰로 들어가자, 스페인어에 자신이 없는 그녀들이 경호를 따라다닌다. 경호는 반기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경호가 작고 가벼운 기념품 두 개를 고르자, 그녀들도 따라 산다.
경호가 다시 공원으로 나왔을 때, 패러글라이딩 팀이 바다 위를 새처럼 날고 있다. 해가 저무는 하늘에 노을과 함께 어우러져 이색적인 풍경이다.
진주리는 그때까지 그 장소에 그대로 앉아있다.
진주리는 그날 왜 버스에서 밤을 보냈는지 아직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 일정이 끝날 때까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박현숙이 진주리에게 말을 걸면 진주리는 기겁하고 피한다. 진주리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경호는 둘의 문제에 끼어들 수 없다.
다음 날, 일행은 왕복 8시간이 소요되는 ‘나스까’로 향한다.
경비행기를 타고 사막 위의 원대한 ‘지상화’를 보기 위해서다.
지상화는 원년~700년 사이의 나스까인들이 광활한 대지 위에 벌새, 원숭이, 고래, 나무, 우주인의 형상 등, 기하학적인 거대한 규모의 문양들을 새겨놓은 곳이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지상에서는 볼 수 없기에 하늘에서 본다.
일반인들은 고대의 경주트랙, 혹은 천문학적 역법과 관련된 상징, 또는 제례와 연관된 그림, 심지어는 몇 천 년 전에 이 곳을 방문했던 외계인들에 대한 숭배의 표현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비옥했던 나스까에 기후변화로 강수량이 줄어 사막화 현상이 나타나자, 비를 기다리는 나스까인들이 거대한 지상화를 신께 바친 것으로 추정한다.
미리 영상을 본 다음, 두 팀으로 나뉘어 경비행기에 오른다. 문화해설사가 한국인의 호기심은 국제적 망신감이라고 ‘호기심천국’ 대형 글씨가 있는 곳을 미리 알려준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한국은 촬영금지국가라고,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준다.
비행기는 비행기 그림자가 바닥에 보일 정도로 저공비행을 한다.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가며 동체를 90도 이상 기울인다. 탑승객에게 지상그림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경호는 비행기 유리창에 카메라를 밀착시켜 놓고 비행기가 오른쪽으로 기울 때마다 셔터를 누른다. 눈동자가 카메라를 보는 순간 속이 왈칵 뒤집힌다.
박현숙은 비행기 타는 것을 포기한다.
노양순은 구토는 면했지만, 머리가 많이 아프다고 하소연 한다.
멀미약을 산 박현숙에게 약을 얻으려했지만 거절당한다.
노양순과 박현숙은, 다시 4시간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생각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박현숙은 노양순의 팔짱을 끼고 다니며, 일행에게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나더러 멀미한다고 촌스럽다더니 자기도 멀미하네?”
말끝마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대던 노양순이 조용하다.
사미자는 진주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소현과 같은 방을 쓰게 한다.
하지만 하룻밤을 보낸 진주리가, 다시 독실을 요구한다.
강소현은 추가비용을 지불하고, 혼자 독실을 사용하게 된다.
경호는 강소현에게 여행사에 문제 삼지 않겠다는 진술서에 싸인 하게 한다.
강소현은 깨워주는 사람이 없자, 머리에 빗질도 못한 상태로 차에 오르는 것과 달리, 경호는 안정을 되찾는다. 옆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사람이 없어지자 비로소 다시 일행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다음 날, 이른 아침을 먹고 ‘파라카스’로 이동한다.
배를 타고 작은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바예스타 물개섬’으로 향한다.
가는 길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삭막한 사막이다.
아기자기 한 산들로 정원 같은 한국의 고속도로에 익숙한 일행은 대부분 잠을 잔다.
선착장이 가까워지자 해안을 한가로이 거니는 펠리컨이 보인다.
사람에게 익숙한 듯 관광객과 뒤섞여 걸어 다닌다.
박현숙은 멀미가 두려워 일행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선착장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물개 섬은 물개보다 새때들로 뒤덮여 있다.
새똥으로 인해 섬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물개 때를 보리라 상상했던 일행은 띄엄띄엄 있는 물개를 보며 실망한다.
3개의 섬은 서로 방파제 역할을 하며 파도를 막고 있다.
모터보트는 섬을 왔다 갔다 3바퀴를 돌더니 거대한 지상화가 보이는 곳에서 멈춘다. 문화해설사가 ‘칸델라브로’라 불리는 촛대 그림이라고 한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 밝혀진 것 없단다.
노양순 눈에는 나무처럼 보인다.
물개 가족이 일광욕을 하기 위해 바위에 오른다. 보트가 물개와 가까이 접근한다.
일행은 물개를 보기보다 사진 찍기 더 바쁘다.
1개의 바위는 가운데가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보트가 가운데를 통과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고, 해설사가 일행에게 박수를 치게 한다.
돌아오는 길에 사미자가 단체사진을 찍어 준다.
선착장에서 점심으로 생선 뷔페를 먹고 ‘이까’로 향한다. ‘와까치나 사막’과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를 보기 위함이다.
가는 길 역시 나무 한 포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다.
와까치나 사막에 도착한 일행은 ‘버기카’를 타고 이동한다.
모래바람으로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와 머플러로 얼굴과 머리를 감싼다.
입을 벌리고 웃으면 미세한 먼지가 입으로 들어간다.
핸드폰도 고장을 일으켜 비닐커버가 없는 사람은 차에 두고 내린다.
기관수와 강소현이 일행의 사진을 대표로 찍어주기로 한다.
버기카는 사막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양손으로 꽉 붙들어도 엉덩이가 들썩들썩 몸을 가누기 어렵다.
강소현은 슬리퍼를 신은 탓에 발에 힘을 주지 못해, 아차하면 밖으로 내동댕이쳐질 판이다. 허리가 안 좋은 사람은 비명을 지르고, 나머지는 탄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고함을 지르며, 사막관광을 즐긴다.
‘샌드보드’를 타고 언덕에서 내려오는 맛은 스릴 그 자체다.
모두 나이가 많은 일행이지만 어린아이처럼 즐긴다.
모래썰매는 처음이라며 오래 살다보니 이런 즐거움도 있다고 70대 노부부가 제일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처음엔 주춤주춤 내려가던 공주파 여성도, 순식간에 함성을 지르며 속도를 즐긴다.
가장 높은 모래언덕에 오르자 이까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오아시스 주변에는 키가 낮은 나무들도 제법 있다.
사막 언덕이 구릉을 이루며 겹겹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다음 날, 버스는 왕복 5시간이 소요되는 ‘차우치야 공동묘지’로 향한다.
사막의 특수한 기후는 죽은 사람의 내장을 꺼내고, 목화솜으로 배를 채우면 시체가 썩지 않는다. 워낙 건조해서 그대로 미라가 된다. 나스까인들은 내세를 믿으며 작은 방에 여러 명을 매장한다. 음식과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들도 함께 넣어준다. 그들은 머리카락의 길이로 신분을 표시한다. 왕족은 긴 머리, 일반인은 어깨길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모습은 생생하다. 입은 옷과 걸친 망토까지 그대로 있다. 도굴을 많이 당했다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경호는 물병을 자주 입에 댄다. 워낙 건조한 공기로 입이 퍼석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메마른 땅 위를 걸을 때는 발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인다.
360도 회전을 해도 보이는 건 바위와 자갈과 흙먼지로
‘이걸 보려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왔나?’
회의를 느낀다.
보기만 할 뿐 만지는 건 금물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땅을 덮은 자갈을 치우면 색이 다른 토양층이 나온다. 자갈을 치우는 것만으로도 땅에 커다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커다란 지상그림은 그런 식으로 그려졌다.
숙소로 돌아온 일행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샤워를 한다.
맨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 미세한 모래로 피부가 상처를 입는다.
절대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 안 된다.
입은 옷과 신발도 털어서는 해결이 안 된다.
여행지에의 빨래는 싫어도, 사막투어와 공동묘지 관람 후에는, 피할 수 없다.
대충 가방에 넣으면 다른 옷까지 오염된다.
건조한 공기로 세탁물은 금방 마른다.
고행의 페루 관광이 끝나고, 콜롬비아 ‘보고타’로 가기 위해 리마공항에서 대기한다.
하지만 항공사 노조파업으로 제 시간에 탑승하지 못한다.
항공사측은 탑승객에게 무료쿠폰을 주어 도넛과 커피, 콜라를 먹게 한다. 일행은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동안 친숙해져 모여서 수다를 떠는 곳이 더 즐겁다.
경호는 콜롬비아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알린다. 오늘 가던, 내일 가던, 답답한 건 보고타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여행은 변수가 있어야 더 추억에 남는다고, 기관수는 이번 여행이 스릴 있어서 좋다고 허허거린다. 호기심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기관수는 자칭 ‘돈키호테’다. 그러나 그녀들은 기관수를 ‘술꾼’으로 부른다. 아버지 덕에 세계일주를 하는 휴학 중인 아들은 ‘백수’로 통한다.
기다리는 동안 70대 후반의 노부부가 피곤한지, 빈 의자 3개를 차지하고, 길게 누워 있다. 노양순이 목이 마른지 김성윤에게 다가가
“물 좀 얻어 묵읍시데이.”
물 내놓으라는 식이다.
김성윤은 못마땅한지
“돈 자랑을 말던가, 룸팀 안 낸다고 똑똑한 척을 말던가, 남에게 손을 벌리질 말던가.”
비아냥거리며
“난 감기 걸려서 나눠먹을 수 없어.”
쌀쌀하다.
노양순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괜찮데이. 내가 입 안대고 먹으믄 된데이”
천연덕스럽게 손을 벌린다.
김성윤은
“거지야?”
약을 올린다.
노양순은 눈치가 없는 건지, 사먹기 싫어서 없는 척 하는 건지
“괜찮데이~~”
내놓으란다.
“안 돼! 감기 옮아. 환자가 늘면 골치 아파.”
끝까지 거절한다.
4시간이 지연된 후, 항공편이 변경되어 비행기가 이륙한다.
박현숙은 기류 때문에 많이 흔들리는 기내에서 멀미를 할까봐 겁을 먹는다.
통로 쪽에 앉아 있는 경호에게 와서, 자리를 바꾸자고 어린애처럼 때를 쓴다.
보고타에 도착했을 때는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한다.
박현숙의 내 맘대로의 행동은, 남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가족 팀에게, 커다란 장벽이다.
박현숙은 경호와 강소현을 갈라놓는데 성공 했지만, 경호의 컨디션이 좋아 보여 불만이다.
그녀에게 적응한 경호가 더 똘똘해져 더 불만이다.
박현숙은 강소현을 확실하게 자신의 졸병으로 삼아, 경호를 골탕 먹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강소현은 언니들의 잔심부름을 기쁘게 한다.
언니들이 예뻐서 그러는 줄 알고 좋아한다. 그녀들은
“소현이가 은근 바보지?”
“이제 알았어?”
“예쁜 것들이 좀 맹하잖아.”
재미있어 한다.
가이드도 심부름을 반기는 강소현을 적절히 이용한다. 버스에서 봉투를 들고 쓰레기를 걷어라, 인원을 체크하라 등, 강소현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시킨다.
노부부도 강소현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한다.
강소현은 일행이 자신을 바보취급 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거라 믿기에, 경호 앞에서 우쭐댄다.
경호는 강소현에게
‘재밌니? 네 돈 내고 해외 와서, 남 심부름 하고 다니는 것이 그렇게 좋니?’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50대 후반까지 살아온 삶의 색깔이 너무 다른 독신들은, 대화의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 아직 서로 바보 만들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탓에 일행에게 ‘바보1, 바보2, 바보3, 바보4’로 통한다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강소현은 그녀들 말에 너무 쉽게 흔들린다. 아침에 늦게 내려오는 강소현에게, 자리를 맡아 놨는데 누가 앉아버렸다는 식의 사소한 말에도 판단력을 잃고 소리를 지른다.
“계란 3개 남은 거 어떡했어요?”
방금 박현숙이 나가고 강소현이 들어왔기에, 진주리는 박현숙의 말장난에 넘어갔다는 것을 안다.
진주리는 강소현이 이해할 수 있게 해명하지 않고 강소현을 바보 만들어 버린다.
“뭔 계란?”
강소현이 팔짝팔짝 뛰거나 말거나 무시해버린다.
강소현은 진주리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왜 화 내냐고 물어봐 주고, 이유를 들어주어야 하는데
“술 덜 깼니?”
또는
“잠꼬대 하니?”
식으로 돌아서는 진주리가 못 견딜 정도로 얄밉다.
진주리도 강소현의 마음을 안다.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한두 명도 아니고, 그럴 때마다 상황을 설명하고, 해명하는 일이 박현숙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 싫다.
보고타에서 하루 자유일정이 주어진다.
경호는 홀가분하게 ‘보테르 미술관’을 가기위해 서두른다.
그녀들이 로비에 모여 수다를 떨다 모두 경호를 따라나선다.
경호는 두 팀으로 나누어 콜택시 2대를 부른다.
다른 택시에는 영어를 잘 하는 강소현과 박현숙, 노양순을 타게 하고, 자신은 진주리, 박성진, 김성윤과 동행한다.
보테르 미술관은 2동의 건물이 2층으로 아담하게 마주보고 있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기에 적합하다.
보테르 그림은 화가 생존당시에는 외면당한다. 장난처럼 치부한 그림은 후손에 의해 인정받고 박물관까지 세워진다. 그는 사람을 뚱뚱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뚱뚱한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 속에는, 보테르자신의 모습이 있기도 하다. 12살의 모나리자 역시 뚱뚱한 모나리자다.
경호는 그림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2시간 넘게 머문다.
박물관을 휙 둘러보기 만한 박성진과 김성윤이 와서
“화가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다른 데로 안 가?”
나가길 바란다.
경호는 일부러 시간을 끈다.
하루쯤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체력이 남아도는 그녀들이 경호 맘을 알 리 없다.
입구에서는 한국의 100원짜리 크기의 은색 보테르 기념 동전을 나누어 준다.
경호는 그녀들과 보고타 시내를 걷는다.
한국의 ‘아이돌 패션’을 능가하는 강소현의 외모에 현지 청소년들이 연예인이냐고 묻는다.
경호는 장난기가 동해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연예인라고 스페인어로 말한다.
애들이 강소현에게 몰려 사진을 찍자고 아우성이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강소현은 영문도 모르고 예쁘게 웃으며 포즈를 여러 차례 취한다.
그녀들이 경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경호는 사실대로 말한다.
그녀들은 박장대소하며 기다렸다는 듯 경호의 등짝을 치고, 팔을 잡아 흔들며 기회는 지금이다 싶은지 몰매질을 한다. 경호는 힘센 그녀들이 힘을 합치면 황소도 때려잡겠구나 생각한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지도를 보며 전통음식점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간다.
4개의 음식점이 나란히 있다.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 가운데 식당으로 들어간다.
메뉴판을 보며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고, 각자 계산하기로 한다.
경호는 콜롬비아 전통식 ‘아히야꼬’와 남미의 ‘잉카콜라’를 주문한다.
그녀들은 골고루 맛을 보자며 모두 다른 메뉴를 주문한다.
종업원에게 1인 1장의 계산서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렵게 들리는지 멍하니 서 있다.
경호는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
그녀들에게 각자 빈 식탁으로 가서 1명씩 앉게 하고, 각자 주문하고 먼저 계산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한다.
그제야 이해한 종업원이 웃으며 머리를 내젓는다.
복잡하다는 눈치다.
잉카콜라는 노란색으로 맛은 코카콜라를 따라가지 못한다. 단맛이 더 강하게 느껴질 뿐, 톡 쏘는 코카콜라에 길들여진 한국인에게는 밋밋한 음료다.
전통식도 생각보다 허술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음식을 모아놓으니 뷔페가 따로 없다.
독신들은 맥주를 곁들여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이국에서의 맛집 식사를 즐거워한다. 행복해 하는 그녀들 모습에서는 그동안 서로 험담 하고, 매일 쌈질을 해댔다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식사를 끝내고 구시가지에 있는 ‘산탄테르 공원’ ‘황금박물관’으로 향한다.
입장료가 꽤 비싸다.
금 박물관이다보니 입구에서는 꽤 까다롭게 검사를 한다.
다행히 큰 가방을 가지고 온 사람이 없고, 작은 여권가방만 소지하고 있어서 쉽게 입장한다.
안내문은 스페인어로만 표기되어 있지만 관람에는 지장이 없다.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입장객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총 4층으로 되어있는 박물관 내부는, 황금박물관답게 모든 전시물들이 금이다 보니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 콜롬비아 전역에 있는 금으로 된 유물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인데, 작은 인형 같은 정교한 유물이 상당히 많다.
경호는 금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의 상징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황금가면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궁금하다.
일행은 하루 종일 걸어서,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다.
더 걷기 싫은지 박성진과 김성윤이 그만 가자고 한다.
경호는 안전을 위해 박물관에 요청해 콜택시를 부른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보고타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몬세라떼 언덕’과 ‘시파키라 소금광산’을 관광한다.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지만, 관광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햇볕이 약해 걷기에는 좋다.
사진도 반사 빛이 없어서인지 깔끔하게 찍힌다.
전날 하루 종일 호텔에서 쉬었다는 사람들이, 몬세라떼 언덕을 오르는 것을 힘들어 한다. 부어라 마셔라 술파티를 했다더니 숙취가 남은 모양이다.
일부는 소금광산을 보지 않겠다고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가이드가 볼만한 것이 많으니 힘내라고 했지만, 손을 내젖는다.
아내들이 독신들이 관광하는 줄 알았으면, 같이 할 걸 콜롬비아까지 와서 호텔에서 죽치고 있었다고 투덜댄다.
시파키라 소금광산은, 폐광한 광산을 정부에서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다. 광부들이 조각한 작품도 있지만, 나중에 조각한 것이 대부분이다.
작은 기념품들은 소금이 아닌 것이 더 많다.
‘소금성당’은 당시 광부들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한 곳이다. 정면에 십자가가 있고, 오색조명을 번갈아가며 받아, 신비롭다.
젊은 문화해설사 ‘박이슬’은 쉴 새 없이 말을 하며 앞장선다.
일행이 듣거나 말거나 큰소리로 설명한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지는 않지만, 그의 빠른 걸음은 여행에 지쳐가는 일행에게 버겁다.
전날 하루 종일 돌아다닌 독신들은 종아리가 당긴다며 좀 천천히 가자고 소리 지른다.
콜롬비아에서 칠레로 가기위해 보고타공항 탑승구에서 대기 중이다.
공항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다.
전기콘센트도 바닥에 있다. 밟아도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깊이가 있긴 하지만, 위생적이지 못하다.
스웨덴 인으로 보이는 모델 같은 젊은 부부가, 생후 7개월쯤 돼 보이는 아기를, 기저귀만 채운 채 바닥에 앉혀놓고 있다. 한국의 젊은 부부 같으면 기겁할 일이다.
아기는 가방에서 아기용품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흩어놓는다.
젊은 부부는 스마트 폰에 얼굴을 박고 있다.
일행 중 거제도에서 온 70대 초반의 남자가 아기에게 다가가
“까꿍~~ 까꿍~~”
예뻐서 한 번쯤 안아보고 싶은 눈치다.
젊은 부부는 남자에게 웃어 보일 뿐, 아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둔다.
보고타를 떠난 LA574는, 6시간 만에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일행은 컨디션 회복을 위해, 해변이 보이는 ‘비냐델마르호텔’에서 휴식을 겸한 2일간의 여정을 보낸다. 해양스포츠와 아름다운 해변의 경치는, 일행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하다.
호텔 직원들은 손님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다시 안 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그들의 영업철학인 듯 싶다.
해변에서 신나게 스포츠를 즐기며 노는 사람과, 호텔에서 쉬는 사람 반으로 나뉜다. 체력이 건장한 기관수를 포함한 남자들이 쉬겠다고 하는 걸 보니, 또 술파티가 잡힌 모양이다.
해양스포츠도 술도 관심 없는 박현숙은, 그녀들을 불러내 경호와 강소현이 싸우는 꼴을 보기로 한다. 추억에 남는 여행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녀들은 몰려다니며 경호를 만나면
“혼자 뭐해?”
의미 있는 질문을 한다.
“어디 갔었어? 아까 문 두드리니까 없던데?”
“어디 갈 거면 같이 가~”
“여기까지 와서 호텔에 죽치고 있을 건 아니지?”
궁금한 것도 많고, 할 말도 많다.
경호는 그녀들의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체력이 부럽기까지 하다. 여독으로 조용히 쉬고 싶을 만도 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강소현은 경호가 그녀들과 대화 하면, 룸에서 있었던 얘기를 까발리는 것만 같고, 이런 저런 자기 단점을 말하는 것만 같아 신경 쓰인다. 같은 방 쓸 때는 언니들이 모두 자기편인 것 같아 그런 걱정은 없었는데,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언니들에게
“경호원이 제 얘기해요?”
물어보지만
“네가 뭐라고 네 얘기 하니?”
쌀쌀 맞다.
경호에게
“언니들이 제 얘기해요?”
“착하고, 예쁘다고 해”
건성이다.
강소현은 경호 말을 믿기로 한다. 안 그러면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박현숙은 짬 날 때마다, 이방 저방 문 두드리고 다니며, 수다 떨 사람을 불러낸다. 가족 팀은 상대하지 않더니, 남편과 싸운 아내를 찾는다. 그들은 박현숙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다. 박현숙은 기도를 해준다며 인심을 쓰고,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며 자신을 의지하게 만든다. 해외까지 와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서운함이 생길 때는, 상처가 더 큰 법이기에 박현숙의 말 몇 마디에 속을 통째 드러낸다. 실수하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채지 못한다.
발과 입이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운 박현숙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전하기 바쁘다.
신이 났다.
없는 말을 더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교묘하게 본질을 벗어나 자신이 구세주가 된다.
그들의 고삐를 쥐고 마구 흔든다.
일행 절반이 박현숙의 손바닥에서 놀아난다.
박성진과 김성윤은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친구로, 말 많은 여자들의 온갖 별별 사건을 다 접해봤으면서도, 박현숙 하나를 제압하지 못한다.
박현숙은 교묘하게 둘 사이에서 간격을 벌려놓고 있다.
노양순은 아직도 박현숙에게 불만이 많다.
일행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행 LA318 비행기를 타기위해 수속을 끝내고 탑승구에서 대기한다.
진주리를 제외한 독신녀 다섯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경호는 무심하려고 애 쓰는데도, 그녀들이 모이면 귓속의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향한다. 또 어떤 작당들을 하는지 무사귀국을 책임져야하는 경호원으로서 걱정이 앞선다.
탁 터놓고
“언니들이 모이면 신경 쓰여요. 뭔 일 꾸미는 것 같아 겁나요.”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다.
경호 옆으로 가족 팀이 온다. 아직도 감기로 고생하는 경호를 일행이 돌아가며 챙긴다.
“경호원이 아프면 안돼요.”
“신경 쓰이는 게 많아서 힘들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니까 정신이 없죠?”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고충이 많죠?”
비타민을 주는 사람, 남은 감기약을 주는 사람, 간식을 주는 사람 등, 그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말하며, 경호가 자신을 더 챙겨주길 바란다.
박현숙이 도끼눈을 뜨고 본다.
경호는 살벌한 그녀들의 시선을 느끼며, 차라리 아무도 경호에게 신경 쓰지 않길 바란다. 뭔 일이 터질 것만 같아 무섭다.
사태를 감지하지 못한 부부 팀이 박현숙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소화제며, 장약이며 내 약 다 뺐어 먹었으면서도, 누구는 고맙다는 말도 없어.”
박현숙이 얼른 다가와 아프니까 정신이 없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한다.
“울산 댁은 싸우는 게 취민가, 뭔 싸움을 그렇게 해대는지, 나까지 정신 사나워.”
노양순이 펄쩍 뛰며
“싸우는 거 아니라 예. 원래 목소리가 크고, 경상도 사투리 악센트가 높아서 그렇데이.”
은퇴교수 아내가
“강소현은 뭔 과자를 그렇게 많이 가져왔데? 내가 어린앤가 입 퍼석거리게 스낵을 주면서 먹으라네. 안 받을 수도 없고, 버리지도 못하고, 짐만 되네.”
옆에 있던 다른 아내가
“우리는 버렸어요.”
다 들리게 말한다.
“독신들은 자기들 밖에 모르고 개념이 없는 것 같아요.”
“창피가 뭔지 모르는 거 같아요.”
“돈은 있는데 쓸 데가 없으니까, 비즈니스 타고 다니면서 돈지랄 하지”
“누가 알아준다고 옷은 어디 거고, 신발은 뭐 메이커라고 자랑들을 해대는데, 하나도 안 부럽데.”
“우리들은 돈 쓸 일이 얼마나 많아요? 비즈니스는 아까워서 못 타죠.”
“자랑할 게 없으니까 돈 자랑하죠. 그런 사람들이 알고 보면 더 없더라고.”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은 있는 척 안 하잖아요.”
“한턱 쏘랄까봐 없는 척 하죠?”
“맞아요.”
둘러선 사람들이 손뼉 치며 웃는다.
“신학대 교수도 교수라고 누가 알아준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데?”
“무식한 것들이 목소리는 더 크잖아요.”
“지들은 아직도 처녀라며, 손자까지 본 할매들하고는 상대 안 할 것처럼 하더니, 약 달라, 손톱깎이 달라, 아쉬운 소리는 더 하데?”
“우리가 나설 바는 아니지만, 철딱서니 없는 소현이를 들었다 놨다 하잖우?”
“경호원도 서로 차지하려고 안달이잖아요.”
“여러 명이 있으면 공평하게 챙겨 달라 해야지 자기들만 챙겨주길 바라.”
“소현이는 아직 젊고 예쁜데, 돈 모아서 결혼할 생각을 해야지 해외여행은 뭔 해외여행? 기백만 원 하는 여행도 아니고, 천만 원 대가 넘는 여행을 겁 없이 하는 걸 보면 시집 다 갔어.”
경호는 더 듣고만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입이 얼어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일행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지 못해 이런 말이 오가는 것만 같아, 자신이 더 바보 같다.
다행히 독신들은 아까 자리를 뜨고 없다.
교수들은 퇴직금으로 세계일주를 하는 친구를 보고, 자신도 질 수 없어 동참한 것이 바보란다.
아내가 고산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아내를 설득해 동행하다보니, 툴툴거리는 아내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남들 앞에서는 잉꼬부부처럼 행동하는 부부도 밤마다 싸운다.
한국에 가서 이혼도장 찍겠다고 나올 것 같아, 바보 같은 이 여행이 고역이다.
‘송파’에서 온 부부는 남편이 강소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맘에 안 든다고 싸운다. 남편은 아닌 척 하지만, 그는 연상인 늙은 아내보다, 옆에서 팔짱도 끼어주고, 술도 따라주며 아양 떠는 강소현이 더 예쁘다. 여행 온 것이 매우 흡족하다.
아내는 다른 사람들 시선이 느껴져 바보 같은 남편이 창피하다. 자식보다 어린 강소현과 대면해 싸울 수도 없어서 속에서 더 불이 난다. 강소현이 알아서 피해주길 바라지만, 속없고 눈치 없는 강소현은 남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다닌다. 아내는 남편과 해외여행 다시 안 하리라 굳게 다짐하며 한국에 가서 남편을 요절내 놓겠다고 벼른다.
칠레에서 버스가 길을 잘못 든다.
여행사 전용기사가 몸이 안 좋아서, 전날 다른 기사로 대체되어 길을 잘 모른단다.
한국처럼 길이 복잡한 것도 아닌데 잘못 들었다니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기사는 길을 모른다 쳐도 가이드는 잘 알 것 아니냐고 따지자, ‘양찬혁’은 한 번 가본 길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고 한다.
경호는 양찬혁을 믿을 수 없어 버스를 세운다.
버스엔 네비게이션이 없다. 페루의 관광버스는 한국과 달리 없는 버스가 더 많다고 한다.
통신사정도 원활하지 않아, 양찬혁의 스마트 폰과 경호, 기관수의 핸드폰도 먹통이다.
경호가 암담해 하자, 기사와 양찬혁은 서로 잘잘못을 따지며 싸운다. 경호가 둘이 내려서 싸우라고 하자 조용해진다.
조금 더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조금 더 가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벌써 2시간째다.
더 가는 건 시간낭비다.
주유소나 휴게소가 나오면 물어라도 보겠는데, 화장실이 급한 사람들은 볼일이라도 보겠는데, 점점 안데스산맥 쪽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일행은 노상에서 볼일을 본다.
대형버스를 사이에 두고 남자와 여자가 반대방향에서 급한 일을 해결한다.
일행은 쇼킹한 상황을 즐긴다.
누군가가 농담한다.
“새우 잡이 배에 팔아넘기는 건 아니죠?”
일행이 한바탕 웃는다.
경호는 어린 유학생 양찬혁을 믿을 수 없어,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일행과 의견을 나눈다.
온 길로 다시 돌아가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버스는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2시간 만에 와인상점을 만난다. 도움을 청하자 나이 많은 상점주인이 지도를 놓고 설명한다.
경호와 기사, 양찬혁은 서로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한다.
경호는 매우 감사하다는 ‘질 그라시아스’로 답례하고, 와인 10병과 빵 22개를 포함, 먹을 만한 간식을 싹슬어 계산한다.
5시간 늦게 호텔에 도착한다.
새벽 1시다.
저녁은 버스에서 와인과 거친 빵, 간식으로 때웠다.
다행히 일행의 불만은 없어 보인다.
경호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없길 바란다.
기관수는 블로그에 올릴 사건이 더 생겼다며 상황을 즐긴다. 자칭 ‘돈키호테’가 잘 어울린다.
경호에게 날짜는 더디게만 간다.
피로가 쌓여 감기가 또 다시 심해지는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무거운 입이 더 무거워진다.
그녀들은 재미없는 경호를 골리기로 한다.
그녀들의 계략은 종종 성공한다.
아르헨티나 ‘탱고디너쇼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날이다.
그녀들에게 휘둘리는 강소현이 또 일을 저지른다.
경호는 모두 입장한 것을 확인하고,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일행은 5개의 원탁을 차지하고, 1개의 테이블에 4명씩 앉아 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무대에서 공연이 시작된다. 와인을 마신 강소현이, 경호에게 와서 귀에 대고 소리친다.
“제 욕하고 다니지 말라니까, 왜 욕하고 다녀요?”
경호는 피곤해서 한 잔 마신 와인 탓인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강소현의 손목을 잡고 강소현이 앉았던 자리로 가서, 그녀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할 말들이 그렇게 없어요?”
강소현은 창피했는지, 밖으로 뛰쳐나간다.
경호는 싸잡아서 삿대질을 하며
“중남미까지 올 정도면 한국에서 살만한 사람들이었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이간질이나 하고, 수준이 이거밖에 안돼요?”
현지가이드 ‘하영미’는 밖으로 나간 강소현을 찾으러 간다.
경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무대 무용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행은 또 터졌구나, 뭔 말들이 오갔는지 궁금하다.
경호는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별일 아닌 척, 팔짱을 끼고 있지만, 그녀들의 장난에 넘어간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 뒤통수가 따갑다.
강소현과 가끔 손을 잡고 다니던 기관수의 아들이 경호에게 와서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무슨 일이예요?”
“강소현에게 물어보게.”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눈치 없는 기관수의 아들이 눈이 벌겋게 부은 강소현 옆자리로 가서 묻는다.
“무슨 일이예요?”
강소현은 대답을 못한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기관수와 그의 아들은 더 궁금하다.
바윗돌 같던 경호원이 강소현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얼굴이다.
호텔에 도착하자 하영미가 정황을 들어보고자, 경호와 강소현을 부른다.
경호는
“어디서 감히 오라가라야? 물어볼 말 있거든, 강소현에게 물어보고, 궁금한 거 있거든, 다 있는 자리에서 물어요.”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다.
강소현은 창피해서 우는 건지, 경호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서 우는 건지, 아직도 눈이 벌겋다.
독신녀들이 강소현을 위로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경호가 우직한 성품이라 또 참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인들이 모여 있는 공연장에서,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자신을 묵사발 만들어, 슬프고 또 슬프다. 경호가 미운 차원을 넘어 무섭다.
독신녀들이 강소현을 감싼답시고 경호에게 한꺼번에 덤빈다.
“소현이한테 사과해.”
“니 인격이 그거밖에 안되나?”
“우리가 니 말만 하고 다니는 줄 아나?”
“경호원이 그래도 되나?”
경호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반말을 하며, 일행 모두 들으라고 쏘아댄다.
“강소현에게 사과할 사람은 그쪽들 아닌가요? 뭔 말인지는 본인들이 더 잘 알 텐데요? 해외까지 와서 철딱서니 없는 애나 울리고, 그렇게도 할 말들이 없어요? 어디다 반말 이예요? 나이 많으면 반말해도 돼요?”
더 크게 말한다.
영리한 박현숙은 벌써 자리를 피하고 없다.
단순한 노양순이 칼자루를 쥔다.
“니는 위아래도 없나? 언니들한테 지금 말하는 태도가 뭐꼬? 고객한테 철딱서니 없다고 해도 되나?”
쌈닭 노양순은 너 잘 걸렸다 식이다.
경호는 너무 창피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언니들이었어요? 하도 유치해서 몰라봤네요. 잘잘못 따지게 청문회라도 열어드릴까요?”
한 술 더 뜬다.
“니 우리를 막 무시해도 되나? 여행사에 항의 한데이.”
“항의하세요.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호원을, 이리 괴롭혀도 되는지 함 따져봅시다.”
경호는 될 대로 되라 식이다.
질 수 없는 노양순은
“확 머리끄뎅이 잡아 팽개쳐 븐데이. 어디서 대드노?”
역시 쌈닭이다.
경호는 정말로 노양순이 머리끄뎅이 잡아 팽개칠까봐 겁이 났지만, 물러설 수도 없다.
“대접 받게 행동해야 대접도 하는 법이예요. 언니들은 개뿔? 소현이하고 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면서.”
어디선가 킥킥대는 소리가 들린다.
경호는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노양순이 제발 멈추어주길 바란다. 다행히 노양순이 말로 경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속이 여린지
“너, 영원히 저주 받아라.”
쏴붙이고 꼬리를 내린다.
경호는
“그런 말은 원래 말 한사람한테 가는 법이예요. 그렇게 저주 받고 싶어요?”
일침을 놓는다.
하영미가 일행을 룸으로 올라가게 한다.
박성진과 김성윤이 씩씩대고 있는 노양순을 끌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경호는 숙소로 올라왔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풀썩 주저앉는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안 볼 사람들이라, 잘 참을 줄 알았다. 누군가에게 엉뚱한 소리를 들어도 ‘수준이 맞아야 싸우지.’ 스스로 위로하며 싸움을 안 하는 성품이라, 끝까지 참을 줄 알았다. 그러나 와인 한 잔에 무너져 패배감을 맛본다.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내일 일행 얼굴 볼일이 걱정이다.
경호는 잠들기 틀렸다는 것을 알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수면제를 먹고 자리에 눕는다.
하영미가 와서 문을 두드리며
“팀장님! 팀장님! 괜찮으세요? 문 좀 열어보세요.”
노크 소리를 들었지만 문 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 시간 그녀들은 룸에서 대판 싸움을 한다.
강소현은 언니들에게 변명하느라 쩔쩔맨다.
노양순은 박현숙에게 같이 안 싸우고 사라졌다고 노발대발 한다.
경호는 깊은 잠을 자고 개운한 몸으로 일어난다.
룸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밤새 있었던 일이 위성안테나보다 빠르게 경호 귀에 들어온다.
하지만 경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녀들은 그러한 경호가 못마땅한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얼굴이야?”
“어마야 무섭데이~”
이런 저런 소란 속에서도 일행의 일정은 하루하루 지나간다.
경호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반장처럼 행동하던 강소현도 풀이 죽어 있다. 언니들을 믿고 저지른 일인데, 개밥에 도토리가 되어 신경이 무척 예민해져 있다. 뒤에서 자기 흉을 보는 것만 같고, 기관수의 아들도 가까이 오지 않아 남은 일정이 두렵다.
독신들도 조용하다. 자신들을 바보취급 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고, 경호가 피해서 더 화가 난다. 그녀들은 명예를 위해, 경호를 진흙구덩이에 처박아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이대로 돌아가면 평생 수치로 남을 것 같아 반드시 반전이 필요하다.
박현숙이 직접 나선다.
“소현아, 너 바보니? 공연장에서 그 꼴을 당하고도 경호에게 한 마디도 못하더라? 영어 잘해서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일행은 다 니편이야. 경호는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잖아?”
강소현은 똑똑한 줄 알았다는 말과, 경호는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라는 말이 귀에 꽂힌다. 강소현은 사람들이 다 자기편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다 있는 자리에서 경호에게 야무지게 어깃장을 놓는다.
“일행이 다 경호원 싫어하는 거 모르죠?”
경호는 잠깐 당황한다.
경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강소현은
“잘난척 해봐야 자기만 손해예요.”
모처럼 맞는 말을 한다.
강소현은 경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린다. 그러나
“낮술 마셨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소현이 따라가며 따진다.
“고객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경호는 언니들 말에 또 흔들리는 강소현이 불쌍하고, 전직 항공사 승무원이었던 그녀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든 게 무엇인지 의아하다. 저만한 외모에 저 정도 실력이면, 회사에서 인정받고 직장생활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무엇이 저렇게 자신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심호흡을 하고
“술주정 그만하고 관광이나 하게.”
너는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 식으로 뿌리쳐 버린다. 강소현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이성을 잃는다.
쌈닭 노양순이
“나 같으면 머리끄뎅이 잡아 팽개쳐븐다.”
훈수를 둔다.
박현숙이 옆에서 강소현 귀에 대고
“뒤에서 밀어버려. 앗, 미안, 하면 지가 어쩔 건데?”
충동질 한다.
판단력을 잃은 강소현은 언니들의 말이 정답으로 들린다.
경호는 그녀들이 뭉치면 단순무식하게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들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 버린다.
70대 노부부의 아내가 독신들의 행동을 눈여겨본다.
그녀는 여자들과 많이 어울려봐서, 여자들의 군중심리를 잘 알고 있다.
조만간 더 큰 문제가 벌어질 것이라 예감한다.
기관수도 그녀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언제든 동영상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
진주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누가 뭘 물어도 모르쇠로 몸을 사린다.
일정은 하반기로 넘어가 ‘이구아주 국립공원’의 장관이 펼쳐진다. 일행은 2일 동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영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관광한다.
대자연의 웅장한 굉음이 인간의 잡다한 소리는 다 묻어버린다.
그녀들 눈에 경호와 강소현이 보이지 않는다.
이 폭포를 보기 위해, 그동안 신경전을 벌이며 온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박현숙은 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여러 사람에게 이것저것 얻느라 체면도 안 서고, ‘해외여행 처음이세요?’ 하는 눈빛을 감당하며 온 보람을 느낀다.
TV에서 이구아수폭포의 장관을 보긴 했지만, 실제 보는 것과 천지차이임을 확실하게 느끼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뇌까린다.
싸운 아내는 ‘이구아수폭포’의 어마어마한 유수량 앞에서, 여행을 가자한 남편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들의 표정은 해맑은 천사의 가장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모두 하나가 되어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 바쁘다.
아름다운 경치의 한 부분이 되어 마음껏 행복해 한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노부부, 다시는 해외여행 못해도 아쉽지 않겠다는 교수부부, 같이 갈 사람이 없어 망설였다는 독신들도 오길 잘했다며 탄성을 지른다.
경호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비로소 자신의 일에 긍지를 느낀다.
‘나선전망대’에 올랐을 때의 일행의 감동은 ‘악마의 목구멍’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압도당한다. 영혼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전망대에서는 대자연을 두루 볼 수 있도록 길을 트고 안내판을 설치한, 인간의 문명이 고상하고 값지다고 생각한다.
기관수는 카메라에 다 들어오지 않는 폭포의 전경을 파노라마기능으로 찍어 360도 펼쳐놓을 생각으로 수평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찍는다.
물안개가 일행의 시야를 차단하지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물세례를 받는 것이 더 영광스러운 축복이다.
이구아주 국립공원은 멸종 위기의 희귀 동식물들이 많다. 한 장소에 5가지 종류의 삼림 생태계로, 1986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다.
일행은 ‘높은 산책로’ ‘낮은 산책로’ ‘악마의 목구멍’ 세 갈래 길을 이틀에 걸쳐 천천히 돌아본다.
다음 날, 보트관광을 위해 미리 약속된 시간에 입구에서 만난다.
60대 중반의 강원도에서 온 부부가, 길을 잘 못 들었는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경호가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문화해설사가 ‘조류공원’에서 봤다면서 찾으러 간다.
30분이 지나서야 부부와 함께 나타난다.
입구에서 지도를 한 장씩 받고, 5분쯤 걸어 공원을 도는 기차를 탄다. 일행은 지체된 시간만큼 서두른다.
보트투어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모두 물속에 빠질 준비를 하고 보트에 오른다.
강소현이 빈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박성진이 김성윤 자리라고 앉지 못하게 한다.
빈자리를 찾아 맨 앞으로 간다.
기관수와 기관수 아들 사이다.
출발한 보트는 폭포수 밑으로 파고든다.
일행은 물벼락을 맞느라 고개를 들지 못한다.
괴성을 지르며 신이 나는지 어쩔 줄을 모른다.
보트는 일행을 허공에 띄웠다 앉히기를 여러 차례, 일행을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 기술이고, 여행의 묘미라며 이리저리 내젓는다.
서로 빠지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보트를 꽉 잡고 있지만, 유동이 큰 앞쪽에 앉아있던 기관수의 아들과 강소현이 중심을 잃고 물속으로 떨어진다.
일행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두 사람을 보며 매우 즐거워한다.
모두 물을 뒤집어썼지만, 행복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이다.
웃느라 벌어진 입에 폭포수가 쏟아져 들어간다.
기침을 하고 켁켁대면 서도 마냥 좋기만 하다.
삼키면 안 돼는 것 아니냐면 서도 어쩔 수 없이 삼키게 된다.
기관수 아들은 이왕 빠진 김에 살려달라고 허우적대며 연기를 한다. 일부러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속에 얼굴을 박는다. 구명보트는 입었지만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지
“진짜 죽는 거 아냐?”
걱정하는 사람이 생긴다.
연기가 그럴 듯 했는지 보트는 멈추어 두 사람을 건져 올린다. 기관수가 놀란 눈으로 아들을 본다.
아들이 발딱 일어나 양손가락으로 V를 표시하자
“이놈아, 놀랐잖아!”
다시 물속으로 밀어 넣는다.
일행은 박수를 치며 신이 났다. 한결같이 모두 이 행복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보트는 선착장에 일행을 내려놓고 다음 관광객을 태운다.
입이 딱 벌어지는 이구아주 국립공원의 2일 간의 관광이 끝나고, 파라나주 공항을 떠난 JJ735 비행기는, 2시간 만에 브라질 ‘리오데자이네루’에 도착한다.
일행은 리오항 야경을 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고 ‘슈가로프’ 산을 오른다.
비구름이 경호의 발 아래로 뭉게뭉게 흘러간다.
구름 위를 질리게 날아왔지만, 뭉글뭉글 어깨동무 하고 빠르게 지나는 구름을 잠자리채로 건져 올리고 싶어진다.
젊은 커플이 둘의 모습을 담느라 셀카봉을 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잡고 있다.
여유가 생긴 경호는 둘의 전신을 담은 모습을 여러 컷 찍어준다.
그들은 경호를 안아주며 땡큐를 연발한다.
맞은편 봉우리에 있는 ‘예수상’은 비구름 속에 숨어 있다.
다음 날, 예수상에 오르기 위해 ‘코르코바도’ 언덕을 오른다.
전동궤도차를 타고, 미니버스를 타고, 가는 빗줄기와 함께 오른다.
예수상은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리오데자이네루의 상징이다. 2016년 리우올림픽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탓인지, 비가 오락가락 하는데도 관광객이 많다.
문화해설사 ‘홍기덕’은 사진이 잘 나오는 위치에서 일행의 모습을 한 사람씩 찍어준다.
빨리 찍고 자리를 비켜줘야 다른 사람도 찍을 수 있다며 빠르게 찍는다.
경호는 백인 청년이 혼자 셀카봉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고 비를 맞으며 핸드폰을 요리조리 돌리는 것을 보고, 홍기덕이 찍어 준 위치에서, 청년의 사진을 찍어 준다.
그는 매우 고맙다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경호는 ‘사우스코리아’라 대답한다. 북한이 핵문제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전에는 ‘코리아’라 했는데, 지금은 남한을 강조하게 된다.
브라질의 도시는 상상 이상으로 지저분하다. 말끔한 벽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낙서들이 있다.
벽에 낙서가 있으면 건물주가 지워야 하고, 지우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개인소유의 건물에는 낙서를 하지 않는단다. 낙서가 심한 곳은 대부분 관공서나 공공건물이다.
다음 날, 리우올림픽 광장의 ‘내일의 박물관’을 관람한다.
건축물의 외관이 지상에 뿌리를 두고, 혀를 길게 15도 각도로 허공으로 뻗은 듯 한 모양이다.
진주리는 2016리우올림픽 기간에,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혀를 길게 빼서 날름거리던 브라질의 발랄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박물관은 ‘켄텔레버건축’의 거장 ‘칼라트라바’의 작품이다. 안에서는 건물이 완공되기까지의 동영상도 볼 수 있다. 구조설계, 강도설계의 이미지도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일행이 다시 버스에 오르기 위해 약속장소에 모인다.
진주리가 오지 않는다.
경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진주리를 난도질 한다.
“고상한 척 하드만 어디 가서 여태 못 온데?”
“혼자 다닐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늦는 걸 제일 싫어한다더니, 자기가 또 늦네?”
신이 났다.
홍기덕이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해서, 제가 10분 더 드린다고 다녀오라고 했어요.”
지고는 못 산다는 김성윤이
“우리 시간은 시간 아녜요? 왜 주리한테만 10분 더 줘요?”
당당하게 따진다. 조용히 있을 그녀들이 아니다.
“팁 받았어요?”
박성진이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다.
브라질까지 와서 살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한국에서 껌 좀 씹고, 침 좀 뱉었다는 홍기덕이 질 리 없다.
“일행을 위해서, 일정에 없는 곳인데, 제가 사진 찍어오라고 보냈어요. 팁 받았냐고 따지신 분과, 10분 더 달라는 분 앞으로 나오세요. 진작 말씀하시지? 일정시간을 조절하는 건 제 권한이니까, 대신 오늘 점심시간을 줄이겠습니다.”
한국에서 월세 받으며 큰소리 치고 산다는 노양순이 말을 받는다.
“지금 그 말은 고객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데이.”
“아까 하신 말도 인솔자 인격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홍기덕이 웃으며 빈정대자 몇 명이 큰소리로 웃는다.
이러한 대화가 오고 갔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진주리는, 정확히 10분 후에 버스에 오른다.
블로그를 운영하는 남자가 진주리에게, 찍어온 사진을 단체 카톡에 올려달라고, 큰소리로 부탁한다.
일행의 일정이 막바지로 접어든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들은, 저녁마다 김성윤과 박성진 방에 모여,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경호를 완전히 구겨놓기로 한다.
영리한 박현숙이 단순한 노양순을 사지로 내몬다.
“넌 무시당하고도 가만있니? 바보니? 경호원이 전업주부라고 널 무시하잖아.”
노양순이 반박한다.
“전업주부라고 무시하는 건, 너 아이가?”
박현숙이 얼른 노양순에게 사과한다.
“미안해. 그때는 네가 카톡도 못하니까 답답해서 그랬고, 지금은 널 사랑해. 하나님 뜻이야. 기도할 게”
노양순의 얼굴이 금세 환해진다.
“미안하다고 해줘서 고맙데이.”
노양순은 박현숙과 매일 싸웠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바보 취급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머리끄뎅이 잡아 팽개쳐버린다며?”
“말이 그렇다는 기제 우째 머리끄뎅이를 잡아 채노? 우릴 바보취급하지는 않는데이. 말이 없어서 그라지, 나쁜 가시나는 아니데이.”
박현숙은 노양순이 걸려들지 않자, 경호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좀처럼 하지 않는 위험한 이간질을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노양순은 박현숙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다. 경호에게 퍼부을 말을 미리 생각해 놓는다.
같은 시간 경호는 호텔 밖에서 남미의 밤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치안이 좋은 국가가 아니므로, 밤에는 나가지 않는 것이 규정이지만, 기관수는 통하지 않는다.
‘로얄호텔’의 외관이 오색 조명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제법 강한 바람으로 어둠 속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는 밤의 교향곡이다.
그녀들은
“경호는 말이 없으니까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어.”
“고향이 충청도라더니 답답하기 짝이 없데이.”
“충청도는 멍청도라던데 멍청하진 않은 것 같아.”
“강소현이 개소리 했다가 우리만 당했잖아.”
“강소현을 또 흔들어볼까? 밑져야 본전이잖아?”
결론을 내리고 흩어진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경호에게 다가온 강소현이, 기관수 아들 들리게 야무지게 말한다.
“제 욕하고 다니지 마라니까, 왜 욕하고 다니세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경호는 한숨을 쉬며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아침이나 먹게.”
귀찮다는 식이다.
“제 말이 말 같지 않으세요? 팀장님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경호는 접시에 있는 음식을 강소현 얼굴에 뭉개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하지만 어린애를 타이르듯
“그대를 상대하려니 내가 지치네. 제발 사람 질리게 하지 말고, 아침이나 먹게.”
강소현은 경호가 밉다.
기관수 부자 앞에서 또 망신을 당해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다.
해외까지 와서 무시당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
강소현은 일행 전체가 자신을 예쁘다고 칭찬하는데, 경호만 자기 흉을 본다는 언니들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제 핸드백 어떡했어요?”
큰 눈을 부라린다.
경호는
“잠 덜 깼나? 핸드백을 왜 나한테 와서 찾나?”
피해버린다.
강소현이 처음 그녀들과 놀다 와서, 자기 말을 하고 다니지 마라 불평했을 때, 경호는 삼자대면을 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강소현 체면을 생각해 참은 것도 있지만,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고, 일행의 분위기가 어색해질까봐 그냥 넘어간 것이 실수다.
경호는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다.
한국에 가면 안 볼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자, 참아준 것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
경호는 강소현의 위태위태한 행동을 보며
‘부처님, 전생에 독신들과 무슨 악연이 있었기에, 하고 많은 일정 중에 가장 힘들고, 가장 긴 이번 여행에서 만났는지요. 주여! 굽어 살피소서.’
기도가 나온다.
노양순은 경호에게 퍼부을 말을 속으로 자꾸 반복하며 경호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경호 주변에서 얼쩡거린다.
경호 눈에 노양순의 속이 보인다.
‘할 말 있으세요? 있으면 하세요.’
속 시원하게 한판 붙어버리고 싶지만, 박현숙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노양순이 또 사고 치지 않게 배려한다.
답답한 박현숙이 직접 나선다.
감기에 걸린 70대 초반의 부부에게
“팀장한테 감기 옮았네요? 힘드시죠?”
챙기는 척 바로 옆에 있는 경호 들으라고 말한다. 그의 아내가
“누가 물어 봤어요?”
쌀쌀맞게 받아친다. 박현숙은 날카롭게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참 까칠하네?”
휙 돌아선다.
아내가 어이없어 한다.
경호는 박현숙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버리고 싶지만
‘하루만 더 참자. 주여!’
기도를 한다.
쌍파울루행 비행기 안에서 박현숙은, 양해도 없이 통로 쪽 경호의 좌석을 가로챈다.
경호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박현숙의 얼굴을 빤히 본다.
박현숙은 기내에서 기절한 후유증이 남아있어, 체면을 생각할 상황이 아니다.
경호가 체념하고 박현숙 자리에 앉자
“고마워. 은혜 갚을 게.”
뜻밖의 말을 한다.
경호는 박현숙이 또 어떤 음모를 꾸미나 속을 떠본다.
“어떻게 갚을 건데요?”
“미안해. 내가 이간질 했어.”
일행이 모두 아는 사실을 비밀이라도 되는 양 실토한다.
경호는 이실직고 하는 박현숙이 마음에 안 든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어가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박현숙이, 사과하면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호는 박현숙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혼자 떠들던 박현숙이 경호 귀에 입을 대고 비밀을 말하듯 속삭인다.
“나 해외여행 처음이야.”
그동안 기 안 죽으려고 신학대 교수라는 둥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더니, 이제야 사실을 말하니 웃음이 나온다. 그녀가 해외여행 처음이라는 것과, 신학대 교수가 아니라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정작 본인은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어요.”
박현숙이 깜짝 놀란다.
“그럼 처음에 말했어야지~ 여태 모른 척 했어? 무섭네?”
“그 교회는 유치하게 그러라고 가르쳐요?”
박현숙의 눈알이 튀어나온다.
“내가 목산 거 어떻게 알았어?”
“이마에 써 붙였던데요?”
박현숙은 더 이상 경호를 째려보지 않는다.
경호는 박현숙이 목사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이제 품위를 지키려나보다 기대 한다. 그러나
“강소현은 뭔 과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왔데?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철딱서니가 없고, 속도 없어.”
강소현의 흉을 시작으로 일행의 흉이 끊이질 않는다. 그녀들끼리 경호의 흉을 보면서 즐긴 대화까지도 다 풀어놓는다. 경호는 그녀들이 어떤 식으로 즐겼을지 짐작은 했으면서도, 막상 들으니 혈압이 오른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고
‘조금만 더 참자.’
자신을 추스른다.
박현숙은 결과가 좋은 것은 자신의 공으로 돌리고, 결과가 안 좋은 것은 자기가 말렸다고 속보이는 말을 이어간다.
경호는 화가 나다 못해, 그녀의 말이 흥미로워진다.
어디까지 무슨 말을 하나 듣고 싶어진다.
경호의 속을 모르는 박현숙은 말을 멈추고 1분을 넘기지 못한다. 경호가 눈을 감으면
“2시간이면 상파울루에 도착인데 뭔 잠이야?”
툭툭 치며 자기 얘기를 듣길 바란다.
“듣고 있어요.”
경호는 박현숙이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신경을 썼네? 속이 허탈하다.
작심하고 박현숙에게 반말을 한다.
“사이비 목사지?”
박현숙이 눈을 부라리며
“우 씨~반말이야?”
주먹을 들어 보인다.
경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교인은 몇 명?”
정곡을 찌른다.
박현숙은 꼬박꼬박 대답한다.
“먹고는 살아.”
“말재주는 있나보네? 교인들 따돌리고 혼자 중남미일주를 다 하고?”
“아냐, 엄마 돌아가시고 상속받은 돈으로 하는 거야. 난 물려 줄 사람 없어서 7대 불가사의나 보려고.”
“목사면 성도들과 성지순례나 할 것이지, 몰래 도둑여행?”
“지들이 낸 헌금으로 가는 줄 알까봐 몰래 왔지. 이제야 나한테 질문 하네? 나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관심 없는 건 사실이야. 더욱 박현숙이라는 사람은 다시 만날까봐 겁나더라고?”
박현숙이 째려본다.
하지만 경호가 눈길조차 돌리지 않자
“에이~ 화 풀어. 하나님이 둘이 풀으라고 옆자리에 앉히셨나 보네.”
아양을 떤다.
경호는 단호한 말투로
“풀고 말고가 어딨어? 귀국하면 끝인데. 난 멀미하는 언니를 긍휼히 여겼을 뿐이야.”
“언니라고 하네? 진작 그러지. 미안해~. 은혜 갚을 게. 두고 봐 꼭 갚아.”
“그런 식으로 여자들 구워삶았어?”
“에이~ 다 까발려진 마당에 왜 그래?”
박현숙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간다.
경호는 박현숙이 어디까지 참나 보려고, 꼬치꼬치 비위 상하는 질문을 해댔지만 다 대답한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필요 없다.
상파울루공항에서 3명이 가방을 찾지 못한다. 노양순, 박성진, 노부부 아내다.
경호는 공항직원을 찾아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상황을 설명한다.
남미인 들은 한국인과 달라 빨리빨리가 통하지 않는다.
답답한 건 짐이 나오지 않은 일행이지, 공항직원이 아니다.
영어를 제법 하는 강소현이 거든다.
경호는 일행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강소현에게 부탁하고, 공항직원을 따라 가방을 찾으러 간다.
다행히 3명의 짐이 잘못 실린 비행기가 이륙전이다.
시간은 걸렸지만 무사히 찾는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노양순이 많이 놀랐는지 툴툴거린다.
공항 노무자들의 평균학력이 낮아서다.
상파울루 ‘빠까엠부’ 축구장에서 열린 브라질 삼바축구는 흥미진진하다.
일행 모두는 피케이렌시FC를 응원 한다.
마치 자신들이 브라질 축구팬이라도 되는 양 모두 흥겹다.
기관수가 단체사진을 찍는다.
돌아서면 서로 헐뜯는 그녀들도 모두 어깨동무 하고 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이어지는 남미의 ‘삼바축제’는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춤을 잘 추는 의사부부가 축제에 끼어 춤 솜씨를 자랑한다.
일행 대부분은 한국 노래방에서 갈고닦은 막춤으로 축제를 즐긴다.
춤을 출줄 모른다던 박현숙도 나무토막처럼 구경만 하더니, 어느새 부어라, 마셔라, 흔들어라를 하고 있다.
무용수들의 ‘거리퍼레이드’가 빠까엠부 축구장에 도착한다.
뒤따르던 일행도 축구장에 도착한다.
이날은 거리에 인파가 많아, 현지여행사에서 경호원 4명을 더 보내 일행의 안전을 돕는다.
축구장에서 조명을 받는 무용수들의 의상은 화려함의 극치다.
의사부부가 한국에서 무용복을 챙겨 올 걸 그랬다고 아쉬워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모두 대 만족이다.
이틀간의 상파울루 관광으로, 분열 위기 직전의 유적탐사단은 하나가 된다. 빨리 귀국하고 싶다던 사람들이 아쉬움을 토한다. 특히 기관수는 브라질에 남을 상황만 만들어주면 남을 기세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붐비는 상파울로 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하기란 인내심이 필요하다. 현지인솔자도, 경호원들도 수속을 돕고, 일행이 검색대를 통과하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간다.
여유시간이 없다.
저녁은 공항로비에서 먹기로 되어 있었는데, 탑승을 해야 한다.
기내식을 꺼리는 박현숙만 과일후르츠를 사고, 모두 기내식을 먹기로 한다.
박현숙은 경호가 인간성이 좋고,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일행에게 칭찬하기 바쁘다.
경호를 시궁창에 처박으려던 독신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다.
천성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뜻대로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박현숙에게 독신들이 다시 휘둘린다.
그녀들이 경호에게 와서 사과한다.
경호는 박현숙의 말재간에 감탄한다. 어쩌면 이리 쉽게 박현숙이 시키는 대로 하는지, 혀를 내두른다. 이래서 목사도 밥 먹고 사는구나 싶다.
경호는 독신녀들이 사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상대하고 싶지 않다.
프랑크푸르트행 기내에서 박현숙이 경호 자리를 차지한다.
경호는 양보 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일부러 신경질을 낸다.
“일어나 줘야 내가 안쪽에 앉던지 말든지 하지?”
박현숙이 당황하며
“아, 그렇지~”
엉거주춤 경호가 통로 쪽에 앉아버릴까 봐 불안해한다.
“양보할 거지? 은혜 갚을 게.”
안절부절 못한다.
경호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성격 참 웃겨. 원래 그래?”
“응, 7남매 막내라 그래.”
“세상 참 편하게 살겠네?”
“에이~ 하나님 뜻이야.”
“기돗발이 좋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밥 먹고 살지.”
벌써 기내식이 나온다.
경호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박현숙에게 익숙해져가고 있다.
박현숙이
“내가 언닌데 왜 계속 반말해?”
따진다.
경호가 박현숙을 째려본다.
“기분 나쁘니?”
아예 야자를 한다.
박현숙이 서운한 지
“기분 나쁘다기 보다 내가 언니잖아?”
“언닌 걸 아는 사람이 그동안 동생을 그렇게 괴롭혔니? 내가 할 수 있는 복수야. 떫어도 참아.”
쐐기를 박는다.
“듣기 싫으면 자리 바꿀까?”
박현숙이 화들짝 놀라며
“아냐, 계속 반말 해. 자리 바꾸자는 말만 하지 마. 화장실 가고 싶음 언제든 말 해.”
경호는 박현숙에게
“피곤해서 좀 잘 테니까, 조용~”
양해를 구한다.
“어~ 그래, 자~”
박현숙은 더 말하지 않는다.
경호가 설핏 잠이 들었을 때 박현숙이 흔들어 깨운다.
“왜?”
“너무 추워.”
박현숙은 손을 비비고 있다. 담요를 덥고 있는데도 추운지 손이 얼음장처럼 차다.
경호는 박현숙의 머리 위에 있는 바람구멍을 닫고, 자신의 담요를 박현숙에게 덮어주고, 승무원에게 가서 담요를 한 장 더 얻어 온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박현숙이 경호에게 사정하는 눈빛으로
“자지 마, 혼자 눈뜨고 있으려니 무서워.”
“무섭다고?”
“또 쓰러질까봐 불안해. 나랑 계속 얘기 해.”
“다들 자는데 시끄럽게 말하면 실례야.”
경호는 박현숙에게 안정제와 멀미약을 준다. 박현숙은 멀미약 먹었다고 먹지 않으려 한다. 경호는
“약 더 먹는다고 안 죽어요. 잠을 자야 안 불안하죠.”
“어? 이제 반말 안하네?”
“불쌍해서 반말도 안 나오네요.”
박현숙은 경호의 말을 순순히 따른다.
경호는 잠들지 못하고 박현숙을 살핀다.
두 번째 기내식이 나온다.
박현숙을 깨울까말까 망설인다.
그러나 어수선한 소리와 밝아진 조명 때문인지, 박현숙이 눈을 뜨고
“내가 잤어?”
신기해한다.
“코골고 잘만 자던데요?”
“비행기에서 잠을 못 잤는데 이상하네?”
“잠을 왜 못 자요?”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
“기돗발 좋다면서요? 자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잖아요?”
“에이~ 왜 그래?” “아는 건 성경밖에 없죠? 너무 많이 알면 목사 못 해먹지.”
“우~ 씨~”
박현숙이 눈을 부라린다.
경호가 웃으며
“꼽니? 자리 바꿀까?”
“아냐, 자리 바꾸자는 말만 하지 마.”
박현숙은 달콤한 케이크만 먹는다.
경호가 박현숙에게 자신의 케이크를 준다.
박현숙은 경호가 자신한테 휘둘리지 않아 밉상도 그런 밉상이 없었는데, 지금은 든든하다.
10시간 만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다.
환승절차는 까다롭지 않다.
일행의 짐은 바로 인천에서 찾을 수 있게 보내, 비행기를 갈아타기만 하면 된다.
3시간의 여유가 있다.
기내에서 식사를 못한 대부분의 일행이 공항라운지에서 식사를 한다.
노양순은 경상도 쌈닭이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는 경호에게
“니는 바보나?”
살갑게 군다.
경호는 경상도 억양으로
“언니들이 나 바보 만든 거 아이가?”
언제 싸웠느냐 식으로 환하게 웃는다.
경호는 속이 풀린 건 아니다.
눈을 감고 있는 경호 귀에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들린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보인다.
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점검한다.
모두 가까이에 모여 있다. 일행을 저 비행기에 태우면 임무는 끝이다. 그녀들과 영원히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니 힘이 난다.
강소현은 경호를 피해 다닌다. 그녀들이 경호와 친해진 후부터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경호가 자기 독실 요금을 내주었다는 둥,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기 위해 거짓말 한 게 있다 보니, 제 발이 저린다.
경호는 강소현 속내가 궁금하다.
경호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깨끗이 제거한다.
그녀들이 언제 따라왔는지 자신들도 세수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제거한다. 손톱깎이를 달라, 소화제를 달라, 장약을 내놓으라, 안 내놓으면 가방 뒤지겠다식으로 다 털어가더니, 이번엔 화장품을 내놓으라는 식이다.
경호는 그녀들이 개념 없는 건지, 자신이 까다로운 건지, 더 생각하지 않는다.
남은 화장품을 줘버리고 일행과 작별인사를 준비한다.
인천에 도착하면 언제 봤냐는 듯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여행객들의 특징이라 미리 마무리를 한다.
경호의 묶은 체증이 내려가다 강소현의 얼굴에서 걸린다.
경호는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강소현과 부딪히길 바란다.
박현숙은 경호와 나란히 앉아서 좋다. 수속할 때 경호가 박현숙을 옆자리로 바꾸어놓았다.
경호는 맘 편히 눈을 감는다.
이제야 비행기 소음이 들린다.
대한항공은 10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강소현은 맞은편에서 혼자 가방을 기다리고 있다.
경호는 강소현 옆으로 가서 그녀 귀에
“강소현씨, 기분 잡칠까봐 그동안 말 안 했는데, 강소현씨 흉 엄청 봤어요.”
“누가요?”
“난 하더라 통신 안 해요. 그건 니가 알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