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비비문림 원고)
어깨를 끼고 달리면 편하다
조윤수
아이와 함께 낙원촌 캠프에 가는 날이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날은 유난히 길이 막혀 시간이 촉박해져서 마음도 약간은 조급했다. 기차역 앞에 당도하니 정말 몇 분이 안 남았다. 우리는 둘이 손을 잡고 달렸다. 플랫폼에 나오니 기차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열차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 때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방향을 달리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길을 나서보면 언제나 많은 사림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무엇 하는 사람들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두 바쁜 표정으로 누구보다 빨리 갈려고만 한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남보다 앞서 가서 선두(先頭)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그래서 길을 나서면 빨리 가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빨리 도착해야 할 그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먼저 도착한 사람이 행복을 모두 차지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뒤에 쳐져 있는데 혼자 외로이 달려서 잡은 결과가 행복일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되새겨지는 이야기가 있다. 내 인생의 지평을 더 넓게 펼쳐주었던 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이야기는 어느 역인지 모르지만 또, 이 경우에 정확한 역의 이름은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햇살이 뜨거운 여름 길을 땀을 훔치면서, Y씨와 몇 사람의 동행자가 역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을 상상해보자.
찌는 듯한 먼지투성이의 길은 시가지 가운데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을 재촉하면서 걷는 듯해서, 가끔 시계를 보는 사람도 있다. '자, 앞으로 3분밖에 없다.' 그래도 모두는 각별히 초조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고, 조금 보폭이 커지고 속도도 빨라진 정도였다. 드디어 역의 구내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어떤 다른 사람이 '열차가 들어왔다.'라고 외쳤다. 그때 Y씨는 간발의 틈도 없이 '어깨를 끼고 달리자'라고 해서 몇 사람이 함께 어깨를 끼고 달렸다. 역 머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광경으로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버스나 기차시간에 늦어진다고 했을 때, 달려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럴 때 모두 어깨를 끼고 달린 적이 있는가. 이렇게 달린 끝에 시간에 맞추었는지 어떠했는지는 들은바 없지만 Y씨는 '어깨를 끼고 달린 쪽이 편하고 빠르네요.'라고 말한 것 같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런 때, 얼른 자기 나름으로 달려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어떻게 해서 시간에 맞추었지만 발이 늦은 사람 때문에 모처럼 달려온 자신까지도 늦게 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도착했다 해도, 나중에 오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것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속에서의 실생활 그 자체이지 않을까. 내가 정말 그렇구나 생각한 것은 이럴 경우에 '어깨를 끼고 달리면서 편하고 빠르다'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깨를 끼고도 달리면 편하고 빠르다' 라고 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대체 무엇을 향해서 '빠르다'라고 말하는 걸까.
우리들 인류는 21세기를 어떠한 시대로 맞아들여,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목적도 수단도 잘못 취하고 있는 착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시작도 ․도정도 가야할 곳도 '사이좋음 한줄기', 이 편하고 간단한 길을 다음대의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라 안에서, 아니 온 인류가 유일무이한 '행복의 열차'에 모두 타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영원의 시간, 0시를 통과하는 의례가 아무리 시끌벅적해도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같이 내 마음에도 새 태양이 밝아오지 않는다면 새 날은 오지 않으리라. 묵은해와 새해 사이는 어떤 틈도 없건만 마치 새 세상이 확 다가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희망의 열차'는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철도의 100년 역사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초고속철도가 2004년부터 운행되었다. 단 두 시간 반 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행복을 실어다 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혼자 빨리 달리다가 나는 넘어져서 발을 다치고 말았다. 하느님은 너무 앞서 간다고 내 발목을 잡고 쉬라고 하신다. 누군가하고 사이좋게 같이 팔짱이라도 끼고 걸었다면 다치지는 않았겠지. 같이 가야할 사람을 어차피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혼자 서둘러 갈 필요도 없었다. 이 겨울 마른 풀덤불에 길게 누워서 아직도 오지 않은 사람을 새봄을 기다리듯 기다려야 하나보다. 꽃피는 사월이 되어 부산 가는 '희망의 열차'를 타러 가자고 할 사람이 오면 나도 '어깨를 끼고 달리자' 라고 말해볼 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