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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
압살롬은 예루살렘에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궁들을 취함으로써 자기가 이제 공식적인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거의 다윗의 왕권을 거의 탈취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빌려서 다윗을 죽이고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할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후새를 통하여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꺽으시고 다윗을 보호하시는 모습이 오늘 사무엘하 17장에 나와 있습니다. 압살롬이 왕궁에 들어와서 후궁을 취한 후에 아히도벨이 제안을 합니다. "왕이여 나에게 일만이천명의 군사만 주시면 오늘 밤에 다윗을 뒤따라가서 다윗을 죽이고 백성은 다 왕에게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한다고 곤고하고 약합니다. 이때 저들을 엄습하여서 저들을 무섭게 하면 다윗과 함께 백성은 다 무서워 도망하게 될 것이고 다윗 혼자 남게 될 것인데 그 때 다윗왕 한 사람만 죽여서 오겠습니다". 이 말을 들었던 압살롬과 장로들이 아 그것 좋은 책략이라고, 아 그러면 되겠노라고 전부가 다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갑자기 후새도 부르라고 했습니다. 후새는 어떤 사람인고 하면 15장 같은데서 보면 자세하게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만 후새는 다윗의 친구입니다. 다윗이 망명할 때 후새가 따라나서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와서 통곡을 하면서 다윗의 뒤를 따릅니다. 그럴 때 다윗이 부탁합니다. 후새와 제사장들을 만류하면서 너희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면서 예루살렘에서 되고 있는 사정들을 우리에게 알려 달라고. 그래서 실제로는 다윗의 사람인데 압살롬편에 섰다고 속이고 상황을 지켜 보면서 예루살렘의 모든 상황을 다 다윗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있는 다윗의 친구입니다. 그도 아히도벨에게까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모사였습니다. 그런 후새를 불러오라고 해서 아히도벨은 이렇게 이렇게 말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만약에 아히도벨과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하라. 만약에 아히도벨의 모략대로하면 다윗은 죽습니다. 그래서 후새는 아히도벨과 정반대의 제안을 합니다. "왕이여. 아히도벨의 말을 들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도 다 용사인데다가 왕의 부친은 얼마나 병법에 능한 사람인지 왕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쳤다고해서 그저 자든지 뭐 가만히 있을 그런 사람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가 오기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왕궁에서 쫓겨났으니까 마치 새끼를 빼앗긴 곰과같이 막 화가 나 있을 것입니다. 유순한 짐승들도 말입니다 새끼를 낳고 난 다음에 새끼를 빼앗아 가면 얼마나 사납게 달려드는 지 모릅니다. 새같은 것들도 보면 자기 새끼를 빼앗길 때는 뱀과 맞서서 싸웁니다. 그런데 곰이 새끼를 빼앗겼다고 하면 그 물불 가리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치 지금 다윗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독이 올라 있는데 지금 어설프게 건들었다가는 큰일 날 것입니다. 만약에 왕의 군사가 몇 사람이라도 다윗의 군사에게 죽어서 패하게 되어지면 그 파급효과는 전국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될 것이고 전세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자같이 아주 마음이 강한 그런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완전히 기가 꺽이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십시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전국에 모든 백성들을 다 모으세요. 그러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스라엘의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우리나라 말로 하면 저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입니다. 가장 위에서부터 가장 아래까지 그 사람들 다 모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이에 다윗이 도망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전국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다 모으십시오. 그러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왕께서 지휘하여서 나가십시오. 아히도벨에게 맡기지 말고 왕이 친히 그 많은 백성들을 끌고 나가면 마치 이슬이 땅에 내림과 같이 저들위에 완전히 덮어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도 왕앞에서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만일 저들이 성에 들어갔다고 하면 다윗과 그의 군사가 어느 성에 들어가서 지금 성을 요새화하여서 나오지 아니하고 거기서 버틴다고 하면 온 이스라엘이 다 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묶어서 끌고 강물에 빠뜨려 버리게 되면 그 성안에 있는 돌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자 얼마나 신나는 007같은 이야기입니까. 압살롬과 이스라엘사람들이 그 후새의 전략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아 이 제안이 더 낫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후새의 모략을 들어야되지 지금 만약에 갔다가는 큰일나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이제 후새의 이야기를 듣고 아히도벨의 책략을 버리게 되?
沮塤求?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의 진영과 다윗의 진영이 대립되어져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요. 압살롬의 진영은 다윗의 진영에 비하여서 휠씬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압살롬 보세요. 수많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천혜의 요새지인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차지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모사인 아히도벨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최상의 상태에 있습니다. 막 사기가 올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진영은 어떻습니까. 성을 빼앗기고 도망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모두가 다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군사라고 해 봐야 육백명이고 그외의 다른 사람들 다 오합지졸로 모인 사람 그것도 얼마되지 않았어요. 압살롬의 군사들이 뒤쫓아오면 당장에라도 몰살당할 이런 형편이고 실제적으로 지리상으로 바라보면 두 진영의 거리가 10Km밖에 안되요. 10Km면 뭐 얼마 됩니까. 뛰어가면 얼마 걸리지 않고 걸어가도 두시간만 하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내친 걸음에 뒤쫓아가면 다윗은 전혀 무방비상태로써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대 불리한 전세가 바로 다윗의 전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본문에서 그 전세가 역전되어지고 결국 압살롬은 죽게되어지고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기득권을 가지고 이렇게 요새를 가지고 이렇게 좋은 출발을 하고 있는 압살롬은 점점 더 내려가는 인생이 되어지고 왜 다윗은 이렇게 풍전등화격으로 그저 밀어 부쳐버리고 나면 지금 후새가 말한 것처럼 요단강에 밀어넣어 버리고 나면 빠져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이런 지경에 있는 다윗의 군사는 점점 더 피어 올라와서 다시 왕권을 회복하게 되어집니까. 무엇이 두 진영의 차이인가 말입니다. 다윗의 모사는 하나님입니다. 압살롬의 모사는 아히도벨이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차이밖에는 다른 차이가 없어요. 여기 모사라고 번역된 말은 신구약을 통해서 다섯 번 나옵니다. 그런데 신구약을 통해서 다같이 카운셀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성령, 성령도 파라테토스라고 하는데 이 성령이란 말 안에 카운셀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사라는 이 말은 상담자란 말입니다. 상담자는 어떤 문제가 있거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에 조언해주는 사람을 상담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압살롬에게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이 그의 인생속에 한번도 나오지 않아요. 어떤 일이 있었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아서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거나 또한 제사장을 청하여서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 뜻을 물어본 적이 압살롬에게는 없어요. 그러나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그 주변에도 아히도벨이 있었고 후새도 있었고 나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모사, 카운셀러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먼저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또 때로는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다윗의 생활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략과 사람의 모략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아히도벨의 모략이 얼마나 치밀하고 얼마나 정확한지 모릅니다. 그대로 나가면 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압살롬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지 않도록 만듭니다.
인간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사탄이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도 하나님의 모략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려고 하면 하나님을 나의 모사로, 하나님을 나의 카운셀러로 삼는 그 사람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멀리가서 모사를, 멀리가서 어떤 자문, 어떤 사람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참된 모사가 되어지는 우리의 카운셀러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자리에 계십니다. 아무리 나혼자 어려운 가운데 있을지라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진정한 카운셀러가 되시고 진정한 모사가 되어져서 그때그때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문을 구하게 될 때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참된 카운셀러가 되어주어서 우리의 갈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 이렇게 좀 해 주세요 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쭉 열어 가지고 뭘 떨어 뜨려 가지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어요 지혜를. 그 지혜를 주고 또 어떤 사람을 붙여 주어요. 그래서 그 지혜와 사람을 통하여서 그 어려운 처지를 이기고 나갈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데 그 진정한 지혜는 누가 주시느냐. 참된 인생의 카운셀러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바로 이런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자기의 카운셀러로 진정한 모사로 삼았기 때문에 그때그때마다 지혜를 주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만들고 피할 길을 허락하여 주어서 언제든지 승리한 길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압살롬은 절대 하나님을 그의 모사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을 모사로 삼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사람과 의논하다가 그는 결국 비참한 말로를 겪지 않습니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계획적이고 지혜로운지 몰라요. 얼마나 치밀한 지 몰라요. 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한 줄 아십니까. 물론 그 당시에 정치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은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사형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보세요. 스데반은 얼마든지 돌로 쳐죽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예수님을 돌로 쳐죽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꼭 이 로마사람의 손을 빌려서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보통 죽이는 것이 아니고 꼭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계획이 나온 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평소에 너희는 선지자를 죽인 백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 바깥에서 죽은 적이 없다 그렇게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놔 놓으면 또 선지자를 죽인 죄인으로 그들이 지목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 죽여야 되겠다. 우리 손이 아닌 다른 민족의 손을 통하여서 죽여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결정한 것이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납세문제를 들고 나온다든지 또한 백성을 미혹하게 한다든지 로마정부에 반대하는 이런 죄목을 뒤집어 씌워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부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무에 달아 죽여야만 하는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저주받아 죽은 자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었다. 땅에 발 못 붙입니다. 하늘에 떠서 죽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은, 나무에 걸쳐 있는 사람들마다 다 저주받아 죽은 죽음이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만약에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 가신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 그래도 메시야라고 이야기하면 봐라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마다 다 저주받아 죽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저주받아서 죽을 수가 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다 그렇게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하든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사람의 손을 빌려서 어떻하든지 나무에 달아서 죽이려고 얼마나 계획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주 아이디어가 얼마나 기발한 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보다도 한수 위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서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마련해 놓았어요. 십자가는 바로 사탄이 패배하는 장소요 유대지도자가 패배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장소요 인류가 구원되는 장소로 하나님은 계획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역이용하여서 마치 유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넘어뜨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악랄한 방법과 지혜를 역이용하여서 그 길을 통해서 인류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아무리 유대 지도자들이 간악한 꾀를 부린다고 할 지라도 아무리 사탄이 간교한 꾀를 부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앞에는 절대로 당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보다도 더 힘있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은 힘 없습니다. 돈의 힘도 없어요. 권세도 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최고로 힘 있기 때문에 다윗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시편 18편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는 많은 시들에서 나의 힘이요 나의 방패요 나의 요새신 하나님이라고 한 이유가 그의 삶에서 체득한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가장 세상에서 힘있는 인생은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하나님을 모사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나의 카운셀러로 삼아서 하나님의 자문을 구하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세상의 어떤 학박사보다도 어떤 경험자보다도 하나님을 나의 모사로 삼고 카운셀러로 삼아서 그를 의지하고 그로부터 지혜를 공급받는 그 인생만큼 지혜로운 인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으로 나의 힘을 삼고 있습니까. 나는 무엇으로 나의 지혜를 삼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하나님을 나의 모사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모사로 삼고 하나님을 나의 카운셀러로 삼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을 나의 카운셀러로 삼고 돈을 나의 힘으로 삼고 어떤 사람을 나의 백그라운드로 삼아서 그들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좋은 카운셀러로 삼아서 주님께서 보여 주는 지혜, 공급하시는 지혜와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칼라카이토스 영원한 모사, 카운셀러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 하나님 어디든지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의 참된 모사와 카운셀러가 되기 위하여서 이 시간도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느 장소에 있든지 어떤 위험한 곳에 있든지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그런 환경 가운데에 있다 할 지라도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카운셀러가 되어서, 모사가 되어서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면서 우리에게 지혜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이 하나님앞에 우리 모든 삶을 내어 놓고 자문을 구하여서 승리하는 자가 될지언정 사람만 찾아가고 사람만 의지하는 압살롬같은 사람되어져서 그의 꾀에 그가 넘어가서 인생을 망치는 이런 성도들 한 사람도 없이 성령 하나님만 나의 모사로 나의 카운셀러로 삼아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지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간만 지혜를 건드리면 사람은 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압살롬과 그의 신하들이 아히도벨이 베푼 모략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가리웠더니 좋은 모략을 버리고 나쁜 모략을 택하지 않습니까. 그의 반역이 실패하는 결정적인 선택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기에서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따라갔다고 하면 그는 승리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된 모략만 의지하는 그를 그 지혜를 가리우고 말았어요.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리우면 참 엉뚱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6.25전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6.25때에 남한을 점령하지 못한 결정적인 두가지의 실수가 김일성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울에 내려와서 뭐 파죽지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서울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 너무 쉽게 점령하니까 기분 좋아가지고 거기서 삼일동안 축제를 벌였습니다. 삼일동안 내려왔으면 어디까지 내려왔겠습니까. 어째 대전까지 내려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사진 붙이고 야단스레 하다 삼일동안 머물렀어요. 너무 많이 지체를 했어요. 거기서도 계속 밀고 내려 왔으면 사실 미군이 오기전에 다 부산까지 점령할 수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실수는 바로 밀고 내려 왔으면 될 것인데 아 너무 잘 되고 보니까 이렇게 내려가지 말고 저 호남쪽을 둘러 가지고 곡창지대에 가서 쌀밥해 먹어 가면서 그렇게 내려가자고 작전을 돌렸어요. 저쪽으로 둘러서 같이 내려 왔어요. 그 사이에 벌써 여러 가지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까. 이 두가지 결정적인 실수가 김일성이가 저지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지만 김일성이가 뭐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조금만 틀어 놓으니까 가리워 놓으니까 그런 잘못된 결정을 해서 참 우리는 하나님 은혜가운데 이렇게 하나님 은총을 받았지만 그들 그 악한 무리들이 그렇게 패배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가리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리우면 이렇게 똑똑하고 이렇게 다 점령한 것도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가리우면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엉뚱한 일을 합니다. 특별히 요즈음 선거판 좀 보세요. 참 똑똑합니다. 내 같으면 저럴 때에 나오지 아니하고 다음 준비를 하겠다 또 그런 약속을 하겠다 저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런데 엉뚱하게 나와 가지고 끝나는 후보들 얼마나 많이 봅니까. 하나님께서 내 지혜를 가리지 않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혜를 가리워 놓으면 내가 아무리 경험이 있다고 할 지라도, 아무리 내게 지혜가 있다 할 지라도 그 지혜를 지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의 모사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생활하여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앞에 기도하여서 그 지혜를 공급받아서 그 지혜를 삶에 적용하여서 승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이렇게 완전히 게임이 안되는 상황이 반전된 이유는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들었을 때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 모사 한 사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 지 모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합니까. 하나님이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다윗이 하나님앞에 기도했더니 압살롬과 신하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그의 모략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습니다. 이게 바로 기도의 능력이요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사람 잡지 말고 그의 자문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논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다윗은 기도가 바로 그의 생명이었습니다. 기도외에는 다른 일들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았어요.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언제든지 응답하여 주었습니다. 때로는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그런 경우들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앞에 응답받아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구원해 주심을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지어다. 그는 기도로써 구원받은 것을 너희도 간절히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우리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세가 반전되게 된 것은 다윗의 기도의 결과임을 알고 우리에게 이런 막다른 골목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할 지라도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인 줄 알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앞에 끝까지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회복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그의 삶이 반전되어서 회복될 수 있었느냐. 다윗은 하나님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의인의 편에 서십니다. 압살롬 보세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죽일려고 그는 나섭니다. 이 두가지 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들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예루살렘에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 피합니다.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서 그는 왕궁까지 내어놓으면서라도 자기 자식과 맞서지 않기 위하여 일시 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면 어느 편에 서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링컨 주변의 사람들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어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링컨이 나무랐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편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 지라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하나님앞에 은총을 입으려고 하면 내가 하나님편에 서세요.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드는 그런 삶을 살게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손을 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손을 들어 주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정말 하나님께서 내 손을 들어 주실만큼 나는 하나님편에 서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장소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 싫어하는 장소에 서 있습니까. 오늘 우리 가정에도 하나님 싫어하는 것들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물건 그 한번 열어 보니까 아마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흔드는 종인데 부처도 새겨 있고 위에 용도 있고 하여튼 이런 우상들이 새겨져 있는, 점칠 때 하는 것인지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흔드는 요령이예요. 그것을 종소리 안 나도록 안에다 묶어서 넣어 두었어요. 오늘 정말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나는 하나님편에 서 있는가. 우리 집에는 하나님 싫어하는 물건들 다 치우고 있는가. 오늘 우리 자신들을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